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나는 자본이 사람들의 부채 욕망을 자극한다고 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왜 자본은 그렇게 하는 것일까? 부채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이자에 대한 탐욕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가진 것도 없으며 고용되지도 않은 존재로부터 어떻게 이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일까?

1971년 달러의 금태환 중지 이후의 부채는 신비한 느낌을 준다. 금태환 시기에 부채는 태환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발행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금태환 중지 이후 부채는 마치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인쇄기의 용량이 부채발행의 한도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채의 운동 메커니즘을 간략하게 스케치해 보자.

부채는 무에서 창조된 자산이다. 그것이 기업에게 주어지는 경우의 가치화 메커니즘(부채-고용-노동-잉어가치)은 쉽게 분석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것이 다중에게 주어지는 경우, 즉 소비자 신용의 경우는 어더할까? 여기서는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새로운 노동형태인 삶정치적 노동의 흐름을 생각해 보자. 1)부채소득으로 생필품을 구매하여 신체력을 생산한다 2)인지노동을 수행한다 3)무형의 사용가치가 생산된다 4)자본이 이 사용가치를 집적하고 집중한다(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생각해 보자) 4)외부에서 창출된 이 무형의 자산의 집적과 집중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6)무상으로 집중시킨 다중의 인지노동이 거대한 주목가치(attention value)를 창출한다(예 광고비의 상승).

이러한 순환메커니즘이 기능하는 한에서 부채는 낭비나 기생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마중물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 마중물은 거대하게 퍼올릴 수 있는 한 없는 깊이를 갖고 있다. 얼마나 한 없는 깊이일까? 사람들 사이의 믿음과 실제적 협력의 가능성만큼이다. 그 가능성은 측량하기 어렵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실제적이고 진정하게 확장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체제이다. 개인화와 경쟁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가로막고 협력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언어행위를 통해 신용의 양과 정도를 평가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거짓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이 2008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다. 신용수축은 팽창의 실제적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즉 거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믿음이 중단되는 순간에 찾아드는 것일 아닐까? (만약 거품이 원인이라면 금융적 축적의 매시기에는 거품[신용팽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항존하므로 위기는 항상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믿음을 지속할 수 있고 협력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와 제도의 구축이 실제적 대안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거품 없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들과 기계들과 사물들 사이의 유물론적 믿음관계로서의 공통되기가 유효한 대안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
2010/01/24 02:13 2010/01/24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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