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은 개체-보편의 틀 속에서 몸을 지배하려 한다. 개체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므로 개체적 몸의 미시구성을 알 수 있다면 몸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생물권력의 전략으로서의 게놈-프로젝트). 이 시각 속에서 개체들은 보편적인 것의 개체적 현시로서 나타난다.
이 관점의 빈곳은 몸이 다중이며 다중적인 것은 창조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몰각이다. 다중으로부터 개체를 분리하고 그것을 독립적인 것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것의 현시로서 고찰할 때 다중으로서의 몸과 몸들의 다중은 고찰 대상에서 누락된다. 여기에는 이미 시각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 다중-몸과 몸들의 다중에서 분리된 개체적인 것은 이미 죽은 것이지 산 것이 아니다.
이론은 회색이고 예술은 산 시간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복된 경험들은 이론이나 예술의 본래적 한계가 아니다. 기존의 이론형태와 예술형태가 다채색과 산 시간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기존 이론형태와 예술형태의 실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치 결점으로 보이는 것, 즉 삶의 생생함으로부터의 추상을 통해서 예술과 이론은 자본의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착취는 산 노동을 산 채로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죽게 만들고 죽은 노동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죽은 것을 축적하는 방식은 기존의 이론과 예술의 작업방식이기도 했/하고 기존 교육의 작업방식이기도 했/하다. 통상적 교육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유효함(어디에?)이 입증된 것을 반복하는 법을 가르친다. 살아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가르치며 유동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것을 가르친다. 존 케이지와 보이스와 백남준이 자신들을 Fluxus(흐름)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이미 삶에 대한 지향과 통찰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죽음의 생산을 자신의 고유한 논리로 삼는다. 죽일 수 없는 것은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죽일 수 없는 것(존재), 죽지 않고 버티는 것(저항), 죽임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탈주)은 쓰레기들이므로 지구밖으로 폐기해야 할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자본 사회는 타나토스(죽음충동)가 지배하는 시공간이다.
오늘날의 생물권력, 생명권력, 삶권력이 몸을 지배하는 방식은 추상이다. 어떤 추상말인가? 산 것, 실재적인 것을 분리시켜서 그것을 죽은 것과 형식적인 것의 지배 아래의 연옥에 배치한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의 독재 아래에 종속된다. 형식적 추상 이것이 삶권력의 현미경이요 회칼이며 알바트로스 감옥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저항들은 반추상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루카치-아그네스 헬러-마이클 리보위츠로 이어지는 사용가치 학파들은 이론의 수준에서 이 작업을 수행한다. 오늘날 많은 생태주의자들도 근대가 배제한 사용가치 개념에 의해 이끌린다. 구체적인 것, 추상되지 않은 것, 날 것이 이러한 흐름의 지도원리가 된다. 지식, 정보, 이론, 소통 등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럽게 고조된다. 하지만 추상에 대한 일반적 거부는 막힌 길이다. 그것은 추상 이전의 삶(예컨대 소농적 삶, 본래적-귀속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에 대한 향수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하여 반추상은 많은 경우에 근대추상세계의 보완물로 기능하곤 한다.
이 한계를 돌파하려면 추상이라는 무기를 전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추상에 반추상을 대치시킬 것이 아니라 형식적 추상에 실재적 추상을 대치시켜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관념적인 것이요 구체적인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추상이 거듭해서 형식화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로부터 추상이라는 무기를 뺏는다. 추상의 실재화, 즉 실재적 추상은 죽은 것으로부터 다시 삶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죽음의 메커니즘의 동력이면서도 그것에서 배제되어 있는 외부성인 삶의 운동, 그것의 독자성, 그것의 원리를 추상해 내는 것이다.
삶권력이 개체-보편의 원리에 따라(이것이 형식적 추상논리이다) 몸을 지배할 때, 다중은 삶의 특이성의 실재적 추상을 통해, 추상된 것들의 접속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몸을 넘겨주고 뭔가 추상적인 것을 향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만드는 것이다. 행크 불은 nation과 culture에서의 multi-inter-trans(쓰고보니 MIT다, 독일어에 mit는 함께라는 뜻이었는데 재미있군)를 이야기했는데, MIT는 아미 WAB(within-against-beyond)처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몸들이 서로 가로질러 만드는 추상이 실재적 추상일 텐데, 다른 이름으로는 공통되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을 장르명으로 표현한다면 네트워크예술일 것이요, 그 질료는 물감도 주사선도 아닌 다중인 몸들, 몸들의 다중들, 물질=에너지들일 것이다. 이 예술에서 삶과 예술과 혁명은 그 어느 것을 이야기해도 이미 다른 것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