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시대에 생명은 매우 긴급한 문제로 제기되어 있다.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거시적인 차원과 미시적인 차원 모두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보다도 생태파괴와 기후온난화에 의해, 전염병에 의해, 일반화된 전쟁에 의해, 실업에 의해, 신용불량에 의해,
2.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 및 개체들의 삶이다. 그것들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삶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 역사는 생명 잠재력의 표현이다. 의식은 단지 현실적인 것이 두뇌에 반영되는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리력만큼이나 중요한 잠재력의 하나의 형태이다. 현실적인 것이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성되듯이 잠재적인 것(잠재력)도 정신적 속성과 연장적 속성을 갖는다.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는 물질적 힘, 물질적 활동들의 표현방식이다.
3. 생명평화가 종교의 방식으로 추구될 때 그것(종교로서의 생명평화)은 생명평화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인 이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생명활동(노동)을 경시, 도외시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시하게 된다. 그 결과 생명평화운동은 노동운동과 , 또 삶정치와 분리된다.
4. 노동(운동) 및 삶정치적 생산과 분리된 생명평화(운동)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 노동에서 추방된 사람들만의 운동으로 기울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대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현존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유형의 노동들에서 유리된 사람들이 농업에서 자신의 꿈과 대안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누워 잘 곳의 생산은 인간 생명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지폐를 먹고 살 수 없고 금덩어리를 먹고 살 수도 없다. 기계를 먹고 살 수도 없고 과학논문이나 예술작품을 먹고 살 수도 없다. 의식주라는 생명에 필수적인 물질의 생산과 재생산이 과거에 농업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의식주의 대부분은 이미 기계기술적 공업에 의해 매개되거나 직접적으로 공업의 산물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미 농민은 옷을 만들지 않으며 집을 짓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이 먹는 것의 상당 부분은 토지에서 나오기보다 공장에서 나온다. 협의의 농민은 지성을 생산하기보다 더 많이 소비한다. 오늘날 농업은 의식주를 직접 공급하는 활동이라기보다 그것의 원료공급활동으로 축소되어있다. 농업노동으로의 귀환과 농업의 재생은 하나의 국지적 대안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정치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대안일 수는 없다. 생명생태운동은 농업재생운동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삶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5. 의식주가 비농업적 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오늘날 낳고 있는 문제를 그러한 생산방식 자체의 문제와 동일시해도 좋은 것일까? 자본주의하에서 비농업적 생산의 문제를 비농업적 생산 그 자체의 문제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6. 농업에 대한 도피적 숭배는 현재의 펼쳐진 생명으로서의 산업들에 대한 외면으로 이끈다. 농경은 그 자체가 이미 자연에 대한 지배의 시작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경작은 잦은 휴경을 요구할 만큼 지력을 고갈시킨다. 수렵과 채취의 생활이 아닌 한에서 '순수' 자연은 없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농경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생산양식의 시작이지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생태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 지배는 공업노동을 거쳐 이제 비물질노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관계의 특수한 역사적 형식으로서의 지배관계가 많은 문제들을 가져오고 있고 이 문제 앞에서의 공포가 농업으로의 회귀경향을 낳는다. 하지만 오늘날 비물질노동과 산업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농업노동은 인구를 먹여 살릴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현존하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산업들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펼쳐진 책이다. 인드라망은 산업들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낳는 문제들을 인간 자신이 숙고하고 그때그때 타개해 나가는 것만이 가능한 생명 진화의 길이다. 즉 다양한 산업 형태들 모두를 인드라망화하는 것이 문제이지 산업 밖에 인드라망을 건설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7. 생명주의가 산업문명의 위기에 처해 농업노동과 자연섬김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금융위기에 처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산업노동과 실물생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양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 속에서 해법을 찾으며 희망이 아니라 공포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어떠한 복귀도 가능하지 않고 또 허용되지도 않는다. 생명은 오직 창조적 진화로서만 생명일 수 있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