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교류에 대한 강조를 나는 지각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대부분의 교육 시스템이 지각교육에 매몰되어 있고 그것도 가장 피상적인 암기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감각, 나아가 몸 전체가 학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감각에 대한 강조는 커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그 무엇을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적 교류라고 했을 때 그 '감각'이 무엇일까요?
시각과 청각?
이미 기존의 교육은 충분할 만큼 이것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시청각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청각을 동원합니다.
우리 역시 시각과 청각을 통한 관계를 나누었습니다.
촉각과 후각?
어제 우리는 손을 잡는 촉각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따뜻함, 촉촉함, 부드러움....
나는 알프레도에게 내게서 마늘 냄새가 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미각?
우리는 루미 님이 사온 귤로 미각적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눈, 귀, 피부, 코, 혀를 통해 접수되는 감각들.
이것들의 총체적 동원이 우리의 공동체적 교류의 불균형을 없애고 관계의 균형있는 발전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주장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이 놀라운 점입니다.
그런데 교실이 아니라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요?(물론 학교교실도 매질이라는 방식으로 감각=통각을 교육도구로 사용합니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감각적이지 않은가요?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었으나 지성은 놀라울 정도로 지체되어 있다."
이것이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될 정도로 말입니다.
모든 상품들(특히 광고상품들)이 우리를 감각적으로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영화 '감각의 제국'은 60년대 후반 불붙었던 혁명적 정신이 감각에 대한 탐닉으로 위축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확실히 한국도 이미 감각의 제국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감각적 교류란 이미 이 제국의 기관을 반복하는 어떤 작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은 시청각이나 촉각, 후각, 미각 등 유기체로서의 기관이 우리에게 주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다중지성이 이미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중은 몸입니다.
다중지성은 몸과 지성의 불가분한 융합체입니다.
지성과 분리되지 않는 감각적 몸이며 몸과 분리되지 않는 지성입니다.
다중지성은 감각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실천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지각과 감각에서 정동과 사유를 거쳐 행위로 이어지는, 활력의 선형적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비물질노동과 다중](갈무리)에서 꽤 깊이 다룬 적이 있지 않은가요?
이제 우리는 감각작용들을 넘어서는 다중지성으로서의 감각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감각적 교류의 의미를 좀더 깊이 되새길 필요 앞에 직면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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