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3---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으로 단결할 것인가?

1.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이론적 논거들을 지젝은 대부분 네그리, 까를로 베르체롤네 등 이탈리아의 비물질노동학파와 연관된 자율주의자들의 연구성과에서부터 가져온다. 물론 그는 단순한 차용에 머물지 않고 그 고유의 전치와 한계부여를 통해 그것을 비판하고 또 넘어서고자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비판과 넘어섬이 과연 정당하고 유효한가 하는 문제이다.

2.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개념(네그리/하트) 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또는 감정적 경험을 초래하는 대상을 팔지 않고 (그리고 사지 않고) 직접 그러한 경험을 파는 (그리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제는 이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는 후기 자본주의 내의 '지적 노동'의 우위(혹은 심지어 주도적 역할)가 노동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의 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주체적 재전유로서의 혁명이라는 맑스의 기본적 구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275)라고 올바르게 정식화된다.

3. 그런데 노동의 비물질화는 지젝에게,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의 형태를 띠는  상품물신주의라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필요성으로 다가간다.(275) 여기서 그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잘못 이해된 관념을 다룬다. 물신주의는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의 노동이 생산물이라는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의 교환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인 상품물신주의를 단순상품생산사회에 고유한 그 무엇으로 전치시키는 논리조작을 통해 맑스(와 네그리)를 비판할 장치를 마련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 마음 대로 다룰 수 있는 인형이나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젝에 맞서 상품물신주의는 맑스의 상품물신주의의 공식이 금융자본의 헤게모니가 뚜렷해진 현대에 와서 더 보편화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질상품의 교환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들 사이의 간접적 사회관계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직접적인 사회관계를 생산하는 비물질상품들조차도 화폐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상품물신주의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4. 물신주의 체제의 이러한 보편화는 착취양식의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는데, 그것이 '이윤에서 rent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잠깐 번역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rent를 한글본 역자는 '세'로 옮기고 있는데 '지대'로 번역해야 옳다. 세는 물건과 건물과 같은 것을 임대하고 받는 사용료로서 대부자본의 잉여수취 형식이다. 그런데 지젝이 이 용어를 가져오고 있는 까를로 베르첼로네를 비롯하여 이윤에서 rent로의 잉여수취 형식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rent를 토지자본의 잉여수취 범주인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의미로 사용한다.1 이 전환은 '지대에서 이윤으로의 전환'이라는 근대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보였고 케인즈주의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던(지대수취 계급의 안락사) 경향의 역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5. 지젝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착취양식의 전환을 사고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일반지성의 사유화'이다. 여기서도 지젝은 맑스가 일반지성의 사회적 차원을 경시했기 때문에 일반지성 자체의 사유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터무니 없는 농단을 하고 있다. 맑스는 당시의 기계류체제/고정자본을 일반지성의 물화형태로 보았는데, 고정자본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을 맑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리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응용이 더욱 일반화되고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개별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이 가치척도로서 기능하지 않게 될 가능성까지도 상상했다. 그럼에도 일반지성의 사유화가 이윤의 지대화 경향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지젝의 차용은 옳다. 그런데 사유화 자체는 지대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생산수단들의 사적 소유는 지대의 원천이 아니라 이윤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적 소유 독점만이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원천이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1)자연에 주어진 것이며 누구의 생산물도 아닌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독점이 2)공업과는 다른 자본구성을 조건으로 3)산업분야간 평균이윤 형성을 저지하는 장치로 작용하면서 토지소유자에게 공업에서의 평균이윤 이상의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곧 지대라는 맑스의 분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맑스가 보지 못한 것(아니 볼 수 없었던 것)은 자연적인 공통된 것으로서의 토지를 넘어서 지대가 발생할 수 있을 가능성이었다. 일반지성, 아니 다중지성의 생산력으로의 전환과 그것의 헤게모니는 인간의 생산능력과 생산과정 전체를 사회화하고 공통화함으로써 착취가 공통적인 것의 착취 이외에는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고 그래서 자본이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에 오늘날 잉여수취 형식으로서 지대 범주의 부활과 일반화라는 현상의 근거가 있다.

6. 그런데 지젝은 맑스의 것이라면서 사실은 그 자신이 위조한 물신주의 개념을 이용하여 바로 공통적인 것의 일반화라는 현상 자체를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으로 몰아부친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이라는, 그가 옳다고 판단하는 주장도 동시에 허구가 될 것이다. 그가 이제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물들가의 [객관적인 시장] 관계가 의사 인격화된 사람들 간의 관계의 환영 같은 형태를 띠는 경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비물질노동화가 생산의 공통화를 가져오고 생산은 곧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네그리/하트의 주장은 바로 이 환영의 덫에 걸린 결과로서의 착시로 된다. 그래서 그는 "그들(하트와 네그리)이 직접적인 삶의 생산으로 칭송하는 것은 이런 유형의 구조적 환상이다"(281)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7. 계속 지젝의 시야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라는 범주이다.  아니, 그는 공산주의 이념이 공통적인 것에 정초한다고 말하고 공통적인 것의 3대형태를 인정한 후에, 끊임없이 그 공통적인 것들의 범주를 의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허구화하고 심리학화(환영화)함으로써 그것을 해체하는 데 열심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의 물화(그 관계가 환영같은 사물들간의 관계라는 형태를 띤다는 사실)은 언제나 일견 정반대되는 과정, 즉 실제로는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인 것의 허위적 인격화('심리화')로 인해 가중된다"(280)고 말할 때 그가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심리학화되고 환영화된 시장관계, 즉 허구에 다름 아니다. 노동의 공통되기, 다중의 공통되기,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중심에서의 부활이라는 현상을 허구/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실제로는 공산주의로부터 모든 유물론적 기초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젝에게는 문제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는 한편에서는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에 정초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신념에 정초했고 전자가 붕괴된다고 해도 후자로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지젝은 공통적인 것을 허구화하는 '시차적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시장관계의 침범하기 어려운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중의 삶정치적 역량을 자본주의적 제도화를 넘는 과잉의 힘으로 사유하는 네그리에 반대하여 지젝은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자체가 생산적 다중의 흐름을 넘어선느 진정한 과잉이며 다중의 생산이 직접적으로 삶을 생산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과잉, 자본이라는 과잉을 생산한다고 말한다.(279) 결국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목적 다중의 끊임없는 분자적 운동에 몰적 구조가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중의 분자적 운동이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그 몰적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이 아니라 자본을 역사의 주인으로 만든다. 역사를 적으로 보면서 공산주의를 신념으로 정의하는 지젝의 주의주의 정치학은 일관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니체적 의미의 노예정신(탓은 주인에게 있다)에 의해 점철되고 있다.

