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운동의 비지옹(vision)

Posted at 2009/09/24 02:56//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
촛불이 꺼졌을까?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마가린(마음이 가까운 이웃들)의 한 만사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촛불은 누가 끌 수도 없고 꺼질 수도 없습니다. 촛불은 이미 참여를 과제가 아니라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홍대앞 문화를 지키기 위해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촛불을 지피려는 것이다. 용산촛불, 공무원노조촛불, 선거촛불은 어떻고 또 마음의 촛불은 어떤가?

다지원은 폐강을 하고 강좌수를 줄여가며 촛불에 참가했고 촛불을 분석한 글들을 수집하고 분석했으며 촛불에 관한 강좌를 조직했고 1년이 지난 뒤에는 촛불논쟁과 촛불토론에 참가했다. 우리는 촛불의 교훈 중의 하나가 중고등학교의 새로운 세대와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 그리고 어린이들에 있음을 안다. 역사 속에서 가장 배제되어 있던 능력들이 활력으로 불타올랐고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을 알리는 팡파레가 쾌활하게 울렸다는 것을. 그래서 다지원의 강좌 초점을 이들에게로 재조정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박 지지율에 대한 여론조사가 48%라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열을 받는다고 한다. 산에서 만난 할아버지도 명박이 욕을 하는 마당에 어떻게 48%냐고. 48%를 수치로 말고 그냥 경향으로 읽자. 이명박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경향말이다.

그런데 이 수치는 촛불이 패배했다는 의식을 증폭시키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지지율의 상승은 이 정부가 비지니스 프렌들리에서 서민 프렌들리로 구호를 바꾸고 중도실용을 실질화하겠다고 하면서 정운찬을 총리로 기용하는 것에 대한 지지가 아닌가? 우리가 그것을 나빠지는 쪽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좋아지는 쪽(보수우파정책에서 중도실용정책으로)에 대한 지지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권력을 아래로부터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극우보수에서 중도실용으로 정책을 전환하겠다고 하면서 보금자리주택과 같은 정책을 내놓는데도 지지율의 변화가 없다면 그냥 삼성-현대주의로 밀고 나갈 위험이 더 클 것이다.

여기에다 대고 '친서민 어쩌구'는 구호나 립서비스에 불과하고 이미지 정치에 불과한데 국민들이 속고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부분적으로 정확한 통찰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조차 (나는 실제로 그것이 정확한 통찰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이른바 '국민들')보다 더 총체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이명박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을 때 '그래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애'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다.

촛불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관심을 끌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는 이미 말한 점 때문이다. 이명박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 하지만 이것은 촛불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승리를 의미한다. 촛불이 없었다면 이명박은 4대강 개발 대신에 대운하를 밀어부쳤을 것이고 용산은 평택시 칠괴동의 쌍용자동차에서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의 촛불이 한미FTA와 대추리를 불러왔다면, 이명박에 대한 비판의 촛불은 그의 동맹자였던 조선일보로 하여금 이명박 퇴진을 고려하게끔 만들고 있다. 하여튼 이명박의 행보가 관심을 끌고 있는 지금 촛불은 그의 행보 속에 잠입해 있지 거리에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촛불이 거죽만 보는 눈에 주변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 이유는 의회의 재기이다. 최장집이나 박상훈과 같은 의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민주당은 무조건 등원을 했다. 식물국회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기우뚱거렸다. MB 악법 논쟁과 노무현의 죽음, 미디어법 불법통과로 다시 의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오죽 했으면 죽은 김대중을 의회주의의 제물로 사용하려 했을까? 봉화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봉화로 대장정을 하며 민주의 꿈을 다시 한 번 불살랐던 노무현의 장례와는 달리 김대중의 장례는 국회에서 흑석동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움직였을 뿐이다. 이것은 의회주의를 위한 여야당의 야합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정략적 보살핌 속에서 의회가 담론 권력을 일정하게 회복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그만큼 촛불이 주변화되는 것을 사실로서 인정하기로 하자.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에게 감각과 지각능력은 충일했으나 사유능력는 충분치 않았다. 엘리뜨들이 아니라 다중들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초 무기는 몸이었지만 초보적 집단지성이 그 몸들에 두뇌를 제공했다. 집단지성의 초점이었던 아고라는 권력측의 역공에 의해 비틀거리다가 서서히 붕괴되었다. 권력은 미네르바 구속으로 집단지성을 공포의 감성 속으로 몰아넣은 후, 인터넷법으로 재갈을 물렸다. 이런 상황에서 포털에 의지하는 집단지성이 권력의 공세를 이기기는 힘들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집단지성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집단지성을 구축할 방안 혹은 집단지성을 혁신할 새로운 방안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촛불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행동을 위한 결집수단으로 기능한 초보적 집단지성을 결합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이 투쟁의 경험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촛불의 직접행동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이명박 시대가 평화스럽지 않다는 이미지와 기억을 통해 새로운 삶의 필요성을 자극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촛불의 행동이 대리적 동원행동적 성격을 점점 더 많이 띠어가고 있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촛불은 국가권력을 넘고, 정당을 넘고, 시민단체를 넘는 다중의 직접행동으로, 직접적 의사표현으로 출현했다. 그것이 역공을 받아 분산되고 숨죽이면서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조직력의 부족도 있지만 촛불에너지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충분히 견지할 수 없는 사유능력의 취약함도 작용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촛불들의 직접적 사유와 담론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촛불당처럼 기존의 당들과 경합하는 조직을 만들기보다 그 경쟁을 비스듬히 비켜가면서 당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삶정치적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촛불의회는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혁신된 집단지성으로서의 (온라인 및 오프라인) 촛불의회에서의 사유결정들을 촛불행동과 긴밀히 연결짓는 것, 그리하여 촛불의 새로운 선순환을 창출하는 것,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지 않을까? 
2009/09/24 02:56 2009/09/24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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