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1 1905
이중권력 1917년 2월
소비에트 1917년 4월
당권력 1917년 10월
제헌의회 1917년 12월
전러소비에트대회 1918년
3개의 사상 속에서 레닌의 동요
의회적 제헌권력=사회민주주의적
평의회적 제헌권력=코뮤니즘적
당적 제헌권력=볼셰비즘적
이중권력 1917년 2월
소비에트 1917년 4월
당권력 1917년 10월
제헌의회 1917년 12월
전러소비에트대회 1918년
3개의 사상 속에서 레닌의 동요
의회적 제헌권력=사회민주주의적
평의회적 제헌권력=코뮤니즘적
당적 제헌권력=볼셰비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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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lsheviks in power
When the Bolsheviks seized power in Petrograd in November 1917, they faced many problems. Not least was the fact that the Bolsheviks only controlled a very small part of Russia – basically the land between Petrograd and Moscow, a rectangular band of territory 30 miles by 400 miles. Outside of this territory, there were many groups that were opposed to the Bolsheviks. Some areas broke away from Russia to become semi-autonomous regions. Even in the land between Moscow and Petrograd, the Bolsheviks were far from being free of enemies.
However, the Bolsheviks did have a number of major advantages over their opponents. They had a leader who was driven by energy and desire – Lenin. His military commander was equally as gifted – Leon Trotsky. The party was actually reasonably small in numbers. This made party discipline much easier to control and maintain. The party had a central body of authority called the National Council. This elected the party’s commissars (ministers) and Lenin was the president. Such tight organisation was vital for success. No other political party in Russia had such organisation and, as a result, the Bolsheviks had a major advantage over them.
The first task for Lenin was to withdraw Russia from a highly unpopular war. Both sides benefited from this. The Germans could shift all their forces on the Eastern Front to the Western Front. Lenin could concentrate all his resources on what was happening in Russia. On December 14th, 1917, an armistice was concluded between Russia and the Central Powers.
The start of the negotiations with the Germans did not go smoothly. Trotsky did not share Lenin’s belief that it should be peace at any price. As Foreign Commissary, Trotsky started the first talks. Trotsky believed that the Russian Revolution would be the catalyst for a world revolution with the workers across the world showing their support for the Bolsheviks. He therefore felt that the Germans were not in the strong position they believed themselves to be as, in Trotsky’s mind, the workers in Germany would rise up in support of the Bolsheviks. He even appealed to the German workers directly. When it became clear that he was wrong and he failed to soften the German demands, he walked out of the negotiations.
The Germans went back on the armistice on February 12th, 1918 and advanced a further 100 miles into Russia in just 4 days. Lenin then took charge and ordered that there should be peace at any price. The result was the Treaty of Brest-Litovsk. This treaty took away from Russia all the land gained since Peter the Great and it separated the Ukraine. Germany was to take from her new territory what she felt was needed to fight the war. When Germans complained about the terms of the Treaty of Versailles, many reminded them of the terms the Germans were willing to impose on the Russians with Brest-Litovsk.
However, the treaty gave Lenin what he needed – time to concentrate solely on Russia. Many groups had formed that wanted the Bolsheviks destroyed. In the Russian Civil War, these were to be known as the Whites. They had little in common, other than a desire to rid Russia of the Bolsheviks.
Lenin also faced an immediate problem in the rectangle of land controlled by the Bolsheviks. Kerensky had promised elections for a constituent assembly while head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July 1917, Lenin had called for a constituent assembly, so he could hardly campaign against one now. Therefore, in December 1917, elections were held for a constituent assembly. The Social Revolutionaries gained most seats (370 out of 703) while the Bolsheviks only got 168 seats. It was obvious that the constituent assembly would be highly critical of Lenin and the Bolsheviks – especially the 100 Mensheviks elected to it. Those voted to the constituent assembly were allowed to meet in the Tauride Palace. The Palace was then surrounded by Red Guards and those in it were told to disperse. It was the first and last time it met.
Lenin could now concentrate on the impending civil war. He also needed to introduce an economic system that was commensurate with his beliefs and one that would benefit those under Bolsheviks rule. This economic policy was to be called ‘War Communism’.
