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이 올 때까지 영원한 ‘5월의 전사’ 윤상원(1950~1980)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67](1991.5.3. 한겨레신문 연재, 고종석 글)


도청서 최후의 항전 산화


그는 카빈소총을 든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하늘 밑으로 멀리 무등산의 능선이 어렴풋이 보였고, 눈 아래 주택가에는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 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만도 40여명의 시민군들이 최후의 항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운명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다시는 밝은 햇살 아래 싱싱하게 푸르른 무등산을, 해방의 환희가 넘쳐 흘렀던 금남로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못 볼 것이었다. 편안한 유택 하나가 그를 위해 마련될 지조차도 의문이었다. 항쟁 초기에 얼마나 많은 주검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갔는가.

그의 왼켠 창틀을 지키고 있던 동지 이양현과 조금전에 나눈 대화는 그러므로 일종의 이별의 제의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10일간의 항쟁과 5일간의 ‘대동세상’을 되돌아보았고,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며, 다시 태어나더라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핍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M-16 자동소총의 끔찍스러운 총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늘에선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예광탄의 섬광이 무등산을 더욱 또렷이 드러냈다. 최루가스로 찬 회의실 이곳저곳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 한사람이 복도를 통해 도경찰국으로 이어지는 회의실 뒷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며 도청의 뒤쪽, 그러니까 금남로의 반대쪽이 무너졌음을 알렸다. 공포와 절망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회의실을 감쌌다.

그때 귀를 째는 듯한 M-16 총성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회의실에 박혔다. 그의 왼손으로부터 카빈소총이 스르르 떨어졌고, 오른손으로 감싼 아랫배와 등에서 새빨간 피가 새어나왔다. 그의 몸이 회의실의 차가운 타일바닥 위로 쓰러졌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4시 30분께. 시민군 대변으로서 광주민중항쟁을 이끈 윤상원(尹祥源)의 30살 삶이 흐너지는 순간이었다.

그해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시각은 여럿이다. 관변쪽에서는 그것을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민주화운동’으로 정리했고, 보수야당을 포함한 자유주의 부르좌 진영에서는 ‘시민항쟁’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주류는 ‘민중항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보세력 가운데 예를 들어 민족민주변혁론(NDR)처럼 좀더 급진적 입장을 취하는 그룹은 노동자계급의 주도성과 목적의식적 자발성을 특히 강조해 그것을 ‘무장봉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입장과 태도에 따라 항쟁의 성격과 거기에 참여한 여러 계급·계층의 중요도에 대한 판단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지만, 10일 동안의 항쟁과정에서 윤상원이라는 개인이 해낸 역할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높은 평가는 그가 항쟁기간에 보여준 남다른 책임감과 헌신성으로부터 온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불요불굴의 혁명가를, 어떤 이는 성실하되 평범한 노동운동가를, 또 다른 이는 단지 양심적인 지식인을 발견하지만, 그들 모두 5월 광주의 한복판에 그를 세워놓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 쓰러져간 ‘전사들’ 모두를 윤상원이 대표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윤상원이 탁월하고 헌신적인 5월의 전사였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또 실제로 윤상원은 전남 사회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그의 평전 발간과 ‘윤상원상’ 제정으로 5월항쟁의 한 상징적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윤상원은 6·25가 난 50년 8월 전남 광산군 임곡에서 자영농 윤석동씨와 김인숙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광산군이 광주시에 편입돼 그 집의 지금 주소는 광주시 광산구 신용동 507로 돼 있다. 이 집에는 지금 노부모와 막내 여동생 승희(23)씨가 살고 있다.

윤상원의 성장기, 그리고 군복무 직후까지의 삶에서는 크게 특기할 만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평범한 소년으로서 임곡국민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나와 자취와 하숙을 하며 북중(현재의 북성중)과 사레지오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두 번의 대학입시 실패 끝에 71년 봄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군복무 뒤 학생운동 가담


다만 그가 일찍부터 일기쓰기에 버릇을 들여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해마다 한권 이상씩의 일기를 남겨놓은 것이 주목된다. 일기들 속에는 대개 그 또래의학생들이 겪음직한 실존적 고민들과 일상적 갈등들이 담겨있다. 병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병원비, 두 숙부의 교육비, 아버지가 잘못 선 빚보증 때문에 가세가 날로 기울어 7남매 중 홀로 광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압박했지만, 애옥살림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만이 사춘기의 그의 삶을 다소 일탈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한 예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대 친구들과 ‘에덴클럽’이라는 다소 질나쁜 서클을 만들어 공부보다 노는 일에 열중하며 술·담배를 가까이 하다가 부친으로부터 의절선언에 가까운 나무람을 듣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시위에 열심히 참가하기는 했지만 당시 ‘유신’ 직전 정치정세의 가파름에 견주어 그의 정치의식이 특별히 높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친구들의 회고다. 다만 그는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거기서 벗들을 사귀며 비교적 자유분방한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그는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일반하사로 경북 상주에서 33개월간 복무한 뒤 75년에 복학했다. 그가 군에 있을 때 터진 10·17정변, 전남대 ‘함성지사건’,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돌아온 교정의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그는 복학 뒤에도 얼마 동안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동안 더 어려워진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무고등고시 준비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그의 삶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의 소개로 이뤄진 전남대 선배 김상윤과의 만남인데, 민청학력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75년 2월의 ‘특사’로 풀려난 김상윤과의 이 만남을 통해 윤상원은 실존적 고민의 테두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역사와 맞부딪치게 된다. 윤상원은 김상윤이 주축이 된 독서서클에 가입해 집중적인 학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모순과 해결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의 교우관계 또한 학내의 ‘선진’ 학생들로 넓혀졌다.

