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트레이닝을 위한 어떤 인터뷰


문: 다중넷은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등과 더불어 우리 시대 대안지성운동의 주요한 실험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실험들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직 외부에 공개되어 있지 않고 그 실험적 경험에 대한 정보가  비공개되어 있음으로써 새로운 실험들은 다시 동일한 문제를 반복해야 할지 모릅니다. 오늘 당신으로부터 다중넷의 지난 수년간에 걸친 경험과 직면했던 혹은 하고 있는 문제,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방안과 노선 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다중넷의 실험은 사회적 실험이고 그 실험의 성과와 한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들 등은 대안지성운동에 큰 유익함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답: 취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중넷을 대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해 나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경향적으로 접근하더라도 각자 조금씩은 다른 느낌들, 생각들, 이해들, 해석들, 판단들, 계획들을 갖고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아주 상반되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중넷의 공동대표라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이 잘 알고 있지도 못한 직함을 갖고 있긴 하지만 형식적일 뿐 실질적으로는 다중넷을 대표해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 그렇다면 다중넷과 관련한 개인적 경험이자 그 경험에 대한 성찰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답: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특이한 개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을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속에서 자신의 실천에 필요한 요소를 더 잘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야기 과정에서 대화의 필요상 "다중넷은 무엇무엇이다"라는 식의 일반화된 표현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는 다중넷은 무엇무엇이라고 생각한다"는 개별적 체험양식의 표현으로 읽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문: 이야기를 가급적 사실적으로 풀아나가면 좋겠는데 그래도 좋을까요?

답: 다중넷의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사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실명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나 사태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는 오히려 인격으로서보다는 사회적 기호로서 이해되는 편이 더 객관적으로 경험을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문: 알겠습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수유+너머는 스스로를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키는 연구자들의 생활공동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중넷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답: 다중들의 해방과 자유를 추구하는 다중들의 투쟁네트워크라고 정의하겠습니다. 우선 다중넷의 잠재성원은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중은 항상 연구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지만 행동가, 예술가, 정치가, 생활인 등일 필요도 있습니다.


문: 네트워크가 공동체와 다른 개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공동체는 '우리'(we)를 만들어내는 조직형태이지만 네트워크는 '우리'를 아주 약한 방식으로만 추구합니다. 우리이기를 늘 거부하는 우리라고나할까요. 네트워크의 힘은 각 마디의 부단한 강도적 특이화와 마디들의 증식적 공통화에 있습니다.


문: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데요.

답: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네트워크가 복수적 마디들의 강도적 특이화와 증식적 확장적 공통화를 추구하는 한에서 공동체의 논리가 일정하게는 관철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는 외부를 내부로 흡수하기 위하여 외부에 개방되는 반면, 네트워크는 내외부의 경계가 약하거나 불투명합니다.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구분하기 힘든 혼돈의 지대를 수반합니다. 네트워크가 공동체라면 아마도 그것은 탈근대적 시공간에서 공동체가 재생산되는 형태일 것입니다. 혁신된 공동체인 것이지요.


문:  생활의 공동화는 추구하지 않는지요?

답: 부차적입니다. 우리 시대 다중의 생활은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제국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활을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제국 속에서의 생활을 제국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다중넷을 바로 이런 의미에서 투쟁네트워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중넷이 생활공동체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한 방편이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활은 이미 전지구화되었고 생활의 공통화는 바로 이 수준에서 추구되어야 할 바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면 다중넷은 생활기관이라기보다는 투쟁기관이라는 의미군요.

답: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공동체라기보다 투쟁기관입니다.


문: 그렇다 해도 다중넷은 다른 연구자 생활공동체나 강좌공간, 아카데미 등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데요.

답: 다중넷의 주요 활동이 대안지성의 구축에 집중되고 있고 이 공통성이 워낙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중지성의 정원]의 강좌활동이나 갈무리의 출판활동이나 자율평론의 웹저널 활동이나 자율광장의 블로깅 및 메타블로그 활동, 그리고 호코모코노까지 주로 언어를 통한 운동이고 활동이고 투쟁입니다. 그런데 언어적 투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투쟁형태이지요. 사빠띠스따의 마르꼬스는 우리들의 투쟁은 '말의 투쟁'이고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현재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언어적 투쟁들은 다중넷의 잠재적 마디입니다. 그외의 투쟁형태들이라고 해서 잠재적 마디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문: 다중넷은 재정적으로 어떻게 운영되는지요?

답: 만사들의 회비, 수강생들의 수강회비, 도서판매대금, 기부금 등으로 운영됩니다. 주로 임대료, 광열비, 내부활동비, 통신비, 공과금, 대외활동비, 웹호스팅비 등에 사용되지요.


문: 회비나 수강료의 납입은 의무적인가요?

답: 예. 할인제도가 있지만 만사에게는 의무적입니다.


문: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나요?

답: 발생합니다. 수강회비나 정기회비 모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원활동가가 회비를 걷는데, 돈의 부족, 망각 등의 이유로 연체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납입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 어떤 문제인가요?

