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
1. 관계미학이 근거하는 해후의 유물론은 우연성을 중요한 미학적 요소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그것은 다양한 것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의 탄생을 미학적 방법으로 삼는다. 백남준은 이 점에서 관계미학의 연장선상에서 작업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백남준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 좀더 의식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의 공통성과 연결성을 추구하고 또 시학적으로 실현하며 입증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계미학을 더 전진시킨다. 소리와 이미지, 전기와 자기, 동양과 서양, 삶과 죽음, 화음과 잡음 등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것들의 공통평면을 드러내는 일에 백남준은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디오아트와 위성아트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은 우주만물을 다중(multitudes)으로서 이해하고 또 제시하려한 예술가이다. 오늘날 이러한 예술행위는 특정한 예술가에 의해서도 물론 시도되지만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집단적 예술주체들에 의해 훨씬 복잡한 수준에서 수행되고 있다. 오늘날 생산과 운동과 혁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술적이며 다중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제도예술을 넘는 생산적 집단예술, (사회)운동적 집단예술을 목격하고 있다. 경제가 예술행위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운동이 사람들, 사물들, 기술들을 조직하는 예술행위로 되고 있다. 예컨대 2008년 대도시 서울에서는 최소한 수개월에 걸쳐 수백만이 참가한 촛불집회가 상연되었다.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 퍼포먼스로서 이 사건에 다양한 예술적 장치들이 동원되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분명한 예술적 행위주체로 참가했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예술적 사실로, 새로운 예술인류학적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오늘날 예술인류학이 '제도로서의 예술가'의 예술행위만이 아니라 비제도적 예술행위들, 예술사건들을 분명한 예술적 사건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오늘날 지구적 삶은 예술인류학을 재사유하고 재맥락화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2. 백남준은 1917년 혁명과 1968년 혁명의 차이를 전기에서 전자로의 이행으로 읽고 텔레비전 주사선과 비디오 기술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소리를 이미지로 바꾸고 다시 이미지를 소리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물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소리, 이미지,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백남준의 작업을 더욱 극단적으로 전진시켰다. 오늘날 예술적 실천은 디지털 기술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과 일반화는 오늘날 예술실천의 사회역사적 조건으로 되었다. 이로 인해 예술주체 역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UCC(User Created Contents)는 제도 예술가 세계와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예술행위가 확산되고 있는 분명한 징후이다. UCC는 경제적 가치생산의 중요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더 높은 수준의 UCC를 창조하려는 욕구는 팽배해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자본도 그러한 경향을 저지하기보다 촉진하는 것에 더 큰 이익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특정한 예술가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요구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기술은 나노 기술, 레이저 기술 등과 결합하면서 백남준 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상상적 세계를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내가 본 작품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레이저를 쏘아 혈관들의 도관(導管)적 형상을 카메라에 잡아 삶의 도관성을 보여주려한 한 일본 작가의 사진작품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존재를 예술적인 것으로 전용하기 위한 노력은 가장 오래된 기술들이나 존재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이것은 백남준이 수행했던 당대의 예술실천을 우리 시대에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3. 오늘날 노동은 삶(주체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노동은 그 자체로 점점 시학(poiesis)에 접근하고 있다. 예술 역시 삶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세계를 재생산하는 활동으로 바뀌면서 예술과 노동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전통적인 인문학이나 자연을 대상화하는 과학은 삶과 노동과 예술의 이 융합을 설명해 낼 수 없다. 삶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상황은 자연과 사회, 인간과 동물, 생물과 기계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며 우주의 여러 존재들과 사건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성의 시각을 간절히 요구하면서 현대의 수직화된 권력질서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인류학은 이 대칭성의 요구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고대와 근대, 동과 서, 음과 양, 천과 지와 인, 여와 남, 권력자와 백성 등의 이분화된 세계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며 인문학과 과학의 범주를 넘어설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예술인류학은 구조주의의 틀을 과감히 벗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성과 대칭성에 대한 의식이 역동성과 주체성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의 탄생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기존의 틀의 재생으로 귀착되는 것을 허용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인류학은 그것의 열대적 기원성(전근대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성격)을 아직 탈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운동이 그 자체의 자기 생산을 통한 새로운 전체의 열림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적 전체 속에서의 변형으로만 귀착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과 예술의 하이브리드라는 예술인류학의 올바른 통찰에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고려를 결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삶예술을 삶정치로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인류학을 삶예술적 상황에 기초를 둔 예술정치학과 결합해야 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관계성이 주체성과 힘에 종속됨을 승인하고 주체성의 동학을 분석하는 문제이다. 이럴 때 비로소 예술인류학은 그 자체가 사회적 예술행위와 혁명적 세계변형의 구성적 부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이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1. Artistic anthropology intends to produce novel models of
relationality and connectivity. Could – Nam June Paik's legacy as a
form of –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n artistic discourse
going beyond the framework of relational aesthetics? Who are the
artists in our day developing relevant examples of rethinking and
recontextualizing an artistic anthropology?
2.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a current artistic practice? How could
it relate to medium-specific qualities? Is it a form of artistic
communication defined by a post-medium condition? Or is it a practice
that demands the concept of medium-specificity to change?
3.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 as a form of knowledge production -
mean for the current classification system? Will it challenge the
dominant paradigms of the established humanities and sciences? What
type of new models might this trigger? How can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 better and more political understanding of the human
condition? And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the concept of
art in general?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