9. 지젝이 일관되고자 했으면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 위에 정초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며(아니면 그것이 나의 '오독'의 효과인가?) 이윤이 지대로 전환된다는 명제를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윤의 지대로의 전환이란 이윤의 자기운동의 착시효과이자 환상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공통적인 것은 없고 사적인 것의 전일적 지배가 있을 뿐이다. 지젝이 대타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 진심이 '공통적인 것은 없다'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말아야 겠다. 그래서 지젝은 노동의 공통되기보다는 노동 내부의 분파화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지적 노동자, 육체노동자, 추방자 등의 세 분파로의 노동의 분화가 그것이다. 지적노동자(보편자)는 계몽된 쾌락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육체노동자(특수자)는 포퓰리즘적 근본주의를, 추방자 분파(개별자)는 더욱 극단적이고 독특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 분파화는 "본래의 사회적 삶, 세 분파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점차적 붕괴"이며 "그러한 상실에 대한 보충물"로서 "온갖 형태의 정체성 정치"(289)의 창궐인데, 대체 지젝에서 '본래적 사회적 삶'이 있기나 했던 것인가? 기원과 그 상실이라는 실락원적 테마로의 이러한 복귀는 대타자는 없다고 단언하는 지젝으로서는 지나치게 일관성이 없는 사고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0.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지젝이 서로 반목하는 이 세부분의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면서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옛 외침이 어느 때보다 적실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공통적인 것을 모두 해체당한 상태의 이 프롤레타리아트, 역사적 과정 자체의 경향에 의해 어떤 단결의 보증도 받을 수 없는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계기로 단결할 수 있을까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도착점을 이미 알고 있다. 말세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공산주의라는 기획된 신념/예견에 따라 선행하는 과거를 창출함으로써 말세의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것. 반역사적 순수 주의주의의 공산주의 모험정신이 치를 예방전쟁에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을 불러모으는 것. 이것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에 기초한 권위주의 정부들에 맞서 지젝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적' 단결의 전략이다. 지젝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라, 돌아오라!'고 호소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살아 있는 감정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이에 대해서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글, '절대지대에서 절대민주주의로'를 참조하라. [Back]
2010/09/02 23:31 2010/09/02 23:31
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2 --신념으로서의 공산주의

11. 그렇다면 그가 굳이 '공산주의'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럴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공산주의의 신념일까?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가 출발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바디우적 의미의) 가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디우란 "공산주의적 가설은 올바른 가설이며 그 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175)고 말한 그 바디우이다.  지젝은 바디우의 이 생각과 더불어  "공산주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그러한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이라는 맑스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그것이 여전히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하지만 양자는 결코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것은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신념으로 설정하지만 맑스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며 지젝이 '그러한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이라는 식으로 대강 인용하고 있지만 맑스는 실제로는 '현존하는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실재적 운동'으로 공산주의를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재적 운동이야말로 실재적 경향의 표현 그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지젝의 앞선 논리와도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맑스와는 달리 지젝은  공산주의를 과학이나 지식에 의해 발견되어야 할 실재적 경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의지적 선택에 의해 정립된 영원한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떻게 공산주의 이념을 계속해서 창출해낼 적대를 정식화할 것인가?"(177)가 중요하게 된다.

12. '공산주의 이념을 창출해 낼 적대'가 주의주의적 자유선택의 산물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지젝은 이제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감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부언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적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으로 인해서 과거들(역사적 현실)이 그 선택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적대를 생산하므로 그렇게 재정렬된 과거를 발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만이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그것을 불가피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선행하는 연쇄를 창조한다"(296)는 말과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그러한 적대를 네 가지로 정식화하는 데, 1)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2)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3)소위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4)새로운 장벽과 빈민간의, 즉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등이 그것이다.

