진보는 역사의 법칙이 아니다. 하지만 생물들 중에서 인간종은 더 나은 삶, 더 새로운 시간을 원한다. 인간들이 더 열악했던 삶,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어쩌면 더 나빠졌을 수 있는) 지금의 삶으로부터 더 나아지고 더 새로와지려는 열망의 산물이다. 진보가 있다면 (어떤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법칙의 실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더 새로와지고 더 나아지려는 개개인들의 욕망의 결과로서이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이룬 삶보다 더 나쁜 삶을 가져오게될 모든 혁명은 결국은 실패한다. 자본주의는 이윤논리에 눈멀었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 궁핍과 고통, 인신적 예속, 인종적 지역적 민족적 편협성, 국가적 억압 등을 실제적으로 극복할 잠재력을 축적했다. 물론 그 잠재력이 이미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현실에서는 나열한 문제들이 더 악화되고 나빠진  상태를 체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국지적이고 모순적일 뿐인 그것들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실현할 잠재력의 실재성(에 대한 직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섣부른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착취, 수탈, 강도, 사기에 의지하고 있고 그것이 낳는 결과들이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에 다중들은 냉소적이거나 혹은 자본주의에 별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 비판들을 수용한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비판도 포함된다. 그 비판들이 자본주의의 현실태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을 때조차 실제로 그러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이어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를 비종교적 종교로서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그러므로 현실태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의 잠재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현실태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그것의 잠재력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비판은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파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것의 합리적 핵심을 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비판이 실제적 대안성의 제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의 제시에 이를 때에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입지점이 될 수 있지만 현재의 농경주의적 생명주의의 비판이 대안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중요하지만 복고적 이슬람주의가 대안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 

오늘날 자본주의 제도교육은 명백히 부패했지만 대안적 교육기관들이 교육 소매상들처럼, 맑스가 말한 바 있는 철학적 소기업들처럼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뒷골목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데 머무르는 한에서는 아직 대안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늘날 세계시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지평은,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인류가 수천, 아니 수만년의 역사적 고투를 통해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므로 세계성을 살려나갈 능력이 없는 모든 것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대안력을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클린턴이 알카에다를 성격규정하면서 사용한 용어, 관민족적 비국가 네트워크(transnational non-state network)는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전환시키는 일에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다중지성에 적용한다면 "관지성적 비학교 네트워크"일 것이다.
  1. 하지만 알카에다와 같은 조직 모두를 복고적 이슬람주의로 취급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어떻게 미국과 같은 거대 국가를 위협하는 '관민족적 비국가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그 동력과 관점이 무엇인지는 연구주제가 되어야 한다. http://is.gd/7Ybru 참조. [Back]
2010/02/09 08:22 2010/02/09 08:22

장례식과 송별회

Posted at 2010/02/09 07:33// Posted in 쓰기(skribi)/단문_F
장례식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 자들의 자리와 마음의 정리를 위한 것이듯이 송별회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남은자들의 마음과 관계의 정리를 위한 것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떠나는 사람을 확실히 보내는 것이며 그 빈 자리를 공동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다지 필요 없어보이는 장례식과 송별회가 커다란 위엄이나 정서적 진동을 갖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2010/02/09 07:33 2010/02/0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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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에 관한 단상

Posted at 2010/02/08 07:58//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1. 우리 시대에 생명은 매우 긴급한 문제로 제기되어 있다.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거시적인 차원과 미시적인 차원 모두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보다도 생태파괴와 기후온난화에 의해, 전염병에 의해, 일반화된 전쟁에 의해, 실업에 의해, 신용불량에 의해,

2.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 및 개체들의 삶이다. 그것들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삶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 역사는 생명 잠재력의 표현이다. 의식은 단지 현실적인 것이 두뇌에 반영되는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리력만큼이나 중요한 잠재력의 하나의 형태이다. 현실적인 것이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성되듯이 잠재적인 것(잠재력)도 정신적 속성과 연장적 속성을 갖는다.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는 물질적 힘, 물질적 활동들의 표현방식이다.

3. 생명평화가 종교의 방식으로 추구될 때 그것(종교로서의 생명평화)은 생명평화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인 이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생명활동(노동)을 경시, 도외시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시하게 된다. 그 결과 생명평화운동은 노동운동과 , 또 삶정치와 분리된다.

