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모순. 자치적 역량. 민족적 지역적 정치의식. 정치의식은 1987년을 거쳐 집권으로. 자치역량은 1990년대의 문화운동으로

참고문헌
1.
영화의 힘을 다시 묻는다 - 한국영화의 미래를 찾아서 [5]
글 : 이성욱 | 2003.12.05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한국의 문화적 투쟁을 지지하다

미국 보스턴의 웬트워스 공과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며 <뉴 폴리티컬 사이언스>의 편집장이기도 한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의 상상력>에서 68혁명이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과학자인 그에게 굳이 서면으로나마 인터뷰를 청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으나,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쿠제와 연구하며 그의 영향을 받아 ‘에로스 이론’을 자신의 분석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아마도 그는 영화인과 인문학자보다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우리에게 좀더 객관적이고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68혁명이 벌어지던 그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11년 동안 캘리포니아주의 오션비치에 있는 급진적인 반문화 공동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던데.

=그렇다. 오션비치는 1970년대의 청년문화가 꽃피웠던 반문화의 안식처이자 대안적 생활방식, 상업적 문화와 체계에 맞서는 정치 활동의 중심지였다. 한번은 닉슨이 공화당 전당대회를 그곳에서 열겠다고 발표했다. 재선을 위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곧장 시위 계획을 세웠고 존 레넌, 밥 딜런,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유명인사들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FBI가 백색테러 단체를 조직해 우리의 코뮌을 공격했다. 집에 총알을 퍼부어 여성 한명이 부상당했고 내 차는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가 오션비치에서 행했던 투쟁은 두 가지다. 현존 권력에 맞서는 것과 우리의 제도를 구축하는 것. 이 투쟁은 상호보완적이었다. 우리는 그곳의 경찰 본부장을 쫓아내고, 정치범들의 네트워크를 지원했으며, 인근 대학에 상주해 있던 CIA에 맞서 사람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충분히 즐기기도 했다. 그런 코뮌적 생활방식이 체제와 싸우는 데 막강한 힘이 되어줬다.

-68혁명의 구호였던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이 구호가 “미래 세대의 삶과 제도에 새겨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 구호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미국에서는 이 구호가 1968년 5월 파리에서 울려퍼지기 이전부터, 블랙팬더 당원들이 이 구호를 내걸고 있었다. 팬더 당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베트남을 파괴하고, 닉슨 같은 범죄자 대통령을 양산해온 미국의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인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뜻하기 위해서 이 구호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자유를 뜻한다. 오늘날 전세계에서는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세계화, WTO, IMF,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맞서 각지의 사회운동들이 결집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국내적, 국제적 문제에 대해서 대중적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확신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8 정신은 ...ing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즐긴다”는 68혁명의 또 다른 구호는 <신좌파의 상상력>의 핵심어인 ‘에로스 효과’를 떠오르게 한다. 당신은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에의 자각이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아가는 현상”이 에로스 효과라고 했다. 그렇다면 특정 시기에, 특정 상황에서 인간의 의지로 이 효과를 일으키거나 가속화하는 것도 가능한가?

=지금으로서는 에로스 효과가 총파업이나 봉기를 통해서 현실화될 수는 없다. 총파업이나 봉기는 조직된 단체들의 계획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했던 것 같은 에로스적 단결과 숭고한 연대감이 언제 또다시 발생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주의 코뮌은 일반 대중의 지혜, 특정 시기에 사람들을 지배해왔던 그 어떤 엘리트들보다 이 사회를 훨씬 더 이성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68혁명 이후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세상이 우리를 바꿨다”라는 말이 나왔다. 일상의 혁명을 화두로 떠올렸던 이 운동은 일상을 어떻게 바꿨나? 후퇴였나, 점진적 진보였나?

=만약 신좌파가 실패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신좌파가 많은 사람들이 꿈꿨던 것 그 이상을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8년 이래로 수천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흑인차별 정책이 산산조각났으니까. 여성들, 청년들, 학생들, 동성애자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게다가 ‘베트남 신드롬’ 탓에 미국은 수년간 군사적 개입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1970년대 당시 미국에서 문화와 정치의 종합을 통한 정치적 히피들, 즉 프릭스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현재에도 이런 세력들이 유효할 수 있는가?