13. 앞의 세 가지는 하트와 네그리가 말한 공통적인 것들, 즉 1)외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3)내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3)문화의 공통적인 것 등에 대한 사유화, 혹은 울타리치기로 인해 발생하는 적대이다. 지젝이 '공산주의라는 관념의 소생이 정당화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해서다'(184)라고 말할 때 확실히 그는 네그리/하트와 공유되는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며 그의 의도를 넘어서 '역사의 실재적 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14. 그렇다면 그는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과 어떻게 관련짓는가? 무엇보다 그는 공통적인 것의 울타리치기와 사유화의 과정에 주목하는데, 이로부터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을 호명한다. 자신의 실체에서 배제되는 자들, 꼬기또가 사라지는 지점으로 영락한 주체들, 잃을 것은 족쇄밖에 없는 주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체들,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는 심하게 조작되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비실대며 모든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추상적 주체, 호모 싸케르, 몫없는 자들....이들이 지젝의 프롤레타리아이다. 우리는 이 프롤레타리아를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울타리치기를 역사적 전제로 형성되지만 울타리치기가 프롤레타리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배제나 박탈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결합되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생산하는 창조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생산수단에서 유리된 존재이고 시장에서는 노동력상품으로 나타나는 존재이며 생산과정에서는 불변자본과 융합되는 가변자본으로 나타나는 존재이며 유통과정에서는 소비자로 나타나는 존재이지만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재생산 전체의 심부에서 자연, 기계, 인간을 생산 속에서 통합하는 주체성이며 역사의 잉여를 생산하는 주체성이다. 그는 족쇄에 묶여 있지만 세계를 창조하는 불이다. 자본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특히 현대에는 이들의 전 지구적이고 전 사회적인 결합노동, 사회적 노동, 공통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공통적인 것 모두를 빼앗을 수는 없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것을 자본이 통째로 뺐는다면 자본은 더 이상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인 바, 자본이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본에게는 안 됐지만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능력 있도록 함으로써만 자본은 사유화와 울타리치기와 사유화와 축적을 계속할 수 있는 역설 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영락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몫없는 자, 호모 사케르, 쓰레기, 모든 것을 잃은자 등)은 일면의 진실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진실이 아니다. 지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좌파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부여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종말론적 서사에 따라 재구성하는 방식의 하나인데, 지젝은 "이것이 종말론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게 살고 있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 가지 과정 각기이 어떻게 종말론적 종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가능한 기계로의 유전자공학적 환원,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 .... 이 모든 차원에서 상황은 제로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자인하고 정당화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186)고 말이다. 멸망의 위협을 급진적인 해방적 재생의 기회로 사고하자고 하는 점은 지젝만의 고유한 주장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말론들의 공유부분이다. 문제는 기회를 어디에서, 어떤 힘에서, 어떤 길에서 찾는가이고 종말론적 인식이 지금껏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여우의 계기를 찾아오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15. 지젝은 "우리가 공산주의자의 이름값을 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종말론적 프롤레타리아화로는 부족하다"(190)고 덧붙인다. 그 부족함이 무엇일까? 그것은 네 번째 적대인 프롤레타리아 대 비프롤레타이아의 적대(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적대)를 앞의 세 가지 적대에 우선하며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적대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적대야말로 앞의 세 적대에 전복적 효력을 부여하는 그 적대이다.  이 적대는 생존의 문제라기보다 정의의 문제며 행위자에게서 실체적 내용을 박탈하는 것이라기보다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일정 인물들을 배제한다는 형식적 사실을 뜻한다. 이제 문제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에서 어느 쪽이 다른 세 가지 적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인가?(197)로 된다. 지젝은 여기에서 위에서 실체를 빼앗겨 영락한 주체로 정의된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적 질서 안에 딱히 정해진 자리가 없는 연유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사회집단'(198)으로 재정의한다. 이 몫이 없는 부분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지젝이 할당한 보편성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좌파지식인들에게 그가 할당한 보편성과 결합함으로써 진정으로 해방적인 정치를 열 수 있다(199)고 지젝은 말한다. 전위와 대중의 이분법을 다시 재생산하는 듯한, 모호하기 그지 없는 이 정식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정의하는 곳(205)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서술된다. 그것은  배제된 자들을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이 정치공간과 정치적 조직형태를 배제된 자들에 맞도록 재조직하는 것이다. 배제된 자를 기존 틀에 포함하는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비해 배제된 자에 맞게 정치공간을 재조직하는 것(지젝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은 분명히 진일보한 측면을 갖지만, 여전히 배제된 자는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의 시혜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이것은 몫 없는 자들의 평등요구라는 랑시에르의 평등정치학에 비해서도 약한 해방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않은가?

16. 계속 문제가 되는 것은 배제와 배제된 자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지젝은 20 대 80의 사회에서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정의한다.(206) 여기서 지젝은 '능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이라는 푸코의 관념이 배제 자체가 포함의 양식으로 되는 비가시적 존재, 고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존재(혹은 배제의 자리가 고유한 자리인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바디우)를 다룰 수 없다는 이유로 부적당하다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적 적대 속에서 획득하는 능력들에 대한 탐구를 애써 기피하고 해방정치의 문제를 배제된 자, 무력한 자, 무의미한 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위에 정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잉여로서의 노동자, 쓸모 없고 무가치하게 된 모든 자들로서 사유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재통합이라는 공산주의 기획/가설은 프롤레타리아를 공통적인 것의 물적 담지자로 파악할 수 없는 한에서 공통적인것과 하등 상관이 없는 이념이자 신념이 된다. 이 논리적 자기모순이야말로 그가 지도자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서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인 좌파지식인을 공산주의의 고유한 주체성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배경,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잔재로 파악하면서 그것과 역사의 가장 진보한 측면(이 단어는 틀림 없이 반공주의적 전력을 가진 순수한 좌파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의 직접적 단락이 문제라고 말하게 되는 배경이 아닐까?

16. 지젝의 공적 이성-프롤레타리아 단락론은 사회주의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테마의 변주임이 분명하다. 이 변주는 "헤겔과 아이띠"의 단락이야말로 공산주의의 가장 간결한 정식(222)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좌파지식인에 대한, 아이띠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은유이다.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지젝의 프롤레타리아관이다. 최초의 성공한 노예반란으로 평가되는 아이띠의 사례에서 지젝이 읽은 것은 몫이 없는 자들의 독특한 보편성, '라 마르셰예즈를 부르고 있는' 아이띠 반란자들이다. 여기서 지젝은 능동화한 반란자들의 형상, 보편성의 운동을 제시한다. 나는 몫 없는 자들의 '보편성'의 잠재력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젝과는 달리 그 보편성은 몫이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주어진다기보다 (분배와 소유에서의 사적 제약들, 불평등들에소 불구하고) 삶과정에서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관계에서 그 보편성의 요구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살아 간다는 것은 보편적 교류와 소통의 필요성을, 모든 사람들의 공통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바디우를 따라 공산주의를 끈질기게 존속하며 때때로 폭발하는 영원한 이념으로 정의한다.(254) 그렇다 공산주의는 영원한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탈과 배제를 근거로 삼는 영원한 이념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삶과 생명의 진화의 영원성과 그 실재성에 근거하는 영원한 이념이다.

