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에 보이는 폭력들을 경험한다. 계엄군의 폭력, 경찰의 폭력, 바그다드에 떨어지는 폭탄의 폭력, 히로시마에서 터진 원자탄의 폭력, 조직폭력배의 폭력, 학교 교사의 매질, 아버지의 폭력, 그리고 이지메. 이와는 성격이 다른 가시적인 폭력이 있다.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서 던지는 팔레이스타인 사람들의 폭력, 이라크의 자살폭탄공격자의 폭력, 최루탄에 맞선 화염병의 폭력.
우리가 폭력으로 느끼지 않는 것, 그래서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것, 요컨대 정상적인 것들은 정말로 폭력과 무관할까? 아침에 강제로 하는 출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서 나가는 등교, 끝나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기다려지는 수업, 반복되어 무료하기 그지 없는 가사노동, 성과를 충분히 올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상사의 훈계, 간첩과 좌익사범을 신고하라며 고운 목소리로 방송되는 지하철 112 홍보, 도심 곳곳에 도배되어 있는 삼성, 현대, 대우, LG의 광고판, 세계인구 중의 극소소만을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텔레비전 모니터, 잠깐 멈추시오라고 말하는 경비를 구비한 관공서들,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폭탄보다 더 보편적인 권력으로 행세하는 화폐......이것들은 폭력이 아닐까?
잘 조직되고 일반화된 폭력, 구조화된 폭력은 우리에게 일상으로 느껴질 뿐 폭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은 그것들에 마비되어 있다. 일상에 적응하는 고상한 인품, 조용하고 균형있는 목소리, 미소띤 얼굴, 합리적 어조, 편파적이지 않고 공정한 태도, 기도하는 듯한 자세....이것들이 폭력에 대한 감각적 마비가 표현되는 방식이 아닐까?
물리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 이외의 다른 것으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언어 언어 이외의 다른 것으로 풀리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관계(가령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 국가와 국민의 관계 등)가 언어가 아니라 폭력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을 때, 그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폭력에 의해 그 구조를 깨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에 의해 구조화된 관계를 언어로 풀려고 하는 것은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 관계를 폭력으로 풀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선제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면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고 폭력 관계의 새로운 재구조화로 귀결된다. 폭력의 해체는 폭력적 관계의 거부, 그것에 수반되는 폭력행위에 대한 폭력에 의한 방어(방어폭력), 이를 통해서 폭력이 행사되는 일방주의적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다. 거부와 방어만으로 기존 폭력과 폭력 관계는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침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폭력은 지금 거부에 나선 바로 그 사람의 활력을 도둑질 한 것이었고 그 도둑질이 지속될 수 있게 만드는 관계틀이었기 때문이다. 거부를 통해 폭력의 재생산기반을 없애고 방어를 통해 더 이상 활력에 대한 박탈이 불가능한 틀을 짜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때 방어를 위한 폭력은 공격해 오는 폭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강렬도가 폭력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생사를 건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