답:  대체로는 연체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하고 합의된 해결책을 찾지만 서로 감정이 상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회비를 내야 운영이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과 다중넷이 부르주아 기업도 아닌데 회비를 꼭 내야 하는 것이냐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합니다. 실제로 약 2년전에 회비나 수강료는 내지 않겠고 세미나 참가나 수강 활동만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1)회비 납입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태도, 2)다른 지출을 하고 남는 돈으로 회비를 내겠다는 태도, 3)회비는 내려고 하겠지만 아주 어려우면 늦거나 못내는 것을 어쩔 수 없다는 태도, 4)자동이체를 통해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회비를 내려는 태도 등으로 분화되어 있습니다.지금은 4)를 대원칙으로 하면서 권장하고 있지만 2)와 3)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의 경향은 논쟁에서 밀린 이후 다중넷을 떠났고 아직은 그런 경향이 재출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문: 회원들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요? 또 어떤 것이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까?

답: 이 다채색의 태도들에 대한 각 회원들의 반응도 다양합니다. 회비는 활동을 위해 우선적으로 내야한다에서부터 회비는 선물이므로 의무적으로 강제하면 안 된다까지. 회비를 못내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적 태도를 갖는 후자의 사람들은 전자를 관료주의적 회비관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문: 회비가 선물이므로 의무적으로 강제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재미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회비가 선물이므로 의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마르셀 모스의 선물경제론에 의거하곤 합니다. 교환가치 체제와는 다른 경제체제에 대한 구상의 한 형태이지요. 공동체론은 많은 경우 이 선물경제론을 원용합니다. 선물관계는 분명 교환가치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해 볼 만하지만 우리말에서의 선물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소유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어서 활동들의 순수 흐름과 네트워킹으로 구성될 코뮤니즘 관계에 적실할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회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회비는 화폐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것의 실체는 맑스적 의미에서의 노동입니다. 즉 회비 납입은 활동이고 활동 흐름의 한 형태입니다. 어떤 조직에서 회비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활동들이 훨씬 많습니다. 비화폐적 영역에서는 선물, 품앗이가, 아니 이런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수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데 어디서나 비슷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활동의 중심이고 대부분이라고 해야 사태에 맞을 것입니다. 화폐적 영역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그 화폐적 영역을 무시하거나 비화폐적 교류와 혼동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앞에서 밝힌 화폐 사용처들은 다중넷이 부르주아 사회의 교환관계망 속에 놓여있고 그 망적 순환이 화폐로 강제되는 경우들이지요. 건물 주인은 건물을 임대한 사람들이 임대료를 거부하거나, 여유가 될 때 내려한다거나 하는 것, 다시 말해 임대료를 선물로 사고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이 지속되면 거리로 나앉아야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경찰이 찾아오게 되겠지요. 우리가 강사들을 초빙할 때에는 일정한 강사료 약정을 하고 모셔오며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모셔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중넷을 투쟁기관으로 이해할 때, 회비는 다른 형태의 투쟁활동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 투쟁기관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책임있게 수행해야 할 활동이 회비납입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대회 당시에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의 논쟁에서 쟁점은 첫번째가 당비 두번째가 당기관에서의 활동이었지요. 두 사람은 당원의 자격조건에 대한 논쟁에서 '당원은 당비를 내야 한다'에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당원은 당기관 중의 어느 하나 이상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레닌의 제안에 마르토프는 반대했고 투표 끝에 레닌의 안이 패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꾸로 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레닌과 마르토프가 합의했던 당비, 우리의 경우에는 회비가 쟁점으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회원은 회비를 내야할 의무가 없다는 생각이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계속 문제로 제기됩니다. 회비를 잘 내는 사람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할 때, 사실상 그것은 회비 조건을 깨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원 규정에 다중넷의 한 기관 이상에서 활동할 것을 적시하지 않고 있으므로 회비 규정이 깨어진다면 실제로 다중넷이라는 모임은 실체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다중넷의 회원이 되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가 다 다중넷의 회원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취지문에의 공감'이라는 마지막 문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것이 실체성의 붕괴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우리는 취지문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중넷 공간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어야 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중넷의 회원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동은 무엇보다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회비 문제는 가장 기초적인 조직형성의 문제이자 의지 결집의 결절점으로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이 활동만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비 이체를 중단하는 것으로도 잘 반증되는 것입니다. 회비는 의지이고 활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비납입의 실질적 정신적 회피는 조직의 존재 자체를 허무는 것으로 작용할 위험을 명백하게 갖고 있습니다. 운동은 주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또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인데 아무 실체가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다중넷에서 회비납입은 주체형성의 가장 기초적인, 다른 모든 활동들이 그것 위에서 발전되어 나가는 특정한 활동형태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추론을 통해 나는 '회비=선물'론은 특정한 조건과 범위에서 타당한 선물 개념을 화폐형태가 요구되는 부분에까지 과잉 확대적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이렇게 회비에서마저 견해차가 난다면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법도 한데요, 어떻습니까?

답: 있습니다.


문: 어떤 유형의 갈등입니까?

답: 유형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 유형화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까?

답: 많은 요인들이 얽혀있어서 단순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문: 추상의 방법을 사용하면 그 복잡성에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답: 직관적 추상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앞서 다중넷이 현 시점에서는 주로 언어적 투쟁에 집중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언어/담론 세계는 공식적으로는 미디어와 대학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그 독점을 허물고 있지만 공식성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대학/대학원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대학/대학원이 불필요하고 다중넷의 활동들이 대안지성활동으로서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한편은 대학/대학원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대안적 길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 그것이 왜 갈등을 가져옵니까?