17.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것이 아이띠든 파리코뮌이든 러시아혁명이든 1968혁명이든 지금까지의 모든 공산주의적 폭발을 흡수하는 데 성공해 왔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것을 넘어서는 과잉을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대놓고 자신의 추동력으로 정립해 왔다. 끊임없는 자기혁명화, 끊임없는 한계 극복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한다.(252) 그래서 끊임없는 역전, 위기, 재발명을 동반하면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정상적 삶이며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5) 이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이다. 그렇다면  반역과 그것의 자본주의 속으로의 재기입이라는 순환을 깨뜨릴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지젝은 이 역사적 순환을 악순환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진보가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며 역사를 적으로 하나의 악몽으로 간주하는 관점의 표현이다. 그래서 지젝은 사건적 폭발에 정상성으로의 귀환이 뒤따르는 패턴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역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강제하는 데로 뻔뻔스럽게 이행해야 한다"(259)고 주장한다. 그는 "적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영구한 자기혁명화의 흐름"(259) 자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국가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두 가지 공리를 제안한다. 첫번째 공리는 공산주의적 국가-당 정치의 실패는 무엇보다 반국가적 정치의 실패로서 국가적 조직형태를 자기조직화의 직접적, 비대의적 형태의 평의회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 위에서 그는 두번째 공리로 진정한 과제는 국가에 거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259) 국가를 변형하고 그것의 기능이나 토대에 대한 그것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국가를 민중참여의 새로운 형식들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면 그것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과제인가?

18. 첫 번째 공리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젝에게 정말로 국가를 평의회로 대체하려는 실험이, 그것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 속에서 진지하게 시도된 적이 있는가? 물어야 한다. 오히려 역사에서 문제는 평의회를 봉기의 기관으로서만 사고할 뿐 권력기관으로는 사고하지 않았던 전위들의 뿌리깊은 대중불신이 국가에 대한 억압, 해체, 파괴가 아니라 평의회에 대한 억압, 해체, 파괴를 가져오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것으로 작동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공리와 관련하여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지젝의 서술들이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자신에게서 찾기보다 반역사적 순수주의주의를 따르는 좌파지식인에게서 찾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프롤레타리아를 존재론적 공통되기의 계급이 아니라 배제되고 영락한 존재, 즉 호모사케르나 쓰레기로 된 몫 없는 부분으로 간주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직접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는 없을 것이고 실제로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 공통체 구축을 역사적 실패로 단정하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능전환은 결국 좌파지식인들의 몫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생각은 또 하나의 대의주의로 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대의주의 비판이 그것을 부정하지만, 그보다 좌파지식인은 지젝에게서 이성을 공적으로/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 주체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대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집단은  민중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1)평등주의적 정의 2)처벌적 테러 3)정치적 주의주의(250)를 실행하는 것으로 국가의 그러한 기능전환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 그 기능전환의 양식이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젝은 의회민주주의를 민중의지를 수동화하고 의지를 비의욕으로 변화시키는 정치형식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268) 이미 자유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경쟁하는 당들이 정치를 조직하는 형식 자체를 통해 특정한 가치와 실천들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다중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키는 형식이다.

20. 대의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이 유럽적 정치실천의 형식이 최근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다양한 유형의 권위주의 정치(중국의 후진타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러시아의 푸띤 등)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면서 지젝은 그 답지 않게 "현시대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에 이러한 부활의 내적 필요성이 있다"는 식의 유물론적 분석방법에 의지한다. 이 문제에 대한 지젝의 응답은 좀더 자세히,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논점을 제시한다.



2010/09/02 10:00 2010/09/02 10:00
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1---반역사적 주의주의

1. 21세기의 첫 십년의 교훈을 정리하는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작과비평, 2010)에서 지젝은 '다시 공산주의communism다!'라는 슬로건을 꺼내든다. 네그리와 가타리는 이미 1983년에 '코뮤니즘communism을 오늘날의 악평에서 구출하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바 있다. 1990년대에 가라타니 고진도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선 바 있고 알랭 바디우도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는 시기가 바로 공산주의/코뮤니즘를 본격적인 화두로 등장시킨 시기였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제 우리는 '문제는 공산주의communism다!'라고 하는 것이 적실한 시대, 이 말이 결코 농담이나 헛소리로 들리지 않는, 뭔가 진지한 내용을 담은 말로 들리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기 시작했다.

 2. 1930년대에 '문제가 리얼리즘이다'라는 명제가 '어떤 리얼리즘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타났듯이, '문제는 공산주의다!' 라는 것은 '어떤 공산주의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지젝은 위 책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공산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그것의 문제의식 상당부분을 수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념과는 매우 상이한, 그리고 그들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공산주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공산주의가 어떤 공산주의인지를, 다시 말해 그것이 누구의 공산주의인지,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인지, 무엇을 가능케 하는 공산주의인지 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3. 지젝의 호소는 이렇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라, 돌아오라! 그대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반공산주의적 놀이를 즐겼고, 그에 대해 용서함을 받았다 --이제는 다시 진지해질 때다!'(308) 여기서 그대는 누구이구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새로운 끄랩쩬꼬들, 20세기 공산주의에 실망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공산주의를 재발명할 준비가 된 사람들(307)이다. 그리고 그대는 아직 공산주의를 재발명할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럴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지젝이 생각하는 반공산주의 좌파들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라는 희극적 사건은 이들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가망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역경을 뚫고 행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자극하는 사건이다.

