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이론적 논거들을 지젝은 대부분 네그리, 까를로 베르체롤네 등 이탈리아의 비물질노동학파와 연관된 자율주의자들의 연구성과에서부터 가져온다. 물론 그는 단순한 차용에 머물지 않고 그 고유의 전치와 한계부여를 통해 그것을 비판하고 또 넘어서고자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비판과 넘어섬이 과연 정당하고 유효한가 하는 문제이다.
2.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개념(네그리/하트) 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또는 감정적 경험을 초래하는 대상을 팔지 않고 (그리고 사지 않고) 직접 그러한 경험을 파는 (그리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제는 이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는 후기 자본주의 내의 '지적 노동'의 우위(혹은 심지어 주도적 역할)가 노동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의 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주체적 재전유로서의 혁명이라는 맑스의 기본적 구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275)라고 올바르게 정식화된다.
3. 그런데 노동의 비물질화는 지젝에게,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의 형태를 띠는 상품물신주의라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필요성으로 다가간다.(275) 여기서 그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잘못 이해된 관념을 다룬다. 물신주의는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의 노동이 생산물이라는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의 교환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인 상품물신주의를 단순상품생산사회에 고유한 그 무엇으로 전치시키는 논리조작을 통해 맑스(와 네그리)를 비판할 장치를 마련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 마음 대로 다룰 수 있는 인형이나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젝에 맞서 상품물신주의는 맑스의 상품물신주의의 공식이 금융자본의 헤게모니가 뚜렷해진 현대에 와서 더 보편화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질상품의 교환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들 사이의 간접적 사회관계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직접적인 사회관계를 생산하는 비물질상품들조차도 화폐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상품물신주의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4. 물신주의 체제의 이러한 보편화는 착취양식의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는데, 그것이 '이윤에서 rent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잠깐 번역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rent를 한글본 역자는 '세'로 옮기고 있는데 '지대'로 번역해야 옳다. 세는 물건과 건물과 같은 것을 임대하고 받는 사용료로서 대부자본의 잉여수취 형식이다. 그런데 지젝이 이 용어를 가져오고 있는 까를로 베르첼로네를 비롯하여 이윤에서 rent로의 잉여수취 형식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rent를 토지자본의 잉여수취 범주인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의미로 사용한다.1 이 전환은 '지대에서 이윤으로의 전환'이라는 근대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보였고 케인즈주의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던(지대수취 계급의 안락사) 경향의 역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5. 지젝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착취양식의 전환을 사고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일반지성의 사유화'이다. 여기서도 지젝은 맑스가 일반지성의 사회적 차원을 경시했기 때문에 일반지성 자체의 사유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터무니 없는 농단을 하고 있다. 맑스는 당시의 기계류체제/고정자본을 일반지성의 물화형태로 보았는데, 고정자본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을 맑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리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응용이 더욱 일반화되고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개별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이 가치척도로서 기능하지 않게 될 가능성까지도 상상했다. 그럼에도 일반지성의 사유화가 이윤의 지대화 경향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지젝의 차용은 옳다. 그런데 사유화 자체는 지대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생산수단들의 사적 소유는 지대의 원천이 아니라 이윤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적 소유 독점만이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원천이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1)자연에 주어진 것이며 누구의 생산물도 아닌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독점이 2)공업과는 다른 자본구성을 조건으로 3)산업분야간 평균이윤 형성을 저지하는 장치로 작용하면서 토지소유자에게 공업에서의 평균이윤 이상의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곧 지대라는 맑스의 분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맑스가 보지 못한 것(아니 볼 수 없었던 것)은 자연적인 공통된 것으로서의 토지를 넘어서 지대가 발생할 수 있을 가능성이었다. 일반지성, 아니 다중지성의 생산력으로의 전환과 그것의 헤게모니는 인간의 생산능력과 생산과정 전체를 사회화하고 공통화함으로써 착취가 공통적인 것의 착취 이외에는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고 그래서 자본이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에 오늘날 잉여수취 형식으로서 지대 범주의 부활과 일반화라는 현상의 근거가 있다.