답: 다중넷을 대안지성활동으로 적극적 우선적으로 사고하는 경우는 삶의 대부분을 다중넷에 바치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중넷에 부분적으로 참가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대학/대학원에서 보냅니다. 즉 다중넷이 거의 전부인 사람과 보조적인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고 그것이 생각과 정서와 습관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문: 차이가 있다는 것하고 갈등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이지 않나요?

답: 물론입니다. 차이가 갈등으로 발현되곤 하는 것은 아직 다중넷이 이 차이를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 유효한 방법을 발명하지 못한 경우에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더 정확할 것 같군요.


문: 그 경우들과 메커니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지요?

답: 다중넷이 '연구자'와 같은 특정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다중의 네트워킹을 추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중넷에서는 중학교도 거부한 탈학교 학생, 고등학교 자퇴자, 대학 자퇴자, 대학원 진학 거부자, 대학원 자퇴자 등이 실무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두번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온라인에서 [자율평론]을 발간하는데, 그만큼 장소로서의 다중넷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중넷이 삶에서 상대적으로 덜 필수적입니다.


문: 실무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는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답: 예컨대 갈무리 출판활동가는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까지 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거의 무의미합니다. 출판활동은 현존하는 지성판에 새로운 기획물을 던져야 하며, 저/역자, 저작권사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원고를 편집하고 레이아웃하며 책을 제작(인쇄와 제본과 입고),하며 이것을 서점에 배본하고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언론과 인터넷에 홍보를 하고 또 서점을 방문하여 도서를 관리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수금을 하고 제작처나 저/역자에게 지불을 하는 재정활동을 해야 하는 등 다양한 일관업무들로 구성됩니다. 하나하나가 지성뿐만 아니라 책임감, 성실성, 엄밀성을 요구합니다. 다양한 연관주체들과의 관계를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하기란 실제로 어렵고 늘 넘쳐 흐릅니다. 게다가 출판활동을 강제노동이 아니라 대안지성운동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해야 할 과제는 더 늘어나고 하루 종일로도 모자라지요. 왜냐하면 과제를 처리해야 할 뿐만 더욱더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전 지구적 지성판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고, 누가 어떤 주제를 통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지성세계에 작동하는 자본의 포획 노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서점과 제작처 그리고 저작권사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자본주의 유통망 속에 있는 이 단위들과 운동의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을지, 수익성 문제를 운동요구에 종속시킴으로써 발생하는 항상적인 재정압박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이 모든 것들은 긴장된 연구와 투쟁의 문제로 다가오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 갈무리를 대안지성운동조직으로 정의하자는 것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고 지식을 생산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출판은 출판사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학교(대학)와 출판(그리고 인쇄공장)의 분리라는 현재의 구조를 가져왔지요. 그런데 이 구조에서 소수적 지성, 혁명적 지성을 계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학은 아시다시피 점점 더 기업의 지적 요구를 감당하는 지식기업체로 바뀌고 있고 이 과정은 인간/인류의 지적 발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입시전쟁터로 되어서 극히 불균형한 불량품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출판은 이 기업주의적 경쟁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생산하느라 분주하지요. 지금의 출판은 교재(와 참고서), 아동, 경영처세, 베스트셀러소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안지성적 출판은 궤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과거에는 뛰어난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장과 출판과 서점을 자신의 활동무대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식인 모두가 대학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경쟁은 치열해지고 대학 운영자는 입맛에 따라 지원자 중에서 사람을 고를 수 있게 되었지요.

대안지성에 진실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성의 생산과 출판제작과 유통과 소비에까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갈무리는 이 지성흐름의 한 고리에서 출판의 형식으로 대안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안지성기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중넷에서 대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 중에 출판을 자기의 업무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래서 대개는 고등학교나 대학 등 제도를 거부한 사람들이 이 일을 맡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대학(원)과 출판(사) 사이에 기존 사회의 학력위계가 덮쳐올 위험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위험한 사태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문: 실무와 관련하여 다중지성의 정원은 어떤가요?

답: 다지원은 다중지성적 강의들을 조직하는 곳인데 출판보다는 강도에서 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도 강사 조직화, 홍보, 수강회원 모집과 관리 등 출판활동과 유사한 실무들이 요구됩니다. 실제로 출판이 글을 출판하는 것이라면 강의는 말을 출판하는 것이지요. 생각을 공중의 것으로 만든다(publish)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문: 누가 그 일들을 맡습니까?

답: 공교롭게도 갈무리를 하는 사람들이 다지원을 그대로 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활동가들은 낮에는 갈무리, 밤에는 다지원  식으로 주야 없는 활동에 쫓기고 활동이 그야말로 노동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지요. 그들은 정말로 공부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문: 두 개의 조직적 업무를 동일한 사람들이 한다구요?

답: 동일한 사람들이 갈무리와 다지원 둘 모두의 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되고 있습니다. 실무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다지원의 실무도 처음에는 활동가들 모두의 공동업무로 시작했지만 1년만에 공동업무 체제는 붕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 업무들을 맡아야 다지원의 재생산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문: 다지원을 중단하면 되지 않나요?