4. 지젝은 명시적으로 (미국, 인도, 중국, 일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서유럽, 동유럽 등지에서 출현하여 서로 이질적이며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지만 결코 적은 수는 아닌 이들) 반공산주의 좌파들의 공산주의로의 재결집(다시!)을 호소하는 책이다. 공산주의로 재결집하는 반공산주의 좌파, 그러나 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향수도 지니지 않은 좌파가 그러므로 지젝의 공산주의의 주체성이다. 그래서 지젝은 말한다: "오랜 갈망의 대상인 급진적 사회변혁을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행위자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리는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단 하나의 올바른 답변이 있다. 그것은 호피족의 옛 속담인데 거기에는 실체에서 주체로의 멋진 헤겔적 뒤틀림이 있다--'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302)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을 주체로 불러내는 것, 그들에게 기다려야 할 대타자는 없음을 각성케하고 그들을 비활동성의 늪에서 구출하여 파국과 종말을 향해 치닫는 세계를 구출하는 행위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지젝의 공산주의 전략이다.

5. 대타자가 없다는 말은 지젝에게서 보편적 해방이라는 예정된 과업을 완수할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타자는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곧바로 역사로 직행한다. 대타자가 없다는 말이, 역사는 우리(이 '우리'가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편에 있지 않다는 말로 전치되기 때문이다.(303) 그리고 연이어 지젝은 '없다'을 '적대적이다'로 바꾼다. 그래서 지젝은 이제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는 고전 맑스주의의 믿음과 달리 현시대의 형세를 보면 대타자는 우리에게 적대적이다"(303)라고 말하게 된다. 처음에 대타자는 해방자 프롤레타리아와 동일시되고 다음에 그것은 다시 역사와 동일시된다. 역사는 지젝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적대적이다. 존재하지 않는 적대적인 것, 이것이 이데올로기란 말의 고유한 내용이 아닐까? 지젝에게서 역사는 이데올로기이며 환상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기관차를 멈춰 세우는 것을 혁명으로 파악한 벤야민의 은유를 받아들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관차를 멈춰 세우는 그 행위는 (벤야민에서와는 달리) 과거의 모든 셈을 청산하는 상징적 최후 심판에 관한 어떤 기대도 포함하지 않는 말세론적 종말론에 입각한다. 역사의 진보라는 기차가 환상열차(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가 환상이고 마야(Maya)이다. 이것은 부처가 해탈의 논리를 정초하는 인식론적 토대이며 벤야민이 각성의 모티브를 설치하는 장소이다.

6. 맑스도 상품물신성의 세계를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로 파악했지만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실재가 화폐매개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현상형식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맑스에게 역사는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인 현상형태를 취한다 할지라도 실재적인 것이지 결코 환상적인 것이 아니다. 대타자가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 지젝의 추론은 명확히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과는 대립하며 그것과 적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역사를 비존재적 적대자로 설정하는 것이 그 첫 발걸음으로서의 반역사주의라면 '역사적 필연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내기를 거는 것, 그가 '순수한 주의주의'라고 명명한 것이 그것의 두번째 발걸음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 반역사적 주의주의 사이를 가르는 심연이 맑스와 지젝 사이에 놓여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7. 순수한 반역사적 주의주의가 '대타자는 없다'를 역사는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적대적인 것으로서만 있다고 해석할 때, 이 해석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근거하는 것이다(295). 장 삐에르 뒤삐의 '기획의 시간' 개념으로부터 지젝은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그것을 불가피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선행하는 연쇄를 창조한다. (...)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우리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다."(297)는 생각을 이끌어낸다. 얼핏보면 이것은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간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맑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오직 미래로부터만 이룰 수 있다고, 이전의 혁명들은 자기 자신의 내용에 관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세계사를 회상할 필요가 있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떨쳐 버려야만 스스로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미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루이 보나빠르뜨 브뤼메르 18일」의 생각이 맑스에게서 '실재적 경향'(아마 지젝이 역사적 진보의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304쪽 참조)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개개인의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론』을 비롯한 맑스의 다른 저작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8. 역사 속에서의 실재적 경향에 대한 탐구를 환상으로 치부하면서 자유의지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지젝의 주의주의에서 자유론은
파국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끝장나게 되어 있다는 것, 파국이 일어나리라는 것, 파국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297). 그런데 파국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파국이 실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파국의 가능성들에 대한 따져봄은 의미가 없다. 내가 보기에 지젝에게서 파국이 결정된 운명인 것은 그것이 선택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어떤 실재적 결정조건들을 갖지 않는 환상이듯이 파국을 결정하는 어떤 실재적 조건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파국은 주체가 선택하는 자유의지적 운명이다. 다시 말해 '나는 세계가 파국에 이를 것(미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만 세계가 파국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게 할 행위를 지금(미래의 과거) 할 수 있다'는 사유 매트릭스에 입각한 파국의 운명이다. 이런 방식으로 파국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변화시킬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그 받아들임과 선택 및 그에 입각한 행위가 또 하나의 꿈, 꿈 속의 꿈이 아니라고 누가 어떻게 밝혀줄 수 있겠는가?