그러나 졸업반 때 그가 혼신을 다해 계획한 4·19 17주년 시위는 불발로 끝나고 그는 현실에 떠밀려 78년 1월 주택은행에 입사했다. 그 전해 9월 김상윤은 사회과학 서적의 유통처이자 광주운동권 인사들의 모임터가 될 녹두서점을 계림동에 열었는데, 윤상원 또한 이 서점을 통해 운동권 인사들과의 교분을 더욱 다졌다.

은행원으로서의 그의 서울 생활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꾸리며 중산층으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이어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땅의 억압받은 민중 한가운데로 자신을 집어던져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반년 만인 그해 7월 10일 일터인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도청에서의 산화까지 그의 길지 않은 역정을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가, 또는 운명이 80년 5월을 위해 그를 귀향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들불 야학 통해 노동운동


그는 학력을 속이고 관천공단 안의 한남플라스틱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자’가 된 것이다. 몇 개월 지속되지 못한 노동자 생활은 그에게 별다른 조직적 성과보다는 노동자적 삶의 실감을 선사했다.

그는 노동자생활을 하며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여)이 중심이 돼 만든 들불야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이 노동야학을 이끈다. 들불야학과의 만남, 또는 박기순과의 만남은 김상윤과의 만남에 이어 그의 삶을 전환시킨 두 번째 사건이다. 그는 이 들불야학을 통해 한사람의 완숙한 운동가로 성장했고, 당국의 탄압을 이겨가며 그가 이끈 이 야학출신의 노동자들은 뒷날 5월 항쟁 당시의 유일한 민중언론이었던 <투사회보>의 제작팀이 된다. 그는 아예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방한칸에 사글세로 들어가 살며, 이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하던 김영철과의 연대 속에 노동운동의 기초를 닦는 한편, 학생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던 중 78년 성탄절 새벽 윤상원과 함께 들불야학을 이끌었던 박기순이 연탄가스로 사망한다. 윤상원과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였던 박기순, 6·29교육지표시위사건으로 강제휴학을 당한 뒤 노동야학운동에 헌신해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의 어이없는 죽음은 윤상원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만, 그 죽음은 그들을 갈라놓기는커녕 뒷날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들을 결합시킨다.

박정희가 죽었다.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릴 것 같던 이듬해 1월 서울에서 내려온 노동운동가 이태복은 윤상원에게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라 불리게 될 전국적 규모의 노동운동조직에 가담하기를 권유했고, 이를 수락한 윤상원은 얼마 뒤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18이 터졌다. 5월항쟁의 전과정을 통해 윤상원은 선전·선동의 탁월한 기획자·실행자로 활동했다. 그가 초안을 잡고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이 19일 오후에 시가지에 배포한 최초의 호소전단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잠을 잊은 채 지휘한 것도 그이고, 수습위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해방광주’의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주동적으로 조직해낸 것도 그이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것도 그이다.


수습위 투항적 경향 견제


더구나 그와 최후를 같이 하거나 끝까지 도청에 남은 지식인 동료들 대부분이 공수부대에 의해 장악된 항쟁 초기의 광주를 일시적으로 떠났던 것에 견주어 그는 시종일관 이 ‘빛의 땅’을 지키며 도청접수에 참가했고, 파시즘의 물리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5월광주를 역사의 비석에 깊게 새겼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모난 데 없이 원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면서도 원칙의 문제를 양보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는 그가 대학의 연극반 시절부터 키워오던 ‘광대기질’이 한목한 것으로 보인는데, 김상윤씨는 그 ‘광대기질’의 한 예로 탁월한 소리솜씨를 들었다. 특히 현대 판소리 <소리내력>을 부르는 그의 솜씨는 문화계 인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바 있는 이양현씨는 그를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그의 동지이자 후배인 임낙평씨도 이 말에 동의하며 윤상원은 항쟁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세력들을 하나로 조직해 항쟁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태복씨에게 윤상원은 농민운동의 힘이 압도적인 광주·전남지역에 노동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자, 자신의 기득권에 눈 돌리지 않았던 올곧은 자세의 운동가이다.

그러나 자식의 역사적 영광은 그 육친에게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말로는 표현 못하겠다”고 말한 어머니 김인숙씨는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모르겠다. 어쩐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동지 박기순과 영혼결혼


82년 2월 20일 정오 망월동 묘역에서는 윤상원과 그의 노동동지 박기순 사이의 영혼결혼식이 친지들의 참석 하에 열렸고, 그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해서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다. 이 소품의 마지막 곡이 김종률씨가 작곡하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작사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80년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운동가요를 통해 윤상원과 박기순은 공장과 교정과 거리에서, 진보의 외침이 들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한국 역대정권의 정치체계


최한수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http://www.gun-park.com/8


한국은 한 국토에 두 개의 상이한 정치체계를 갖고 있다. 남한은 자본주의적 민주정치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체계이다. 이러한 배경은 명백하다. 2차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의 지배로 양분되면서 남한은 미국체계, 북한은 소련체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즉 한국내의 자발적 세력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외세의 타율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20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강점되었다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일어진 것이다. 문제는 일본의 강점기가 없었다면 어떤 체계로 존속되었을 까 하는 점이다.