http://www.kgv.edu.hk/history/Y12-13/Russia/1
이 자료에서 주목할 것, Sovnarkom
1917년 5월 5일에 러시아에 수립된 새로운 정부, 곧 소비에트의 다수파도 참가한 \'연합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겠다던 방침을 지니다 인민의 저항으로 무너진 정부의 뒤를 이어 출범한 만큼, 전쟁의 문제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케렌스키, 체르노프와 함께 새 정부를 주도하던 체레텔리(멘세비키)는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여 자국 정부에게 종전을 촉구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런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연합국의 압력을 받아 \'대공세\'의 길을 택했다. 새 정부는 \"2월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며 전장에서 \'시민으로서의 병사\'를 설득하려 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대공세 직전의 일주일 동안 10만 명 이상이 탈영했다. 6월 18일에 시작된 공격의 초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제압하는 듯했으나, 7월 2일부터 감행된 독일의 반격으로 전세는 다시 러시아에게 불리해졌다. 두 주일 동안 40만의 러시아군이 죽거나 다치거나 적에게 잡혔고, 전선도 200km나 후퇴했다. 한편, 대공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6월 18일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50만 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멘세비키와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은 \"제헌의회를 거쳐 민주 공화국으로\"라는 깃발을 준비한 반면에 볼세비키는 \"노동자 관리 만세\"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8월 9일에 케렌스키가 제헌의회 선거를 11월 12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으나, 코르닐로프의 눈에는 케렌스키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런 코르닐로프가 8월 12일부터 열린 국가자문회의를 겪으며 쿠데타를 생각하게 되었다. 총리가 된 직후 케렌스키가 소집을 요구해 온 그 회의는 기업가 단체와 노동조합을 포함한 각계 이익집단 대표들과 교회 지도층과 장교 등이 참석하여 국정을 논하는 회의였다. 회의에는 그 회의가 반혁명 은폐 기도라며 24시간 항의 파업을 벌인 볼세비키를 제외한 정당의 대표들도 참석하여, 모두 2천 5백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코르닐로프는 볼세비키에 대한 케렌스키의 미온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러시아를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며, 군에 대한 소비에트 간섭의 배제,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혁명위원회의 해체 또는 권한 축소, 철도와 군수 공장의 군사화, 사형 제도의 부활, 사회 분야의 국가 개입 중단 등의 계획을 발표했다. 케렌스키가 그의 계획에 반대했지만, 코르닐로프는 노동자와 농민을 제외한 대부분이 자신을 지지함을 확인했다. 이로써 옛 차르 지지자는 물론이고 부르주아와 연합국 정부는 코르닐로프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등장에 불안감을 느낀 케렌스키는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에게 전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입헌민주당의 각료들이 이를 거절하자,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해임하고는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임시정부 수반 르보프 공이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를 연이어 만나 회담을 열고 타협 방향을 찾았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케렌스키가 국가자문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무시하자, 결국 코르닐로프는 8월 25일에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제3기병 군단을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8월 26일에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사임을 요구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했으나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해임했다
레닌은 더 직접적으로 \"볼세비키는 왜 바로 이 순간에 권력을 장악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전황과 임시정부의 제헌의회 소집 계획 등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물론 레닌은 좁은 의미에서의 봉기 \'날짜\'나 \'시점\'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오직 노동자와 병사, 곧 대중과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소리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374쪽) 하지만 레닌은 다시 분명히 말한다. \"중요한 점은 당에게 과업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당면한 과업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와 그 관구)에서의 무장 봉기와 권력의 장악 및 정부의 전복이다.\"(374쪽) \"볼세비키를 지지하는 \'형식적\' 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천진난만한 것일 게다. 어떠한 혁명도 결코 그것을 기다리지 않는다.\"(375쪽)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즉시 권력을 획득함에 의해 ……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승리할 것이다.\"(375쪽) 소비에트 대회나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지 말자는 것이다. 4-2. 집권에 대비한 레닌의 연구 1917년 9월에 레닌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가 아니라 \'볼세비키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저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레닌에게는 집권 이후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레닌은 8월에서 9월에 걸쳐 <<국가와 혁명>>을 썼는데, \"맑스주의 국가 이론과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레닌은 그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국가에 대해 언급한 저작들을 설명하며 러시아에 수립될 새로운 국가 체계에 대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1992년에 문성원과 안규남이 번역하여 돌베개출판사에서 낸 것이 있다.) 이 책은 볼세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인 1918년 12월에 출판되었지만, 아나키스트는 물론이고 플레하노프와 파넨쿠크 등의 국가 이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는 아직도 공정과 평등이 실현될 수 없\"고, \"부의 차이, 그것도 불공정한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라며,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당장 공산주의가 수립되는 것이 아님을, 곧 국가가 사라질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었다. 