=프릭스는 정치활동을 했던 히피들을 말한다. 문화와 정치가 결합되자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놓이게 됐다. 한편에선 철두철미했던 정치 활동가들이 코뮌을 이뤄 함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계질서를 거부한다며 비웃었다. 다른 한편에선 히피들이 우리가 권력의 세계에 매혹됐다고 여겼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전쟁은 끝난다”라는 식으로 생각했으니까. 현재까지도 미국에는 주변화된 집단들이 계속 존재하고, 그들 중 몇몇은 활동적이기도 하지만, 히피에 ‘필적’할 만큼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흡수력에 있다. 흡수력이 강제력보다 훨씬 더 엄청난 힘이다. 만년필 제작사로도 유명한 파커브러더스사는 1973년에 이런 광고를 만들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모델로 나와 “계속 쓰십시오”(Write On)이라고 말하는 광고였다. 이 광고는 블랙팬더당의 구호인 “그대로 계속해”(Right On)를 패러디한 것이다. 할리우드는 샘 그린리의 소설 <문 옆에 앉아 있는 비밀탐정>(1969)을 영화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 소설은 암살됐던 블랙팬더당의 지도자 조지 잭슨을 연상시키는 어느 흑인이 CIA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대도시 중심부의 흑인 갱들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자들이 마틴 루터 킹을 영웅시했고, 프릭스들이 말콤 X를 자기 방어의 국가적 상징이라고 봤던 시기다. 이들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최근 들어 대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들뢰즈/가타리의 ‘유목민’ 개념을 착취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이건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즐긴다”

-당신은 68혁명의 특징이 정치적 해방을 위한 사회운동과 거대한 문화적 반란이 융합이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68혁명 때만큼 사회 변혁의 기운이 꿈틀댔던 건 1980년대다. 그렇지만 문화적 반란까지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대 담론이 무너지던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에서 서서히 문화적 반란이 일어났다. 한국의 영화는 이와 맞물려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상상력이나 유희를 주된 특징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해 그 감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된 시각 매체라는 점에서, 당신이 68혁명의 유산으로 중시하는 ‘국제연대’를 문화의 영역에서 발현시키는 데 영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늘 여러 운동이 내부적으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최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반대 시위를 담은 비디오 같은 비디오가 전세계에서 엄청나게 빨리 상영되고 있다는 점은 대중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이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했던 일들 중 하나도 운동 내부에서 제작된 영화나 베트남에서 제작된 영화가 집회 현장에서 상영됐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운동이 조직되고, 국제적 연대의식이나 내부적 단결이 증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밀 드 안토니오의 <베트남: 피그만 사건의 해>(1968)가 상영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쿠바의 기록영화 감독 산티아고 알바레즈가 만든 <호치민, 79년간의 청춘>(1969), 그 밖에 집단영화제작단체들이 찍은 여러 기록영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중매체들도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와 단절한 영화들을 제작했다. <이지 라이더>(1969)나 비틀스의 영화 <옐로 서브머린>(1968)이 생각난다. 우리는 집회 현장에서 이 영화 주제곡의 후렴구 “우리는 모두 노란 잠수함 속에서 살고 있죠”를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파시스트 전쟁 기계 속에서 살고 있죠.” 1968년 당시 프랑스에서도 영화 활동가들이 급진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여러 곳에서 상영했다.

그렇지만 흔히 영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적 원근법에서 비롯된 대상/주체라는 이원성을 영속시키기도 한다. 단 하나의 시점만을 지닌 카메라를 제작 도구로 사용할 때의 문제점은 화면과 관객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거리가 고스란히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영화는 본성상 일종의 구경거리다. 물론 상업영화도 사람들의 시각을 변화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무어가 좋은 본보기다. 그렇지만 돈을 내고 영화관에 들어가 익명의 구경꾼으로 영화를 관람한다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

