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담론의 제헌적 재구성을 위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적 협력을 넘는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
조정환
1. 머리말
30년 전 5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제헌권력은 전두환 호헌파의 학살적 계엄통치에 무장으로 맞섰을 뿐만 아니라 계엄군의 ‘과잉진압’ 중단과 시민군의 무기반납을 교환하려 했던 수습위원회의 개헌정치도 거부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외무부와 내무부, 그리고 시민군을 갖춘 엄연한 자치권력으로서, 비록 미분화된 형태로지만 입법과 사법의 기능까지 통일적으로 수행했다. 개헌파가 대오에서 이탈한 가운데,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계엄군의 투항요구를 거부하면서 죽음으로 항쟁의 제헌적 생명력을 살려냈다. 고전적 비극은 단지 비참한 죽음을 보여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 그리고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삶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이야말로 역사 속에 등장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의 결사항전 사흘 후인 5월 30일, 정부의 만행에 항의하여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서강대학교 기독교 회관 옥상에서 투신한 김의기의 죽음,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그해 6월 9일 이대 앞 네거리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노동자 김종태의 죽음, 그리고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당한 바 있으며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5년 8월 15일 전남 도청앞 금남로 1가에서 진상규명을 미루는 정권에 항의하여 전단「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를 뿌리면서 분신한 홍기일의 죽음 등은 제헌권력이 어떻게 그 비극적 생을 이어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에 뚜렷이 현시되었던 제헌적 힘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5월 항쟁이 1987년 6~9월의 항쟁으로 부활했으면서도 광주보상법(1990)과 5.18특별법(1995)을 거치면서, 그리고 호헌파로부터 이른바 ‘광주내란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김대중의 집권기를 경유하면서 그것이 개헌파의 권력제도 속으로 포섭되어간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가 처벌되었고 항쟁 참가자들은 보상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5.18은 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이것이 항쟁의 희극적 반복이자 조작된 결산에 불과했다는 비판적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폭넓은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문제로 느낀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잠재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필요한 것은 5.18을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아니라 다중의 삶정치적 해방과 제헌적 자유자치의 동력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제헌권력이 개헌파의 이 포섭을 뚫고나와 역사적 구성역능으로서 그것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여년의 역사에서 개헌파가 어떻게 집권할 수 있었는지, 무엇이 그것의 제정된 권력을 지금까지 재생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경쟁적 협력관계를 맺어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두 개의 바퀴로 확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제헌권력이 그 활력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실제적 힘들의 결집이 필요한지, 어떠한 비전(이념적 전망)을 갖추어야 하는지, 어떤 정치적 배치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이 광주항쟁에서의 제헌권력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자 진로임을 밝힐 것이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