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기는 『세계체제론으로 보는 세계사』(원저, 1999)에서 세계체제론에 입각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금융팽창에 관한 아래의 다섯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이미 금융위기를 경험한 지금 우리는 그것을 이 위기에 대한 예측이자 판단으로 읽을 수 있다.
다섯 가지 명제는 두 가지 전제에 입각한다. 하나는 '1)패권국가의 주도 아래에 일어난 체계 전체에 걸친 팽창은 새로운 패권국가가 전임 패권국가가 연 경로에서 직면한 문제들과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체계를 재편하면서 다른 발전경로를 열었을 때 비로소 재개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2)과거의 패권이동들을 분석하면 이 이동들의 본질과 장래의 결과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반복과 진화의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은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발전경로를 여는 패권국가들의 교체에 두어져 있다. 그에게서 세계체제는 국가간 체계가 발현되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주요 행위자는 특정한 국가이다. 이 정치학은 반복과 진화의 패턴을 찾아내는 철학에 의해 지지된다. 시간은 동일성의 지속으로 이해되며 그렇기 때문에 진화도 동일성의 진화로 나타난다. 맑스는 '루이보나빠르뜨 18일'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반복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전의 혁명들의 특징이며 이러한 혁명들은 과거로부터 통치기술을 가져온다고 비판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와는 달리 미래로부터 영감을 가져오면서 낡은 것을 철저히 파괴하는 자기비판적 혁명으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럴 때 진화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도약과 폭발을 함축하는 것으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더 접근할 것이다. 그런데 아리기는 패턴의 연속과 반복과 진화라는 동일성을 찾아내는 데 이론의 역점을 두는데, 이는 차이와 경향을 찾아내는 데 역점을 두는 맑스, 들뢰즈-가타리, 네그리-하트의 방법론과는 대립된다. 심지어 루카치도 항시 역사적 새로움을 탐구하는 데 역점을 두었음이 상기되어야 한다. 아리기가 국가라는 범주를 역사적으로 과도적이고 그래서 불안정한 생산관계이자 권력관계로서보다 릴레이하듯 되풀이될 안정적인 범주로 설정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철학관의 정치적 효과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아리기 이론에 커다란 보수성을 각인한다.
그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명제가 여기에 있다.(괄호안은 쪽수)
명제1. 최근 약 20년 동안의 세계적인 금융팽창은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도 “세계시장의 다음 패권”의 선발대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패권의 위기가 현재 한창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러므로 이 팽창은 쇠퇴하는 패권이 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큰 파멸 또는 적은 파멸로 끝날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431)
명제2. 현재의 패권위기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새로운 점은 과거의 패권이동에서 전례가 없는 군사능력과 금융능력의 분기이다. 이 분기는 체계의 가장강력한 구성단위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패권위기가 다소간 긴 체계 대혼란으로 악화될 가능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435~6)
명제3: 세계적인 금융팽창과는 달리, 다국적 조직과 지역사회의 수와 다양성의 급증은 현재의 패권위기의 새롭지만 되돌릴 수 없는 특징이다. 이것은 미국의 패권질서가 해체되는 한 주요요인이며 결코 보편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계속해서 체계의 변화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441)
명제4: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세계적 금융팽창에 수반된, 사회운동(특히 노동운동)의 약화는 대체로 과도기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미국이 주창한 세계적 뉴딜정책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을 나타낸다.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것은-인용자] 세계 노동력의 더 큰 프롤레타리아화와 점증하는 여성화와 변화하는 공간적. 인공적 구성을 반영할 것로 예상된다.(446)
명제5: 서양문명과 비서양 문명 간의 충돌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기보다 우리 뒤에 놓여 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현대 세계를 서양문명과 비서양문명(특히 다시 떠오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 사이의 변화하는 세력균형을 반영하는 문명들의 연합으로 변화시키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이 변화가 얼마나 격심하고 고통스러울지는(그리고 심지어 이 변화가 결국 문명간의 상호파괴가 아닌 연합으로 끝날지는) 궁극적으로 두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첫째, 서양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이 얼마나 현명하게 보다 덜 높은 신분에 적응할 수 있느냐와 둘째, 다시 떠오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이 미국의 패권이 뒤에 남긴 체계 수준의 문제들에 대한 체계 수준의 해결을 제공할 과제를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452)
나는 이 명제들이 근대사에 대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흥미 있는 것은 3과 4의 명제이다. 아리기는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주요한 인식론적 목적 하에서이지만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차이의 지점들을 언급한다. 3에서 말하는 것, 즉 국가권력을 침식하는 초국적 조직과 지역사회들의 증식이 그 하나이고 4에서 말하는 '세계 노동력의 더 큰 프롤레타리아화와 점증하는 여성화'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5에서 그의 관심은 새로운 패권국가로서의 중국이 새로운 발전경로를 열면서 현재의 국가권력의 침식을 만회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차이는 반복에 종속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장기 20세기』서문 에서 아리기가 네그리/하트가 『제국』에서 수행한 아리기에 대한 비판이 자신에게는 억울하다고 한 것이 근거 없음이 드러난다. 차이가 서술되지만 그것은 반복에 종속되고 그래서 돌파와 단절의 가능성은 닫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덧붙이자. 4에서 아리기는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복귀를 점치지만 이러한 시각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바로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에 대한 자본의 대응(반혁명) 양식이었다는 것, 요컨대 사회운동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점을 감춘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그의 반복론이 가하는 효과로 인해 중국을 대안중심으로 인식할 때, 그리고 중국 패권에 대한 서구의 적응을 요구하는 정치학을 그가 제시할 때, 주체성의 복귀에 대한 그의 비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패권들의 릴레이라는 거대한 순환을 장식하는 장식물로 전락하고 만다. 중국이 아니라 다중(그의 말 속에서는 여성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이 '체계 수준의 문제들에 대한 체계 수준의 해결을 제공할 과제를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아니 '자본의 세계체계의 해체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체의 구축을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세계체제론의 순환적 릴레이라는 관점을 폐기해야 할 것이고 '반복과 진화'가 아니라 '차이의 반복'1을 사유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뿐이라고 말한다. [Back]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