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내가 쓴 어떤 글(「들뢰즈의 시간론 연구서설」)의 한 구절에 지속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맑스는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통해 삶시간의 도래 가능성을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맑스에게서 삶시간은 항상 뒤로 밀려나 있고 억압당하고 있으며 비노동시간의 형태로 겨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 맑스주의들의 눈이 오직 노동시간에만 고정되고 매몰된 것은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노동에 주어진 강조는 더욱 경직되었고 삶시간은 점점 더 깊이 망각되었다. 맑스 이후에 악화된 모습으로 지속된 이 문제적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 들뢰즈의 관심이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통해 삶 시간이 도래할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가능한 노동시간을 노동의 부동의 단면으로 이해하면서 다시 노동을 삶의 동적인 단면들로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여는 것이다.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durée 혹은 전체Tout 혹은 어떤 전체un tout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이 변화라는 사실은 지속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다: 지속은 변화하며 변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은 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이제 운동은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지속'(tout-durée)의 동일화이다.
여기에 두 개의 정의가 있다. 그 첫째는 지속이 변화라는 사실 혹은 전체-지속의 실재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전체 지속은 들뢰즈에게서 특정한 삶이 아닌 불특정한 삶, 단수적이고 특이한 삶을 가리킨다. 그 삶은 특정한 삶에 의해 표현된다. 둘째 특정한 삶은 특이한 삶의 움직이는 단면으로 기능하고 그것은 전체-지속으로서의 삶 속에 변화를, 비결정성을, 자유를 도입한다. 이것은 맑스에게서와는 달리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경우하는 특정한 삶 세계의 모순을 통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삶의 직접적 운동, 폭발을 통해서 표현된다. 모순은 지성이 부여한 허구적 운동이며 실재하는 운동은 변화 자체로서의 실재하는 지속이다. 지속이 변화하며 변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지속의 움직이는 단면으로서의 운동이 지속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다.
시간 개념의 이 베르그송적 전환은 실재적 지속의 변화를, 그리고 그 변화를 표현함으로써 지속 안으로 자유를 도입하는 (그 단면으로서의) 운동을 근본적인 문제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노동시간들의 축적이 가져오는 모순을 통해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그래서 실재적 변화가 영구히 지연되도록 만드는 관점을 파열시킨다. 얼마나 많은 맑스주의들이 저 순간들의 상호관계와 그 모순을 통해 도래할 파국을 기다렸던가? 그러나 들뢰즈-베르그송에 따르면 부동의 순간들로부터 변화하는 시간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순간들은 죽은 시간일 뿐이며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합친다 할지라도 그것에서 실재하는 시간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부동의 순간들의 연쇄를 따라가면서 언젠가 생성할 실재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불변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실재적 시간을 미래로 돌리는 이 온갖 대기주의적 유혹을 뿌리치고 단번에 시간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에서 시작하자.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세계화]에 실린 글에서 약간의 문구 수정)
지속이 운동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지속에 변화와 자유를 도입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지속의 실재성을 확인한 후에 다시 문제가 되는 것, 그리고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이지 않은가? 운동이 없다면 지속은 변화할 수 없고, 차이를 생성할 수 없으며, 영원회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