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gmentoj 2007/02/03 07:54

Humuro

Mi mankis la problemon kaj signifon de humuro en mia raporton pri moderna literaturo en Koreio titolita "Superpontante la malapero de popolo kaj la fino de moderna literaturo".
(Pensu ekzemple, Pak Min-Kju-on.) Do, mi volas adici al la fino de tezo 8 suban frazon, kiu markiĝis per *.
La frazo signifas, ke humuro estas la nova afekta nivelo de samtempa literaturo, kiu superpontas la tragedia afekto en 1980a jardeko kaj patosa afekto en 1990a jardeko.

민중의 소멸과 근대문학의 종언을 넘어


1. 1987년을 정점으로 산업노동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인가? 내부적으로는 첨단산업 및 통신산업으로의 산업재구조화, 외부적으로는 세계화 움직임의 확대. 이것이 산업노동의 봉기, 반란에 대응하는 자본의 반격방식이었고 이것이 산업의 일국적 세계적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재구성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1990년대에 노동의 정보적, 소통적, 정동적 재구성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산업노동은 전통적인 중심성을 상실하며 유연하게 재구성되는 노동의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섬처럼 되어간다. 1991년 이후 대기업노동조합 헤게모니 하에 놓인 민주노조운동이 1995년 그 화려한 전국조직을 출범시킴과 더불어 사실상 표류를 시작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6/7년의 총파업은 민주노조운동이 광범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마지막 투쟁이었다. IMF는 산업노동의 입장에서 보면 일국에서의 노동재편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노동재편의 광대한 바다로 떠밀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1998년 노사정 체제에의 참여를 둘러싼 내부 논쟁은 산업노동에 기원을 둔 민주노조운동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이었다. 왼편에는 광대한 비정규, 이주, 정동, 지식 노동의 소용돌이가 일고 오른편에는 권력의 깍아지른 절벽이 우뚝 서 있는 곳을 표류하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논쟁이 반복될때마다 민주노조운동은 정규직, 대기업, 남성이라는 특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의 절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노사정 협약을 통한 안정된 권력 분점에 채 이르기도 전에(혹은 그러한  형식을 피한 채) 그것은 이미 기업단위에서 스스로 권력체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2. 1980년대 민중문학, 노동문학의 운명은 산업노동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 농민적 정서에 기반하여 발생했던 1960-70년의 공동체 민중문학은 노동문학에 밀려 주변화되었다.[*물론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노동문학의 쇠퇴를 배경으로 부활한다. 1990년대의 생태문학, 생명문학이 그것이다.] 노동문학은 그것의 작품적 질의 성과와는 별개로 민족문학, 민중문학의 가능성을 대변하게 되었다. 문학의 역할과 지위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노동-민중문학은 한편에서는 현실재현주의로서의 리얼리즘으로 나타났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모더니즘적 선동주의, 계몽주의, 실험주의로 나타났다. 이것은 문학의 전위적 역할을 공통적으로 승인한다. 그리고 이것이 문학이 문화의 선두, 전위에 섰던 시대를 가능케 했고 이후 문학 위기(전위로서의 문학의 불가능성) 이론의 조건이 된다. 당파성, 민중성, 전형성이라는 3대 미학적 개념에 따라 산업노동과 문학의 관계는 마치 대중과 전위의 관계처럼 구조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산업노동의 중심성 상실은 필연적으로 문학을 표류하게 만든다.


3. 1990년대 문학의 표류는 산업노동의 헤게모니 하에 구축되었던 민중이 소멸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헤게모니적 집단이 없을 때 민중은 구성될 수 없다. 1980년대적 좌파 민중[현존하는 국민의 대안집단]의 소멸은 산업노동의 헤게모니 소멸의 직접적 결과이다. 민중은 그 자립성을 잃고 국민 개념 속으로 흡수된다. 민주노총에 기반한 민주노동당의 전신이 ‘국민승리21’로 나타났던 것은 상징적이다. 도미노 현상: 산업노동의 헤게모니 붕괴->민중의 자립성 붕괴->민족 개념의 대안성 상실->노동, 민중, 민족 개념의 국민으로의 흡수. 이제는 낡아버린 민족문학의 위기론, 그리고 최근의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개칭문제는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후일담 문학은 민중의 소멸을 자기확인하는 한 형태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중의 소멸을 그 표면에서만 포착하며 그것을 주체성의 소멸과 동일시하는 신비화를 꾀한다. 산업노동의 헤게모니 체제에서 억눌려 있었던 많은 것들이 작은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한다. 생태문학은 산업노동의 붕괴를 전통적 농업노동, 자연주의적 생태노동의 긍정성을 부각시킬 계기로 삼는다. 산업노동의 남성중심주의가 동요하는 상황에서 여성성(신경숙, 김인숙, 공선옥, 공지영 등)이 문학을 통해 분출하고 또 힘을 얻는다. 반가족주의. 권력 비판으로서의 아나키즘. 그리고 또 극단적 냉소주의와 나르시즘의 문학들. 이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문학이론들은 내면성, 개인성을 대안으로 내세우기 시작하며[문학의 미시정치화]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문학이론들은 당파성 고수라는 환영에 사로잡히거나 한국문학, 통일문학, 아시아문학 등등의 담론적 영토확장을 통해 자신의 공허를 채운다[문학의 거시정치화]. 민중의 소멸과 그것의 재구성이라는 측정키 어렵고 형언키 어려운 잠재적 과정의 실체는 오리무중에 있다.