한나라의 정치체계를 말할 때는 크게 민주정치체계이냐 또는 독재정치체계냐로 구분한다.민주정치체계는 대부분의 정권들이 표방하는 정치체계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이다,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많은 나라에서는 외적 표현과는 달리 민주성이 아주낮아 실제는 권위주의 체제와 흡사하거나 사실상 권위주의 체계인 경우가 많다. 권위주의 독재와 독재는 사실상 같은 속성이지만 권위주의 독재에서 권위주의가 빠지고 「독재」라고만 하면 전체주의 독재와 혼동되거나 통용된다. 그러나 권위주의 독재와 전테주의 독재체계는 아주 다르다. 전체주의 독재(totalitarian Dictatorship)는 전체주의 독재, 전체주의 지배, 전체주의 국가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전체주의에 관한 문헌은 광대하고 복잡하며, 아주 논쟁적이고 50년 이상 거술러 뻗혀있다. 독재의 두 주요한 형태인 권위주의 독재와 전체주의 독재간의 가능한 보다 현저한 구별이 필요하다. 물론 어떤 분석이 요구되지만 권위주의 체계와 전체주의 체계사이의 기본적인 대비점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권위주의체계는 “멘탈리티”나 순수한 실용주의를 분명히 하는 경향인 반면, 전체주의체계는 이념을 확충시킨다. 이념-정신성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 것은 사회정책에 관한 문제이다. 전체주의 독재의 근본적인 사회정책은 “총체적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C.W.Cassinelli,1976). 권위주의 정권들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사회정책중의 하나는 변화에 대한 반동이나 단순한 거절이며, 때로는 지배하는 과두제에 대하여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최근의 발전을 소멸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또다른 개혁은 사회나 정체의 요소를 증진시키려는 점진주의자의 시도도 있다.


권위주의 정권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부합성에 만족한다. 즉 시민이 요구된 사항을 저항없이 수행하는 한 당국은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독재에서 정권은 시민이 정부(또는 지도자)의 지시나, 또는 소망에 대하여 불평하면 유죄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내적인 부합성을 요구한다. 권위주의 정권은 또한 정부나 집권당이 국민의 정치적 각성이나 관여를 자극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무관심을 즐긴다. 권위주의 체계에서 문제는 참여를 축소하기보다는 그 참여가 정권에 위협적 요소가 되지 않도록 참여의 방향을 전환(channel)한다. 전체주의 동원은 근대 민주주의에 의하여 육성된 자발적인 활동주의가 아니나 통제된 것이다. 권위적인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극복할 수 있고 그를 위하여 합리적-법률적 또는 전통적 주제(theme)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이러한 것들이 전체주의 정권에는 위협적 요소가 된다. 전체주의 독재는 북한의 정치체계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는 이승만 정권이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정부에 대해 권위주의정권 또는 독재정권 즉 권위주의 독재정치체계로 평가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우리 나라의 역대 정권별 정치체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나를 알아보기로 한다.


1. 이승만 정권 :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체계


현대정치는 봉건정치와 구별되는 대의정치를 의미한다. 한국의 현대정치는 봉건정치가 일본의 강점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후 1945년 광복을 맞고 1948년 선거를 통해 대의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막이 오른다. 1948년 5월 10일 한국최초로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7월17일 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이 공표되며,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8월 15일 내외에 정부수립을 선포하여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게되었다.


독립운동과정에서 획득한 카리스마와 잔존하고 있는 유교문화 속에 노령,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으로 이승만은 권위와 권력을 독점하게되었다. 독립운동과정에서 나타났던 유아독존적이며 경쟁자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메마른 이승만의 권력 행태는 대통령이 됨으로 더욱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정부수립과정에서 지원을 받았던 김성수 등 한민당 인사들을 비롯한 잠재적 세력들을 외면하고 순종적인 인사들과 함께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권력의 공유를 기대했던 한민당 인사 등 지식인들은 이러한 이승만의 독선과 전횡에 대하여 저항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반대세력들은 내객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이승만 권력의 뇌관을 빼내려고 시도했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간선에 의한 재선이 염려되었고 정권유지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이 와중에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3년간의 민족상잔 속에서도 이승만은 권력확대와 장기집권터전을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52년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국회간선을 직선으로 바꾸어 재선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승만은 건국초기에는 정당을 기피했다. 그러나 야당의 조직적 저항에 대한 대응과 자신의 영구집권의도를 행동으로 옮겨줄 전위대로서의 정당이 필요했고, 이에따라 자유당을 성립시켰다. 이어 자유당을 중심으로 54년 4사5입 개헌을 통해 헌법의 대통령중임제한규정을 개정하여 영구집권가도에 들어섰다. 이승만의 추종세력은 고령의 이승만 후계를 염려해 3.15부정선거의 감행을 통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60년 4.19학생혁명에 의해 12년 집권의 막을 내렸다.


이승만정권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였다. 권위(authority)는 라틴어 동사인 augere(augment:증가하다)와 관련된다(Givanni Sartori,1987,186). 궁국적으로 권위의 가장 간결한 의미는 "도덕적 영향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체계에 대한 이름으로써 권위주의는 파시즘에 의하여 찬양하는 이름으로 주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용어는 약간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정당한 정부는 권위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주위라는 용어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자유에 대치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권위가 행사되는 방법에 대하여 거의 어떤 통제도 없는 정권, 즉 독재정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유사한 개념들에 의하여 종종 의미가 혼돈된다.


독재정치(autocracy)와 전제정치(tyranny),권위주의(authoritarianism)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들은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정권의 본질과 정권의 관리구조에 대한 본질을 나타내는데 반해 전자의 둘은 지배자의 본질을 나타낸다.(Amos Perlmutter,1981,p.1). 독재정치는 일인의 지배자가 절대적인 집행권을 휘두르는 지배를 말한다. 독재정권은 권력을 제한하는 법률적인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권력에 대한 책임성이나 질서있는 승계도 이루어 지지 않는다. 지배는 독단적이고 오직 힘에 의하여 지탱될 뿐이다. 권력구조의 영속성과 제도화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우 한정된 권위와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불완전하다. 전제정치도 법률에 의하여 제도화된 왕의 지배가 아닌 독단적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독재정치와 사실상 동의어지만 16-7세기의 고전적인 형태다. 전제적 권위는 정복에 의하여 확보되고 공포로 유지된다.