오히려 레닌은 그 책에서 \"계산과 통제\"가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국가와 혁명>> 5장 4절, 돌베개 136쪽)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레닌은 1917년 9월 10-14일 <<임박한 파국,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책자를 썼는데, 파국으로 치닫는 러시아를 구할 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아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것밖에 없다며 집권 이후에 시행할 강령들을 밝히고 있다. (한국어로는 1990년에 이창휘가 번역하여 새길출판사에서 발간했는데, 그 책에는 그 글 말고도 사회주의 체제의 정책과 관련된 레닌의 몇 개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책에서 레닌은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이전의 경제 체제로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 계산과 통제를 국가가 수행하는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임박한 파국>>의 아래와 같은 목차만 보면 레닌이 혁명 이후의 새로운 국가에서 당장 시행하려 했던 정책이 어떤 것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근이 닥쳐오고 있다\", \"정부의 철저한 무능력\", \"통제 방책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으며 쉽게 실행할 수 있다\", \"은행의 국유화\", \"신디케이트의 국유화\", \"영업 비밀의 폐지\", \"조합으로의 강제적 결합\", \"소비의 규제\", \"정부는 민주주의적 조직의 활동을 파괴하고 있다\", \"재정 파탄과 그것에 대처하는 방책\", \"우리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면서 전진할 수 있을까\", \"경제 혼란에 대한 투쟁 ― 그리고 전쟁\". 우리의 교재에 포함된 글에도 혁명 이후 사회에서 시행될 정책에 대한 레닌의 구상이 담겨 있다. 9월 전반부에 집필되어 9월 말에 <<노동자의 길(라보치 푸트)>>이라는 기관지 20호와 21호에 발표된 <혁명의 임무>라는 글이 그것이다. (<<노동자의 길>>은 임시정부가 <<진실>>을 폐간한 뒤 9월부터 10월 26일까지 그 역할을 맡은 볼세비키의 중앙 기관지이며, 10월 혁명 직후에 <<진실>>은 복간되었다.) \"강령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363쪽)인 <혁명의 임무>는 7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하나. 자본가들과의 협정은 파멸이다. \"새로운 기반 위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함으로써만\" 빵, 자유, 평화, 토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둘. 권력을 소비에트로. 그리고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셋. 민족들에게 강화를. 전쟁을 중단한다는 이유로 동맹국들이 러시아 혁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겁낼 것이 없으며, 무조건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 경작자에게 토지를. 다섯. 기아와 경제적 붕괴에 대한 투쟁. \"소비에트 정부는 즉각적으로 생산과 분배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노동자 통제를 도입해야 한다.\" 노동자 통제만이 기아와 경제적 붕괴를 막는다는 것이다. 여섯. 지주와 자본가들의 반혁명에 대한 투쟁. 코르닐로프의 반란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일곱. 혁명의 평화적 발전. 소비에트가 최고 권력 기관이 되면, \"인민에 의한 평화적 대의원 선거\"를 통해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정당들 간의 평화적 투쟁\"이 보장될 것이고, 그렇다면 \"혁명의 평화적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레닌의 \'국가 이론\'과 \'사회주의 강령\'에 대한 논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4-3. 봉기 일정의 결정과 볼세비키 단독 권력 9월 15일에 당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편지 <볼세비키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와 <맑스주의와 봉기>를 검토했다. 레닌의 제안에 중앙위원회는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소비에트가 급속히 볼세비키화되고 있는데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 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에서 볼세비키가 다수를 차지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레닌은 소비에트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권력을 쥐게 된다면, 설혹 볼세비키가 다수파가 될지라도 처음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이나 멘세비키에 속한 대의원들의 반대로 정책 시행이 연기될 것이며 그렇다면 반혁명 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레닌의 주장대로, 중앙위원회 이후 당은 봉기 준비에 착수했다. 9월 24일에 난관에 부딪힌 케렌스키 정부가 각료를 교체했으나,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세비키가 승리했고, 9월 25일에는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가 케렌스키의 새 정부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볼세비키 단독 권력을 수립하려는 레닌의 생각은 볼세비키가 범한 오류를 기록하고 하고 있는 레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924년에야 처음 발표된 글 <한 정치 평론가의 일기로부터. 우리 당의 오류들>에는 1917년 9월 22일, 23일, 24일의 날짜가 적혀 있다. 먼저 9월 22일의 일기에서 레닌은 \"민주회의\"에 참가한 것이 오류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이콧했어야 했다.\"(376쪽) \"새로운 혁명\"이 시작되었으니, 이는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동맹인 영국 및 프랑스의 금융 자본, 케렌스키 등을 필두로 한 정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대다수 농민, 더 정확하게는 대다수 빈농의 혁명이며, 그런 마당에 부르주아가 제시한 정치 일정에 참가한 것은 오류였다는 것이다. 1905년 혁명 당시 불리긴의회를 보이콧한 것이 옳았듯, 민주회의 보이콧이 옳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비의회를 보이콧해야 한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 노동자병사농민대표자소비에트로, 노동조합으로, 대중 일반에게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투쟁할 것을 호소해야 한다.\"(381쪽) 23일의 일기는 트로츠키가 자신의 보이콧 전술을 지지한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4일의 일기는 소비에트 대회가 10월 20일로 연기된 것을 두고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세비키에 의해 상연된 익살극\"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 이전에 써 두었지만 바로 이때인 9월 27일에 <<노동자의 길>>에 발표된 레닌의 글 <혁명의 한 가지 근본 문제>는 임시정부를 대신할 권력을 세우는 일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필자가 레닌임을 명시하고 발표된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혁명의 핵심 문제는 의심할 바 없이 국가권력의 문제이다. 