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태는 「한국 보수주의의 힘」(『실천문학』2009 겨울)에서 보수주의를 합리적 보수와 사이비 보수로 나누고 한국의 보수주의가 강력한 그러나 사이비인 보수주의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사이비보수주의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의 과실을 향유하는 중산층에 기반한다. 그는 진보/개혁 진영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에 무관심하며 시대착오적인 맑스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거나 한국에 무지한 서구 연구들을 최고의 이론으로 여기는 수입상적 행태를 갖고 있어 보수주의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과제는 한편에서 보수주의의 합리화와 정상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개혁/진보 세력의 갱신에 두어진다.
1. 이러한 서술을 통해 그는 자신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짓는다. 그가 사이비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진보주의의 갱신을 촉구하는 한에서 그의 위치를 합리적 보수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2. 수입상 행태에 대한 비판이 뿌리 없는 서구중심주의적 상업주의 문화관행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로 비판자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습관적 담론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잘 주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뛰어난 서구 지성이 갖곤 하는 전 지구적 관점을 갖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관점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이 글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이 서구 기원의 개념들일 뿐만 아니라 서구 보수주의를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한국 보수주의를 사이비로 규정하면서 모델을 서구에서 찾을 때 그는 영락 없이 서구주의자로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한국 보수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종합국면적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었을 것인데, 이 문제에서는 한국 보수주의는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라는 계층환원론적 사회학 방법론에 너무 쉽게 의존한다.
3. 그는 '보수와 진보의 관계는 적대적이기보다는 상보적이어야 한다'는 선험명제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이것은 사실이거나 진리라기보다 그의 모랄 혹은 정치적 욕망에 가깝다. 어디에서도 이 선험명제를 뒷받침할 논리적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사회의 복합성과 역사성에서 보았을 때'(25) 그렇다는 단언뿐이다. 어떤 복합성과 어떤 역사성이 이 명제를 정당화해주는 것일까? 균형, 정상, 합리! 그는 부르주아 균형이론의 입장에서 사회의 복잡성과 역사성을 관찰하고 있으며 균형을 깨뜨리거나 정상에서 일탈하거나 합리성을 넘어서는 모든 경향을 극단이자 동시에 오류로 평가한다. 가령 "보수이건 진보이건 반인권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25)는 것이 그의 당위론이다. 그의 당위론을 벗어나는 우파 극단은 '사이비 보수주의'며 좌파 극단은 '시대착오적 마르크스주의'이다.
4. 그가 이명박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지배적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한에서 그의 정치학이 해방적 요소를 갖지만, 그 비판이 균형과 정상과 합리, 요컨대 자본주의 질서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자유의 편이기보다 억압의 편이다. 그의 정치학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실업자, 불안정노동자, 다양한 소수자들의 해방과 자유의 열망 및 운동과는 대립한다.
5. 「한국 보수주의의 힘」를 읽고서야 나는 지난 해 촛불집회에서 아고라 촛불들이 대책회의의 집회진행에 항의하며 행진을 요구할 때에 홍성태가 그들과 격렬한 언쟁을 벌였던 사건의 지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율적 다중은 다양한 정치적 경향들이 상충하는 격랑 속에서 형성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바, 보수주의, 균형주의, 진보주의 등에서 해방적 요소와 억압적 요소를 식별하면서 사유와 실천에서 해로운 만남들을 줄이고 기쁜 만남들을 늘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되고 있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