답: 실제로 다지원을 포기하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다지원이 공부시간을 줄이고 재정압박을 키운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사회적 투쟁의 관점이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갈무리가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을 줄이고 실무압력을 늘리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만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엄연히 실재합니다. 물론 나는 그것이 협소한 시각이며 지성의 문제를 창백한 엘리뜨의 업무로 사고하는 주지주의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이미 만연되어 있는 저 분업주의적 주지주의말입니다. 다중지성은 실물적 운동이고 조직화이며 강도적 실천활동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은 우리의 싸움 중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공부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싸움활동을 포기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일까요?


문: 갈무리 활동가들 외에 다지원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답: 다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무국이 꾸려지고 다중넷 내외부에서 쿠쿠(강의관리자)를 모집하여 그들의 활동으로 다지원이 돌아가게 됩니다. 기존 만사들의 협력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잔재처럼 남고 점점 사라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외부로부터 영입된 쿠쿠에게 만사가 될 것을 요구했는데, 지금은 만사가 아니라도 쿠쿠활동을 할 수 있게 조정했습니다.  쿠쿠 제도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다중넷은 만사로 구성된다는 애초의 규약이 현재는 붕괴된 상황입니다. 쿠쿠는 다중넷에서 매우 중요한 활동을 수행하는데 꼭 만사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쿠쿠는 다중넷의 자유출입권, 기기사용권 등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의결권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에 의한 의결과정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 쿠쿠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요?

답: 열려 있는 문제입니다. 경험만을 말할 수 있는데, 쿠쿠가 모자라면 무조건 자신이 쿠쿠 책임을 지게되는 다지원 사무국 활동가 외에 교사, 실업자, 탈학교 학생, 타 단체 활동가, 대학생, 대학원생 등이 쿠쿠를 맡았습니다.


문: 기존 만사들은 쿠쿠를 맡지 않는지요?

답: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사 대 쿠쿠 사이에 뭔가 모를 선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사들의 주력 부분은 대학원을 진학했거나 마친 상태인데 쿠쿠는 일반적으로 그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단절과 분화로 말이암아 쿠쿠들이 다중넷의 다른 마디들의 활동을 이해할 기회는 줄어들고 쿠쿠 활동조차도 수강과 강의보조라는 협소한 시야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부분인데 아직 그것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문: 만사 대 쿠쿠 사이의 선이라면 어떤 선인가요?

답: 쿠쿠들은 다중넷에 대해 잘 모릅니다. 처음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이미 다중넷 경험을 갖고 있는 기존 만사 집단을 일종의 권력체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평만사 대 사무국 만사의 관계가 왕왕 고용주 대 피고용자로 오인되는 것처럼 만사 대 쿠쿠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착시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문: 고용주 대 피고용자요?

답: 사무국 활동가들은 활동비를 지급받습니다. 활동성과에 대한 비례부분을 지급받는데 그 몫은 아주 적습니다. 아마도 활동과정에서 요구되는 전화비에 몇 끼니의 식사비 정도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무국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생산활동비가 충분히 지급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문: 무엇을 '고용주적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까?

답: 만사들이 사무국 활동가들에게 다중넷의 공간, 비품관리의 책임을 맡기려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왜 쓰레기 봉투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았는가라고 만사가 사무국에 물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무국 활동가에게 지급되는 활동비는 그들의 활동성과에서의 비례배분일 뿐 회비에서 지불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만사들이 사무국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수강회원들의 경우에도 사무국 활동가들을 다지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오히려 이 경우는 수강회비 중에서 사무국 활동가에게 활동비가 나가니까 필연적 착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어느 경우이건 활동가들이 활동의 의욕을 잃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이지요. 기업조직에서는 재산(소유)를 침식하는 것이 가장 큰 범죄행위로 간주되지만 활동조직에서는 활동가들의 의욕을 침식하는 것이 가장 큰 범죄행위일 것입니다.


문: 그렇게 갈등이 있을 것이라면 모든 사무활동을 공동업무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답: 그렇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공동업무 방식으로는, 다지원처럼 정규성과 책임성, 그리고 일정한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활동을 감당하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공동업무 방식을 사람들이 원치 않을 때,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그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업무 방식이 채택될 수 있겠습니까? 


문: 그렇다면 갈무리나 다지원 같은 조직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답: 아마도 매일매일 부딪히는 압력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사들 중에서도 갈무리나 다지원 활동가들이 삶의 기쁨을 잃고 노동중독증에 걸렸다고 조롱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것을 중단하는 것은 활동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존재이유가 있다면, 이 의지에서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문: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갈무리나 다지원이 없다고 세상이 더 나쁜 쪽으로 달라진다고 보십니까?

답: 세상 전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대안지성의 가능성은 위축됩니다. 이러한 출판공간이나 강의공간의 존재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주는 힘과 희망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무리나 다지원이 없어진다면 탈학교, 대안학교, 대안출판, 대안적 삶을 절실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나쁜 소식일 것입니다.


문: 그래도 앞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갈등이 내재하고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면 이미 실패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답: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자나 수탈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이니까요. 이 착취질서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계급질서의 상층부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다중넷은 현존 부르주아 사회의 이 적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중넷 내부의 갈등은 부르주아 사회의 적대가 우리 내부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형태입니다.