어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가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354쪽) 아직도 러시아 인민의 신임을 얻고 있던 사회주의자혁명가당과 멘세비키가 권력에 참여한 상황이어서 봉기를 통해 볼세비키 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망설이는 동지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권력의 문제는 회피할 수도 털어내 버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혁명 발전에 있어서, 혁명의 대내외 정책에 있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은 \"권력 체제에 대한 동요 속에서 6개월을 ‘허비해 왔다’는 것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며 그 책임을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세비키의 동요하는 정책\"으로 돌린다(354쪽). 레닌은 \"명백하고 무조건적으로 주민의 대다수에 기초하고 있는 권력\"이 수립되어야 하는데, \"소비에트 권력만이 안정적일 수 있으며, 폭풍우 같은 혁명의 폭풍우 같은 순간일지라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56쪽) 레닌은 자신이 말하는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그 소비에트 권력이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들의 내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도 명백히 하고 있다.(356쪽) \"권력을 소비에트로, 바로 이것만이 인민 대다수의 정치적 각성과 결의와 인민 자신의 경험에 완전히 발맞추어 앞으로의 진보를 점진적이고 평화적이며 순조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으로 국가 행정과 경제 관리를 완전히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감히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반항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와 농민들은 실천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토지와 생산물과 곡물을 적절히 분배하기 위한 방법을 머지않아 배우게 될 것이다.\"(361쪽) 1917년 10월 8일에 작성했으나 1920년에 <<진실>>을 통해 처음 인쇄된 <한 국외자의 충고>라는 글 역시 무장 봉기를 통한 볼세비키 단독 권력의 의지를 잘 보여 준다. 그 글에서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겨야 함은 분명하다\"고 한 후 \"실제로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은 지금 무장 봉기를 의미한다\"(384쪽)고 말했다. 그리고는 봉기가 \"신중히 고려되어야 할 특수한 법칙에 따르는 특수한 형태의 정치투쟁\"(384쪽)이라 하며, 당시 러시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봉기를 시행하는 것에 관한 지침을 전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 양자의 성공은 2,3일간의 전투에 달려 있다.\"(386쪽) 4-4. 군사혁명위원회 10월 7일에 케렌스키가 주장한 러시아공화국예비의회가 개회했으나, 볼세비키는 그 의회가 \"새로운 두마\"일 뿐이라며 모두 퇴장했다. 봉기 감행을 결정하는 중앙위원회를 위해 레닌은 사살 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변장을 하고는 페트로그라드로 들어와 회의에 참석했다. 10월 10일에 중앙위원 21명 가운데 12명이 한 아파트에서 회의를 열었다. 매우 긴 시간의 토론과 설득으로 무장 봉기에 들어가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레닌의 안건이 통과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만이 반대했다. 그리고 봉기 때까지 임시 조치로 정치국이 당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여 집행하기로 했는데,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소콜리노프, 부느노프 등이 정치국원이었고, 본인들은 반대했지만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도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중앙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진 직후인 11일에 볼세비키페트로그라드시협의회도 3차 총회를 열어 봉기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봉기는 트로츠키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그가 의장인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 산하에는 12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독일의 위협에 대비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을 수호하고 코르닐로프와 같은 반혁명 분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개개인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군사혁명위원회 설립의 목적으로 명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을 실제로 지휘하게 되는 이 군사혁명위원회는 당 중앙위원회, 당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수비대, 발틱 함대 등의 조직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스탈린, 부브노프, 제르진스키, 스베르들로프, 우리츠키 등이 이 위원회에 속했는데, 의장은 물론 트로츠키였다. 위원회는 볼세비키를 지지하는 군대, 곧 ‘적군’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다음날인 13일에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의 병사들은 군사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군사혁명위원회로 넘겼다. 봉기 준비가 진행 중인 16일에 볼세비키 중앙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려, 당 중앙위원회는 물론이고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군사위원회,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 페트로그라드관구위원회,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등의 대표들이 모였다. 이 회의에서 수비대는 노동자 투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고 병사들도 지쳤다고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도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봉기 결행에 반대했으나, 6표를 얻는 데 그쳤고, 이 일로 카메네프는 중앙위원 직을 사퇴했다. 4-5. 봉기 계획의 누설 볼세비키 중앙위원회의 확대 회의 직후에 볼세비키가 폭동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러시아 전역에 퍼졌다. 그러더니 멘세비키를 지지하는 고리키가 주도하는 신문 <<새로운 생활(노바야 지즌)>>의 18일자에서 카메네프는 \"당이 무장봉기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데 반대했다\"는 내용의 글을 실으며, 사실상 볼세비키의 계획을 누설하고 말았다. 