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네그리의 홀로웨이 비판
작성자 트리어늘보     2006/09/22



링크_01  http://info.interactivist.net/article.pl?sid=06/09/16/2032251&mode=nested&tid=9

네그리가 최근에 낸 책인 [글로벌]이란 책에 실린 글입니다. 그 책이 스펜인어로 되어있었는데, 그 글중 일부를 엘킬롬보인터갈락티고 라는 단체에서 영역을 했습니다. 홀로웨이가 행한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의 비판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글로벌]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정치학을 다루다보니, 그곳에서 네그리와 더불어 유력한 정치학중의 하나인 홀로웨이 대한 비판을 실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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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홀로웨이의 『권력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가』 비평
토니 네그리


[영역자주: 존 홀로웨이의 『권력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가』(이하 『권세바』)에 대한 다음의 리뷰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기우세페 코코(Giuseppe Cocco 최근에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이탈리아 정치과학자)가 공저했고, 아르헨티나의 파이도스(Paidos)라는 출판사에 의해 스페인어로 출간된 『글로벌: 지구화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삶권력과 투쟁들』의 13장의 부록으로 제시되었다. 네그리 서술의 특성과 처음 출판된 스페인어로 인해 만들어진 모호함 때문에, 이 번역은 임시적이며, 우리는 수정을 위한 어떠한 제안도 환영할 것이다. -영역: 엘 킬롬보 인터갈락티코(El Kilombo Intergalactico)  

역자주: 이들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http://www.elkilombo.org/  를 참조하라. ]

존 홀로웨이의 『권세바』는 아름답지만 이상한 책이다. 그 책의 역설은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우리 책 『글로벌』의 기반이 되는 방법)를 비판하면서, 홀로웨이가 변증법적 맑스주의(그가 “형태문제”라고 부르는 것)를 세계의 물신주의적 특성(이것이 그의 현실원칙이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행위를 위한 적대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홀로웨이는 배타적으로 그것의 적대적 측면으로 (사용된 변증법에 의해 공격당하는) 오뻬라이스모를 비판하는 반면, 그것의 물신적 측면만을 현실로 고려한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홀로웨이의 관점 내에 행위를 위한 원칙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 보자. 홀로웨이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매우 거칠다. 그에 따르면, 오뻬라이스모는 “급진 민주주의” 이론이고, 그에 따라 (전통적 논쟁대로) 오뻬라이스모는 노동계급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맑스주의 변증법을 세계의 급진적 부정성의 발견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웨이는 이러한 전통(때때로 비판할 지라도, 그가 많은 존경을 표하는 것)에 부분적으로만 속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가를 알아볼 것이다.
 
홀로웨이는 권력의 모든 형태들을 오직 배타적으로 물신적인 형태들로서 간주한다. 권력이 표현되는 각 계기와 각 형태는, 비록 그것이 적대적 방식 속에서 일지라도, 그것의 물신적 형태의 효과 때문에 결코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역능은 항상 (자본주의적 권력potestas에) 상동적으로만 존속 할 뿐이다. 자 여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전 우주는 암흑 속에 있다. 만일 당신이 코뮤니스트이고 당신이 힘을 가지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신은 파시스트이다. 오직 거부만이 혁명적 계기이다.

거부를 넘어, 억압된 자들의 “비명”을 넘어, 현실은 완전히 사물화되고(thingified), 변증법적 승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부정성은 긍정된다. (우리는 여기서 부정성에 대한 루카치적 형태들과 모든 포스트모던적 조성들(tonalities) 사이에서 드러나는 모호한 유사성을 보고 있다. 데리다적 표현으로 ‘주변적인 것 the marginal', 아감벤에 따르면 “벌거벗은 삶” 등등) .그러나 홀로웨이는 이들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그들을 충분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홀로웨이는 푸코와의 매우 모호한 관계를 주장한다. 그는 푸코에 매혹되었지만, 동시에 푸코적 차이들의 지평(더 낫게는, “저항”의 무차이적indifferent 지평) 내에서 적대의 생산적 잠재성(푸코 자신의 언어로는 “주체성의 생산”)과는 합쳐질 수 없었다. 푸코적 저항의 절합된 동학의 국면에서, 홀로웨이는 절대적 적대의 순수한 재긍정인, 착취당하는 자들의 “비명”을 주장한다. 주의 사항: 홀로웨이는 변증법이라는 개념이 엥겔스의 전통 속에서 그리고 후기 소비에트 맑스주의적 관점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퇴화와 마주한다. 거기서 변증법은 실제로 자연법적인 것이 된다. 이점에도 불구하고 홀로웨이는 그가 이러한 어려움을 순수하게 부정적 용어들 속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후에 이러한 선택의 정치적 효과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홀로웨이의 오뻬라이스모 비판을 고찰하러 가보자. 홀로웨이가 어쨌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오뻬라이스모가 노동의 힘에  돌리고 있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계급투쟁에 돌리고 있는 구성력(the constitutive power)이다. 홀로웨이는 이러한 속성을 노동의 가치와 정치적 자유의 형상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기능하는 구성된 힘(constituted power)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착취라는 개념은 거의 제기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홀로웨이의 주장은 자기가치화라는 개념(그는 해리클리버의 작업 속에서 정교화된 그것을 발견한다)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사람들이 홀로웨이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그 자신을 벗어나고 있다. 여기서, (백하우스Backhaus의 방식 속에서 해석되고 홀로웨이에 의해 다시 채택된) 맑스주의적 변증법의 물신적 형태는 모든 변증법적 요소들, 특히 적대적으로 남아있던 것들을 질식사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홀로웨이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거의 관계가 없다) 남는 것은 물신주의, 즉 거의 회복될 수 없는 실제적인 것의 비극적 형태이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절대적 사건, 즉 “혁명!”이 될 것이다.