4. 노동(운동) 및 삶정치적 생산과 분리된 생명평화(운동)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 노동에서 추방된 사람들만의 운동으로 기울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대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현존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유형의 노동들에서 유리된 사람들이 농업에서 자신의 꿈과 대안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누워 잘 곳의 생산은 인간 생명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지폐를 먹고 살 수 없고 금덩어리를 먹고 살 수도 없다. 기계를 먹고 살 수도 없고 과학논문이나 예술작품을 먹고 살 수도 없다. 의식주라는 생명에 필수적인 물질의 생산과 재생산이 과거에 농업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의식주의 대부분은 이미 기계기술적 공업에 의해 매개되거나 직접적으로 공업의 산물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미 농민은 옷을 만들지 않으며 집을 짓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이 먹는 것의 상당 부분은 토지에서 나오기보다 공장에서 나온다. 협의의 농민은 지성을 생산하기보다 더 많이 소비한다. 오늘날 농업은 의식주를 직접 공급하는 활동이라기보다 그것의 원료공급활동으로 축소되어있다. 농업노동으로의 귀환과 농업의 재생은 하나의 국지적 대안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정치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대안일 수는 없다. 생명생태운동은 농업재생운동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삶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5. 의식주가 비농업적 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오늘날 낳고 있는 문제를 그러한 생산방식 자체의 문제와 동일시해도 좋은 것일까? 자본주의하에서 비농업적 생산의 문제를 비농업적 생산 그 자체의 문제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6. 농업에 대한 도피적 숭배는 현재의 펼쳐진 생명으로서의 산업들에 대한 외면으로 이끈다. 농경은 그 자체가 이미 자연에 대한 지배의 시작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경작은 잦은 휴경을 요구할 만큼 지력을 고갈시킨다. 수렵과 채취의 생활이 아닌 한에서 '순수' 자연은 없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농경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생산양식의 시작이지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생태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 지배는 공업노동을 거쳐  이제 비물질노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관계의 특수한 역사적 형식으로서의 지배관계가 많은 문제들을 가져오고 있고 이 문제 앞에서의 공포가 농업으로의 회귀경향을 낳는다. 하지만 오늘날 비물질노동과 산업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농업노동은 인구를 먹여 살릴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현존하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산업들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펼쳐진 책이다. 인드라망은 산업들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낳는 문제들을 인간 자신이 숙고하고 그때그때 타개해 나가는 것만이 가능한 생명 진화의 길이다. 즉 다양한 산업 형태들 모두를 인드라망화하는 것이 문제이지 산업 밖에 인드라망을 건설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7. 생명주의가 산업문명의 위기에 처해 농업노동과 자연섬김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금융위기에 처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산업노동과 실물생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양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 속에서 해법을 찾으며 희망이 아니라 공포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어떠한 복귀도 가능하지 않고 또 허용되지도 않는다. 생명은 오직 창조적 진화로서만 생명일 수 있다.


2010/02/08 07:58 2010/02/08 07:58

삶정치의 양식으로서의 예술

Posted at 2010/02/07 12:2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바디우는 예술을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면서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비미학(inesthétique)이라고 부른다. 비미학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철학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몇 가지 예술작품들의 독립적 실존이 만들어내는 순전히 철학 내적인 효과를 기술한다".1

비미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철학과 예술이 맺은 역사적 관계양식들에 대한 그 나름의 정리에 기초한다. 20세기에 철학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에 따라 예술과 관계를 맺는다. 즉 철학은 예술에 대해 지도적이었거나(맑스주의) 낭만적이었거나(해석학) 고전적이었다(정신분석). 이것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지도적 도식은는 예술은 (철학이 담지하는 바의) 자신 외부에 있는 진리를 모조한 가짜진리를 직접적으로 현시한다고 보았다(플라톤에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흐름). 낭만적 도식은 예술만이 진리를 육화할 수 있고 철학은 그것을 해석한다고 본다(니체, 하이데거, 들뢰즈). 고전적 도식은 예술이 진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메시스(사이비질서)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예술의 목적이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카타르시스)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프로이트, 라깡으로의 흐름).

바디우는 이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도달한 상태에서 20 세기에 새로운 종합도식이 시도되었고 그것이 아방가르드(브르통과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상황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적 도식에 대항하여 지도적 도식과 낭만적 도식을 중재하고 불안정하게 그것을 추구한다. 그의 글을 읽어보자.

예술에 종말을 고하려는 욕망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진짜가 아니라는 예술의 성격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지도적이다. 또한 예술이 절대성으로서, 그 고유의 작용들에 대한 온전한 의식으로서 즉시 읽어낼 수 있는 그 자신의 진리로서 조만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낭만적이다.(21쪽)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창조적 파괴"의 절대성으로서 바디우에 따르면 그것은 지도적 낭만주의 도식이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면 이 새로운 종합도식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사라졌다. 그래서 바디우는 새로운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 번째의 도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재성과 독특함의 동시성을 긍정하는 도식이다.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의 절차이며(내재성), 그것은 다른 진리들(과학의 진리, 사랑의 진리, 정치의 진리 등)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다른 진리의 절차들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과의 관계에서 예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24). 어떤 실제적인 진리도 생산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들을 파악하거나 보여줄 뿐인 철학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술적 짜임configuration artistique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적 짜임은 "규정가능한 어떤 기간으로 사건을 통해 시작되고 이론상 무한한 작품들의 복합체로 구성되며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진리예술vérité-art2를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는 단위"(30)이다. 철학은 사유하는 주체인 작품들로부터 예술적 짜임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의견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영원(유적 무한으로서의 진리)을 향해 돌려놓는 일을  수행한다(33).

