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포스트모던을 예견했고 또 그것을 앞서 실행했다.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그 중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하나이다.
그는 민족적 정체성을 문제삼았다. 정치적 애국심은 물론이고 문화적 애국심도 위험하다고 보았다. 서울, 도쿄, 쾰른, 뉴욕을 오가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산 그의 삶 자체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다. 작품 속에 그는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섞어 넣었다. 비빔밥 창작방법이 그것이다.
그는 사물적 정체성도 문제삼았다. 사물이 특정한 정체성의 회로를 따라 인식되고 사용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회로를 따라 인식하고 행동함으로써 재생산될 때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질서. 백남준은 사물에 고정된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괴라는 방법을 썼다. 그것은 흔히 예술적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곤 한다. 연주하던 피아노를 넘어뜨려 부수고 바이얼린을 깨뜨리고 넥타이를 자르고 소머리를 잘라 전시한다.
이미지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백남준의 고유하고 강렬한 영역이다. 그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정체성을 주사선 합성을 통해 해체한다. 나아가 그는 관객/소비자가 그 합성 과정에 이미지 생산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함으로써 일방향적 텔레비전 제국과 싸울 수 있는 능동적 힘을 키우려 한다. 그에게서 교육적인 것은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은 교육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단순한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받아들이고 적극 실천하면서도 그것을 올터모던(altermodern)으로 비틀고 이중화한다. 그는 기술의 인간화가 자신의 목표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기술을 예술화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은 기술 속의 대안기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기술의 효용성 논리를 창조성 논리로 재전유하는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 컴퓨터 아트, 위성 아트 등 다양한 미디어 아트를 통해 보여주었다.
정체성을 파괴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경계를 넘는 것은 백남준의 미학적 강령이다. 그는 연주되는 피아노가 내는 선율음과 넘어지는 피아노가 바닥과 부딪혀 내는 소음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오직 음에 대한 고정된 청각을 가진 사람만이 후자를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러한 청각양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그 감각을 일반화하는 어떤 지배적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질서에 포획된 사람에게 소음인 것이 동물에게는 음악일 수 있다. 어떤 음악전시회에 개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개들만이 들을 수 있는 고유한 주파수의 음이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걸어둔 소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후각양식, 브래지어를 벗은 상반신을 터부시하는 시각양식 역시 그러한 질서의 효과이지 본래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백남준은 그러한 질서가 자신의 좌표에 위치시킬 수 없는 특이한 것, 괴물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그 질서에 균열을 낸다.
경계를 넘어선 백남준의 상상력은 위성의 수준에서 펼쳐진다. 양의 동서, 국경이나 인종, 피부색, 성 , 계급 등은 협소한 경계이다. 그의 위성예술은 상상력의 공간적 크기를 보여준다. 동시간에 뉴욕, 도쿄, 서울이 연결되고 합성된다. 그것은 견우와 직녀의 만남처럼 특이한 것들의 만남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많을 수록 좋다는 다다익선(1003개의 모니터가 이 작품에서 결합된다)의 사유는 넓을 수록 좋다는 사유와 연결된다.
백남준의 비빔밥 미학은 특이한 것들의 혼성, 혼종, 네트워크를 예견하고 또 실천했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인정과 그것의 연결을 강조했다. 이것은 정체성에 사로잡히고 갇힌 근대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의 비빔밥 미학은 분명하게 근대 이후를 지시하면서 대안근대에 대한 미학적 사유를 제시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은 그의 미학을 역사적으로 상대화시킨다. 제국은 차이, 탈정체성, 다원성을 흡수하여 자신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차이와 그것의 혼종은 제국의 지배논리의 일부이다. 예컨대 다문화주의가 그러하다. 그것은 차이를 권유하고 지원하지만 더 큰 틀에서 포획한다. 캐나다에서는 원주민이 바로 전통 문화에 따라 살도록, 즉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백인과는 다르게 산다는 조건 하에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 시대에 정체성의 해체, 차이의 승인, 차이들의 우발적 만남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해방적이지만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좀더 의식적으로 특이한 것들의 연결과 공통화를 추구함으로서 후기근대나 탈근대를 넘는 대안근대성의 형상을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파괴를 넘는 건설의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정체성의 해체는 차이가 서로 교차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것은 공통되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정체성들로부터의 빼기는 그 탈주하는 것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대안을 발견하고 다시 그것의 군주되기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백남준이 공통되기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코스모폴리탄적 인류인주의의 이상을 예술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부처, <진화, 혁명, 결단>, 그리고 굿바이 오웰(반비관주의) 혹은 굿바이 키플링(동서양의 융합). 하지만 그 공통되기는 아직 사변적이며 실재적이지 않다. 그것을 달성할 주체성이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예술적 이상으로서만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인류인주의에 유토피아적 흔적을 남긴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맑스주의에 접했고 "맑스와 쇤뵈르크"의 결합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 중국, 소련 등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그의 맑스는 비판의 맑스로 수축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즘의 맑스는 오류로 기각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국 시대는 우리에게 그가 기각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즘의 정치적 재사유를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과 맑스"를 재결합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지난 세기에 전개된 무수한 투쟁들은 세계시민들의 실재적 공통되기의 평면을 열었다. 비물질노동화와 그것의 헤게모니. 디지털화와 인터넷. 전 지구적 반전연대와 대안지구화 운동. 다중들의 전 지구적 소통 잠재력. 이것은 백남준이 전위적으로 추구하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실재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술은 점점 예술가의 수중으로부터 다중의 직접적 삶사유와 삶행동의 수준으로 내려온다. 백남준은 모든 장르들의 경계를 넘는 종합을 예상하고 실천했다. 그런데 오늘날 다중의 비물질적 인지혁명과 대안근대성의 운동이야말로 모든 장르들의 실제적 종합을 요구한다. 다중의 삶이 백남준 예술이 지향한 총체예술의 실제적 아뜰리에로 되었다. 이제 백남준은 다중의 예술을 위한 길을 연 위대한 역사적 중개자로 뚜렷이 기록될 수 있다. 다중은 그가 고독과 은둔 속에서 수행한 작업을, 협력적 공통되기를 통해 구체화하고 그것을 군주되기의 살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