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에 따르면, 지능은 본성상 평등하며 보편적이다. 지능은 보편적으로 혼자서 익힐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능에는 위계가 없다. 불평등은 (지능의) 그 발현에 있을 뿐이다.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지성 발현의 불평등은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의 차이에 달려 있다. 의지가 충분하지 않을 때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관여하는 능력의 영역은 지능이 아니라 의지이다. ( 그래서 랑시에르의 교육학은 지능의 교육학이 아니라 의지의 교육학이다.)
그렇다면 스승은 학생에게 부족할 수 있는 의지를 전달하는 자인가? 의지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그것의 차이는 왜 나타나는가? 지금까지 읽은 것에 따르면 의지는 위급상황에서 조성된다. "조국의 위급함, 세계를 탐험해야 하는 아이의 위급함, 식자와 발명가의 욕망의 위급함." 의지의 체계적 강제가 스승의 역할이라면 그것은 위급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급상황, 즉 비상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비상사태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스승은 학생에 대해 설명의 주권자로 나서지 말고 의지강제의 주권자로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랑시에르는 지성이 본성상 평등하다고 가정하면서 왜 의지는 본성상 평등하다고 가정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는 '스승/교사'라는 권위주의적 범주를 유지하는 것일까? 그는 지성의 공통되기를 인정한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의지에 있어서만은 평등과 공통되기를 유보하는가? 그는 소크라테스를 바보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로 비판한다. 그런데 그의 해방의 교육학은 주권자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일 수 있는가? 그의 해방의 교육과정에서 학생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해방(emancipation)을 넘는 자유화(liberation)가 랑시에르의 교육학에서 사유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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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다지원 교육학 세미나 발제문 일부를 모은 것]
스승이 책에 내재한 설명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에게 책의 내용을 다시금 설명한다면, 이는 책의 설명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승은 자신의 설명을 통해서 책의 설명을 학생들이 이해했는지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스승은 책과 학생 사이의 거리를 식별하는 사람이자, 자산의 말을 통해서 그 거리를 없애는 사람이다. 글로 쓰인 설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승이 하는 말은 설명자의 질서에 있어 글에 대해 말이 갖는 특권을 의미한다.(첫 번째 역설) 그런데 학생이 가장 잘 이해하는 말은 선생이 설명을 하기 이전에 배운 말들이다.(두 번째 역설) 스승의 설명은 학생 자신의 고유한 지능을 통해서 학생 스스로가 무언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듯이 이루어진다. 자코토의 깨달음은 이와 같은 설명의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둘로, 즉 열등한 지능과 우월한 지능으로 분할하고, 우월한 지능을 가진 스승이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춰 설명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바보 만들기의 원리일 뿐이다.
설명자와 피설명자의 구분이 이해시키는 교육의 원리이다. 자코토는 “우연히” 사실과 대면한 사람이다. 어떤 사실인가? 그것은 물질적인 것/사물보다 더 확실한 것으로서의 정신의 사실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정신인바, 학생들이 설명의 도움 없이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혔다는 사실이다.(23) 이 혼자 익힘에 세 가지 지능적 계기가 있다. 1)저자 페늘롱의 지능, 2)번역자의 지능, 그리고 3)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초심자의 지능. 1)과 2)가 텍스트라면 텍스트와 대면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번역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번역하려는 의지와 텍스트가 같은 본성에 속하는 지성인 이유는 텍스트 역시 번역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 등. 이것은 우연을 따라가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지능의 고유한 운동형태들이다. 삶은 다양한 위급상황들로 구성된다. 조국의 위급함, 세계를 탐험해야 하는 아이의 위급함, 식자와 발명가의 욕망의 위급함. 이 위급상황들은 그 원리에서 다르지 않다. 위급상황은 우연의 상황이며 우연의 방법은 평등의 방법이고 동시에 의지의 방법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말한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덕분에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스승의 지능을 빼냄으로서 학생의 지능이 온전히 책의 지능과 씨름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실천에서 식자의 기능과 스승의 기능이 분리되었다. 또한 책의 지능은 스승과 학생에게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둘을 지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는 두 지능과 두 의지가 있다. 인간이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승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자는 의지와 지능을 동시에 예속한다. 이것을 바보 만들기라고 하자. 반대로,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을 해방이라 부르자. 교육 행위의 목적이 스승이 학생에게 학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교육학 논리는 단지 무지와 학식의 관계를 살핀다. 이제는 지능과 의지가 분리됨에 따라 바보 만들기와 해방의 더 근본적인 철학적 관계도 살펴야 한다.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이 네 가지 한정-해방과 바보 만들기, 학식과 무지-의 다양한 조합에 따라 산출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지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34) 이것은 해방, 능력의 현실화,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낡은 방법(구식), 역량의 고리는 ‘자신을 선전해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지한 자도 혼자 힘으로 익힐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즉 설명자와 학생을 이어주는 무능의 고리를 뜻한다. 