오뻬라이스모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위에서 언급되었던 모순은 전체 속에서 명백하게 된다. 홀로웨이는 오뻬라이스모의 구성적 관점을 “기능주의적”인 것이라고 특징화하면서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한, 기능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회피한다. 그것은 모순들을 중립화하고 모순들과 차이들의 승화로서의 변증법을 채택한다. 기능주의는 유물론에 대한 이단이다. 기능주의는 변증법을 해결의 요소로만 자신 내에서 찬미하면서, 선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정된 기능주의에 대해, 오뻬라이스모는 이러한 그림을 단지 거꾸로 돌릴 뿐이다. 노동의 힘의 적대적 압력은 (변증법이 내팽겨쳤던)  모순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킨다. 모순의 이러한 심화는 두 가지 효과를 가진다. 첫째는 주체들의 일관성(consistency)을 강조할 수 있다는 것(가령 노동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다중)과 이러한 주체적 현실을 변형의 연속적 과정, 존재론적 변형의 배치(dispositif)로 인식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거기에서 매순간 주체(노동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다중)를 자본의 더 외부로 밀어내는 효과가 나타난다. 탈주는 정확하게 이러한 과정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닌 과정, 투쟁이며, 결말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계보이며, 몽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위의 주장들에 대해 홀로웨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변증법이 자본의 무기이며, 그의 손에서 노동을 위한 사형선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해소될 수 없는 조성(tonality), 즉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는 해결할 수 없는 희생물이다. 해결책은 외부로부터만 올 수 있다. 우리의 반론: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들이 주어진 조건이라면, 혁명은 구성력이 될 수 없고 오직 신비적 사건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노동거부”(즉 노동으로부터의 해방emancipation과정 내의 해방liberation의 요소들) 내어서 “구성력”의 요소들 내지는 배치들을 규정짓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오히려 규정짓는 것을 허용하는 부정확한 과정에 관한) 그의 주장 속에서, 홀로웨이는 계급투쟁의 역동적 관점 모두를 막고, 그러므로 소위 사회주의의 구체적 역사에 부딪친다. 즉 홀로웨이는 계급투쟁을 제도적 형태에 내주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홀로웨이가 선호하는 것으로서의) 계급투쟁은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구성적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에 종결을 가져오거나 그것을 닫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투쟁을 일정 정도의 자연주의적 형태로, 또는 같은 것의 반복으로 이끄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노력은 프롤레타리의 잠재성의, 계급투쟁의 상이한 모순들(polarities)의 새로운 일관성 속에서 계급관계를 발전시키고, 절합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홀로웨이의 논증의 불행은 개혁과 혁명간의 모든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관계들에 대한 그의 급진적 거부 속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 주권이 더 이상 권력의 통일 속에 집중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제도들 자체의 본성과 근본적 지평 속에서 이중성을 받아들이고 운동과 “거버넌스governance” 사이의 관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기에는, 완전히 위험한 것이 된다. 이것은 대조적으로 그람시(토글리아띠의 그람시가 아니라, 레닌주의자로서의 진정한 그람시)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홀로웨이의 입장이 단순히 변증법적 (변증법적 맑스주의) 전통을 변호하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코뮤니즘적 대안들의 근본적 효과성들을 증진시키는 장점을 가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홀로웨이의 담론에는 사빠띠스따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웨이가 “형태문제”라고, 또는 물신주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담론 속에서 비판이나 정치학적인 것이라기 보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범주로 환원되 어진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동안 프롤레타리아 유럽의 공산주의 좌파들의 변증법적 철학에 의해 생산된 유사한 이론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들에 동의하는 것은 이미 어렵다. 그리고 21세기 즉 제국의 세기 동안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들의 삶정치적 현실 내에서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물신화(존재론적 붕괴와 그것의 실천적 붕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부활rebirth”의 몽상을 만드는 방식 속에서, 계급화된 주체(classed subject)를 가져오고 부정한다.

오뻬라이스모는 자신의 존엄을, 개혁이라는 개념 속에서 혁명이라는 개념을 해소시키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서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효력을 혁명의 개념 속에 개혁의 개념을 항상 해소시킨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또한 이러한 연계(개혁-혁명) 내에서 그것(생산관계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 주체의 자율/독립은 자본관계로부터의 탈주에 재접합된다.)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갖는다. 즉 이러한 주체는 착취와 함께, 계급들 바로 그 존재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홀로웨이의 노선은, 삶권력과 삶정치적 잠재성의 관계를 국가와 발전이라는 범주 내에서 평탄화시키는 특정한 제도적 라틴아메리카 좌파에 의한 시도들에 대한 최고의 반대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부정변증법적 틀에 의해 제한된 채 남는다. 부정성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욕망이고, 끊임없는 기쁨, 평화 그리고 코뮤니즘을 긍정하는 다중적 필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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