-2000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은 “내가 한국에서 가장 놀란 것은 ‘세대차’가 유럽에서처럼 엄청난 문화적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렇다고 보았나? 그리고 문화적 모순의 하나라는 세대차가 한국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신좌파의 상상력>이 출간됐던 1999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때 만난 한국의 활동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집 한채를 구해 다같이 살면서 코뮌을 만들어보는 것 어떤가? 그러면 일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재밌게 살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대답을 듣고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아버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내건 채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들과 싸워왔던 활동가들, 운동을 위해서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것같이 보였던 활동가들이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보기에 유교사회에는 두 가지 성격이 서로 얽혀 있는 것 같다. 공적인 자리에서 엿볼 수 있는 친절함과 신중함이 그중 하나라면, 이 친절함과 신중함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모습이 나머지 하나다. 특히,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부모와 함께 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전통적인 문화 형태가 개인의 자연스런 발전을 억압하는 물리적 힘이 되는 듯 느껴진다. 청소년 센터나 코뮌 형태의 가옥이 이런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도 좋은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신좌파의 문제의식 중 하나였던 걸로 알고 있다. 당신은 ‘개인주의’를 새로운 ‘독자성’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뜻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지난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월드컵 축제, 반미시위, 대통령 선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이 말을 실천하는 듯 보였다. 젊은이들은 개인에서 정치적 군중으로, 다시 개인으로 순식간에 변화해갔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신좌파의 구호는 여성해방운동에서 계발된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억압의 맹아를 담고 있는 일상생활의 억압적 관계를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와주려던 여성운동의 구호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 느낌을 말한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에는 개인들을 좀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할 듯하다.

2. http://www.pwc.or.kr/maynews/article_print.php?table=organ&item=&no=1682
파리코뮌과 광주민중항쟁
특집

기관지노힘  제54호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대

특집_광주자료사진12.jpg 특집_광주자료사진12.jpg (47 KB)

지난 2세기동안 민중들의 자발적 통치능력을 보여주는 두개의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871년의 파리코뮌과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이다. 파리와 광주에서 비무장 시민들은 각자의 정부에 맞서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하였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려는 중무장세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민중권력을 유지하였다. 봉기한 수만 명의 민중들은 전통적 형태의 정부를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체한 민중권력의 기관을 창출하였다. 해방의 시기동안 범죄율은 급감했고, 민중들은 그 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유대와 연대의식을 서로에 대해 느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군이 수도인 파리를 접수하려 이동하자 파리코뮌이 일어났다. 프랑스정부의 무기력한 항복과 프로이센의 진무 공작에 파리 시민들은 격분했고, 3월18일 파리 국민방위군(National Guard)이 상대적 무혈쿠데타를 통해 파리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정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코뮌 전사들은 프로이센 정복자들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에 맞서 70일간의 항쟁을 계속했다. 그들은 파리 방어와 일상생활을 관리할 자신들의 정부를 수립했고, 선출된 민중의 대표들은 해방된 도시를 통치했다. 마침내, 압도적 군사력으로 봉기는 진압되었고, 수천 명이 “유혈의 1주일”로 불리는 시가전에서 전사했다.
군대의 화력이 수십 배나 증가된 한 세기 후에,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외국의 정복군이 도시로 진격하지 않았지만, 광주의 시민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자국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정예 공수부대에 의해 광주시민에 대한 끔찍한 잔혹 행위가 벌어지자, 수천 명의 민중들이 군대에 맞서 싸워 그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은 해방공간을 6일간 유지했다. 해방광주에서, 매일 열린 시민집회에서 수십 년 간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주시민들은 질서를 유지했고, 새로운 형태의 정부, 즉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를 창출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파리코뮌이 진압된 같은 날인 5월27일 광주코뮌도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다.

