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 미학에 대한 잠정적 생각
루카치는 근대예술과 근대과학의 충실한 설명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부르주아 혁명기에 탄생한 근대예술의 원리들과 형식들을 이념화한다. 그런 한에서 루카치의 미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특히 오늘날의 다중의 혁명의 예술적 이념으로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미학』 1권 1장과 2장에서 루카치는 일상생활에서의 반영과 과학에서의 반영을 식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전자는 직접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반면, 후자는 매개적이고 탈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반영개념은 오늘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대상의 감각적 직접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특성을(예술적 반영의 경우는 대상의 특수성) 반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대상들 사이의 내적 관계와 대상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아우르는 다면적 관계들의 구축이라는 의미로 재개념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반영을 공통관념의 구축과 공통되기의 실천의 계기로 재정위함으로써 그 함의 중의 일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루카치는 노동을 축으로 하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예술과 과학의 분화를 설명하려 한다. 이것은 예술과 과학의 노동으로의 재통합을 설명하려하는 네그리와는 상반되는 지적 노력이다. 그래서 루카치가 미학에서 맑스의 『그룬트리세』(의 고정자본에 관한 장)를 명백히 참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남는 과학기술(그리고 예술)의 독자성을 설명하는 데 역점을 둔다. 우리는 이것이 과학자, 예술가 등의 분업적 특수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착되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노동으로부터 정치의 독자성을, 그리고 활동적 삶으로부터 관조적 삶의 독자성을 옹호하려 한 한나 아렌트와 기본 정신에서 일맥상통한다.)
루카치는 오늘날의 노동에서 이전의 노동과 비교하여 과학적 범주가 훨씬 더 큰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어 그는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의 기본적 특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며 과학적 요소를 더 많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가 과학적 태도로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급히 덧붙인다. 일상생활과 과학 사이의 엄연한 특성적 구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의 독자성에 대한 주장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과학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한 독자성임을 세심하게 덧붙인다는 점에서 일상생활 대 예술.과학을 경직되게 구분짓는 경향과는 선을 긋는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방법이 일상생활의 직접적 요구로부터 (물론 상대적으로) 결별한 것은 일상생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과 일상생활의 차이도 그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이 일상생활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점점 더 예술적 과학적 계기에 의해 크게 자극되고 있는 경향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예술과 과학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인지는 예술.과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카치는 노동하는 다중들이 스스로 예술과 과학의 수용자를 넘어 창조자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정에 인색하며 그럼으로써 다중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또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데에는 무력하다.
그래서 그는 근대성의 이념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미학자로 남아 있다. 이 입장은 그에게 플라톤주의적인 초월주의적 관념론의 전근대적 흐름을 올바르게 비판할 힘을 제공하지만 그로하여금 근대성의 경직된 분업을 넘어서려는 노력들 중의 의미 있는 부분까지도 근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이름 하에 기각하도록 만든다.
주목할 점은 그가 스피노자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인식의 진화론은 루카치에게서 일상적 반영으로부터 예술적 과학적 반영으로의 진화라는 형태로 재구성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인식의 이러한 진화는 몸들의 진화, 몸들의 공통되기와 평행하는 것이며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헤겔은 표상(종교)-직관(예술)-개념(철학)으로의 절대이성의 진화를 서술했지만 스피노자에게서 그것은 표상-이성-직관으로의 윤리적 진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루카치에게서 인식의 진화는 몸의 진화와 평행하기보다는 도구, 기술, 개념, 방법의 진화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이 변증법적 매개 개념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매개 개념은 직접성에 대한 강력한 공격지대를 구축한다.
매개를 통한 직접성의 극복(루카치)과 공통되기를 통한 직접성의 재구성(네그리)가 대비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비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노동과 그 진화에서 원리를 찾는 것이다. 루카치는 노동을 일상생활의 기본범주로 본다. 예술과 과학을 경유하여 혹은 그것들의 흡수를 통해 일상적 반영은 유적 자기의식에로 접근해 갈 수 있다고 그는 파악한다. 반면 네그리는 동일하게 노동에서 원리를 찾으면서도 노동의 비물질화, 지성화, 미학화와 과학화를 통해 노동의 담당층이 변화하며 이 과정에서 생성된 다중이 노동 주체이자 예술주체이고 과학주체로 되어가는 경향에 주목한다.
우리는 루카치에 맞서 직접성에서부터 공통성의 개념을 구출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비매개적 방식으로 연결되는 다양체이자 공통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체는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구나 기술조차도 실제로는 공통되기의 한 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공통되기의 과정은 자연(환경)-기계-인간(생명)이 새로운 연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기계는 매개하는 존재라기보다 그 자체가 공통되기의 창조과정의 참가자로 이해될 수 있다.
Pensu kiel singulara aŭtonoma marksisto, agadu kiel kosmopolitika esperantista homaranis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