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Posted at 2010/01/16 13:19// Posted in 쓰기(skribi)/교육_E
학교를 우리는 주체성 생산공장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종교의 물적 제도가 교회이고 소통의 물적 제도가 언론이듯 교육의 물적 제도가 학교인데, 이들은 모두 주체성 생산이라는 기능을 담당한다. 근대적 학교는 근대적 주체성, 특히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생산을 그 목표로 한다. 그것이 입시와 취업을 위한 경쟁이라는 제도 속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곳1에서 말했다. 이러한 주체성 생산과정이 인간의 잠재력을 계발하긴 하되 극단적으로 불균형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것 역시 그곳에서 말했다. 오늘날 지배적으로 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학교, 학교의 신자유주의화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이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실제적 대안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경쟁의 길을 그저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사실 대안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사실과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안들이 제안되고 있고 또 실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 몇 가지 유형들에 대해 검토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근대적 주체성을 대체할 대안적 주체생산능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고 싶다.

1. 공교육 강화론
이것은 기존의 학교체제의 음지에서 태어난 사교육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학교 유연화가 가져오는 공교육의 사교육화 경향에 제동을 거는 데 목적을 둔다. 공교육은 명목상으로는 민중교육이지만 그 실질에서는 국가교육이다. 국가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경합적 행위자이고 초국적 금융자본 헤게모니의 국내적 실현마디라는 점에서 공교육의 회복이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현행의 자본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바로미터일 수는 있다.

2. 대안학교론
대안들은 복수적이다. 그러므로 대안학교를 하나로 묶어서 대상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미 드러난 대안학교의 경향들 가운데 일부만을 생각해 보자.
첫째 기존 학교체제(발전단계론에 입각한 초중고 등급제와 학년제와 학과제)를 복제하면서 대안성을 추구한 대안학교들 중의 많은 부분이 고급 사교육 기관으로 포섭되어간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에 대안성의 추구는 주로 방법론적인 것에 있었다. 기존의 학교보다 더 효율적으로 학생이라 불리는 교육대상의 잠재력을 계발하는 것이 대안성의 핵심이었다.
둘째 이러한 발전에 저항하는 대안학교들이 있다. 공부보다는 놀이, 훈육보다는 자유, 경쟁보다는 협동. 대안성은 방법론적인 것을 넘어 과정과 지향에서 추구된다. 하지만 이 경향이 가로막힌 지점이 있다. 그것은 교육자와 피교육자라는 근대적 일방적 통치관계 모델을 받아들인다. 또 완화된 형태로이지만 발전단계론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교육은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는 영역적 사고법이 여기서도 관철된다. 그래서 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가시적 비가시적 교육제도나 가족, 기업, 국가 등 근대사회의 모든 기관들이 수행하는 교육적 기능에, 그리고 그것이 학교라는 제도를 어떻게 포위하고 있는지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 과정과 대안적 지향은 작은 게임으로 축소되고 게임을 쉬거나 끝낸 순간에 엄연히 남아 있는 거대한 경쟁적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첫번째의 대안으로 귀결된 많은 학교들이 둘째의 대안에서 출발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귀결을 대안학교 교사세대들 간의 지향성이나 결의의 차이에서 찾는 것은 큰 원인을 젖혀두고 작은 원인만을 문제삼는 진단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 탈학교 운동이나 홈스쿨링과 같은 대안적 추구들이 있다. 탈학교는 학교라는 훈육체제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하지만 무엇을 구축해야 할지, 대안적 주체생산의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상이 명확하지 않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대안성을 위한 자유공간과 자유시간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홈스쿨링은 학교 대신 가정을 학교공간으로 대체하는데 학교만큼이나 가정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효과는 개별적이고 국지적인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맑스주의적 조류는 이들과는 다른 대안성을 사고해 왔다. 그것은 교육의 문제를 체제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맥락 속에 위치짓는 것이다. 이 조류에서 당은 교육기관으로 이해되었으며 그람시 이후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교의 구축이 목적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 한국에서  과거의 야학이나 사이버노동대학이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에 가장 근접한 사례일 것이다. 이 조류에서 주체생산은 계급형성과정으로 이해되는데 그 초점에는 공장 노동자들의 계급의식화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대안교육을 대안주체성의 형성 과정으로 보는 한에서 이 조류의 관점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을 짚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노동자학교나 노동자대학을 재생하려는 움직임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주체형성이 공장을 넘어 사회전체에서, 아니 삶의 시공간 전체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는 주체관점이 실효적으로 대안적인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성과를 낳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이다.

지난 십여년간에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비제도연구교육기관들은 어떨까? 이것들은 지적 혼종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제도권에서 배제된 혹은 그것을 거부한 연구자들이 주축이 된 교육기관들은 지적 영역들의 경계를 허물면서 최근 제도권에서 담론화되고 있는 통섭의 논리를 선구적으로 실행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다. 지적 혼종은 그 자체로 혼성적 지식을 도야하는 데 유익하지만 삶의 혼종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다시 말해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위계관계가 암묵적으로 유지된다. 비제도연구교육기관들은 교육자들의 지적혼종과 피교육자들의 혼종에는 일정하게 성공했지만 이 양자간의 경계는 유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실업자의 증대로 인해 비제도적 엘리뜨집단이 양성되는 과정의 효과처럼 작동한다. 이 엘리뜨 집단이 장애인, 수감자, 노숙자등을 찾아 움직일 때조차 '지성인들의 지적 연대'라는 분할이 사라지지 않고 동반된다. 신체와 정신의 분업이 유지된다.

삶의 혼종은 지적 혼종에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통섭으로 제도화되고 있는 지적 혼종을 넘어 세대간 혼종, 성별 혼종, 삶의 경험의 혼종, 감각들의 혼종, 정동들의 혼종, 성향들의 혼종이 필요하다.  다양성들, 차이들이 합류하여 그 긴장의 공간에서 새로운 사유가 싹트고 공통되기의 샘물이 솟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신이 '정상'인 사람과 '이상'인 사람(이른바 정신에 있어서의 '정상인'과 '이상인'의 구별은 사회적 척도에 따른 것이고  그 척도를 문제시하는 순간 사실은 어느 쪽이 정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의 혼종이 필요하다. 학교와 비학교의 경계를 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학생과 선생이 경직된 정체성으로 유지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다중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교육까지 교육으로 사고한다는 것, 아니 자기교육을 교육의 핵심으로 사고한다는 조건 위에서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다중교육은 지금까지의 공교육, 사교육, 대안교육, 탈학교, 홈스쿨, 노동자학교, 야학, 비제도연구교육기관들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와 같은 검토에 기반 위에서 구체화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중교육이 학교라는 경직된 틀보다 정원이라는 열린 개념을 취한 것은 좋은 출발인 것 같다. 하지만 겨우 출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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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6 13:19 2010/01/1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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