4. 주목해야 할 것은 IMF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갑작스런 침몰이다. IMF가 1991년 이후 득세하던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 관념을 붕괴시켰기 때문이다. 오직 거시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거대한 사회적 위기가 다시 출현하고 지금여기에서의 삶이 정리해고, 실업, 노숙으로의 향하는 길임이 드러났을 때, 사회적 적대는 더 이상 없다는 관념은 설득력을 잃었다. 국가가 폭력을 동원해서 민중들을 몰아넣은 곳은 세계시장의 거친 파도 속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원리이자 삶의 생리로 정착되는 시기. 신자유주의의 탈민족주의 돌풍에 대한 대응은 정치적 경향에 따라 달랐다. 좌파는 민족주의적 방어의 전술을 내놓으며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수세적이고 보수적인 대응만을 일삼았다. 이것은 세계화에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다중들의 욕망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중도파는 확대된 지역주의로서의 아시아주의를 통해 자신의 민족주의를 확장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지역화했다. 우파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보냈고 신자유주의를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국가 강화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5. ‘정리해고’의 과정이야말로 민중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강제로 해체되는 표면과정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로, 노숙자로, 행상으로, 그리고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로 재편되었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현장조사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인구의 대다수가 매우 다양한 노동현실에 강제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해외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들이 합류함으로써 오늘의 노동현실의 복잡성, 이질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삶 그 자체를 항구적 위기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사회적 존재 차원에서의 다중이 형성되는 기반이 된다.


6. 위로부터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아래로부터 세계적 인구재구성이 진행되는 이런 상황에서 문학판을 휩쓴 것은 우선 강력한 시장주의였다. 시장에서의 성공여부가 작품의 생사를 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세계화는 한국문학에 노벨상 수상이야말로 한국문학 세계화의 진정한 지표라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문학적 중도파에 의해 주도된 아시아문학 담론은 세계화의 하위담론으로 자리잡았다. 한류와 결부되어 한국의 대아시아 영향력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은 『아시아』지의 창간을 비롯하여 아시아 수준에서의 다양한 작가교류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미 국민문학(즉 한국문학)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 민족문학은 아시아문학 구축 흐름의 국민적 마디로 기능했다.


7. 세계화의 권력풍향에 조응하는 이러한 문학 경향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삶의 위기를 경험하는 다중과 연결되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은, 다중의 삶의 요소가 이러한 작품들 속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다중이 보이는 사실적 측면들을 넘어 그들이 갖고 또 만들어 가는 욕망들 및 기획들과 결부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창작의 이러한 시장화, 권력화를 거부하는 진지한 작가들이 있었지만 그 거부가 강력할수록 낡은 관념체계에의 집착이 강했던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것은 이 진지한 창작의 고립을 가져왔는데, 예컨대 전통적 노동문학 조류를 고수하는 흐름이 그러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지난날의 그림자를 찾는 데 많은 노력을 빼앗겼다. 따라서 시장화, 권력화에 매몰되어 삶의 새로운 경향을 단지 대상과 수단으로만 파악하는 창작조류를 거부하면서도 낡은 세계상의 창작적 투영에 머물지 않는 문학, 오늘날 부단히 재구성되면서 나날이 새로운 욕망을 창출해가고 있는 다중의 삶과 내재적으로 결부되어 그것의 역동적 표현으로 될 문학의 창조가 문제로 주어지게 되었다.


8. 그러므로 2000년대의 새로운 문학, 이른바 ‘젊은’ 문학을 이 문제에 대한 문학적 응전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2000년대의 문학은 서정 행위의 재편(‘다른 서정’), 환상, 공상, 판타지, 상상 등 의 적극적 도입, 새로운 감각의 창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구축, 경직된 경계를 넘어서는 노마드적 정서의 표현 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응전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서정 행위를 단성적 주체의 행위에서 다성적이고 이질적인 과정으로 보여줌으로써 시는 다중의 혼종성을 표현할 능력을 갖춘다. 상상력의 적극적 도입을 통해 시는 사실이나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다중의 잠재성을 그릴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된다. 자본의 세계가 부과하는 고정된 감각의 틀을 넘어서 다중의 감각을 그려내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전개된다. 가족, 민족, 국경, 성별 등을 넘어가는 노마드적 정서와 사고법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것은 해학, 유머의 정동을 통해 표현되면서 80년대의 비장, 90년대의 비애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정서적 차원을 구축한다.


9. 이것이 일상적 삶의 정치성의 현현이지만 그것이 공적 정치성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사적 정치성의 발현으로 제한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게서 공과 사의 대립은 의미를 잃는다. 이 양자의 뒤섞임 속에서 개체는 특이한 주체성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의 정치성의 현현이 사적인 것에로의 중심이동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선호할 시장적 대중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미만해 있는 냉소주의와 결합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경계를 유연화하고 새로운 분배의 선을 창출하는 노마드적 흐름은 기존의 질서와의 전쟁을 수반하지만 오늘날 이 전쟁은 노마드적 개체들, 주체성들의 네트워크의 구축 없이는, 즉 그들을 공통기계로 전화시키는 노력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10.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문학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넘어서 더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은 국민문학으로서 존립해 왔고 국가건설에 복무해 왔다. 주체적으로 그것은 민족적 공통어의 가공을 통해 민중을 형성함으로써 국가를 건설하는 문학이었다. 따라서 민중의 소멸이 근대문학의 종언, 근대문학의 불가능성을 가져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의 종언으로 될 것인가? 오늘날의 문학, 특히 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또 그렇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개척지들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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