독재정치체계는 권위주의 독재체계, 일당 독재체계, 전체주의 독재체계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독재정치(autocrac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 전제정치(tyranny)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들은 아주 유사하다. 독재정치는 일인의 지배자가 절대적인 집행권을 휘두르는 지배를 말한다. 독재정권은 권력을 제한하는 법률적인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권력에 대한 책임성이나 질서 있는 승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독단적이고 오직 힘에 의하여 지탱될 뿐이다. 권력구조의 영속성과 제도화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우 한정된 권위와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불완전하다.


독재정치와 민주정치(입헌정치)를 크게 구분한다면 그 핵심적인 차이는 모든 입헌정권이 법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는, 즉 정부가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실체적 규칙과 절차에 둘러싸여 있는데 반하여 독재는 법에 의하여 동일한 방법이나 동일한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법의 정당성이 전제된다. 법이 국민 대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 아니면 형식적 과정은 유권자의 의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는 지배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법(규칙)자체만으로도 민주성의 취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권력은 바로 이승만 개인에 의해 창출되고 지탱되면서 이승만 개인의 지도력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사유적 절대권력구조였다. 근대의 권위주의 독재가 비록 제한적이며, 배타적이라고 하드라도 정치 엘리트와 대중적지지 및 정치적 동원에 의지하며, 무엇보다도 전문화된 정치구조와 제도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승만 독재는 전근대적 권위주의 즉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라고 할 수있다. 즉 이승만의 리더쉽은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가부장과 같은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있었다. 가부장적 권위는 법이나 제도보다는 가부장의 의사가 절대적 판단과 행위기준일 수밖에 없다. 능력보다는 복종과 헌신이 최우선의 덕목이다. 가부장은 위엄은 있지만 간교하거나 매섭고 혹독한 통제력은 약하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 정권하의 반대세력은 외각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지만 나름의 목소리는 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독존적이고 독선적인 통치 속에서도 반대자들의 공간을 허용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오랫동안 미국의 정치과정에 익숙했던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독재를 경쟁적 준권위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2. 장면정권 : 위약한 유아 민주정치체계


장면정권은 제2공화국 정권을 말한다.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승만은 하야하면서 허정(許政)을 과도내각의 수반으로 지명하고 향후 정국주도권을 획득하게 된 민주당이 이를 수용해 과도내각이 탄생했다. 과도내각은 민주당과 함께 내각제 권력구조로 개헌했다. 민주당은 학생들과 시민들에 의해 집권세력들이 밀려난 공간에서 내각제하의 총선거를 통해 압도적 의석으로 집권했다.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 이어 장면정권의 제2공화국의 출발이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내각제권력구조의 민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국회는 양원제로 상원격인 참의원과 하원격의 민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전부터 치열한 집권경쟁을 전개했다. 의석수가 곧 집권자원인 내각제하에서 한 석이라도 더 늘리려는 민주당내의 신.구파는 총선거의 후보공천에서 당의 공천과 함께 각 계파의 공천으로 인해 한집안이 뒤엉켜 딩구는 선거전을 치루었고 결과는 의석수를 양분하는 백중의 세력이었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장면중심의 신파 세력은 전략상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에게 양보한 뒤 총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총리를 차지하려던 김도연 중심의 구파는 '신민당'으로 분당했다.


내각제는 안정된 정당체계와 절대다수의석을 바탕으로 집권해야 한다. 사실상 유일정당으로 의석을 휩쓸었던 민주당은 집권경쟁과정에서 양분되고 대통령과 총리가 여.야당으로 등을 돌린 가운데 국회를 권력 줄다리기장으로 삼아나갔다. 4.19학생혁명의 성공으로 정치화된 학생들은 특히 통일문제에 관해 보수세력들의 우려를 낳게 만들었다. 정치적 자유가 대폭확대되면서 정치적 열기가 뜨겁게 확산되고 그만큼 사회 분위기는 혼란스러워져갔다. 민주주의신봉자들에게는 권위주의 독재에서 벗어난 일시적 반동으로 인식될 수있지만 권위주의의 억압에 익숙해진 시민들, 그리고 규율 속의 군인들에게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장면에게는 혼란스러운 사회를 통제할만한 권위가 약했다. 시민들은 무절제된 투입욕구 속에 그에 상응하는 산출을 바라지만 장면정권은 그만한 능력을 갖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약한 정당성을 카리스마와 정교하게 조직된 행정권으로 유지했었다. 그러나 장면은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그와 함께 가야하는 효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면정권은 결과적으로 당시 신생국에 창궐하던 군부 쿠데타를 예방할만한 면역성을 상실하고 이었던 것이다. 장면정권은 혼란스럽고 무능하게 비쳐졌고 그 사이를 어느새 쿠데타 병에 감염된 정치군인들이 침투했던 것이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 병에 전염된 것은 이미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에서부터였다. 발병순간 학생들이 나서는 바람에 뒤로 물러섰다가 결국 장면정권이 들어선지 9개월 여 만인 1961년 5월16일 군부 쿠데타로 장면정권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장면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에 대한 항거를 통해서 성립된 독재의 반제정권이라는 점에서 민주정치의 기대를 갖고 탄생한 정권이다. 권력구조나 의회구조도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구성되었다. 민주정치체계는 입헌주의의 구체적 형태로서 포괄적으로는 민주주의,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정치 즉 지배자 개인의 자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정당한 헌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헌법은 정부를 안내하고 그 요점이 성문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는 규범적 구조이다. 입헌정부는 정부권력이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규정되고 강제적인 방식에서 행사되며 제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들은 실질적이거나 절차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실질적인 제한은 정부가 어떤 일들을 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에서 특정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절차상의 제한은 정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규정된 형태나 순서에 따라 하여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정치체계에 관하여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된다. 정치엘리뜨들은 기업이 소비자를 상대로 하듯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경쟁관계라는 경쟁 모델,(Anthony Downs, ,1957) 직접민주주의 이상에서 출발하여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한 대의제도에 접목시켜 민주주의 이상을 구현해 보려는 기대를 담고 있는 참여민주주의도 있다.(C.Pateman,1970).민주주의를 어떻게 기술하든 그것은 인간의 본질과 이상에 대한 최대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본질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그 자체의 사실만으로 평등한 존엄성과 자유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한다면, 그를 구현하는데 적합한 정치,경제, 사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합리적인 제도와 절차를 필요로 한다. 바버(B.Barber)는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B.Barber,1984) 그는 대의제적 자유민주주의를 약한 민주주의로 부르며,강한 민주주의는 현대적 형태의 참여민주주로써, 이것은 시민 교육에 의하여 결속되며, 시민적 태도와 참여적 태도 등을 통하여 공동목표를 추구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치공동에 의존하는 민주주의다.


