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5일 오후, 서울역에서는 미디어법 무효화 투쟁이, 평택역에서는 쌍용자동차 파업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전자는 언론노조가 후자는 금속노조가 주축이 된 집회이다. (야당들은 주로 전자에만 관심을 쏟는다.) 명확한 소속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이 혼란은 참가의 혼란뿐만 아니라 감성의 혼란으로도 나타났다. 평택시 칠괴동 삼익아파트 앞 다리에서 벌어진 전쟁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서울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촛불문화제를 '이제는 접어야 할 투쟁방식'이라며 비난했다. 반면 헬리콥터를 동원한 색소물 투하, 물대포, 과격한 강제연행에 맞서 투석과 쇠파이프를 불사했던 투쟁을 낡은 폭력투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진실은, 우리가 하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 아니 여러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리라. 바로 그 시간에 무수한 사람들이 어떤 밴드의 방한공연을 보러 몰려들었고 축구 이야기로 열을 올렸고 본격적 휴가철을 맞아 바닷가로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의 시간, 단일한 평면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각은 현실의 복잡성 앞에서 좌절하고 기력을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에서 나타나는 그 두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두 시간은 어떤 두 시간인가?
미디어법은 말, 언어, 기호를 둘러싼 투쟁이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날치기, 불법투표, 대리투표까지 동원해 미디어법을 강행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미디어 환경, 담론 환경, 기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삼성과 같은 재벌이나 조중동과 같은 보수신문의 방송진출을 가능케 하려는 법적 정지작업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뿐만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미디어법은 케이블 티비, IP 티비, 위성 티비 등은 물론이고 공중파 티비에 대한 자본투하를 늘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나라당과 정부가 미디어 법을 통한 미디어 산업의 개편이 고용을 신규 창출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이 기존 미디어 법을 전두환 시절에 언론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미디어 영역 속에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관철하려는 시도로도 들린다. 아무튼 미디어 영역에 이명박 정부는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투자를 하려하고 그것을 더 많이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려 한다.
반면 쌍용자동차 문제는 해고의 문제이며 파산의 문제이다. 정태인은 25일 밤 생중계 방송 해설과 쌍차 공장 정문에 도열한 사측 직원들을 향한 거리 연설을 통해, "쌍차의 위기는 1)국제적인 자동차 수요의 감소 2)쌍용이 투자했던 파생금융상품의 붕괴 3)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R&D 투자노력의 부족 등에서 기인하는데, 이 중 어느 것도 노동자들의 책임이 아니다. 이미 이명박 정부는 쌍용자동차를 버렸다. 파산은 기정 사실이고 그 책임을 저항하는 노조원들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일만 남았다. 여러분들이 동료 노동자들을 적대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에 속는 것이다"는 요지의 생각을 밝혔다. 공적 자금이 투입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려니와 은행대출을 비롯한 민간적 차원의 조력도 쌍용자동차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진단의 구체적 옮고그름 여부를 떠나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가 미디어 문제와는 달리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투자, 더 많은 영토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더 적은 관심, 더 적은 투자, 기존 영토의 축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와 자동차를 둘러싼 두 개의 투쟁의 동시성은 단순히 복잡하기만한 시간을 보여주기보다 바로 '떠오르는 시간과 기우는 시간의 교차'를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물질생산과 비물질생산,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 등의 개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 바로 그 현상이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양상 속에서 중대한 사건이자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기획,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조)] 정확하게 20년전 우리는 거대한 파급효과를 갖는 두 개의 투쟁의 동시적 출현을 경험한 바 있다. 그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투쟁과 현대 중공업 파업투쟁의 교차이다. 통일전선과 노동전선, NL과 PD의 교차를 당시 ND는 두 개의 전선론으로 읽었다. 하지만 지금의 두 개의 전선에서 중공업, 금속, 자동차가 놓인 위치는 당시와 크게 다르다. 당시에 이것들은 떠오르는 시간을 표상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무급순환휴직까지 대안으로 내놓게 만드는 정리해고가 문제가 아니라,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노동조건 개선, 노동조합결성 자유 등이 쟁점이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이 적극적 내용을 갖고 있었을 때 노동자 투쟁은 사회혁명의 전망과 쉽게 그리고 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노동의 영역에서 특히 산업노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일자리, 고용, 요컨대 '생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서 과거와 같은 적극성을 갖지 못한다. 