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의 인류를 연구하기 위해 탄생한 인류학적 방법을 근대의 인류에게, 그리고 과학과 기술에 적용할 수 있는 길과 조건에 대해 라투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서두에서 나는 오직 인류학만이 준대상의 기이한 궤적 전체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우리가 속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로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델이 지금까지 과학 기술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 상태로는 곧바로 이용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했다. 민족지학자들이 민족지학과 사회 세계를 묶어주는 고리들을 효과적으로 추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과학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왜 동일한 논조의 자유를 우리 서구의 기술사회 연결망들에 적용해보지 못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나에게는 우리가 근대적이라 부르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만일 한편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전면적으로 구분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화와 매개를 구분해야 하는 공식적인 근대 기본체제의 개념들 속에서 근대성을 이해하게 된다면 근대 세계의 인류학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근대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화와 매개의 작용을 하나의 화면 안에 결합한다면 역으로 우리가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과학과 기술에 대해 연구하기를 주저했던 인류학이 다시 내가 찾고 있던 서술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근대인들과 근대인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양자를 비근대인들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의 인류학을 그대로 재활용하기란 그리 녹녹한 작업이 아니다. 근대인들이 전근대적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류학은 그 실행, 개념과 문제제기 방식 속에 내가 앞서 언급한 불가능성을 내면화하였다. 인류학은 자연적 대상들의 연구를 배제하고 연구의 범위를 문화들에 국한시킨다. 따라서 인류학은 비대칭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류학이 비교의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인과 비근대인 사이를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대칭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인류학은―우리가 비록 충분히 비판하기는 하지만―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신념들이 아닌, 우리와 오늘날 완전히 밀착된 진정한 지식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류학은 지식사회학의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식론의 한계를 뛰어넘어 제 과학들을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233쪽 이하에서 인용)

이러한 전제 위에서 라투르는 인류학이 대칭적이기 위해서는 " 서양에서의 인간과 비-인간의 극단적인 구분과 서양 이외 지역에서의 사회와 지식의 완전한 중첩 모두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동시에 두 대분할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방식에 관한 전면조사와 지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같은 책, 256쪽)고 덧붙인다. 전근대인과 근대인, 서구인과 비서구인, 과학과 이데올로기,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매개와 정화의 분리와 비대칭이 극복되고 대칭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류학은 오직 대칭적 인류학 하나만 존재한다"(261쪽)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라투르가 이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하여 그는;

열대지역 연구에서 서구세계로 돌아온 인류학이 학문 방법을 삼중의 대칭적인 시각으로 재편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인류학은 동일한 개념을 이용하여 진실과 거짓을 말하고(이것이 대칭성의 제1원리에 해당된다),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산물을 동시에 살펴보고(일반화된 대칭성의 원리), 끝으로 서양과 타자를 구분함에 있어서 선험적 선언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류학은 기존의 이국적 특성을 잃지만 반면에 서구인이 속한 집합체를 포함한 모든 집합체들의 핵심 작동원리를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들을 획득한다. 인류학은 제 문화들―혹은 문화적 차원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던 지위를 잃게 되지만 자연들이라는 소중한 대상을 연구대상으로 얻는다. 지금까지 이 글 내내 내가 주장해 온 이 두 가지 입장―민족학자가 아무 노력 없이 오늘날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입장과 과학을 분석해온 학자들이 너무나 힘들게 얻어낸 또 다른 입장―들은 이제 비로소 하나의 입장으로 중첩될 수 있다. 연결망 분석의 일부가 인류학으로 확장되면서 인류학에게 이미 오랫동안 준비되어온 역할을 수행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같은 책, 261쪽)

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상상되는 '사물들의 의회'는 극히 흥미롭다.

새로운 회합을 위해 새로운 단어들이 필요한 시기들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시민들에게 부여할 권리나 우리 사회들의 짜임새 안으로의 노동자들의 통합을 발명했을 때 그들의 과제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철학자이자 시민으로서, 비교인류학의 산재된 주제들을 모아서 축적함으로써 나의 과제를 수행해왔다. 다른 사람들은 사물들의 의회를 소집할 수 있게 될 것이다.(같은 책, 357쪽)

 

 

2009/11/10 11:41 2009/11/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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