장면정권은 이러한 민주정치로 이행하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쿠데타로 장면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민주정치의 싹은 자리보지도 못한 채 짓밟혔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배경에 대한 설명은 군부의 정치활동을 주로 사회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반면 내적인 성향도 많이 고려한다. 예를 들어 야노비치(Morris Janowitz)는 군부의 멘탈리티를 형성하는 요인, 특히 제3세계의 군부정치에 특별히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써 과도한 민족주의(hypernationalism) 청교도 주의(puritanism), 집산주의(collectivism), 반정치(antipolitics)등 4가지를 든다( M. Janowitz,1967, 64-65). 과도한 민족주의는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민족주의를 말한다. 민족적 단결, 국가건설 그리고 심지어는 민족적 굴욕에 대한 복수의 주제는 많은 군인들의 정신상태속에 무겁게 나타난다. 민간정부를 공격하는 군부의 민족적 바탕은 대개 정부가 민족적 영광을 아주 열열히 옹호하지 않는 다든가, 외국이나 동맹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간다든가, 또는 정부가 국내의 집단을 단결시키려는 노력을 하지않는 다든가, 또는 방위비 증액의 약속을 정부가 지키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런 또는 다른 이유들은 군부로 하여금 민간인 지도자들은 사실상 민족운명을 저버리는 배신자들로 판단하게 만든다. 이 경우 그들에게 나타나는 다음의 행동은 그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쿠데타이다.


청교도주의는 실질적인 정책보다는 생활양식과 더 관계된다. 군인들은 호사스럽고 우쭐대는 것 보다 엄격하고 강인한 생활방식에 더 가치를 부여한다. 이들은 민간정치지도자들의 고급생활과 부패를 보게될 때 종종 경멸과 혐오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을 그들 스스로 및 국가에 대하여 항상 모욕적이며, 나약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기생충은 지배를 담당할 만한 가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군인의 신성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야노비치(Janowitz)에 의하면 집산주의는 "사회, 정치 및 경제적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기반으로써 집산적인 공기업(collective public enterprise)의 수용(acceptance)"( M. Janowitz,1967, 64).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프리카와 아랍의 몇몇 군부정권에서 모호한 "사회주의"가 유행하는 부분적인 속성을 알수 있다. 이러한 이유중의 하나는 집산주의는 군부 자체가 일종의 "집산적인 공기업"이라는 것이다. 군부는 집산적 공기업이 가장 효과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산적 공기업은 군부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경제에 좋다고 결론 짓는다. 더욱이 계획과 지시를 중앙기획위원회가 내리는 "지시경제"에 대한 구집산주의자 사고는 모든 강경노선의 장교들의 꿈과 아주 잘 일치한다.


가장 정치적인 행위로써 군의 개입은 원칙과 이익, 야망과 희생 등의 복잡한 혼합을 포함한다. 집정관 주의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들이나 혹은 군대의 "정신성"또는 이념을 강조하는 이론들 까지도 진실로 강조하여야 하는 요인들을 잘못 놓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예를들면 아프리카 군부의 불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야망과 불만을 가진 장교들, 그리고 그들은 분열되고, 비구조적이며, 불안정한 정치체계에서 많은 자유와 넓은 행동반경을 가진 장교들의 개인적 동기에 관한 요인의 강조가 충분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정치에 개입한 배경은 이상의 배경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적 정치사회환경과 군 내부의 복잡한 환경, 그리고 박정희를 비롯한 친위세력의 군인으로서의 개인적 이해 등이 중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의 내부요인이 어떠하던 군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당시의 정권과 사회상황이다. 이것은 박정희세력이 자유당 정권당시부터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민주당 정권에서 결행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정치적 야심가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거나 유지하는데 정치.사회 상황을 최대로 활용하게된다. 장면정권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신의 상황을 제공했고 사회적으로 무질서하고 불안한 환경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은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배경을 충족시켰고,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들도 결국 이를 거부하지 못했던 것이다.


3. 박정희 정권 : 관료적 권위주의독재 체계


박정희 정권은 군부정권기와 3공화국, 4공화국(유신정권)에 걸쳐 존재한다. 박정희는 군부세력을 주도하여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탈취한 뒤 3년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다음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3권을 장악했다. 정권탈취를 위해 정치정화법이라는 소급법으로 기성정치인들을 규제한 뒤 62년 12월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의회를 단원제로, 그리고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의 출마를 금하는 등의 정당본위정치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지방자치는 전면 중단시켰다.


