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과 우리 시대
전도된 세계의 의식으로서의 종교와 비판의 과제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 즉 국가나 사회이다. 우리 세계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이다. 민중의 환상적 행복으로서의 종교의 지양은 민중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법에 대한 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맑스의 이후의 행보에서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경제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됨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경제에 대한 비판이 삶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삶에 대한 비판은 삶의 구성적 노력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있다.
비판의 본질과 목적
비판은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이며 비판의 목적은 논박이 아니라 절멸에 있다.(374) 비판은 현실의 억압에 그 억압에 대한 의식을 부가함으로써 그 억압을 더욱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고 치욕을 공개함으로써 그 치욕을 더욱더 치욕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이론도 역시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380)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도 말할 수 있다. 물질적 힘에 의한 전복도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는 없다. 물질적 힘이 정신을 사로잡는 순간, 그것은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맑스는 "사유가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현실이 스스로 사유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382)고 표현한다.
세계사에서 비극과 희극
역사는 낡은 형태를 무덤으로 보낼 대 많은 국면을 통과하다. 처음에는 비극의 국면을 다음에는 희극의 국면을 통과한다. 왜 역사는 이러한 경로를 밟는가?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그들의 과거와 유쾌하게 결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376) 유쾌함은 가벼움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혁명이 주는 기쁨의 감정이다.
독일, 그리고 독일에서 실천적 당과 이론적 당의 입장
독일인은 현재의 역사적 동시대인이 아니면서도 현재의 철학적 동시대인이다. 독일 철학은 독일 역사의 관념적 연장이다. 독일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실제로 행했던 것을 정치학 속에서 사유했다. 독일에서 실천적 당은 철학을 실현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지양할 수 없다. 독일에서 이론적 당은 철학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실현할 수 없다. 이에 이어 맑스는 "프랑스에서는 부분적 해방이 보편적 해방의 기초이다. 독일에서는 보편적 해방이 모든 부분적 해방의 필수조건이다"(386)라고 쓴다. 이제 세계도처에서 부분적 해방이 보편적 해방의 기초가 되고 보편적 해방이 모든 부분적 해방의 필수조건이 되는 공시성이 일반화되었다.
맑스의 문제의식과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독일은 원리의 수준에 이른 실천에, 다시 말해 혁명에, 근대의 민족들의 공식적 수준에는 물론 이들 민족들의 바로 다음의 미래가 될 인간적 수준die Menschliche Hoehe으로까지 고양된 혁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인간적 수준이 류로서의 인류의 수준인 한에서 그 수준은 민족이나 국가가 실제적으로 지엽적 범주로 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열정의 계기
한 계급이 사회 전체를 해방시키려면 사회전체가 이 계급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자신 및 대중 속에서 열정의 계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고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열정의 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정의 계기란 그 속에서 한 계급이 사회와 일반적으로 화합하고 융화하며 사회와 혼동되고 사회의 일반적 대표자로 느껴지고 인정받는 그런 계기이다."(384) 이런 계기 속에서 그 계급의 요구와 권리는 사회 자체의 요구와 권리가 되고 따라서 그 계급은 실질적으로 사회의 머리요 사회의 심장이 된다. 맑스는 여기서 특수와 보편의 범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특수한 계급이 특수한 계급으로서 사회의 일반적 대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난 세기 세계사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이다. 특수한 계급들은 실제로 다른 계급계급과의 공통되기를 이루어냄으로써만 그리하여 자신의 특수성을 실제적으로 지양해 냄으로써만, 그리하여 그 실제적 공통되기 속에서 독특성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만 이 열정의 계기를 지속할 수 있다. 맑스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야말로 반항적 표어라고 쓴다. 그런데 세계 구성은 오히려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너와 더불어 모든 것이다."라는 표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세계사의 운동
맑스는 독일에서 왕국/귀족에서 공국/관료으로, 공국에서 국가/부르주아로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체를 서술한다. 그 끝에서 그는 코뮌/프롤레타리아트로의 대체를 서술하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의 경험들은 이 대체의 연쇄가 인류공통체/다중으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 출현과 더불어 한계가 나타나고 그것이 새로운 것에 의해 대체되는 운동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해방의 실질적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
근본적으로 사슬에 얽매인 한 계급의 형성 속에, 시민사회의 한 계급이지만 시민 사회의 계급이 아닌 한 계급의 형성 속에, 어떤 특별한 부당함이 아니라 부당함 그 자체가 그들에게 저질러지는 계급, 그래서 특별한 권리의 요구나 역사적 명분이 아니라 오직 인간적 명분menschlichen Titel만을 내세올 수 있는 계급, 국가체제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체제의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계급,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하며 동시에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까지도 해방시켜야 하는 계급, 완전한 인간상실로 말미암아 인간의 완전한 재획득을 통해서만 자신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급 속에 해방의 실질적 가능성이 있다. 맑스는 이러한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단언한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누구인가?
철학과 프롤레타리아트
인간해방die Emanzipation des Menschen의 두뇌는 철학이요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 철학은 실현될 수 없고 철학의 실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양될 수 없다.(388) 만약 우리의 자유가 인간해방을 넘어서 인간homme으로부터의 해방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면,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해방의 필수조건이 된다면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아닌 계급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계급을 인간을 표준으로 하여 그것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보게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적 비인간, 실제적으로 인간은 극복한 초인Ubermensch, 비인간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기보다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전제들을 이미 집적하고 있는 계급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중을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면 바로 이런 의미맥락에서일 것이다.
Pensu kiel singulara aŭtonoma marksisto, agadu kiel kosmopolitika esperantista homaranis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