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에 대한 생각들을 비교해 보자. 미메시스를 루카치는 인류의 자기의식과 벤야민은 해방과 아도르노는 표현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들뢰즈는 미메시스론에서 거리를 두면서 예술이 미메시스가 아니라 감각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루카치는 일상생활과 예술, 그리고 과학이 모두 객관현실에 대한 반영활동(미메시스)이라고 보면서 이 세 가지 반영활동의 차이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둔다. 일상생활은 개별성을, 예술은 특수성을 과학은 일반성을 반영한다. 일상생활과 예술은 인간중심적이지만 과학은 탈인간중심화하는 반영이다. 과학은 비자립적이지만 예술은 자립적이다. 과학은 노동에서 기원하지만 예술은 주술에서 기원한다. 예술적 반영, 미적 반영은 인류가 자기의식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며 정서환기적 특성을 갖는다.1
벤야민에게서 미메시스는 자기보존본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좀더 주체적이다. 미메시스는 사물을 읽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 읽기의 순간성 속에서 읽혀지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난다. 미메시스는 대상의 마법성을 탈마법화시키는 활동이다. 희극(자연을 언어에 근접시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탈마법적 예술이다. 미메시스들은 점차 언어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의 번역기를 찾으며 이를 계기로 자연적 상응에서 언어적 번역으로 철수한다. 번역은 모국어에 맞게 원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에 맞게 모국어를 변형하는 활동이다. 이것이 모국어 자체의 표현능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미메시스는 억압으로 다가오는 객체를 주체가 극복하는 활동, 즉 억압당하는 자의 해방활동이다. 언어적 미메시스에서 재현과 표현은 변증법적 관계를 맺지만 표현이 근본적인 것이다. 같은 이치에서 벤야민에게서는 가상보다는 유희가, 모방보다는 놀이가, 전달보다는 표현이 미메시스의 더 근본적 측면이 된다.
아도르노에게서 미메시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게서 진정한 미메시스는 동일성 사고에서 배제된 것, 즉 비동일적인 것(das Nichtindentische) 혹은 타자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 혹은 그러한 요소들에 합당하고자 노력하는 사고의 의식적 태도이다. 아도르노에게서 미메시스는 진화의 과정을 밟는다. 첫째 주객분리 이전의 미메시스는 자연의 공포에 대한 매개되지 않은 반응양식이다. 공포의 대상과 동화됨으로써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 미메시스이다. 이후에 마술적 미메시스는 노동에 의해 주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합리적 미메시스로 대체된다. 그 결과 이성은 미메시스에서 연원한 것임에도 미메시스를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바뀌었고 미메시스적 충동은 예술의 영역으로 후퇴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Amresh Sinha는 그 방식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의 자기동일적 실체로서의 예술작품은 세계의 동일성과의 관계 혹은 방법의 동일성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미메시스적 계기와의 자기동일성이다. 즉 그것은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타자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으며, 정신적 내용의 복제 혹은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표현에의 기여이며 미메시스를 통해 전달되는 능력이다. 예술적 기여는 이해의 대상인 진리내용의 내재적 범주를 표현한다. 미메시스는 그러므로 내용의 복제가 아니라 표현형식이다.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적 계기는 예술적 의도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표현의 특질들을 개괄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표현 자체를 표현할 뿐이다.2들뢰즈는 "예술은 보존하며 스스로 보존되는 유일한 것", "감각들의 집적,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체", "기념비"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서는 루카치, 아도르노가 말하는 자립성의 이론과 일치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것을 미메시스와 연관짓지 않는다.
우리는 감각들과 더불어 그리고 조각하고 구성하고 쓴다. 우리는 감각들을 그려내고 조각하고 구성하고 기술한다. 지각들로서의 감각들은 대상을 반영하는(지시하는) 지각작용들이 아니다. 만일 그것들이 무언가와 닮아 있다면 그것은 그들 고유의 방법들이 만들어낸 유사함이며 따라서 그림 속의 미소란 오로지 색채들, 필치들, 빛과 음영이 만들어낸 것이다.3또 그는 "어떤 예술, 어떤 감각도 결코 재현적이었던 적이 없다"4고 단호하게 말한다. 들뢰즈는 예술의 목적이 재료들의 방법에 의해서 지각작용에서 지각을, 정서작용으로부터 정동을 분리시켜 자립화시키는 것이다.5 그것은 존재로서의 감각을 지속하도록, 자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에게서 지각은 자연의 비인간적 풍경을, 정동은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비인간되기)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 스틸들이, 작가의 문장, 음악가의 음계와 박자, 화가의 필치와 색채가 필요하다. 위대한 예술가(소설가)가 하는 일은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잘못 인식된 정동들을 창안해 내고 그것들을 자기인물들의 생성으로 발현시키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철학자가 개념을 변주하고 과학이 기능들의 변수를 제시하듯 다양성을 세계에 덧붙인다. 이것은 표현없는 표현이라는 아도르노, 벤야민의 생각과 통한다. 들뢰즈는 예술과 혁명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기념비는 일어났던 무언가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즉 늘상 새로워지기만 하는 인간들의 고통, 재창조되는 그들의 항거, 줄기차게 시도되는 그들의 투쟁을 구현하는 확고부동한 감각들을 미래의 청자들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고통은 끝도 없이 이어지며 혁명들은 승리 이후에는 존속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 혁명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혁명이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울림들, 어우러짐, 열림들에 있다.(...) 혁명의 승리는 내재적이며 혁명이 인간들 사이에 세워놓은 새로운 유대들로 이루어진다. 비로 그 유대들이 용해된 질료만큼만 존속할 뿐, 이내 분열과 배반에 자리를 내어줄지언정 말이다.6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재료로써 수행하는 감각혁명이다. 예술과 혁명에 차이가 있다면 혁명이 노동/실천과 더불어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할 때, 예술은 그것을 구현/체현한다는 점에 있다. 예술이 감각의 집적물로 드러낼 그 잠재적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가? 첫째 그것은 체험된 육체, 지각된 세계, 경험에 얽매어 있는 상호간의 지향성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지게 될 살(la chair)이다. 이것은 형상이다. 둘째 집이자 골조물인 윤곽이다. 셋째는 세계이자 우주인 플랑aplas이다. 몸/집은 우주로부터 무엇인가 선별하고 여과하며 다시 살은 몸/집으로부터 감각을 생성시킨다. 이렇게 예술은 구성한다. 예술적 구성은 기술적 구성과는 다르다. 그것의 기능은 견해체계들을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지각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구성적 감각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어떤 환경 내에서의 지배적인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집결시키는 견해체계를 탈영토화한다."(284) 이것은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결국 예술도 과학, 철학과 더불의 카오스와 대적하여 하나의 구도를 끌어내는 일이다.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무한을 구원한다. 과학은 지시관계를 얻기 위해서 무한을 포기한다.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구성의 구도를 설정하고 그 구도가 미학적 형상들의 행위를 통해 기념비들(감각구성물들)을 떠받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방법이다.(285)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미메시스로부터 거리를 둔다.

- 루카치, 『미학』 1권, 미술문화 참조. [Back]
- http://www.wbenjamin.org/mimesis.html 에서 발췌. [Back]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37쪽 [Back]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79쪽. [Back]
- 이 점에서 객관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루카치와 비교된다. 루카치의 객관현실은 존재라기보다 존재자이다. 주체성은 루카치에게서 의식존재로 나타난다. 반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지각작용과 정서작용 속에서 존재로서의 지각과 정동을 경험하는 물적존재로 나타난다. [Back]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255쪽. [Back]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