1963년 10월 15일과 26일 대통령선거 및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기까지 3년여간은 정부수립후 최초의 군부정권기간이었다. 군정은 권위주의독재정권의 한 유형이다. 래파포트(David Rappaport)에 따르면 군부사회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D. Rappaport, 1970, 20).


1).정부의 형태와 기능에 관한 합의가 아주 약하다. 입헌주의는 근본적인 문제에 어떤 합의를 가정하는 반면에, 군부사회는 "게임의 규칙"에 대하여 합의뿐만 아니라 그것을 준수하지도 않는다.

2).富와 권력에 대한 무방비 상태의 투쟁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치는 이런 일들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군부사회는 특히 무자비하다. 즉 제어력이 없는 것이다.

3).소수의 거부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마지막단계에 대한 시나리오를 회상시키는 측면에서 빈곤으로 고통받는 대중들에 직면한다.

4). 전체적으로 정통성은 매우 낮고 불안정성은 매우 높기 때문에 정치 및 행정구조들은 제도화의 수준이 빈약하다. 낮은 공공도덕으로 인하여 부패와 금전에 의한 매수가 정치생활의 목적이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 헌팅톤(S.P. Huntington)은 군부사회의 유형을 3가지 즉 과두적, 중산계급적, 대중적 집정관 주의로 보았다.(S.P. Huntington,1968,chap.4)과두적 군부사회는 대중의 정치화가 제로(0)상태일 때, 중산계급 군부사회는 대중의 정치화가 중간정도 일 때, 그리고 대중적 집정관주의는 대중의 정치화가 높을 때이다.


박정희 군부정권이 래파포트가 지적안 4가지 특성을 나타냈다고 불 수는 없다. 헌팅톤의 분류에 의한 대중의 정치화수준에서 우리는 이중적 배경이었다. 즉 정치 엘리트나 학생, 지식인들의 정치화수준은 집정관 단계지만 일반대중은 과두적 단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군부는 이른바 혁명과 반혁명사건과 박정희의 민정참여 및 군의 복귀를 둘러싼 번의파동 등 군 내부와 정치권의 다각적 갈등 속에서 유지되었다. 군부정권은 또한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감시체제를 확립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켜놓은 상황에서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는가 하면 각종 부정의혹사건이 뒤따랐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군부정권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군부는 자신들의 정권획득과 연장을 위한 수단에는 규칙을 초월했다. 박정희 군부정권은 부패를 바탕으로 금권에 의한 정권유지수단도 동원했고 이는 한국정치의 금권화를 낳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민주정치역사의 퇴영을 초래하였고 민간엘리트의 위상을 주변화시킨 반면 군부를 패권집단으로 등장시킴으로써 한국의 정치체계를 군부지배체계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따라 5.16은 민주지향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군부세력도 권위주의 억압정책을 강화함으로서 정치불안이 가중되고 억압과 저항의 악순환현상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가속화시키고 사회변동에 역동성을 강화시켜 근대화와 산업화를 가속화시켰다는 점, 기술관료주의와 행정능률을 제고시켰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김호진,1992,236).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거친 개헌안에 따른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선거를 거쳐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군부정권의 굴레를 벗고 문민정부의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반이 쿠데타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은 군부정권의 허물을 벗지 못한채 정당성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정권은 특히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제 협정의 조인을 통하여 한일관계를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및 경제협력자금을 공여받아 경제개발에 사용했다. 이에 대해 재야와 야당은 굴욕외교라는 비판과 저항을 계속했다. 박정희정권은 또한 야당 일부와 재야세력의 반대 속에 같은 해에 월남전에 국군을 파병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수호라는 명분과 함께 미국과의 동맹관계강화와 미국 및 월남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냈다.


박정희정권은 정권출범과 함께 의회의 기능유지와 언론자유의 보장 등 나름의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나 한일협정조인과 월남파병 등에 대한 야당과 재야의 반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면서 권위주의 정권의 속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정책들이 국민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면서 지지기반이 강화되었다. 1967년에 실시된 박정희의 제2기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4년전 박빙의 선거결과와는 달리 윤보선후보를 10%이상차이로 압도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박정희는 2대 마지막 임기 말에 이르면서 과거 이승만과 유사한 변칙적인 3선 개헌을 단행했다. 야당과 일부 재야는 극명한 반대에 나섰지만 국민들이 동참은 미약했다. 결국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대결하여 승리하였지만 국민들의 경계심은 높아졌다. 이것은 같은 해의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의 득표율이 48.8대 44.4의 근접한 결과에서 확인된다.


