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경성대 출판부)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얼굴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 그 얼굴은 그에게 어떤 명령을 전달한다. 윤리적으로 되라! 그는 그 얼굴의 명령에 반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 얼굴에 뭔가 불확실한 것이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자각을 준다. 비폭력, 그것은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라 폭력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폭력을 입힐 것이라는 두려움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는 긴장"에서 유래한다. 살인하고 싶다와 살인하지 말라 사이에 비폭력의 긴장이 있다. 여기에서 언어가 성립한다. 메시지가 전달되고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보여질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작동하기 시작하여 특수한 주체성들의 등장을 가능케 한다.
이 주체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서구의 양심적 지식인의 시선이 아닐까? 왜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주체로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이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타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 바로 성찰의 그 특수한 입장에서 유래하는 것이지 않을까?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