이러한 비미학은 예술을 과학이나 사랑이나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훌륭한 방법이긴하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을 (물론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도) 철학의 품안에 품거나 혹은 그것의 아래에 거느리는 방법이다. 마치 나이든 사람들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의 생식성에 기대면서 그들을 자신의 품에 거느리려 하듯이. 다른 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술을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과 함께, 아니 철학까지도, (진리의 평면이 아니라) 삶의 평면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술은 삶의 잠재력의 현전일 것이며(낭만적), 그 현전양식들과는 다른 독특한 현전(광의의 미메시스)일 것이고(지도적), 그 현전은 삶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여는 정화, 치유, 혁신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고전적).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종말을 갈구한 것은 지금까지의 예술이 삶의 평면에서 움직이기보다 삶을 오히려 예술 속에 봉쇄하는 전도된 위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의식을 안고 가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더 철저하게 다중의 자기예술, 삶예술의 수준으로까지 철저화하는 것이다.   
  1. 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2010, 5쪽. [Back]
  2. 역서에는 예술진리로 번역되어 있지만 필요상 말을 바꾼다. [Back]
2010/02/07 12:23 2010/02/07 12:23
미메시스에 대한 생각들을 비교해 보자.  미메시스를 루카치는 인류의 자기의식과 벤야민은 해방과 아도르노는 표현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들뢰즈는 미메시스론에서 거리를 두면서 예술이 미메시스가 아니라 감각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루카치는 일상생활과 예술, 그리고 과학이 모두 객관현실에 대한 반영활동(미메시스)이라고 보면서 이 세 가지 반영활동의 차이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둔다. 일상생활은 개별성을, 예술은 특수성을 과학은 일반성을 반영한다. 일상생활과 예술은 인간중심적이지만 과학은 탈인간중심화하는 반영이다. 과학은 비자립적이지만 예술은 자립적이다. 과학은 노동에서 기원하지만 예술은 주술에서 기원한다. 예술적 반영, 미적 반영은 인류가 자기의식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며 정서환기적 특성을 갖는다.1

벤야민에게서 미메시스는 자기보존본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만 그것에 해석은 좀더 주체적이다. 미메시스는 사물을 읽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 읽기의 순간성 속에서 읽혀지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난다. 미메시스는 대상의 마법성을 탈마법화시키는 활동이다. 희극(자연을 언어에 근접시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탈마법적 예술이다. 미메시스들은 점차 언어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의 번역기를 찾으며 이를 계기로 자연적 상응에서 언어적 번역으로 철수한다. 번역은 모국어에 맞게 원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에 맞게 모국어를 변형하는 활동이다. 이것이 모국의 자체의 표현능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미메시스는 억압으로 다가오는 객체를 주체가 극복하는 활동, 즉 억압당하는 자의 해방활동이다. 언어적 미메시스에서 재현과 표현은 변증법적 관계를 맺지만 표현이 근본적인 것이다. 같은 이치에서 벤야민에게서는 가상보다는 유희가, 모방보다는 놀이가, 전달보다는 표현이 미메시스의 더 근본적 측면이 된다.

아도르노에게서 미메시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게서 진정한 미메시스는 동일성 사고에서 배제된 것, 즉 비동일적인 것(das Nichtindentische) 혹은 타자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 혹은 그러한 요소들에 합당하고자 노력하는 사고의 의식적 태도이다. 아도르노에게서 미메시스는 진화의 과정을 밟는다. 첫째는 주객분리 이전의 미메시스는 자연의 공포에 대한 매개되지 않은 반응양식이다. 공포의 대상과 동화됨으로써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 미메시스이다. 이후에 마술적 미메시스는 노동에 의해 주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합리적 미메시스로 대체된다. 그 결과 이성은 미메시스에서 연원한 것임에도 미메시스를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바뀌었고 미메시스적 충동은 예술의 영역으로 후퇴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Amresh Sinha는 그 방식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의 자기동일적 실체로서의 예술작품은 세계의 동일성과의 관계 혹은 방법의 동일성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미메시스적 계기와의 자기동일성이다. 즉 그것은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타자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으며, 정신적 내용의 복제 혹은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표현에의 기여이며 미메시스를 통해 전달되는 능력이다. 예술적 기여는 이해의 대상인 진리내용의 내재적 범주를 표현한다. 미메시스는 그러므로 내용의 복제가 아니라 표현형식이다.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적 계기는 예술적 의도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표현의 특질들을 개괄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표현 자체를 표현할 뿐이다.2
들뢰즈는 "예술은 보존하며 스스로 보존되는 유일한 것", "감각들의 집적,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체", "기념비"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서는 루카치, 아도르노가 말하는 자립성의 이론과 일치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것을 미메시스와 연관짓지 않는다.