제도상으로 박정희는 자신이 변칙적으로 주도한 개헌에 의한 출마가 마지막인 선거를 통해 집권하면서 또다시 영구집권기반구축의 기도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남북관계개선을 적극화하고 71년 남북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제의하고 72년에는 남북 7.4공동성명을 도출해냈다. 정부의 이러한 대북 정책은 남북긴장완화의 기대와 안보이데올로기로 정권유지의 정당성을 확보해오던 박정권에는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영구집권기반을 확립하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12월에 들어서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11월 21일 이른바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박정권은 스스로 남북대화를 확대하면서 안보를 내세워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헌정을 중단한 상태에서 영구집권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이 절대권력과 영구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제한을 철폐했으며, 대통령의 당선은 행정기관의 통제 속에 선출되는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박정희의 무제한 당선이 보장되는 제도였다.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여 국회를 대통령이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제도에 의해 92년 12월 27일 제 8대대통령에 취임하여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유신정권은 국회와 언론,정당 노조 등 민주정치의 하부구조가 강력히 통제되고 위축되는 대신 중앙정보부, 보안사등 사찰과 통제기구는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과 재야의 저항은 반체제운동으로 확산,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6년간을 지탱한 후 1978년 7월 유신 제2기의 6년 대통령임기를 시작했으나 야당과 재야의 저항은 간접적이고 제한적 범위에서 직접적이고 방법위하게 나타났다. 10대 국회의원총선거를 통해 유권자들도 득표율에서 야당에게 1.1%를 더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유신체제를 부정하였다. 특히 야당은 온건,타협의 이철승체제 대신 유신철폐를 공개적으로 외치는 선명,강경의 김영삼 체제를 선택하고, 이에대해 유신정권은 국회에서 야당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당총재 집마저 가처분하는 어이없는 사태를 유발했다. 결국 유신체제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하여 ‘부마민중항쟁’을 초래함으로 민중의 공개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박정희는 유신 제2기 대통령에 취임한지 1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그의 심복이던 당시 중앙정부부장 김재규가 일으킨 ‘10.26사태’로 시해됨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벅정희는 3년간의 군정기를 거쳐 민간정부를 출범시켰다. 박정희의 민간정부는 3공화국과 4공화국이 완전히 구분된다. 제3공화국은 제4공화국에 비해 정치적 자유나 시민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다원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박정희가 추구하는 이른바 행정민주주의체계였다. 행정민주주의는 의회민주주의를 비능율 또는 무능으로 인식하고 관료들의 행정적 주도로 국가정책이 입안 집행된다. 따라서 정치과정에서 의회의 역할은 축소되고 시민들의 참여는 봉쇄된다. 이런점에서 제3공화국도 실상은 관료적 권위주의형 정치체제였다.


박정희의 제4공화국인 유신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보다도 정치적 공간이 훨씬 더 좁아진 권위주의 독재정치체계였다. 권위주의 정권 모델은 다양한데 볼세비키(Bolshevik),나찌(Nazi), 파시스트(Fascist), 조합주의(Corporatist)모델 그리고 군부정권(Praetorian)등으로 구분된다(Amos Perlmutter,1981,2) 권위주의독재정권의 또 다른 유형은 군부정권체계(praetorian society)와 1당 정권(single-party regimes)이다. 여기에서의 1당은 정당의 수적인 의미보다 정당의 활동과 세력을 의미한다. 즉 군소 정당이 있지만 그것은 화장하는데 필요한 분가루일 뿐이다. 박정희 정권의 특성에 대해 관료적 권위주의형 군부지배체제(김호진, 244)라는 평가와 집정관체제 (한배호,1994, 318-328)라는 견해 등이 있다. 권위주의에 관료주의가 합쳐진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는 특히 우리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이다. 관료적 권위주의는 1964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정착된 정치체계로서, 권위주의는 남미 정치체계들의 낮은 근대화수준 및 비민주성을 함의하고 있으며, 관료주의는 사회부문들에서 조직능력의 성장,정부의 포섭에 의한 통제전략, 기술관료들의 경력유형과 권력기반, 대규모 관료조직의 중추적 역할 등 근대화수준이 높은 특징을 나타낸다(한상진,,1984, 69).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는 관료주의가 갖는 비민주성의 일면과 군부지배의 비민주성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관료주의의 비민주성에 군부지배의 비민주성을 더하여 양적으로 비민주성이 그만큼 강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관료주의가 비민주성을 가졌다는 것은 공공정책을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가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 입장에서 볼때, 비선출된 관료들이 공공정책을 결정한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군부지배보다는 민간 관료가 지배에 가세되었다는 점에서 비민주성을 엷게 하는 희석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적 권위주의 독재는. 정신성 또는 이념적으로 “멘탈리티”나 순수한 실용주의를 분명히 하는 경향이다. 또한 어떤 원칙에 호소하거나 막연한 도덕적 또는 종교적 특성의 어떤 규칙을 따르도록 호소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 하려한다. 린즈(Juan Linz)는 이러한 원칙이나 규칙들을 정신성(mentality)이라고 부른다(Juan Linz,1975,266-67).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 근대화, 새마을 운동, 국가안보 등을 내세웠다. 현대적 권위주의 정권은 또한 전체주의독재와는 달리 외적인 부합성에 만족한다. 즉 시민이 요구된 사항을 저항없이 수행하는한 당국은 시민을 괴롭히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시민의 부합성은 위장될수도 있으나, 그가 어떤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한 안전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문화, 예술 등의 비판에는 관대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은 광범위한 정치적 무관심을 즐긴다. 칼러 TV방영을 서두르고 야구단을 창설해 놓을 테니 국민들은 이를 즐기며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바램이다. 참여를 축소하기 보다는 그 참여가 정권에 위협적 요소가 되지 않도록 참여의 방향을 전환(channel)한다(M.N.Hagopian,117-122). 이러한 경향은 박정희의 독재를 이은 전두환 정권에서 본격화된다.


4. 전두환 정권 : 집정관적 권위주의체계


전두환 정권도 장면정권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반제의 상황에서 태어 났으나 결과는 외혀려 유신독재와 유사한 정치체계로 회귀되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배경은 민주정치체계의 또 다른 유형인 입헌독재 즉 민주적 독재체계를 교묘히 권력의 찬탈과 유지에 악용한 극명한 예이다. 정부차원에서 입헌독재는 행정부에 권력이 집중됨을 의미한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그들의 정상적인 활동을 다소 포기하고 그들의 활동을 행정부에 넘기거나 그들의 기능을 일시 정지시킨다.민주적 독재라는 말은 자가당착 같이 보인다.