6. 그런데 지젝은 맑스의 것이라면서 사실은 그 자신이 위조한 물신주의 개념을 이용하여 바로 공통적인 것의 일반화라는 현상 자체를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으로 몰아부친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이라는, 그가 옳다고 판단하는 주장도 동시에 허구가 될 것이다. 그가 이제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물들가의 [객관적인 시장] 관계가 의사 인격화된 사람들 간의 관계의 환영 같은 형태를 띠는 경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비물질노동화가 생산의 공통화를 가져오고 생산은 곧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네그리/하트의 주장은 바로 이 환영의 덫에 걸린 결과로서의 착시로 된다. 그래서 그는 "그들(하트와 네그리)이 직접적인 삶의 생산으로 칭송하는 것은 이런 유형의 구조적 환상이다"(281)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7. 계속 지젝의 시야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라는 범주이다. 아니, 그는 공산주의 이념이 공통적인 것에 정초한다고 말하고 공통적인 것의 3대형태를 인정한 후에, 끊임없이 그 공통적인 것들의 범주를 의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허구화하고 심리학화(환영화)함으로써 그것을 해체하는 데 열심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의 물화(그 관계가 환영같은 사물들간의 관계라는 형태를 띤다는 사실)은 언제나 일견 정반대되는 과정, 즉 실제로는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인 것의 허위적 인격화('심리화')로 인해 가중된다"(280)고 말할 때 그가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심리학화되고 환영화된 시장관계, 즉 허구에 다름 아니다. 노동의 공통되기, 다중의 공통되기,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중심에서의 부활이라는 현상을 허구/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실제로는 공산주의로부터 모든 유물론적 기초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젝에게는 문제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는 한편에서는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에 정초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신념에 정초했고 전자가 붕괴된다고 해도 후자로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지젝은 공통적인 것을 허구화하는 '시차적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시장관계의 침범하기 어려운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중의 삶정치적 역량을 자본주의적 제도화를 넘는 과잉의 힘으로 사유하는 네그리에 반대하여 지젝은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자체가 생산적 다중의 흐름을 넘어선느 진정한 과잉이며 다중의 생산이 직접적으로 삶을 생산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과잉, 자본이라는 과잉을 생산한다고 말한다.(279) 결국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목적 다중의 끊임없는 분자적 운동에 몰적 구조가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중의 분자적 운동이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그 몰적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이 아니라 자본을 역사의 주인으로 만든다. 역사를 적으로 보면서 공산주의를 신념으로 정의하는 지젝의 주의주의 정치학은 일관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니체적 의미의 노예정신(탓은 주인에게 있다)에 의해 점철되고 있다.
9. 지젝이 일관되고자 했으면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 위에 정초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며(아니면 그것이 나의 '오독'의 효과인가?) 이윤이 지대로 전환된다는 명제를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윤의 지대로의 전환이란 이윤의 자기운동의 착시효과이자 환상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공통적인 것은 없고 사적인 것의 전일적 지배가 있을 뿐이다. 지젝이 대타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 진심이 '공통적인 것은 없다'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말아야 겠다. 그래서 지젝은 노동의 공통되기보다는 노동 내부의 분파화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지적 노동자, 육체노동자, 추방자 등의 세 분파로의 노동의 분화가 그것이다. 지적노동자(보편자)는 계몽된 쾌락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육체노동자(특수자)는 포퓰리즘적 근본주의를, 추방자 분파(개별자)는 더욱 극단적이고 독특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 분파화는 "본래의 사회적 삶, 세 분파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점차적 붕괴"이며 "그러한 상실에 대한 보충물"로서 "온갖 형태의 정체성 정치"(289)의 창궐인데, 대체 지젝에서 '본래적 사회적 삶'이 있기나 했던 것인가? 기원과 그 상실이라는 실락원적 테마로의 이러한 복귀는 대타자는 없다고 단언하는 지젝으로서는 지나치게 일관성이 없는 사고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0.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지젝이 서로 반목하는 이 세부분의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면서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옛 외침이 어느 때보다 적실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공통적인 것을 모두 해체당한 상태의 이 프롤레타리아트, 역사적 과정 자체의 경향에 의해 어떤 단결의 보증도 받을 수 없는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계기로 단결할 수 있을까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도착점을 이미 알고 있다. 말세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공산주의라는 기획된 신념/예견에 따라 선행하는 과거를 창출함으로써 말세의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것. 반역사적 순수 주의주의의 공산주의 모험정신이 치를 예방전쟁에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을 불러모으는 것. 이것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에 기초한 권위주의 정부들에 맞서 지젝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적' 단결의 전략이다. 지젝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라, 돌아오라!'고 호소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살아 있는 감정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이에 대해서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글, '절대지대에서 절대민주주의로'를 참조하라. [Back]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