부르주아 사회가 지속된다는 것은 모든 대안실험이 실패한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모든 투쟁들과 혁명들, 대안들의 뒷목에는 실패라는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조직들, 단체들, 기관들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지요. 예컨대 대학과 대학원은 지금까지 늘 성공해 왔습니다. 서로 들어가려는 경쟁자들이 학기당 수백만원 씩의 돈을 내면서 몰려 왔으니까요. 이것이 대학(원)이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대안지성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붕괴시키면서 말입니다.


문: 대학원의 요즘 사정은 좀 다르지 않아요?

답: 그렇습니다. 학생모집에 어려움이 따르지요. 돈을 기꺼이 내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 불행한 일이지 않나요?

답: 글쎄요. 대학(원)은 경제적으로는 피라미드조직입니다. 승자독식의 세계랄까요? 전국 대학원 출신자 중에 자신이 대학(원)에 낸 돈 이상을 취업이나 기타의 방식으로 환급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소수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승자는 큰 판돈을 움켜 쥐지만 대부분은 빈털터리로 본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대학(원)입니다. 이 피라미드 조직은 국가의 지원과 매스미디어의 홍보, 입시제도 등에 의해 뒷받침되므로 전국가적 피라미드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승리하는 것은 국가피라미드교육조직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까?


문: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돈을 잃을지 모르겠지만 배움을 얻지 않습니까?

답: 무슨 배움을 얻는다는 뜻인지요?


문: 가령 언어라든가, ...

답: 언어라면 지금의 실용화된 대학(원)보다 일반 학원에서 더 잘 배울 수 있지 않아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뭔가 배움을 얻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이 그곳에서 그토록 비싼 댓가를 치르고서 이뤄져야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심지어 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교육'이 생산하는 내용이 바로 현존하는 적대사회를 온존시키는 바의 바로 그것이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 그래도 그 속에서 다른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소수 철학자들을 전공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답: 정말 그것이 목적이라면 대학(원)은 방해물입니다. 혼자 독학하거나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중넷 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쪽이 더 낫습니다. 학점제도는 공부를 하도록 만드는 강제동기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공부와 지성활동을,내공을 쌓는 일이 아니라 업적을 쌓는 일로 만들어, 그것들을 불구로 만들지 않고는 계속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여기서 해리 클리버의글, "성적을 폐지하라!"가 떠오르는군요.


문: 다중넷 같은 비공식기관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어렵잖아요.

답: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대학원 밖에서 다른 체계성 있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대학(원 )등록에 내야하는 학기당 4~5백만원은 강제나 의무로서보다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월 2만원의 회비나, 3개월 10만원 정도의 다지원 수강료는 망설이는 심성조건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계획을 체계적이고 집단적으로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대학원에 내는 돈의 절반만 기꺼이 대안지성기관들에 낸다고 한다면 대안지성기관은 실로 충실한 계획을 새롭고 체계적으로 세워서 실천에 착수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문: 돈이 부족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인가요?

답: 왜 내 말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돈의 부족은 현존 체제를 바꾸려는 명철한 인식과 의지의 부족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실패는 우리가 자본의 계획에 일상적으로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중넷의 일상적 실패는 뭔가 성공의 상태에서 실패로의 이행이 아니고 실패의 조건들이 늘 재생산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고 또 중요한 것인데, 다중넷의 모든 마디활동들 하나하나는 승리의 걸음걸음이고 승리를 향한 도약의 노력입니다. 그것이 다시 실패로 귀착될지라도 말이지요. 승리란 우리가 서로 협력할 수 있고 새로이 도전할 수 있는 한 멈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많은 경우에 승리과정의 일부입니다.


문: 대학에서 대학밖으로 역량있는 사람들이 빠져나온다면, 대학이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되지 않을까요?

답: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대학(원) 제도가 우리가 지켜야할 진지가 아니라면 모세가 이집트를 비우듯이 그곳을 비우는 것도 유의미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바로 지성세계 전체의 새로운 제도화를 요구하는 시간이라고 보기 때문에 비울 것을 비우고 파괴할 것을 파괴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대학(원)을 가서는 안 된다는 교조를 강제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안지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가 관건이지 대학(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가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대학(원) 안에서도 대안지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개인적 집단적으로 투쟁한다면 대학(원) 밖에서 아무 계획도 없이 방황만을 계속하는 것보다 백배 나을 것입니다. 대안 계획을 세우고 투쟁하는 흐름은 대학(원) 안팎에서 서로 연대해야 할 강렬한 필요를 느낄 것이고 그럴 때는 대학(원)의 안과 밖이 갈등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대학(원)에서 제도의 강압과 유혹을 물리치고 새로운 대안계획을 세우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는 것이고 그러한 계획을 세우고 싸웠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대학(원) 밖으로 추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 다시 저 활동과 노동의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만사들의 시선이나 태도는 어떻습니까?

