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의 미학으로 1968 이후의 예술들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이 (어제 미학 세미나에서) 제기된 문제였다. 이 질문은 세 가지의 전제들을 함축한다. 하나는 루카치 미학이 무엇인가? 혹은 적어도 그 본령이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을 이미 전제한다. 또 하나는 1968년 이후의 예술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에 대한 답을 이미 전제한다. 셋째로 미학의 목적과 기능은 무엇인가? 혹은 그것은 예술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이미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루카치 미학을 공부하고 있는 현재의 단계에서는,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는 아직 문제로조차 등장하지 않았고 첫 번째 문제를 더듬고 있는 단계에서는 사실상 아직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는 것이, 아니면 문제의 규모가 너무 커서 실효적인 답을 내오기에는 막막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68혁명 이후 현대예술과 관련하여 루카치 미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정도로 조금 좁히고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여기에서 추구하기보다 그것에 답하기 위한 몇 가지 실마리 생각들을 정리해 두기로 하자.

1. 루카치 미학의 핵심이 미메시스와 카타르시스에 있다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는 미메시스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디우의 분류법에 따르면 이것은 고전적 도식에 속한다. 루카치는 예술을 진리형식의 하나로 보면서 그것의 기능을 윤리에서 찾는다. 1962년의 『미학』에서 그의 미메시스 개념은 매우 확장되어 있다. 그것은 서정시는 물론이고 춤, 음악 등을 다룰 수 있는 것으로 확장된다. 루카치 미학은 소설 미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세간의 비판을 강하게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이 확장 과정은 미메시스를 더욱 근본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요컨대 미적인 것은 일상적인 미메시스와는 달리 직접적 구체적 유용성을 유보하면서 과학과는 달리 인간중심적으로 객관현실의 특수성을 미메시스한다는 것이다. 무관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인간중심적 미메시스는 수용자의 작품 미메시스를 거치면서1 일상에서 '전체적 인간'인  예술가와 수용자를 '전체로서의 인간'으로, 류적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고양시키는 윤리적 효과를 발휘한다.

2. 미메시스가 아무리 확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체와 객체로 분리된 이원화된 세계를 가정하는 한, 그 분리를 전제 한 위에서의 상호작용을 상상하는 한, 그래서 주체로부터 분리된 객관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이라는 사태를 이해하려고 하는 한, 그 틀은 협소하고 보수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협소하다는 것은 그것이 상상과 발명과 창조라는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과 관계 맺을 개념적 도구들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며, 보수적이라는 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목표(전체적 인간)에 예술을 종속시키며 이미 그것에 도달한 예술가가 수용자를 윤리적으로 교화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배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술은 수용자를 가르치는 하나의 권력형태로 이해될 것이며 다시 예술가는 더 원숙한 의식을 가진 미학자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진리형식으로 본다는 점에서 예술을 가짜진리로 보는 플라톤, 브레히트와 루카치는 다르지만 윤리(카타르시스, 치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루카치는 지도를 추구하는 브레히트와 공통되는 부분이 매우 크다.

3. 루카치적 의미의 미메시스는 '유사하지 않은 것들의 공통되기'의 과정에 수반되는 일정한 사태들에 대한 인간중심적이고 시각중심적인 해석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벤야민은 미메시스를 상응에서 번역으로 치환하고 재현보다 표현을 중심적 계기로 설명함으로써 미메시스 개념을 확장했고 아도르노는 '비동일적인 것(das Nichtindentische) 혹은 타자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 혹은 그러한 요소들에 합당하고자 노력하는 사고의 의식적 태도'로 확장함으로써 미메시스를 공통되기의 계기로 설정하는 사유에 한층 가까이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반영은 탈마법화(벤야민)나 경험하기(아도르노)로 되고 객관적인 것 혹은 대상은 비동일적인 것, 즉 타자로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탈마법화나 경험적 지각을 감각의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세계를 떠난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세계는 존재자의 지평에서 발생하는 지각과 경험의 구조이다. 들뢰즈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서의 감각을 지속하도록, 자립하도록 만드는 것을 예술로 봄으로써 존재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존재를, 지각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지각을, 정동작용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동을 감각화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다.

4. 들뢰즈는 존재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현실적 공통되기로 보기보다 존재자들의 지평에 잠재하는 것으로 보기를 더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적 감각화라는 특수한 활동양식이 일상적 삶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으로 의미있게 되고 예술가는 바로 잠재력, 잠재로서의 존재를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존재론적 공통되기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가? 들뢰즈에게서 예술은 루카치와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루카치에게서처럼 존재가 현현하는 것으로서의 '진리'의 독특한 장소이다. 예술은 삶 속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예술로서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닫힌다. 예술을 특이한 것들의 공통되기의 특수한 양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서 분리시키기보다 삶의 평면에 그것의 일부로 배치하게 되면 일상의 노동과 예술 활동 사이의 간극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느끼고 행하는 시간에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된다. 문제는 왜 노동의  시간에 개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이다. 왜 노동과 예술은 유리되어 있는가? 왜 우리는 예술을 하는 시간에 노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노동하는 시간에는 자신이 예술과는 다른 뭔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감각과 감정들의 체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체제의 문제일 것이다. 공통되기의 지평에서 노동과 예술은 구분될 수 없는 것이지만, 바로 공통되기를 저지하는 체계의 존재로 말미암아, 우리는 양자를 구분하게 되는 아비투스를 반복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 공장, 기업, 대학, 국가, 브랜드, 주권 등의 사유재산 체제들로 구성된  자본주의는 예술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노동적대적인 체제라고 해야 한다. 루카치는 노동을 일상적 삶의 행위양식으로 보는데, 노동이  삶의 행위양식인 한에서 자본주의는 삶 적대적인 체제일 것이다.

5. 우리의 사유가 딛고 서 있고 또 전개되는 기존의 모든 범주들을 어떤 과정의 결과이자 효과로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술을 마시기 전의 신체는 재현적이지만 조금씩조금씩 술을 마시면 신체는 점점 표현적 상태로 들어간다. 술 마시지 않은 신체와 술 마신 신체가 이토록 다른 기계로 작동한다면 자본주의의 신체와 비자본주의의 신체가 아주 다른 행동기계일 것임은 분명하고 그만큼 다른 사유기계로 될 것이다. 사유혁신은 신체혁신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신체혁신 없이는 큰 실효를 거둘 수 없다. 그런데 신체는 항상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미메시스하는 신체, 대상을 번역하는 신체, 타자를 경험하고 지각하는 신체, 주객관계에서 감각존재와 삶을 드러내는 신체, 과정에서 벗어날 물질을 생산하기보다 공통되어가는 특이자들의 조우의 기쁨을 생성하는 말벌-난초 기계의 신체, 이것들은 순수한 사유혁신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혁신과 평행하는 사유기계의 작용의 효과이다. 루카치는 플라톤의 예술추방론이 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의 산물로서 이해한다. 브레히트가 예술의 감정이입 효과를 거부하면서 소외효과를 제안하고 아방가르드가 불꽃의 삶을 살다가 사라지고 폴 비릴리오가 빛의 예술, 소멸의 미학을 경고하면서 오래된 물질의 예술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더 이상 미메시스는 없다는 외침이 예술시장을 구원할 메시아처럼 기능하는 이 미학의 소용돌이와 아비규환이야말로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와 해체의 과정을, 새로운 신체의 탄생을 알리는 산고로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1. 벤야민과 랑시에르에게서 번역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 [Back]
2010/03/21 09:32 2010/03/2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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