광주와 파리의 유사성

이 두 봉기에는 놀라운 경험적 유사성이 존재하며, 이들 해방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유사한 동학이 발생했다.
1.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민중권력기관의 자연발생적 등장
2. 아래로부터 무장저항의 발생
3. 범죄행위의 급격한 감소
4. 시민들 사이에 진정한 연대와 협력
5. 계급, 권력, 지위에 의한 서열의 중지
6. 참여자들 사이에 내부적 분열
이들 봉기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은 인간존엄에 대한 승인과 해방된 사회의 예시이다. 파리코뮌의 경우처럼, 광주의 민중들도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무력진압 때까지 스스로 통치하였다. 파리봉기의 오랜 전통처럼, 광주의 민중들도 1894년의 동학봉기와 1929년 학생봉기에서 1980년 봉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혁명의 도래를 되풀이하여 암시해 왔다. 이들 봉기는 누적된 불만과 불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극단적인 사태전개로 인해 촉진되었다.
봉기를 제압하고 전국적 확산을 막기 위해, 양측 정부는 해방의 시기동안 도시를 봉쇄하고 고립시켰다. 지방과 차단되었음에도, 파리코뮌은 지지자들을 발견했고, 마르세이유에서 투르까지 유사한 코뮌의 경험이 분출했다. 파리의 코뮌전사들은 봉기를 확산하기 위해 편지를 담은 풍선을 날려보냈다. 광주에서 봉기는 최소한 전남의 16개 시, 군으로 확산되었다. 군대의 봉쇄망을 뚫으려는 시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광주방어를 위해 광주로 가려던 수십 명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두 도시에서, 봉기의 배신자들과 정부의 지지자들(코뮌을 혼란으로 몰아넣기 위해 보내진 첩자와 사보타지 선동자들을 포함하여)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부로부터의 배신과 방해로 광주에서는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가져와 시청 지하실에 보관했던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없어졌다. 파리코뮌에서, 도시 전체를 관찰하는 요새의 방위에서 철수하기로 한 사병들의 결정으로 코뮌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새를 상실했고, 반동세력은 이 요새를 이용하여 파리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파리는 내부의 적으로“가득 차”있었다. 베르사이유와 지속적 접촉을 가졌던 “왕당파”시민들의 선동으로 방돔궁과 부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평화로운 해방의 시기가 유혈진압으로 끝나자, 1871년과 1980년 야만적 탄압이 이어졌다. 파리코뮌 후에 처형당한 사람의 수는 3만 명에 이르며, 이 수치는 태평양의 프랑스령 제도로 추방된 수천 명을 제외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수백 명이 실종되었고, 2천 여명이 봉기 중에 사망했다. 그 이후에도 7년 넘게 진실을 왜곡하고 민주적 열망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있었다. 광주봉기는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군부독재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광주와 파리의 해방코뮌의 현실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여서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신화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히려, 해방공간에서 시민들은 자치와 협력의 내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잔학 행위를 저지른 것은 피지배민중들이 아니라, 바로 정부의 군대였다. 정부의 잔학 행위에 대한 다음의 글을 보면, 이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는지 파리에서 일어났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너희들은 죽을 것이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손에 무기를 쥐었다면, 죽음이다! 자비를 구한다 해도, 죽음이다! 전후좌우상하 어느 쪽으로 움직이더라도, 죽음이다! 너희들은 법의 외부에 존재하고,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 나이나 성별도 너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죽겠지만, 먼저 너희 아내, 누이, 어미, 아들과 딸, 심지어 요람의 어린 것들의 고통을 맛볼 것이다! 너희 눈앞에서 부상자는 구급차에서 끌려나와 총검으로 난자당하거나 소총 개머리판에 짓이겨질 것이다. 부러진 다리와 피 흘리는 팔로 질질 끌려가, 고통과 신음의 쓰레기더미처럼 시궁창에 처박힐 것이다. 죽음! 죽음! 죽음!!”
[표트르 크로포트킨, 『파리 코뮌』, 1895년 런던]

봉기 후에 탄압은 일상사가 되었다. 프랑스와 광주에서 경찰은 수년간 장례식을 방해했고, 운동과 관련된 인사들의 우울한 장례식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이런 방해행위는 최소한 6년 간, 즉 1887년까지 계속되었다. 광주의 봉기가 무자비하게 진압된 후에도, 봉기의 소식은 너무나도 전복적이어서, 헤아릴 수 없는 시체가 불태워지고, 무명묘지에 매장되고, 기록마저 말소되었다. 봉기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적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천 명이 체포당했고, 수백 명이 고문당했다. 군부가 학살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파리와 광주의 봉기는 장기적 경제성장이 끝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한국경제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과 조합조직 권리의 탄압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초과착취의 대가로 1970년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에서, 제2제국 시기에 생산은 급증했다. 1853년과 1869년 사이에, 농업산출은 64에서 114로, 공업은 51에서 78, 건설은 51에서 105, 수출은 25에서 66으로 증가했다.(이 지수는 1890을 100으로 놓고 고정프랑화로 계산한 것이다.) 1860년과 1870년 사에서 국민소득은 152억 프랑에서 188억 프랑으로 늘어났다. 1866년 당시 프랑스인의 49.8%가 1차 산업에, 28.9%가 2차 산업(제조업)에, 21.3%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도 유사하게, 1868년과 1979년 사이에서 농업산출은 68에서 124로, 공업은 26에서 220으로 늘어났고(이 지수는 1975년을 100으로 한 것이다.), 건설은 3.6배, 수출은 33.1배, 국민소득은 16.8배나 증가했다. 1975년 당시, 45.9%의 한국인이 1차 산업에, 19.1%가 2차 산업에, 35.0%가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광주와 파리의 차이점