답: 안타깝지만 곱지 않습니다. 활동에 쫓기다 보니 이런저런 요구들을 다른 만사들에게 하게 되는데(갈무리 특판을 도와달라, 다지원 웹 홍보를 해 달라, 포스터를 부착해 달라...) 점점 이 요구들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지요. 요구를 하면 만사들이 대개는 수용해 왔지만, 그것이 점점 욕망보다 떠밀림에 의한 것으로 되면서 술자리 같은 데에서 이런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것이 순환되어 사무국으로 돌아오면 더는 부탁할 수 없게 되지요. 사실 다지원 공동업무 방식의 붕괴도 불만의 순환 때문이었습니다. 왜 누구누구는 강의관리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팽배해 갔기 때문이지요. 세 사람 정도가 지목이 되었는데, 실제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강의관리 이외의 방식으로 다지원에서 많은 기여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지원이 강의관리라는 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다지원 활동의 다양성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 사태의 연장선 상에서 불만은 새로운 형태로 제기되었는데, 강의관리를 맡지 않은 사람들 셋 중에서 다지원에서 강의를 하는 두 사람은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이해하겠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말만 많이 한다는 식의 문제제기를 사석에서 불만의 형태로 제기했고 이것이 어쩌다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목된 나머지 한 사람은 다중네트워크센터의 총무일을 어떤 보상도 없이 십년동안 지속하고 있고, 갈무리에서 총무일, 디자인일, 상임대표일을 맡고 있고 다지원의 건물을 구하고 돈을 조달하고 내부 디자인을 하는 등 수개월을 다지원에 송두리째 바친 그 사람이었습니다.

좋았던 관계가 이 일로 파괴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지성에 대한 주지주의적 관점이 관계를 파괴하는 한 양상이라고 봅니다.


문: 지성에 대한 주지주의요?

답: 지식은 고귀한 것으로, 실무는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말입니다. 다중지성에서는 이 양자가 불가결한 것으로 연결되고 통일되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푸는 문제에서 우리가 아직 실패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계속 후퇴가 이루어졌고 이번에는 (지금까지 만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거의 유일한 작업이었던) 다지원 홍보도 탈학교 학생인 만사 한 사람이 소액의 활동비를 받고 혼자 힘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실무는 계속해서 부르주아 사회의 학력피라미드의 하층에로 쏟아지고 공동업무 체계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러면서 공부하는 만사와 일하는 만사 사이의 구획선이 점점 강화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분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문: 분리라니요?

답: 지난 8월에 한 만사는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마다 갈무리/다지원과 비갈무리/비다지원 사이에 구분선이 그어지는 것도 갈무리, 다지원을 중심으로 다중넷 내 노동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정을 도외시하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구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바, 지난 봄 다지원에서의 논의와 그에 따른 몇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해결을 향한 진전은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저녁에 라틴어세미나가 있습니다. 지금 저는 진심으로 다중네트워크센터 건물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꺼려집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다중넷 공간의 어느 곳에서, 어떤 시간에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지원 사무국에 부당한 노동을 부과하며 다지원 사무국의 노동에 의해 편의”를 누리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아니 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까요? 현재로서는 갈무리와 다지원에서 활동하지 않으면서도 동료들에게 부당한 노동을 부과하는 파렴치한이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중넷 만사이기를 그치는 길밖에 없다는 지난 봄의 판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난 10년간 제 삶과 기쁨의 주요한 원천이었고 현재도 그러한 다중넷의 활동을 계속할 방법이 찾아질 수 있을까요?" 다중넷에서 활동하는 것이 숨이 막힌다는 내용입니다.


문: 이것이 분리론인가요?

답: 개인적으로라면 탈퇴가 될 것이고 집단적으로 다른 모임을 꾸린다면 분리일 수 있겠습니다.


문: 왜 그토록 숨이 막히게 되는 것일까요? 어떻든 활동이 편중되는 불균형으로부터 문제가 파생되고 있지 않습니까?

답: 맞습니다. 문제는 왜 활동이 편중되도록 되었느냐 일텐데,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어느 정도 밝힌 셈입니다. 활동의 편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실무활동의 편중입니다. 책을 싸고 나르고 글을 레이아웃하고 웹자보를 만들고 홍보를 하고 하는 식의 실무말입니다. 실제로 실무활동에 많은 시간을 바치지 않는 회원들도 바쁩니다. 학교 수업을 들어야 하고 시험을 쳐야 하고 레포트를 써야하고 그러면서 다중넷 세미나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쌍방이 모두 바쁘다는 사실이 문제지요. 쌍방 모두가 노동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쪽 노동은 주로 다중넷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주로 대학(원)에서 주어지는 것이지요. 한쪽은 책나르고 전화하고 홍보하는 일이고 다른 쪽은 책읽고 발표하고 강의듣는 일입니다. 후자는 다중넷에 와서도 책읽고 토론하는 일에 주로 시간을 바칩니다. 그래서 실무 대 공부의 분할은 더 뚜렷해집니다.

다지원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사태를 보면 한쪽은 강사를 추구하는 반면 다른 쪽은 그 강의의 뒷바라지를 하도록 강제되는 것이지요. 갈무리에서 보면 한쪽은 저/역자를 추구하는 반면 다른 쪽은 그 책의 출판 뒷바라지를 하도록 강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한 의미의 계급구분이 시작됩니다. 누구인가 미국의 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부패한 정치가들이 아니라 지식인들이다라고 말하던데, 다중넷 내부에 지식인층과 노동자층의 구분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우정으로 뭉치고 노동자들은 분노로 뭉친다고 할까요? 전자가 '내가 언제 갈무리에서 책내고 다지원에서 강의하고 싶댔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 길항적 네트워킹이 끝나는 시간일 것입니다. 이때가 분업관계를 다스리는 일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실패하는 시간일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고리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문: 숨이 막힐 지경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봐야 겠네요.