자코토는 자연의 진행방식으로서 사실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통해 스스로의 힘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우연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코토는 진보론자들과 실업가들의 상호교육(랭커스터가 고안한 일종의 ‘조교제도’)은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 즉 ‘바보 만들기’의 굴레로 보았다. 해방은 지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알려야 할 혜택이다. ‘해방하는 자는 해방된 자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코토는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필요조건’으로 본다. 자코토는 이러한 보편적 가르침에 대한 해방, 혜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연대의 관계들을 현실화하는 새로운 사회성에 이바지 한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40) 공부의 결과를 판단하고, 학생의 학식을 검증하려면 유식해야 한다. 하지만 무지한 자는 학생이 작업한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적게’ 하고, 학생이 들인 수고와 주의를 검증하고, 나아가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한다. 무지한 스승이 그의 학생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은, 학생 자신이 주의 깊게 공부했음에 대한 증명이다. 이 요청은 학생에게 끝없이 계속 해야 하는 과제로서의 모든 것을 내포하며, 무지한 점검자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지능을 준다.(68)
‘어머니의 직관’은 칼립소(감추는 여자 또는 꾀바른 여자) 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안에는] 인간 지능의 표시, 이성의 가장 기초적인 꾀-각자에 고유하고 모두에 공통된 참된 이성이 있다. 이는 무지한 자의 앎과 스승의 무지가 서로 평등해지면서 지적 평등의 힘들을 증명하는 곳에서 본보기처럼 발현된다. 무지한 스승의 실천은 학식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곳에서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하는 결정적 실험이다. 무지에는 위계가 없으므로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한 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무지한 자들이 언제나 할 수 있으며, 무지한 자들과 유식한 자들 모두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지적 존재의 힘이라고 부른다.(70)
평등의 힘은 이원성의 힘인 동시에 공통성의 힘이다. 하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의 엉김, 즉 묶음이 있는 곳에는 지능은 없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무지한 스승은 무지한 자만큼이나 아는 자도 지도할 수 있다. 아는 자가 지속적으로 구하고 있는지 검증하면서. 구하는 자는 항상 찾는다. 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찾거나, 찾아야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던 것/사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경계를 지속하고, 무분별-아는 자는 무분별에 있어서 무지한 자처럼 탁월하다-에 안주하지 않고 주의가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 것이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가 그의 길을 계속 가도록 유지하는 자이다. 그 길에서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지적인 발현 속에서 인간 지능의 전체를 찾는 것은 해방하는 방법의 핵심이다. 해방된 자가 할 수 있는 자는 해방하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지능이 다른 모든 지능과 평등하다고 보고, 또 모든 다른 지능이 자신의 지능과 평등하다고 볼 때 지능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을 주는 것이다.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열등한 자들’과 ‘우월한 자들’ 모두를 바보로 만든다. 이 믿음 속에서 열등한 자들의 보편적 우월성은 우월한 자들의 보편적 열등성과 결합되어 어떤 지능도 그와 평등한 것에서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을 세계를 만들게 된다.
보편적 가르침은 철학과 인간성이 관건이다. 보편적 가르침은 먼저 비슷함에 대한 보편적 입증이다. 모든 해방된 자들, 즉 다른 이와 비슷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있다. 텔레마코스의 모험과 같이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간단히 말해 고전 -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결시켜야한다.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이다. 구식의 원리는 어떤 것을 배우고 나서 또 다른 것을 배우는 선별, 개선, 불완전 순환을 의미한다. 학생은 항상 앎의 쪼가리들을 배우며 스승보다 뒤쳐짐을 느끼고 다른스승과 보충설명을 필요로 한다. 즉 앎의 체계적인 개선은 무한정 되풀이되는 훼손이다. 구식의 원리로 설명하는 자는 이해를 하지 못하는 즉, 무언의 책 앞에 남아 있는 열등한 자들에게 우월의식을 이용해 지능의 위계에 맞는 설명 유형을 선택해 지도하려 할 것이다.
학생은 혼자 힘으로 늘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며- 무엇을 보는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나는 할 수 없다는 속임수를 쫓아내야 한다. 기호를 배우고 문장을 배우고 책을 통째로 외우자. 그러면 역량의 고리가 시작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적 주체로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진보의 시대에는 관례에 따르는 잘못된 통념 대신에 이성의 원리에 기초한 건전한 통념들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다. 문제는 인민의 아이를 그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조건들과 이 조건들에 결부되어 있는 통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보론자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지도와 교육을 균형있게 배정하는 것, 학교 스승이 맡는 역할과 가장이 맡는 역할을 균형있게 배정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통해서 스승이 아이에게서 잘못된 통념들을 쫓아내지만 동시에 가장이 다시금 아이에게 관례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해방은 이것과 대립된다. 해방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실천은 ‘너 자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기초하여 학생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능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보편적 가르침에서 이는 아이 스스로 책의 저자의 지능과 자기 자신의 지능이 평등함을 입증함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편적 가르침의 실천은 바로 가장이 무지한 스승이 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