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또니오 네그리가 쓴 '후기 알뛰세 사상의 진화에 관한 단상들'[한글본]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네그리는 알뛰세가 "무엇인가가 우지끈 부러지는" 1970년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철학적 도약을 이룬다고 본다. 그의 도약의 핵심은 유물론 개념 속에 우발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고독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즉 자신의 조건들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생각하기를 선택한다. 사회주의가 끝났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존재조건을 잃는다. 알뛰세르는 비목적론적이고 우발적인 유물론을 구성하는 도정에 들어선다. [미래는 오래지속된다]의 알뛰세는 다시 한 번 마키아벨리를 읽음으로써 생산관계의 사유로부터 역능의 사유로, 생산력의 사유로 나아간다. 구조의 철학자, 주체 없는 과정의 철학자로부터 역능의 철학자로의 변신이라고 해도 좋을 행진이다. 그것은 사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여우되기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생산을 위해 실천하는 자, 즉 코뮤니스트로서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실재의 반영이라는 전통적 인식론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며 사유를 신체로부터 출발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이 연속성을 압도하는 알뛰세르의 혁신이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발견된 것은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국가기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삶의 다양성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국가권력이 실제로는 공허한 것이라는 것. 네그리적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자본에 대한 탈근대적인 실질적 포섭이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공허의 지배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과 다중>>에서 공허의 지배는 추상화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요컨대 탈근대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전체주의적 작동의 연속적 팽창과 점증적으로 강렬해지는 연접(contiguity)이다. 알뛰세르는 여기에서 경제와 정치에서 이데올로기로 향하는 계급투쟁의 변동을 포착한 것이 아닐까? 물질적 생산에서 비물질적 생산으로의 이행이 알뛰세르에 의해 파악되었다고 하는 것이 어떨까?
이 공허로서의 지배의 총체성(즉 중심)에 맞서는 것은 어떤 힘인가? 그것은 주변이 아니라 가장자리이다! 이것은 국가도 정당도 아닌 다중 속에 있는 힘이다. 랑시에르의 '아무개'가 뒤늦게야 알뛰세르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해야 할까? 물론 알뛰세르는 사회적 노동이 비물질적이고 협력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천착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는 여기에서 이론적 실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등에서 이미 암시되고 실험되었던 바의 존재론적 인식틀로의 전면적 이행이 발견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서서히 주체성에 대한 강조로 초점이 이동한다. 유물론은 벌거벗는다. 벌거벗은 유물론은 첫째 구조가 아닌 현재를, 둘째 업적이 아닌 업으로서의 역사를, 셋째 목적이나 필연성 없는 우발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필연이 지배하는 변증법 대신 주사위 던지기가 고려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