이 두 역사적 봉기의 차이점도 아주 분명하다. 먼저, 지속 시간에 차이가 있다. 파리코뮌은 3월18일 봉기에서 5월27일 최종진압까지 약 70일간 지속되었다. 반면 광주 민중항쟁은 단지 6일간, 5월21-27일까지 광주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에서 시간은 주요변수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차이는 광주에 파리의 국민군과 같이 권력에 대한 공격을 이끌 군대가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수부대의 잔혹 행위에 대한 자연발생적 저항의 과정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고, 일부는 공식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해방광주는 정부의 개입이나 정당의 계획과 무관하게 조직되었다.
먼저 전투의 열기 속에서, 나중에 도시의 통치와 최후의 저항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자기조직화 능력은 놀라운 것이다. 20세기 후반, 높은 문자 해득률과 보통교육은 수백만 명의 민중들에게 소수의 엘리트보다 더 현명하게 자신을 통치할 역량을 길러주었다. 이와 같은 자치역량은 광주봉기에서 나타났다. 쿠데타를 이끌 조직도 없었고, 운동의 지도부는 봉기 이전에 체포되거나 은신 중이었다. 5월17일 밤, 보안사와 경찰은 광주 전역에서 활동가들의 집을 습격하여 운동의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체포를 피한 활동가들은 피신했다. 이미 전국적 운동의 지도자 26명이 체포된 상태였다. 한 증언에 의하면, “운동의 지도부는 마비되었다.”또는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경찰과 새로 도착한 군부대의 점령에 항의하여 행진했다. 다음 날도 시위가 계속되자, 모든 계층의 민중들은 시위대에서 학생의 숫자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민중운동의 자연발생적 등장은 도시와 대학간의 분리를 뛰어넘었고, 이는 봉기의 전면화를 알리는 첫 번째 지표였다. 5월20일 자치역량은 이미 거리에 존재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금남로에 모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공수부대의 곤봉이 그들을 해산시켰지만, 오후 5시 50분 폭력과 저항은 계속되었고, 5천명의 군중이 경찰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공수부대가 뒤로 밀리자, 군중들은 다시 모여 거리를 점거했다. 그들은 대표자를 뽑아 경찰과 군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며칠 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밥을 지어 시장에서 무료급식을 했으며, 예상되는 반격에 대해 경비대를 유지하였다. 모든 사람이 해방광주에 기여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자연발생적으로 노동분업이 이루어졌다. 시민군은 대부분 밤을 새웠지만, 책임감의 모범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민병대를 “시민군”이라 불렀다. 그들은 민중을 보호했고, 민중들은 그들을 보살폈다. 시민군의 남녀 전사들은 어떤 학습 없이도, 전세계적으로 군대의 잔혹 행위에서 드러나는 광기 없이, 모범적 방식으로 행동했다. 민중의 요구에 입각하여 새로운 형태의 명령체계에 따라, 그들은 모든 중고생의 무장을 해제했다. 최후의 공격이 임박하자, 윤상원은 여성과 고등학생들에게 살아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항의와 눈물이 있었지만, 그들은 돌아갔다.
이런 투쟁의 와중에서 과거의 행정체계보다 더 민주적인 구조가 등장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그것이다.
파리의 경우처럼, 군과 경찰은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의 편에 섰다. 정웅 소장은 무고한 시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광주 경찰서장은 4.19 당시 사격명령을 내린 경찰관에 대한 사형선고를 떠올리고, 학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수많은 경찰은 개별적으로 부상당한 시민을 도왔고, 광주가 해방되자 새로운 시민행정체계에 협력했다.
한국의 군과 경찰이 개인적으로 행동했다면, 파리코뮌 시기에 군대와 경찰은 코뮌 찬반세력으로 나뉘었다. 1870년 8월11일 프랑스정부는 유산계급에서 소집한 60개 대대와 함께 싸울 새로운 국민군 200개 대대를 하층계급으로부터 조직하였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1871년 2월 8일 새로 선출된 국민의회가 민중의 증오를 받게 되자, 국민군은 프랑스의 자존심을 상징하게 되었고 3월18일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260개 대대 가운데 최소한 215개 대대가 파리의 20개 구를 각각 대표하는 3인으로 구성된 국민군 중앙위원회를 지지하였다. 프랑스에서 코뮌의 편에 섰던 군대는 때로 규율이 없었다.
혼란과 다중심적 권력은 파리코뮌의 특징이었다. 3월1일 인터내셔널 파리지부의 지도적 인사들도 명확한 정치적 강령이 없었다. 3월26일 287,000명이 투표하여, 90인의 코뮌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15명의 정부 지지자와, 정부에 반대하지만 3월18일 “반란”에도 반대하는 시민 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날 20만 명이 선거결과 발표 및 정부취임식에 참석하였다. 파리를 통치할 9인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화파 중앙위원회가 그림자 내각의 역할을 했다.”
19871년 약 3천명의 블랑키주의자들이 있었고, 코뮌은 6만 명의 병사, 20만 정의 머스켓총, 1,200문의 대포, 5개 요새와 수년간 쓸 수 있을 정도의 군수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프랑스 은행을 접수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뮌 지도부의 명령은 번복되기도 했고, 정부와 국민방위군 중앙위, 구협의회 등 간의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4월 첫 주에 200명 이상의 사제가 체포되었지만, 4월16일 선거에는 참가율이 저조했다.
파리코뮌은 선거를 했지만, 정부는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군사문제는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의 견제를 받았고, 구협의회에 의해 정치권력이 제한당했다. 또한 비극적으로, 정부는 개인적 암투에 시달렸고, 공직거부 사태와 반동파의 공세로 크게 약화되었다.
“유혈의 1주일”에 군대에 맞서 15,000명이 전투를 벌였지만, 5월21일 베르사이유 군대가 파리에 침입했을 때, 수많은 군중은 튈레리 정원에서 열린 콘서트에 모여 있었다. 파리코뮌에서 규율과 단결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약탈에 사형! 절도에 사형!?”이라는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의 포스터였다.