카메네프의 기사 소식을 들은 레닌은 10월 19일에 즉각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볼)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24일에야 중앙위원회에 전달되었고, 1927년이 되어서야 인쇄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레닌은 편지에서 카메네프의 행위를 \"파업 파괴\"(387쪽)에 비유하며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중앙이 파업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는 그것에 대한 찬반 선동이 허용되지만, 파업을 찬성하는 결정(적에게 이것을 비밀로 한다는 추가 결정과 함께)이 내려진 이후에는 그 파업에 반대하는 선동을 계속하는 것이 파업 파괴임을 이해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388쪽)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봉기에 관한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과 봉기 준비 및 지정된 봉기 일자를 적에게 비밀로 하라는 결정을 로드지안코와 케렌스키에게 팔아넘겼다. 그것은 실제 사실이며, 어떠한 책임 회피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두 명의 중앙위원은 중상모략의 거짓말로 노동자들의 결정을 자본가들에게 팔아넘겼다.\"(390-1쪽) 레닌의 결정은 단호했다. \"중앙위원회는 당외 출판물에 실린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성명을 완전한 의미에서의 파업 파괴로 간주하여 이 둘을 당에서 추방한다.\"(391쪽) 10월 22일 또는 23일에 쓴 것으로 보이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레닌은 글을 쓴 카메네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할 것을 촉구했다. 지노비에프의 경우에는 카메네프의 성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렇다 해도, 카메네프가 사임하는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획이 누설된 이상 레닌과 볼세비키에게는 신속하게 행동에 옮기는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20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행동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22일에 군사혁명위원회는 작전권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수비대 사령부에게 통고하고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당연히 페트로그라드 요새의 간부들과 군사혁명위원회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그러던 가운데 23일에는 그동안 봉기의 걸림돌이었던 한 감옥의 수비대가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 지지를 선언했다. 4-6. 1917년 10월 25일 소비에트 대회를 하루 앞둔 10월 24일에 정부는 볼세비키의 군사 행동을 감지하고 비상사태 선포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전략적 요지에 기존의 수비대를 대신해 장교 후보생으로 구성된 군대를 배치했다. 임시정부는 군사혁명위원회 핵심 인물들을 체포하고 볼세비키 신문사 두 곳을 폐쇄했다. 하지만 혁명군사위원회는 25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여 주요 관공서를 쉽게 장악했다. 오전 9시에 케렌스키는 도주했고, 정오에는 공화국의회가 폐쇄되었다. 오후 3시에 열린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 대회에는 레닌이 참석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가 있는 겨울궁전에 대한 작전은 오후 9시에 개시되었다. 케렌스키의 <<회상록>>에 따르면, 겨울궁전 벽에는 \"유대인 케렌스키는 물러가라! 트로츠키 만세!\"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2월 혁명이 갑자기 터져나온 것이라면 10월 혁명은 볼세비키가 준비한 것이었다. 10월 혁명에 직접 참가한 것은 수비대, 크론슈타트 해병대, 페트로그라드혁명군사위원회 등에 속한 병사 수천 명과 공장위원회의 볼세비키 수 백명이 전부였다. 충돌로 발생한 희생자도 10명이 안되었다. 우리가 여섯 번째 주제에서 읽을 마지막 글은 10월 25일 오전 10시에 발표한 성명 <러시아 시민에게!>이다. 전문(全文)은 이렇다. \"임시정부는 폐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노동자병사대표자소비에트의 기관인 혁명군사위원회, 곧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비대의 선두에 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손에 넘어왔다. 인민은 즉각적인 민주적 강화의 제의, 지주적 토지 소유의 폐지, 노동자 생산 관리,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 등의 대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해 왔던 바, 이제 그와 같은 대의가 보장된 것이다. 노동자, 병사, 농민의 혁명 만세! 페트로그라드노동자병사대표자소비에트 혁명군사위원회. 1917년 10월 25일 오전 10시\" 25일 오후 6시 30분에 혁명군사위원회는 임시정부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겨울궁전은 순양함의 포격을 받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했고, 오후 9시에 포격이 시작되었다. 실제로는 공포 한 방이 발사되었을 뿐이며, 두 시간 후에 실제로 포격을 가했으나 궁전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궁전을 지키던 정부의 군대가 후퇴하자, 해병대와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선발대가 문과 창을 부수고 궁전을 접수했다. 이것이 1917년 10월 25일에 있었던 무력 충돌의 전부였다. 4-7. 10월 25일 직후 25일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2차전러시아노동자병사대표자소비에트대회가 열렸다. 650명의 대의원 가운데 약 400명이 볼세비키였는데, 멘세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볼세비키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며 퇴장했다. \"당신들은 실패한 불쌍한 작자들이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소. 역사의 쓰레기통으로나 가시오!\" 트로츠키의 말이었다. 볼세비키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 함께 회의를 열고 무장봉기를 승인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부여한다는 레닌의 제안도 가결했다. 그리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평의회라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인가했다. 새 정부는 첫 임무로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 등 레닌이 발의한 안건을 심의하여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무병합과 무보상의 강화를 맺기로 결정했고, 지주 소유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토지에 관한 포고>는 토지 국유화라는 볼세비키의 애초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지만, 농민의 지지를 얻고 있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의 협력을 감안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정부로서, 우리는 설령 동의할 수 없는 것이라도 하층 인민이 결정한 것을 회피할 수 없다. 현실의 시련을 받아들이면서, 그 결정을 실제로 적용하여 보고, 현장에서 실행하는 사이에 농민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이해할 것이다.\" 한편, 1917년 10월 26일 새벽 2시 10분, 마지막으로 체포된 각료들이 이송되었다. 러시아 주재 유럽 대사관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내내 러시아에서 벌어진 많은 잡다한 일들을 즉각 알지 못하고 있던 것처럼.