9. 이러한 도전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지젝은 '참된 행위가 의존하는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298)라고 미리 말해 버린다. 맑스의 공산주의자되기는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는 실천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을 수반했다. 그것은 포이에르바하 테제 1에서 제시된 바의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것이 잊혀져 가는 속도에 저항하기 위해 한 번 다시 인용해 보자.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젝에게서는 대상, 현실, 감성이 사라진다. 그것에 대한 관조도 사라진다. 감성적 객체도 사라지고 대상적 활동도 사라지며 혁명적인 실천적 비판적 활동도 사라진다. 유물론은 철처히 짓밟히며 참된 정치적 행위의 유일한 토대는 개개인의 신념으로 된다. 세계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는 것도 신념이며 지금 세계를 파국에 이를 조건들을 변경시키 그것을 파국에서 구출하겠다는 것도 신념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지젝에게서는 신념이 행위의 진리(확실성)를 보장하기 때문에,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네오콘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사용되는 예방행동론(선제공격론)의 발상을 과감하게 복원할 것을 요구한다.(298) 나는 오래 전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에 나타난 문화정치학이 테러리즘에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바 있는데1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 경향을 순수한 반역사적 주의주의라는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안정화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10. 지젝의 주의주의는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온 주지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침식, 즉 플라톤적 철인왕의 포기,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로서의 지도자에 대한 거부, 지식과 주인의 격리 등을 넘어서 '창조적 실험을 위한 집단적[전혀 필연적인 말이 아니다-인용자] 의지'와 '자신의 법칙과 객관적 경향(앞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환상의 법칙이요 환상의 경향일 것이며 실제로는 의지가 선택하는 법칙이요 경향일 것이다)을 지닌 역사'를 대립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그는, 전자의 풍차를 향해 후자의 돈끼호테가 돌진하도록 요구하는 정치학을,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론으로 제시하게 된다.






2010/09/02 06:40 2010/09/02 06:40
국가를 상품commodity유통이 아니라 코몬common유통의 기관으로 만들기

출현하는 코뮤니즘, 도래하는 공동체를 사유하면서 마이클 하트(Politics of Common1)가 공통적인 것을 두 수준으로 나누고 그 두 수준의 공통적인 것의 상충과 소통을 고찰했음에 반해 닉 위데포드는 2006년에 쓴 Circulation of Commons2에서 공통적인 것을 세 수준으로 나누고 그것들의 복합과 혼성을 고찰한다.
Marx deemed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to be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His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raced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which commands the acquisition of further resources to be transformed into more commodities. The theorists of autonomist Marxism demonstrated how this circulation of capital i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meeting resistances at every point. But although this concept proved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multiplicity of contemporary anti-capital, it says very little about the kind of society towards which these struggles move, a point on which the autonomist tradition has mainly been mute. Today, new theorizations about multitude and biopolitics should to reconsider this silence. I suggest that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good produced to be shared in association. The circuit of the common traces how shared resources generate forms of social cooperation—associations-- that coordinate the conversion of further resources into expanded commons. On the basis of the circuit of capital, Marx identified different kind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unfolding at different historical moments yet together contributing to an overall societal subsumption. By analogy, we should recognise differing moments i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These include terrestrial commons (the customary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in traditional societies); planner commons (for example, command socialism and the liberal democratic welfare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free associations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the numerous other socializations of technoscience).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unity of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but the commanding point in its contemporary, neoliberal, phase is financial capital.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again by analogy,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but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These must however, also be seen in their dependency on, and even potential contradiction, with the other commons sectors. The concept of a complex, composite communism based on the circulation between multiple but commons forms is opens possibilities for new combinations of convivial custom, planetary planning and autonomous association.(강조는 모두 Amelano의 것)
닉 위데포드가 말하는 terestrial commons는 마이클 하트가 말하는 ecological commons와, networked commons는 socio-economic commons와 상응한다. 차이는 planner commons이라는 개념이 마이클 하트에게는 없고 닉 위데포드에게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세 가지 코몬 중에서 네트워크코몬이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전통적 사회주의 관점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다.)3 그는 그 예를 사회주의 국가나 복지국가에서 찾고 있다.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를 코몬의 형식으로(commons forms)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왜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견해를 조금 더 들어보자.

Primitive communism (so called), based on a terrestrial commons that involves the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such as land, game, firewood and water, on the basis of associations shaped by custom. In so  far(far는 Amelano에 의한 삽입) as these associations take as their foundation the apparently given quality of natural resources, we can say they proceed from Commons to Association (C-A). In contrast, various forms of planner commons emerged as radical project for the public ownership and state management in the factories and urban conurbation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sofar as these centered on the marshalling of new industrial capacities of production into forms of collectivity, they proceeded from Production to Commons (P-C). The main examples are the command economies of authoritarian socialism and the welfare state of liberal capitalism, bit there are also the important minoritarian traditions of the cooperative and self-management movements. Finally, a networked commons proceeds on the basis of social communicative capacities, from language on up, that enable Associative practices to occur. So the movement here is from A-C. Today we are seeing an explosion of new developments in this sub-circuit, including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other socializations of labor intrinsic to high technoscience, which we will discuss further in the next section.
여기서 우리는, 닉 위데포드가, 공적 소유와 국가관리가 새로운 산업능력을 집단성의 형식으로 정렬하는 한에서 그것은 생산에서 코몬으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공통도시』(갈무리, 2010)에서 내가 20세기의 역사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로 파악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역시도 사회(민주)주의의 부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전 지구적 확산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을 때, 즉 국가와 제국이 수행하는 집단화의 효과를 중심으로 역사를 고찰했을 때의 관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와 제국의 모순적 기능, 이중기능이라는 현상에 직면한다. 한편에서 그것은 민중과 다중을 착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사람들을 더 크고 깊은 어소시에이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부터도 구분해 오지 않았던가? 분명히 국가형태 속에서 정립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사적인 것도 아니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복합체요 긴장이다. 국가가 계급투쟁의 장이 되는 것은 이 이중성과 복합성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국가를 사유화하려는 계급들의 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를 공통화하려는 계급들의 투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를 직접적으로 코몬의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코몬의 형식으로 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는 코몬은 아니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그것은 코몬이다.