독재(dictatorship)는 원래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이 완전한 반민주적 의미를 준 것은 아니었다.로마 국가가 위험한 시기에 한사람 독재자는 외국과의 전쟁이나 시민 반란에 의하여 야기되는 치명적인 위험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충분한 권력을 갖고 임명되었다. 로마 독재자의 권력의 위험은 두 가지 핵심적 방향 즉 (1) 기간은 최대 6개월, (2) 범위는 개인적으로 로마 정체의 입헌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제한되었다.


로마 독재는 입헌정부의 영원한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헌법 실천과정에 있어 일종의 간이 조치였다. 이러한 로마 모델에 따른 민주적 독재는 입헌독재로 불려지며, 오늘날의 민주정권도 (1) 외국과의 전쟁 (2) 국내반란(내란) (3) 경기침체 (4) 천재지변과 같은 위기나 비상사태의 상황에 직면하면 입헌독재에 의존하도록 만든다.(M.N.Hagopian,42-43) 외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에서 외국과의 전쟁이 국가 상황의 강력한 통제를 가져왔던 점에서 분명해진다. 전쟁기간 처칠( W.Churchill)의 권력은 히틀러(Hitler)시대의 권력에 비하여 더 적지 않은 독재적 권력이었고 의회는 정상적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내란 진압은 종종 입헌독재에 의지하는 이유가 된다.

한편 민주독재체계는 실제적인 독재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빈번히 사전에 시험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조작된 위기와 실제적인 위기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1930년대의 대공항(Great Depression)과 같은 경제적 위기는 정부로 하여금 경제 통제에 관하여 비상대권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자유방임주의적 위치는 경제에 대한 개입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외국과의 전쟁이나 내전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이다. 아울러 홍수나 지진 같은 천재(天災)도 거대한 파괴적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근대 정부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처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군부는 국가 안보와 사회안정을 구실로 장기간 계엄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이 계엄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1979년 10.26으로 대통령이 유고되고 권력핵심부에 진공상태가 초래됨으로써 10.26사건의 수사를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었던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12월 12일 반란을 통해 계엄권을 찬탈하고 정권장악을 기도하였다. 1980년 유신정권의 반제요구에 따라 정치활동이 대폭 허용되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이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다가올 대권경쟁이 치열해졌고 학생과 노동계 등 각계의 자유의 요구에 대한 못물이 터져 나왔다. 특히 학생들은 필요이상으로 군이 정치,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고, 이기간 전두환 세력은 정권탈취의 기도를 현실화했던 것이다.


신군부세력은 80년 5월17일 계엄의 축소가 아니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다시 헌정이 완전 중단되고 군부의 계엄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전두환 세력의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계엄령 속에서도 신군부의 등장에 대한 공개적인 시민의 저항이 일어났고 200여명의 시민이 계엄군에 학살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이러한 과정에서도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임시 대통령 최규하를 밀어내고 동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군부세력은 정권장악과 유지방식을 대분분 박정희의 군부정권당시에서 시사 받는 것 같았다. 박정의 국가재건최고회의 대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집권에 필요한 각종 제도를 마련했다. 그리고 군부정권의 옷을 벗기 위해 10월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 당시의 대통령선출방식과 흡사한 제도를 통해 다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와 다른 점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야당의 참여를 허용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의 단임으로 정한 것과 유신정우회 대신 전국구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와 같은 소급법으로 기성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뒤 선별적으로 제외시켜 여당과 3개의 야당에 분산시켜 관제정당을 만들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관제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민주사회당)의 창당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요 국민에 대한 기만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공직자와 언론인들의 대량해직을 통해 언론을 무력화시켜 홍보기관으로 악용하는 한편 지식인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철저히 통제하며 자신들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조작하고 야당 특히 저항세력들의 언동은 거의 완벽하게 제한하였다. 정치활동이 규제된 채 가택에 연금된 김영삼은 20일 이상의 단식저항을 통해 재야세력의 반정부의식을 일깨웠다. 국내에서 전두환 세력에 저항한 김영삼과 군부정권의 씨니리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미국으로 추방된 김대중 등 야권의 두 지도자는 전두환정권의 억압에 더 이상 질식사할 수 없다는 인식 속에 1983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여 반정부 재야세력의 구심체로 등장했다.


전두환 세력은 11대 총선까지는 동반야당과 밀월관계를 유지했으나 12대 총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주요 야당인사를 제외한 대분의 야당인사에 대한 정치규제를 해제하여 참여의 문을 열었다. 그 결과 민추협 참가자들은 1895년 1월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다음달 2월 12일의 12대 총선에 임하게 되었다. 미국에 체류중인 김대중은 정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2월 8일 귀국하였다. 김대중의 귀국은 필리핀의 반체제운동가였던 아퀴노가 귀국과정에서 피실된점과 관련하여 세계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사실도 은폐하려 기도했지만 마침 총선거운동기간 중이어서 유세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는 야당붐 조성에 시너지효과를 낳았다. 선거결과 신한민주당은 제1당을 차지함으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야당과 여론의 공세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85년 3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미해금자 14명을 마지막으로 해금하였고, 야권은 이를 계기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추진을 가속화시켰다. 야당과 시민의 민주화요구는 유신정권당시보다 훨씬 활발하고 거세었다. 역사의 시간이 그만큼 전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국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성 고문사건과 대학생의 고문치사사건은 소극적이던 시민의 저항을 행동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탄압에서부터 전두환 정권의 공권력행사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남한을 물바다로 만들려한다며 대응땜의 건설필요성을 들고 나와 국민의 성금을 강요한 이른바 ‘금강산 땜’사건을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가 하면 내각제 개헌으로 정권연장을 기도했지만 한번 추락한 권위와 권력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