우리는 감각들과 더불어 그리고 조각하고 구성하고 쓴다. 우리는 감각들을 그려내고 조각하고 구성하고 기술한다. 지각들로서의 감각들은 대상을 반영하는(지시하는) 지각작용들이 아니다. 만일 그것들이 무언가와 닮아 있다면 그것은 그들 고유의 방법들이 만들어낸 유사함이며 따라서 그림 속의 미소란 오로지 색채들, 필치들, 빛과 음영이 만들어낸 것이다.3

또 그는 "어떤 예술, 어떤 감각도 결코 재현적이었던 적이 없다"4고 단호하게 말한다. 들뢰즈는 예술의 목적이 재료들의 방법에 의해서 지각작용에서 지각을, 정서작용으로부터 정동을 분리시켜 자립화시키는 것이다.5 그것은 존재로서의 감각을 지속하도록, 자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에게서 지각은 자연의 비인간적 풍경을, 정동은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비인간되기)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 스틸들이, 작가의 문장, 음악가의 음계와 박자, 화가의 필치와 색채가 필요하다. 위대한 예술가(소설가)가 하는 일은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잘못 인식된 정동들을 창안해 내고 그것들을 자기인물들의 생성으로 발현시키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철학자가 개념을 변주하고 과학이 기능들의 변수를 제시하듯 다양성을 세계에 덧붙인다. 이것은 표현없는 표현이라는 아도르노, 벤야민의 생각과 통한다. 들뢰즈는 예술과 혁명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기념비는 일어났던 무언가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즉 늘상 새로워지기만 하는 인간들의 고통, 재창조되는 그들의 항거, 줄기차게 시도되는 그들의 투쟁을 구현하는 확고부동한 감각들을 미래의 청자들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고통은 끝도 없이 이어지며 혁명들은 승리 이후에는 존속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 혁명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혁명이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울림들, 어우러짐, 열림들에 있다.(...) 혁명의 승리는 내재적이며 혁명이 인간들 사이에 세워놓은 새로운 유대들로 이루어진다. 비로 그 유대들이 용해된 질료만큼만 존속할 뿐, 이내 분열과 배반에 자리를 내어줄지언정 말이다.6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재료로써 수행하는 감각혁명이다. 예술과 혁명에 차이가 있다면 혁명이 노동/실천과 더불어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할 때, 예술은 그것을 구현/체현한다는 점에 있다. 예술이 감각의 집적물로 드러낼 그 잠재적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가? 첫째 그것은 체험된 육체, 지각된 세계, 경험에 얽매어 있는 상호간의 지향성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지게 될 살(la chair)이다. 이것은 형상이다. 둘째 집이자 골조물인 윤곽이다. 셋째는 세계이자 우주인 플랑aplas이다. 몸/집은 우주로부터 무엇인가 선별하고 여과하며 다시 살은 몸/집으로부터 감각을 생성시킨다. 이렇게 예술은 구성한다. 예술적 구성은 기술적 구성과는 다르다. 그것의 기능은 견해체계들을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지각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구성적 감각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어떤 환경 내에서의 지배적인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집결시키는 견해체계를 탈영토화한다."(284) 이것은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결국 예술도 과학, 철학과 더불의 카오스와 대적하여 하나의 구도를 끌어내는 일이다.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무한을 구원한다. 과학은 지시관계를 얻기 위해서 무한을 포기한다.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구성의 구도를 설정하고 그 구도가 미학적 형상들의 행위를 통해 기념비들(감각구성물들)을 떠받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방법이다.(285)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미메시스로부터 거리를 둔다.
  1. 루카치, 『미학』 1권, 미술문화 참조. [Back]
  2. http://www.wbenjamin.org/mimesis.html 에서 발췌. [Back]
  3.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37쪽 [Back]
  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79쪽. [Back]
  5. 이 점에서 객관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루카치와 비교된다. 루카치의 객관현실은 존재라기보다 존재자이다. 주체성은 루카치에게서 의식존재로 나타난다. 반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지각작용과 정서작용 속에서 존재로서의 지각과 정동을 경험하는 물적존재로 나타난다. [Back]
  6.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55쪽. [Back]
2010/02/05 09:36 2010/02/05 0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