위데포드는 산업자본과 계획자 코몬을 상인자본의 지구생물적 코몬에 대한 공세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소통산업과 연결된 금융자본의 등장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Like the different types of capital, these different forms of commons have blossomed or blazed at distinct historical epochs. Indeed, the varying forms of capital and commons should be seen as each summoning each other, or provoking one another into being. Thus terrestrial commons were attacked by the forces of mercantile capital, which in doing so lay the basis for the industrial capitalism to which the planner commons was a response. The temporary success of these largely state based commons was then undermined by the fluid mobility of finance capital, whose appearance is however, inextricably tied up with the development of a means of communication—the Internet—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mergence of networked commons. The concept of the cycle of struggles can be re-written as the story of this antagonistic spiral, betwee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nd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나는 상인자본이 생태코몬에 대한 착취형식인과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자본과 계획자국가도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코몬에 대한 착취형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 측면에서 보면 계획자 국가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 혹은 정당 조직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코몬들에 대한 흡수장치로서 등장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닉 위데포드는 계획자 국가를 그 직접적 형식에서 코몬형식으로 간주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서술들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투쟁의 순환 개념이 자본유통과 코몬유통의 적대적 나선의 서사로 다시 씌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한 것이며 오늘날 자율주의 이론의 중요한 진전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10년에 닉 위데포드는 같은 제목의 글4에서 자신의 2006년 주장에 일정한 비판적 수정을 가한다. 그 수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국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다. 그 변화의 지점들을 살펴보자.

There is one other factor which Marx did not explicitly include in his map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but which I think today we must include. At the centre of the circuit of capital, like hub connected by spokes to a wheel, is the state apparatus. It protects private property and defends it with coercive force; provides the judicial framework for the sale of labour power, in communication the intellectual property laws, and, has we have seen recently, when the  circuit fails steps in promptly to the rescue . . .

여기서 닉 위데포드는 국가기구가 강제력으로 사유재산을 지키며, 노동력 판매를 위한 사법적 틀을 제공하고 소통에 지적재산권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2006년 글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요소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대의 코몬운동에서 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정치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사례를 발견한다.

Where one can see elements of this type of project in action is in some of the ‘solidarity economics’ of the Latin American left, in Brazil but also in Venezuela, Ecuador, El Salvador. Here we see models of social change that works on the basis of a ‘quilt’ or ‘patchwork’ of decommodified activity includes interaction between central state planning and a decentralized network of worker cooperatives, self-management projects, nuclei of development, and so on. In the work of solidarity economists such as Euclides Mance, the units of these networks are conceived not just as individually following principles of social and environmental justice, but as providing inputs for each other, to create an autopoeitic, self-boosting system whose logic is similar to that outlined here. What is being increasingly thrown into the mix in Venezuela, Brazil is now publically sponsored use of open source systems—networked commons. So the recipes are being tested.

집권적 국가계획이 노동자 협동체의 탈집권적 네트워크와 상호작용하면서 탈상품화 활동의 퀼트나 쪽모이의 기초를 제공하는 사회변화의 모델을 그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쿠아도르, 엘 살바도르에서 찾는다. 이것은 바로 안또니오 네그리의 『글로발』(GlobAL)(갈무리, 근간예정)의 주제(그것은 정부government와 운동movement의 협정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며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에서 제시했던 '마그나카르타적 계기'(군주에 대항하는 다중과 귀족의 협정론)의 실례이다. 2010년에 위데포드는 다시 한 번 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강조한다.

It is worth emphasizing (if only to excite some controversy)  that in this map of circulating commons the state apparatus has a place, an important place. I mentioned at the beginning that one of the important things about commons for the movement of movements was that it provided a non-statist model of social change, thereby freed it from the historical shadow of authoritarianism.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dodge the issue of the state.

위데포드는 운동들의 운동을 위한 코몬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의 비국가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권위주의의 역사적 그림자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점에서 2006년에서의 일정한 변화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국가 문제를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제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 즉 비국가적 모델를 추구하면서 국가를 회피하지는 않는 길이 무엇인가로 된다. 위데포드의 제안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사빠띠스따와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사례들을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실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국가와 코몬제도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협력체들의 파종으로 파악한다. 국가가 상품유통의 기계가 아니라 코몬유통의 기계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운동의 한 활동영역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도달하는 지점이다.

Zizek is correct when he says the true task is neither to take over the state, nor to smash the state, but to “make the state itself work in a non-statal mode”—as a machine for incubating and growing commons. For that reason I have recently started, provocatively, to talk not so much of commonism or commonwealth but about biocommunism. Commons projects are projects of planning; regulation of carbon emissions (or other ecological pollutants); the distribution of a basic income (or of public health or education) programs, the establishment of networked infrastructures are extremely difficult of any large scale without the exercise of governmental power. To speak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also to think both how large scale molar governmental planning creates the conditions for autonomous projects—by funding coops or adopting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standards-- and, in turn, how these autonomous molecular units in turn guaranteed innovation, variegated input and dissent against the dangers of bureaucratization, rigidity, and sectional interest.