이상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old_newlenin2
또 소브나르콤sovnarkom과 관련하여서는 "볼세비키가 임시정부와 공화국의회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겨울궁전을 접수한 직후인 10월 24일 오후 3시에 2차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대회(1차 대회는 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7년 6월에 열렸다)가 열렸고, 오후 11시에는 전러시아노동자병사대표자소비에트대회가 열려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소비에트(러시아 어로 줄여서 \'소브나르콤\'이라 부르며, [읽은 후에 6-3]에서는 \'인민위원평의회\'라 했었다)를 선출하고 몇 가지 포고령을 발한 바 있다.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의 다수파와 멘세비키의 거부로 인민위원소비에트는 볼세비키와 사회주의자혁명가당에서 분당한 좌파사회주의자혁명가당만으로 이루어졌다. 인민위원소비에트는 과도 정부라 불렸는데, 이는 제헌의회가 소집되고 정식 헌법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11월 말에 4170만 명이 참가한 제헌의회 선거에서 선출된 7백 7명의 분포는 사회주의자혁명가당 370명, 볼세비키 175명, 좌파사회주의자혁명가당 40명, 입헌민주당 17명, 멘세비키 16명 등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에는 소비에트를 주도했고 5월 이후에는 임시정부를 주도했던 사회주의자혁명가당(우파)이 1905년 이후 1917년까지 최대 야당이었던 입헌민주당이나 1917년 5월 이후 임시정부를 함께 이끌었던 멘세비키는 물론이고 10월 이후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를 이루고 권력을 쥐고 있는 볼세비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1917년 러시아는 농민의 나라였던 것이다. 제헌의회는 개회하자마자 소비에트대회의 결정들이 무효임을 선언했고, 볼세비키와 좌파사회주의자혁명가당은 회의를 거부했고, 제헌의회는 해산되었고, 1918년 1월 중순에 열린 3차 전러시아노동자병사대표자소비에트대회는 사후적으로 제헌의회 해산을 승인했다."
그렇다면
볼셰비키 당
소브나르콤
제헌의회--해산후--전러소비에트대회
의 수직 계열이 형성된다.
과제들:
레닌의 제헌권력관
제헌적 동아시아
5.18에서의 제헌권력
디아스포라와 제헌권력의 지형변화, 그리고 정체성의 변형문제
모든 정치질서의 원인으로서 자신은 특정한 질서로 고착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정치질서를 존재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헌법제정권력은 결코 특정 질서나 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제정행위를 통해 고갈되거나 소진되지 않으며 현행 헌정 질서에 평행하여 지속한다. Ibid., 91쪽.
즉 제헌권력은 시간적으로 영속적이라는 것이다.
http://jbreview.jinbo.net/maynews/article_print.php?table=organ
우리는 이제 헌법제정권력을 좀더 완전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계약의 파기란 결국 제헌권력의 주체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제정된 권력과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것,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이를 무효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정하는 권력은 단지 새로운 헌정질서를 성립시키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헌정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자 적대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관점을 바꿔서 기존의 헌정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제헌권력의 무제한성과 절대성이 단지 자의적이고 맹목적인 파괴행위로 귀결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슈미트는 자신의 입장, 즉 법치국가(Rechtsstaat)와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제헌권력의 절대성을 완전히 긍정하는 것일까? 위임적 독재(kommissarische Diktatur)로부터 주권적 독재(souveräne Diktatur)로의 그의 입장의 변화는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인가, 아니면 권력의 무제한적인 행사를 위해 제헌권력을 참칭하는 것에 불과한가?
슈미트는 이러한 제헌권력과 주권재민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형이상학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입장의 변화를 보였다. 위임적 독재론자로서의 슈미트는 제헌권력을 내세우는 정치적 입장은 형이상학적으로 초월적인 정치신학을 배제하는 내재성의 개념에 대한 승인이며, 정치적인 것을 거부하는 “범신론”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54쪽.
칼 슈미트, 법, 권력 : 네그리와의 인터뷰
Mouvements37호/ 역자 : 양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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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Mouvements 37호(2005년, 1-2월), 89-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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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vements : 이탈리아에서 슈미트의 사상이 가졌던 지위에 대해 언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특히, 한편으로 슈미트의 사상의 이론적 함의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그리 : 슈미트와 저의 이론적 마주침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는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 즉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연구하기를 요구했던 헌법학자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슈미트는 이탈리아 헌법을 주도했던 이론 연구의 책임자인 코스탄티노 모르타티(Costantino Mortati)의 ‘아버지’였고, 이탈리아 국가가 노동에 기초한다는 개념을 정초했던 사람이기도 했죠.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과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을 결정적으로 매개했던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르타티는 독일의 시장 사회 국가 이론가인,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Ernst Forsthoff) – 그 자신도 슈미트의 제자였죠 – 의 분신이었습니다. 포르스트호프와 마찬가지로, 코스탄티노 모르타티는 파시스트 기간 동안 슈미트 곁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슈미트와 저의 이론적 마주침은 다음과 같이 이뤄진 셈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즉 <정치 신학>보다 먼저, 헌번, 슈미트의 헌법에 대한 주요 논설들, 전쟁 직후 이탈리아내 헌법 연구에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던 그 논설들을 연구했습니다.