답: 심각함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숨막힘이 어디서 오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리를 무릅쓰고 두 가지 경향을 추상했습니다. 그것을 편의상 '공부' 경향과 '활동' 경향으로 불러보겠습니다. 세미나를 통해 공부하는 모임은 무척 많습니다. 다지원 식으로 이름을 걸지 않고도 학교, 교회, 군대, 인터넷 등 사람이 모이는 주변에는 어디서나 공부모임이 생겨납니다. 공동의 주제를 만들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이름을 건 사회적 활동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들을 경향의 형성을 통해 연결해야 하며 형성된 집단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의제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해야 합니다. 또 공간을 마련하고 활동에 수반되는 권태로울 정도의 실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공부에서 활동으로 나아가려면 거대한 도약이 필요한 것이지요. 공부만으로는 새로운 집단형성이 불가능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문: 모여서 세미나하는 것과 다른 활동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답: 세미나 활동은 개인의 부담이 가장 적은 활동이고 그 성과가 직접적으로 개인에게 귀속되는 활동입니다. 이것은 자취방이나 민들레영토나 학교교실이나 교회나 뭐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어떤 장소도 별도로 구하지 않고 각자 집에 앉아 온라인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세미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개인들의 지적 정서적 변화는 사회적 삶을 바꾸는 데 중요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목적이 아닌 조직에서도, 즉  투쟁기관들에서도 공부하기를 중단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공부가 사회적 실천의 일부로서 전개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의 세미나 모임은 교재가 선정될 때마다 그 집단이 다른 지적 정서적 내용으로 흔들립니다. 텍스트가 많은 것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회적 활동과 연계된 세미나는 그 활동의 필요에 상응하여 세미나가 조직됩니다. 활동이 세미나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문: 다중넷의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세미나라는 기초 활동 외에 출판, 웹출판, 강좌, 메타블로그, 대안언어운동 등 대안지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벌여놓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잘 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지만 다들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것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활동가만을 네트워크의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출판의 경우는 무엇보다 역자/저자 망이 있는데 이미 연결된 부분만도 꽤 많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대안적 지성을 책의 형태로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네트워크의 마디들입니다. 서점과 제작처도 그 망의 일부입니다. 다지원의 경우도 강사망, 쿠쿠망, 수강생망 등 다중넷에 포괄되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유효한 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잠재적으로 다지원의 경우도 대안지성을 강좌/수강의 형태로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마디입니다. 자율평론도 기고자망이 그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메타블로그 자율광장과 마찬가지로 접속자들이 그 망에 비가시적인 형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다중넷은 불과 수십명, 아니 십수명의 활동가들이 현실적으로 수천명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잠재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다중넷 사람들이 세미나만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그 공부모임에 참가하는 몇 사람의 연결망을 넘어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회는 다중넷에서 어떤 세미나가 진행되는지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책과 웹저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강좌에는 관심을 갖습니다. 바로 자신들과 일상에서 연결되는 활동들이기 때문이지요.


문: 모여서 공부만 하는 것으로는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네요.

답: 그렇습니다. 공부하고 뒷풀이하는 과정에서 정과 믿음이 쌓이고 동료로서, 선후배로서 서로 돕는 우애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익기관이지 투쟁기관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이한 개인 한 사람이 여럿이 모인 공부모임보다 더 분명한 사회적 실천기관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모여서 세미나만 했다면 앞서 말한 갈등 같은 것은 생겨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아주 작은 개인적 갈등들이 출렁이다가 사라지곤 했겠지요. 다중넷이 지금 경향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진화의 효과입니다. 공부를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다지원의 구축 이후로 이 갈등이 심화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기가 걸린 것은 세미나를 중심으로 하는 공부공동체로 갈 것인가, 사회적 투쟁기관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정인가 분노인가, 친구인가 투사인가, 이익기관인가 투쟁기관인가 등의 내기가 걸려 있는 것이지요. 이 내기는 실제로는 다중넷만의 문제가 아니고 새로운 삶/지성을 실험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입니다. 그러니 내기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이야기를 조금 돌려볼까요? 앞서의 숨막힘에서 어느쪽이 어느쪽을 숨막히게 하는 것입니까?

답: 숨막힘을 느끼는 쪽은 쌍방이겠지만 주로 '공부'쪽에서 그것을 표현합니다. 서로 생활의 리듬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공부도 사실 숨막히는 활동입니다. 문자들간의 긴장관계를 조금만 놓쳐도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책을 벗어나서 그런 긴장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계속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활동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활동과 활동 사이를 조직하는 일이고 바로 책 밖의 현실에서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부에는 문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엄밀함이 필요한데, 활동에는 사실/사태들 사이의 엄밀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활동하는 사람들의 공존구조에서 활동이 전개되는 현실 시공간의 저 엄밀함의 틈바구니에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잠시잠시 들러 세미나를 하고 가는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숨막힘의 조건입니다.