여기서 나는, 국가가 비국가적 양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즉 국가가 상품유통을 보장하는 기관이 아니라 코몬 유통의 기관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국가형태는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집중기관이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코몬 유통의 기관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네트워크 코몬의 전략적 중심성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네트워크 코몬의 전략적 중심성이 약화될 경우, 국가는 네트워크 코몬의 힘을 흡혈하는 기관으로 순식간에 돌변할 것이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네트워크 코몬의 양육과 확산을 통해서만 국가가 비국가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국가형태의 해소, 비국가적=공통적 사회변화의 길이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1. http://www.zcommunications.org/politics-of-the-common-by-michael-hardt. 이 글의 요약은 [Back]
  2. http://www.fims.uwo.ca/people/faculty/dyerwitheford/Commons2006.pdf [Back]
  3. "while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should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of immaterial labor." [Back]
  4. http://www.globalproject.info/it/in_movimento/Nick-Dyer-Witheford-the-Circulation-of-the-Common/4797 [Back]
2010/08/28 13:24 2010/08/28 13:24
4대강 사업에 대한 10가지 테제

1.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주요한 정치적 쟁점은 과학논쟁과 맞물리고 있다. 광우병, 천안함, 4대강 모두가 전문적인 과학논쟁을 수반하면서 정치쟁점화되었다. 이는 한편에서는 현대 정치가 지략화하고 있는 것의 효과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중들의 지성화의 효과이다. 계급투쟁은 과거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지성투쟁의 성격을 띤다.

2.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논쟁이 비생산적인 것으로 되고 줄줄이 꼬이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이 1)홍수를 막고 2)물부족을 해소하며 3)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핵심인 4대강 내 16개의 보건설과 대규모 준설은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홍수빈발지역, 물부족지역은 4대강 사업 대상 외부에 더 많이 위치해 있으며 보건설과 준설이 수질을 개선하기보다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3. 4대강 사업을 둘러싼 갈등은 광우병, 천안함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 때문에 심화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업에 반대하거나 아직 유보적인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보건설과 준설에 박차를 가했고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일방주의는 겉으로 보면 그 주체의 힘의 표현으로 보인다. 밀어부칠 힘이 있기 때문에 일방적일 수 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일방주의는 그 주체의 무력과 위기의 표현이라는 것, 통제불가능성이 표현되는 방식이 일방주의라는 것은 부시 정부와 그것의 금융위기를 통한 붕괴를 통해 입증되었다.

4. 그렇다면 왜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명운을 걸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것일까?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추론의 영역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4대강은 한반도 대운하의 전단계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고 실제로 현재의 사업방식은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비롯 영산강과 새만금을 잇는 '호남운하' 및 '새만금 운하', 금강을 중심으로 지천을 잇는 '충청운하' 등 남한의 12개 노선 2,100여km, 그리고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잇는 '평개운하',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운하' 등 5개 노선 1,000여km를 통칭하는 것이었다. 인수위 시절에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경제가치를 강조했다. 1)예상되는 물류 문제 해결 2)고용창출 3)관광산업 발전 4)전력생산 5)골재수급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개발논리에 속한다.

5. 이명박 정부가 이 개발논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게 된 것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생명논리의 도전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겪은 상처로 인해, '한반도 대운하' 구상은 4대강 '살리기'라는 생명논리로 재명명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개발주의적 몸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생명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사업을 4대강 '죽이기'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6. 경제적 가치생산이라는 개발논리가 홍수, 물부족해소, 수질개선이라는 생명논리의 탈을 쓰고서야 겨우 행진할 수 있도록 억눌리게 만든 것은 촛불봉기다. 국민이 원치 않는다면 대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끊임없이 두더지 정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의 앞날이 밝지 않은 것은 이명박 정부의 입장이 이처럼 난처하고 표리부동하며 공명정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 홍수는 막아야 하며 물부족은 해소되어야 하고 수질은 개선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이다. 이것은 반대입장에서 말하는 환경과 생태의 보존과 상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상충하지 않는 것이 상충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논리와 실제 사이의 엄청난 괴리이다. 현정부가 말로는 생명논리를 펼치면서 행동으로는 경제적 개발논리에 따라 4대강 사업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따로 행동따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행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4대강 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하며 사회적 토론에 회부되어야 한다.

8. 그러나 반대논리의 일부에도 맹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생태를, 인공과 자연을 대립시킬 때에 나타난다. 인간 일반을 잠재적 환경파괴자로 몰고 갈 때이다. 이것은 개발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대를  강화시킨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 그 외부에 있지 않다. 지나친 생태론은  극단적 개발논리와 똑 같이 인간과 자연, 사람과 강의 대립관계를 받아들인다. 이 대립관계에서, 생태론은 자연/강을, 개발론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9.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통성을 이해하고 공통되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 풍요로울 때에 더 풍요로울 수 있는 존재이고 자연 역시 인간의 풍요 위에서 더 풍요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통되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인간들 사이의 적대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소수의 인간이 다수의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계를 극단화하고 있다. 인간의 생산과 재생산에서의 공통관계는 전 지구적 수준에서 더욱 확장되고 또 심화되고 있는데 그 성과를 전유하고 소유하며 그 관계를 통제하는 차원에서는 사적인 적대관계가 전 지구적 수준에서 더욱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 적대관계로 인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도 심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 문제의 해결과 생태적 공통관계의 확립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대관계의 해결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과제로 되고 있다.

10. 이것은 결코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1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사회적 적대에 기초한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을 원형으로 삼고 그 적대의 조절을 꾀하려 한다. 이것은 나쁜 효과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문제해결을 유예하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통관계를 확립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적대를 해소하는 공통되기의 운동, 즉 생태적 공통체와 사회적 공통체를 관리하는 정치적 공통되기로서의 코뮤니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과제는 현재의 대의주의적 권력체제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다.
  1. 박창근은 「4대강 사업 어디로 가는가」(『창작과 비평』 2010, 가을)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Back]
2010/08/27 07:51 2010/08/27 0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