슈미트와의 이러한 관계는, 켈젠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즉, 켈젠은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켈젠의 관점은 독일 공법에 내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었고, 미국에서 유래한 토크빌적이거나 고전 자유주의적인 관점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유효한 관점이었습니다. 당대의 이탈리아 문화는 슈미트와 켈젠이라는 이 두 원천 내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절대 다수는 슈미트라는 원천이었죠. 켈젠의 경우, 그는 본질적으로 국제주의자들이나 연합국 이론가들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켈젠의 형식주의는 트레베스(Treves), 보비오(Bobbio) 등등의 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참 후, 즉 1960년대의 일입니다. 1950년대에, 독일 공법의 중요한 전통은 완전히 슈미트적인 채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자유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경향들, 옐리네크(Jellinek)같은 주관주의적 법 경향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하지만 매우 동질적인 하나의 틀 내에서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슈미트와의 정치적인 접촉은 비의회주의 좌파와는 전혀 무관한 작업의 토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비의회주의 좌파에서 빠져나와 당을 만들었던 동지들의 작업과 관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 사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슈미트에 기댔던 앙드레 글뤽스만(André Glucksman)과 그 패거리보다는 다른 방식에서 더 진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슈미트를 이용했을까요? 사실, 그들은 슈미트에게서 발견되는 과도함이나 ‘극단화’가 무엇이든 간에, 슈미트를 근대 주권에 대한 주요 이론가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슈미트의 주권 개념은 막스 베버나 레닌의 주권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월적이고, 전체적인 주권으로서의 국가 개념, 결국 삶권력으로서의 국가 개념을 대표하는 주요한 근대성의 사상가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왜 우리가 슈미트에 대해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유태인들을 공격했기 때문인가요? 하지만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우리는 유태인들, 나아가 모두를 공격할 수 있는 국가 기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전혀 분노하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제 관점에서는, 이탈리아 비의회주의 좌파의 일파가 슈미트를 따라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 [1970년대초 마리오 트론티가 발전시킨 개념] 이라고 불렀던 것과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전형적이었던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연속성 개념과 단절하는 순간을,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그것의 고유한 자율성을 갖는다는 관념이 부과되는 순간을 정의해줍니다. 따라서 그것은 좌파에서 슈미트를 참조하는 저자들에 대해 우리가 비난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슈미트는 항상 이러한 홉스적인 초월성을 주장했던 사람이며, 완전히 통속적으로 말해, 이 위대한 권력, 이 위대한 초월적 권력에 기초해야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의 내용과 관련된 지속되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주 명백한, 정통의 대표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은 그 안에 입헌주의의 차원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할 때, 저는 그 관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이것이 어디에서 표명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제서야] 이러한 요소들을 결정짓는 어떤 역사적 조건들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이죠. 근대 권력이 그 자체 안에 권력 분립의 관념, 정부 및 독립적인 법 생산의 관념, 그리고 법률학 혹은 실질적인 법률학적 권력 관념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근거없는 관념일 뿐입니다.
MouvementsM. : 이번 호, 쟝-끌로드 모노(J.-C. Monod)의 소논문은 비판적 저자들의 슈미트 참조가 갖는 기능을 살피고 있습니다. 주요 좌파 사상가들과 슈미트와의 대화는 항상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들[네그리, 발리바르, 아감벤] 외에도,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나, 공공 영역의 붕괴에 대한 슈미트적인 서술을 양식화한 초기 위르겐 하버마스, 그리고 쟈콥 타우베스(J. Taubes)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어떤 현실성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요? 슈미트에게서 우리는 어떤 도구들을 찾는 것인가요?