그 투쟁들은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기보다 과거를 향해 수축된다. 살아남는 것이 문제일 때, 혁명적 기쁨보다 산다는 것의 슬픔이 압도한다. 아마도 그래서 쌍용자동차 가족이나 용산 참사의 유가족들이 (그래서 지켜보거나 연대하는 사람들까지) 싸움의 한 가운데서 거듭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일 게다. 쌍차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공권력이 아니라 공적 자금'을 투입하라고 외칠 때, 생존을 위한 그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내가 낸 세금 쌍용자동차에 주기만 해라"라고 부정적 의견을 표하는 분열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제(7월 25일) 평택에서의 가두투쟁은 징후적이었다. 1만여명의 시위대가 칠괴동 삼익아파트 다리 앞 투쟁에서 순식간에 몇 백의 경찰에 밀려 동삭동, 세교동으로 달아나야 했다. 물론 경찰은 시위대가 갖지 않은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상공을 나는 헬리콥터에서는 색소봉투가 뿌려지고 물대포가 물을 뿜고 전경들은 사냥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날의 도주를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두 대오가 칠괴동의 다리 앞에서 보도블록을 걷어냈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사용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돌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투석전이 시작되려 했지만 시위대의 대부분은 그 사태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즉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투석이 준비되는 시간에 시위대 내부에 어떤 싸움이냐를 둘러싼 균열이 발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보도블록을 깨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헬리콥터가 색소봉투를 투하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나타나자 선두 시위대가 먼저 보도블록을 던졌으며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시위대는 산산이 흩어져 도주했고 골목도 없는 소도시의 한적한 동네에서 무차별 연행을 당했다(약 15명, 대개 수원중부서로 이송[수정: 7월 26일 SBS 뉴스보도를 따르면 연행자는 30여명이다]).
약 1시간 40분 뒤인 7시 50분경 대오를 추스른 시위대가 다시 쌍용자동차 공장을 향해 행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시 9시 30분경 부암사거리에 모인 시위대는 이후 행동계획을 놓고 토론을 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해산을 제안했지만 청중 속에서 이견이 나왔고 곧 마이크는 계속 투쟁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쌍용자동차로 진격할 선봉대가 모였고 이들은 이번에는 쇠파이프를 들었다. 늦은 밤 소도시의 아스팔트를 쇠파이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이때 시위대는 불과 60여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후발대나 본대오가 있는 선봉대가 아니라 그래서 본 대오를 지키기 위한 선봉대가 아니라 선봉대가 본대오이기도 한 특별한 선봉대였다. 우리는 쇠파이프를 울리며 평택시의 아스팔트를 걸어 9천여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는 평택자동차 공장으로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이들 결의한 사람들, 수천명의 본대오로부터 분리된 이들 선봉대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스쳐지나갔는지 알기 어렵다. 아마도 두려움뿐만 아니라 슬픔까지도 요동쳤으리라. 60 대 9000, 영화 <300>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 이 중과부적의 싸움. '이 승산 없는 싸움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경찰들을 향해 걸어가는가?' 문제는 그 '무엇을 위해'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었다. 25일의 목적은 사측과 경찰의 잔인한 단수로 목말라하는 동지들에게 물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생존의 물. 그러나 선봉대에게 물은 없고 물을 넣게 할 강제력도 없다. 10시 5분경 경찰과의 거리 500여 미터를 앞두고 멈춰선 60여명의 '선봉대'는 장고 끝에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쇠파이프를 끌며 뒷걸음질로 평택역을 향해 물러나기까지 수 십 분 동안 이어졌던 '어둠 속의 행진', 이것은 25일 밤 선봉대의 행진의 성격만은 아니고 지금 노동자들의 투쟁 전체를 횡단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 총고용과 공적자금, 이 사회민주주의적 요구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본가적인 이명박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하나의 실제적 요구로서 제시해야 하는 상황. 노동자들이 '대화를 안할꺼면 차라리 다! 죽여라'라고 피의 절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노동운동이 suicidal strike(자살파업)를 뜻하는 '옥쇄파업'을 긍정적 어법으로 사용하는 상황(이명박이 쥔 옥새 玉璽는, 아니 어쩌면 옥새 자체가, 노동자의 옥쇄 玉碎를 조장한다)를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자살폭탄투쟁의 정신이 우리의 노동운동을 이끌게 된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운동과 정치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시간이며 그런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새로 시작해야 할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근본적인 변화일까?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