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엄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답: 공부하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커다란 갈등을 겪고 그 사이에서 '사랑의 트레이닝'을 받기 전에는 현실에서  긴장하는 능력을 갖기 어려운 환경에서 삽니다. 분업화된 남편과 부인 관계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니 한 번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가정에서 남자는 회사에서 보이는 엄밀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유롭고자 하지요. 부인은 가정에서 엄밀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화재가 난다거나 아이가 다친다거나 음식이 상해 버린다거나 하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최상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남편의 자유는 부인에게는 더 큰 긴장과 노동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부인이 순종적일 때에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투쟁이 시작되고 갈등이 일반화됩니다. 이 숨막힘의 시간이 사랑의 트레이닝으로 될지 파산의 게임으로 될지는 불확정적인 것이고 사태에 대한 인식과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과를 좌우할 것입니다.


문: 사랑의 트레이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관용과 포용으로 상대방을 감싸안는다는 의미인가요?

답: 절대 아닙니다. 사랑은 흔히 정동의 문제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분명 정동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근저에서 규정하는 것은 가타리적 의미의 기계적 과정입니다. 공통기계가 사랑입니다. 현실에서, 엄밀한  기계적 협력관계를, 온 정성으로 구축하려는 노력이 사랑입니다. 숨막힘은 엄밀함을 요하는 현실에서 협력해야 할 순간에 협력하기를 피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부정적 정서입니다. 숨죽임은 반대로 그 협력의 요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유의 정서입니다. 그것을 '가장 필연적인 것이 가장 자유로운 것이다'의 정서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협력하지 못함은 정서적인 문제 이전의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며 습관과 사고방식의 문제이고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몸과 생리의 문제입니다. 복도에 떨어진 쓰레기를 보는 눈과 그것을 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후자가 전자를 결백증이라고 부를 때에는 아직 양호한 편입니다. 정말 쓰레기가 넘쳐 발을 디뎌놓기 어렵게 되었을 때 후자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이 파탄의 시간이지요. 회비를 최우선적인 지출항목에 넣는 지출습관과 최후적인 지출항목에 넣는 지출습관이 있습니다. 이익집단도 아닌데 회비 독촉이 있게 된다는 것은 경제적 곤란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습관과 문화의 차이가 있음을 징후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령 회비독촉 같은 것을 받을 때 그것을 숨막힘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숨죽이며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것을 숨막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습관이 방해를 받은 것에 대한 불편함을 총무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불편함과 숨막힘은 습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을 자기밖으로 투사할 때 뭔가 정식화하기 어려운 불만의 정서로 되고 그것이 이론화되면 사람들을 괴롭히는 관료주의가 나타났다면서 총무노동을 하는 사람을 지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집단화되면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트레이닝은 무엇보다 투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습관을 바꾸는 힘겨운 지옥훈련 입니다. 분업을 넘어서 제3의 관계를 창출하려는 노력이고 스스로의 몸과 생리를 바꾸어 타자와 제3의 몸을 만들어내는 탈바꿈의 혁명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부품을 갈아끼우고 세포들을 접합하고 자를 것을 잘라내는 눈물(과 그에 이어지는 희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트레이닝은 포용이나 관용과 같은 권위주의적 정동의 제스쳐가 아니라 전쟁이고 혁명이고 새로운 몸을 만드는 창조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숨이 막히는 순간을 배움과 변신의 기회가 도래한 절호의 순간으로, 숨죽임의 시간으로 변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시간을  회피하는 것이 습관으로 될 때 자신이 어느새 보수주의에 찌든 늙은이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숨죽임은 차이와 긴장의 시간이고 새로운 것의 탄생의 시간입니다. 화살을 당길 때의 긴장과 같은 저 엄밀함의 끈을 놓아 버릴 때 화살은 과녁을 빗나가며 변신보다는 낡은 정체성에의 반복적 안주가 나타날 뿐이지요. 앞의 분업적 남편부인의 비유를 계속해 보자면, 바로 이때 주먹이 날아가기 시작하고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생은 부패의 시간에 맡겨지고 그것은 자신의 시간,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아닌 것이지요.


문: 그렇다면 어떤 것의 창조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답: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암시했지만 지식활동과 투쟁실무활동의 분업을 넘어서 공통체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결국 공부 모임과 활동 모임으로 분리되어 그 분업을 보존할 것인가가 지금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이 분업을 넘어서는 변신을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의 판 위에서 벌어지겠지요. 공통체의 창출이란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 욕망을 조절하고, 습관을 바꾸며, 자신이 갖지 않았던 감각을 획득하는 유물론적 창조의 문제이며 실제적이고 집단적인 몸바꾸기의 문제입니다. 밥먹는 습관, 말하는 습관, 느끼는 습관, 술마시는 습관, 잠자는 습관, 생각하는 습관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실패하더라도 계속 도전해야 할 문턱이고 우리가 혁명을 하고자 한다면 중단해서는 안 될 싸움입니다. 이 작은 싸움 속에 인류의 삶 전체의 문제들이 횡단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싸움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문: 시간도 늦었고 힘도 들어서 더 이상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좀더 말씀을 듣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것을 미리 부탁드립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답: 이 인터뷰가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같이 활동하는 동지들에게 조금이라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나는 이 대화과정에서 이미 적지 않은 도움을 얻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기회는 그때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2009/09/16 15:29 2009/09/1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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