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관모는 스스로 네그리가 차이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을 인용한다.
“다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단일한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문화들, 인종들, 민족들, 성별들, 성적 지향성들, 다양한 노동형식들, 다양한 삶의 방식들, 다양한 세계관들 그리고 다양한 욕구들.”(『다중』, 19)
이러한 인정을 직접 인용하면서도 그는 네그리가 현실의 갈등적, 적대적인 사회적 차이들을 ‘탈근대’, ‘삶정치적 생산’의 이름으로 "간단히 부정한다"고 본다.
사실은 무엇인가? 자신이 보기에 차이는 필연적으로 적대를 함축하는데 그것을 네그리가 부정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차이의 필연적 적대성을 부정하면 차이를 무시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네그리는 실제로 차이가 적대로 되는 것을 저지하면서 차이가 소통을 통해 협력관계로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주목한다. 차이는 필연적으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정세적 상황적 주체적 요인에 따라 유대 혹은 적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사랑의 윤리정치학이 의거하는 시각이다.
서관모는 네그리가 이런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사회적 유대의 문제설정으로 대체하며 이 유대의 기획으로서의 다중론이 해방적 잠재력을 지니기는커녕 해방적 운동들에 이론적 장애가 되는 위험한 기획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차이는 필연적으로 적대적'이라는 자신의 입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 평가이다.
차이가 필연적으로 적대를 함축한다는 그의 맑스주의관은 바로 근대 부르주아 정치를 정초한 홉스의 이리의 이리에 대한 전쟁 이론을 끌어와 그것에 맑스의 옷을 입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유대와 사회적 적대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우리가 유대의 길을 닦아내지 못할 때 적대의 구조가 형성된다. 우리가 유대한다면 적대는 붕괴하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서관모의 비판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유대의 길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지각할 필요성을 직시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이들은 필연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은 것처럼, 필연적으로 유대적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차이에서 유대로의, 협력으로의, 사랑으로의 길은 도약을 필요로 한다. 소통의 도약을! 사랑의 유물론적 경로는 기쁨으로 가득차고 꽃들이 만발한 한가로운 여행길과는 다르다. 이 길은 차이를 넘는 공통평면을 구축하려는 긴장과 노력을, 협력의 제도화를 위한 고된 지적 정서적 노력을 요구한다.
- antagonism
- 1838, from Gk. antagonisma, noun of action from antagonizesthai "to struggle against" (see antagonist).
1835–40; (< F antagonisme) < Gk antag
nisma. See antagonize, -ism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