네그리 : 저는 이러한 슈미트의 현실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슈미트에 대한 이 모든 담론들이 매우 애매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이브-샤를르 자르카(Yves-Charles Zarka)가 슈미트[에 기대는] 담론 내의 반유태인적 구성요소를 드러내려고 했을 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자르카는 근대 국가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배제에 근거했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우리는 사실 슈미트나 홉스의 그런 면모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에띠엔 발리바르는 아니죠. 발리바르에게, 근대 국가는, 비록 그것이 동일한 개념들에 기초하기는 했지만, 횡단(transversalité), 개방(ouverture) 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저의 경우, 제가 슈미트의 제헌 권력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제헌하는 권력이 제헌된 현시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런 중립적인 권력입니다. 이것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슈미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접근해왔던 것과는 정확히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아렌트나 다른 이들처럼 -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슈미트와 연결되어있던 사람들입니다 –, 제가 이해시키고자 하는 바는, 권력의 폐쇄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렌트가 비의회주의 좌파의 주요 표현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르카가 시작한] 이 사건에는 사실 순전히 기회주의적이고, 사람들이 쓴 것을 읽지 않게 만드는 개념들과 형상들의 고착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미트가 제헌 권력이 외부에 있고, 제헌 구조 안에 갇힐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시에예스(Siéyès) 이래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구성요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제헌 권력을 긍정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향에서’ 그것을 긍정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헌 권력의 방향이 민주주의로 향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슈미트가 말한 것의 반대, 곧 슈미트가 제헌 권력은 그것의 고유한 권력과 그것이 그 자신 안에 담고 있는 것, 즉 자율화와 그것의 고유한 권력의 독립, 그것의 고유한 권력에 고유한 유효성을 긍정하는 것에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으며, 그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제헌 권력 – 제헌 권력의 다양한 국면들, 우리가 날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의 실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중의 주요 현상들, 스페인 사회당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빠떼로(Zapatero)의 승리에서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에 대해 말하는 것을 굳이 피하고자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어떤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쟝-끌로드 모노가 거론한 저자들의 경우, 저는 발리바르가, 슈미트나 베베가 근대성을 통해 정의한 바 있는 권력 개념을 참조하는, 근대성에 연결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를 전체주의적으로, 베버를 민주주의적으로, 레닌을 사회주의적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항상 자본의 관리 형태, 그리고,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 관리가 필요로 하는 집중화가 관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실체는 동일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들은 점점 더 동질화되어 갑니다. 저는 발리바르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보증하는 부의 증대와 연결된, 다양한 주체들이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 이 지형 위에서 진보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군주제적인 방식으로, 귀족제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슈미트가 그것을 군주제적인 방식으로 했고, 베버가 귀족제적인 방식으로 했으며, 발리바르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감벤은 자유의 심급이란 이런 것과 지속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는 권력이란 변혁될 수도, 이용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은 확실히 하이데거주의자이긴 하지만, 여하튼, 세계의 운명과 우리가 머물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혼동하기에 앞서, 사태를 약간이나마 헤아리며, «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다른 것에로 열릴 수 있다 »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사실 권력은 우리가 여기에, 이러한 개방(열림)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운명적 특성을 꿈꿉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의 글에서, 이러한 운명적 특성은 절대적인 것이 될 뿐더러, 그 안에는 자유에 대한 어떤 개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권력이란 관계, 정확히 <자본>에서와 같은 관계, 즉, 이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논쟁하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며, 때로는 피착취자들도 승리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제 문제는 그것입니다. 하나의 적으로 간주하기. 저는 슈미트를 하나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저는 슈미트를 권력의 극단적인 대표이자, 극단적인 파시스트로 간주할 뿐이지, 전혀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건의 문제적인 추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선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MouvementsM. : 자유주의자들은 [좌파의] 비판적인 슈미트 활용 속에서, 법률적 형태들을 보증인이나 반-권력으로 간주하길 거부하는 혹은 반자유주의라는 유령을 선동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모체가 지닌 일종의 반법률주의적 잔재들을 바라봅니다.
네그리 :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점에서 소유권이 우리의 자유를 그다지 방어할 수 없는 지에 대해서는 결코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아주 나쁘게 기능했던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권리는 착취의 권리가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대한 소유로서의 인간의 표현을 투자해야 하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토론해야만 하는 개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유주의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수락한다면, 그들과 논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래 좋아, 인간 본성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관건은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어떤 도구들에 의해 제어된 자유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 그러나, 정확히 거기에 슈미트적인 논변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자연적이지 않은 것을 자연적인 것인양 간주하면서, 주권과 그것이 긍정되는 형태들을 혼동하면서 과장합니다. 이 수준에서 볼 때, 신비화의 형식들이란 우리가 어떻게 그것과 논쟁해야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감벤이 자유 민주주의는 집중 수용소를 경험하는데 이르렀음을 보일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권력 형태 자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권력이 그런 종류의 것에로 이른 것입니다.
비자유주의자인 슈미트 자신은 게르만 전통 깊숙히에서 나온 것입니다. 슈미트는 라반트(Laband) 이후, 즉1870-1880년대 공법 및 헌법의 논설들을 작성했던 저자들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공화주의자입니다. 그는 라인 연방 전통과 프러시아 왕국 전통 사이의 동맹을 법률적인 관점에서 봉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슈미트는 프러시아적인 관료주의국가(Obrigkeitsstaat)의 고전적 권위주의의 원천과 결부시키기 위해, 가톨릭적인 라인 전통에서 반동적인 원천을 채취해냅니다. 그는 헌법들을 생산해낸 주요 독일 공법 학파의 언어에 비추어볼 때, 세심한 언어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해냈습니다. 이 학파 자체도 18세기에 형성된 한 흐름, 언어를 법률적 도구로 사용함에 있어서 참으로 강력하고, 발전되었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실, 만일 슈미트가 역시 중심적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타우베스와 슈미트가 주고받았던 서신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우베스는 슈미트가 권력, 국가를 이해했음을 암시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근대 민족 국가는 슈미트에게서 그 가장 고도의 건축물을 발견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