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거치면서 네그리의 사유는 '공통체'(commonwealth)로, 홀로웨이의 사유는 균열(crack)로 발전해 가고 있다. 한쪽은 가장 거시적인 것으로, 한쪽은 가장 미시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대립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또 생산적이다. 구성적 경향과 비판적 경향의 이 대립은 맑스 속에 공존했던 두 요소가 두 개의 노선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맑스-레닌-그람시-네그리 노선과 맑스-평의회공산주의-비판이론(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홀로웨이(개방적 맑스주의) 선의 분화이다. 분화는 생산적이며 새로운 공통평면의 발명을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이 문제를 위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에 실려 있는 홀로웨이의 네그리 비판에 대해 네그리가 가한 반비판(이것은 네그리와 꼭꼬의 책, 『글로발』, 조정환 옮김, 갈무리, 근간에 포함되어 있다) 의 요소들을 정리해 둔다.
1.홀로웨이는 현실을 물신주의적 측면에서만 고려한다. 그래서 권력의 모든 형상들을 오직 물신적인 것으로만 간주한다. 이 때 행위의 원리는 거부, 부정으로만 축소되고 제헌권력도 부정된다. 오직 거부만이 혁명의 계기인 것으로 파악된다. 거부의 외부에서, 그리고 피압박자의 '비명' 외부에서는 현실은 완전히 물화된다. 변증법이 승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부정성이 주장된다. 이것은 데리다의 '주변', 아감벤의 '벌거벗은 삶', 물상화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 등과 유사하다.
2. 홀로웨이가 엥겔스적 전통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소비에트 맑스주의 속에서, 변증법의 개념이 사실상 장황한 자연법칙으로 변형되었을 때 이루어진 변증법 개념의 타락을 완전히 파악했지만 그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지 않다. 오페라이스모에서 구성적 역능, 제헌권력은 노동의 가치들에뿐만 아니라
자유의 정치적 형상에까지 관계하는 제헌적 긍정성이다. 홀로웨이는 오페라이스모가 노동력에 귀속시키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계급투쟁에 귀속시키는 그 구성적 역능까지 부정한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착취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실제로 홀로웨이가 사용하는 바의 부정성으로 환원된 맑스주의 변증법은 변증법의 물신주의적 형태이며 그것은 변증법의 모든 요소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물신주의, 즉, 파악하기 불가능한 실재의 비극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다른 면은 절대적 사건으로서의, 즉 대문자로서의 혁명(la Révolution)일 것이다.
4. 홀로웨이는 오뻬라이스모를 기능주의로 비판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기능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회피하고 그것들을 중성화하는 것이며 변증법을 모순들과 차이들의 지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해소적 요소들을 찬미하면서 변증법을 선형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페라이스모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의 작업방식을 생산했다. 오뻬라이스모에서는 변증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노동력의 적대적 압력은 그 모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킨다. 모순들의 이러한 심화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첫 번째 효과는 주체(노동력, 프롤레타리아, 계급, 다중)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이 존재론적 변형의 배치, 계속된 변형 운동을 이 주체적 실재에게 새기는 것에 있다. 첫 번째 효과의 결과인 두 번째 효과는 주체들(노동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들, 다중들)을 자본의 외부로 더욱더 밀치는 것에 있다. 대탈주는 바로 이 과정의 결과이다.
5. 홀로웨이 에게 있어서 자본의 무기인 변증법은 노동력에 대해서는 저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해결될 수 없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내부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이 총체성의 수인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면 해결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한다. 이럴때 혁명은 제헌권력이 아니라 신비한 사건으로 된다. '노동거부' 속에서 '제헌권력'의 요소들이나 배치들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 '해방'의 과정 속에서 '자유화의 요소들'을) 식별할 수 없다고 보면, 생산과정에서 매장자(거부자)가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면 계급투쟁의 역동적인 관점 모두를 금지하게 된다.
6.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역사이다. 다시 말해 제도적 형상 외부에서 계급투쟁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의 제헌적 과정이 결코 결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형상들이나 그 자체의 반복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계급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적인 활력의 (혹은 다중의) 늘 새로운 공재면을 가로질러서, 다시 말해 계급투쟁의 상이한 극성화들을 가로질러서 발전시키고, 절합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7. 이와 연관하여 홀로웨이가 취한 추론의 정치적 퇴행은 혁명과 개혁 사이의 온갖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관계를 그가 발본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주권이 통일된 권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것이 이중성을 (다시 말해 운동과 '통치'의 관계를) 제도들의 성격이자 동시에 근본적 지평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톨리아티의 그람시가 아닌 레닌주의적 그람시는 이미 이 점을 통찰했었다.
8. 홀로웨이의 입장은 코뮤니즘적 대안의 기본적인 유효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란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런데 그 '형식 문제'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물신주의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서는 비판적인 정치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윤리-도덕적 범주로 환원된다. 물신주의가, 달리 말해 존재론적 부패와 그것의 실천적 결과가 계급 주체의 활력 그 자체를 건드리거나 변경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가 존재하면 할수록, 그 부패가 대규모적이고 물리적으로 결정되면 그럴수록 혁명적 과정은 구체적인 개혁들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공상적 꿈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9. 오뻬라이스모(노동자주의)가 존엄한 이유는 혁명 개념을 개혁 개념에 결코 해소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이유는 개혁의 개념을 혁명의 개념 속에 늘 해소시켰기 때문이다.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개혁과 혁명의 이 관계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 외부로의 탈주 속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트적 주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착취를, 계급의 실존 그 자체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0. 우리는 홀로웨이의 정치학을, 삶권력과 삶정치적 활력 사이의 관계를 발전과 민족의 범주 아래에 밀어 넣으려는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제도 좌파의 시도에 대한 최고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은 변증법적 부정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부정성은 단지 "절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 평화, 그리고 코뮤니즘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려는 다중의 욕망이자 필요이기도 하다.
나는 두 입장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크게는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것이 홀로웨이의 입장과 대립한다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실제로는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홀로웨이가 강조한 절규, 그리고 그의 새로운 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에서 강조하는 크랙(crack)의 방법을,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방법을 강력하게 결합할 때 구성의 방법은 약화되기는커녕 훨씬 더 강력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통체』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개혁, 사랑, 행복, 공통성의 혁명적 가능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많이 나아간다. 이것은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절규와 균열내기와 비판의 어조를 깊이 함축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계기가 충분히 강조되지 못할 때, 개혁주의에 동화될 위험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네그리는 제도주의를 한편에 놓고 그 다른 극단에 홀로웨이를 놓음으로써 이중전선에서의 싸움을 수행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정치주의와 탈정치주의의 양극과의 싸움에서 네그리와 홀로웨이, 구성의 입장과 비판의 입장은 상보적 협력자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홀로웨이의 새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는 창조와 건설의 계기를 부정의 계기와 더불어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협력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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