마치며

파리코뮌처럼, 광주의 역사적 의의도 국제적인 것이며, 단지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의미와 교훈은 동양과 서양, 북반구와 남반구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1980년 민중봉기는 그 이전의 혁명들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투쟁의 상징으로서 광주는 일반민중이 권력을 자신의 손에 장악하는 하나의 모범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의 예고편이다. 그런 사회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보려면 바로 광주민중봉기를 보면 된다. 1980년 5월의 야만적인 현실에서 한국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진정한 해방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자치역량과 민중의 유기적 연대로 표현된 파리와 광주민중의 모범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오늘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암시와 더불어, 한국 군부독재의 타도와 다른 민주화운동의 자극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성과,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으로 배운 구체적 교훈도 있다. 오늘날 파리와 광주의 봉기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존엄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과 더욱 강화되고 있는 해방투쟁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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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국제적 영향과 함의

광주코뮌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의미는 오늘날에야 이해되고 있다. 투쟁의 상징으로서 광주코뮌은 다른 나라의 투쟁을 자극하였다. 1985년에 수십 년 동안 집권해온 동아시아의 독재정권들은 흔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1986년에 들어서면서 반란과 봉기의 물결이 동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다.
필리핀에서는 1986년에 있었던 대선 기간 18일 동안 30명의 컴퓨터 개표원들의 항의퇴장이 마르코스 독재의 종말을 알렸다. 필리핀 민중권력 혁명은 이번에는, 천천히 재건되고 있었지만 심하게 탄압받던 남한의 민중운동을 고무하였다. 민중권력 혁명 발발 후 한 달도 안돼서, 서울에서 추기경과 주교들은 남한 민중이 교훈을 배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년이 지나기 전에 군부독재는 타도되었다.
한국의 운동이 필리핀의 사건들에 의해 재활성화된 이후, 대만에서 민주개혁이 일어났고 미얀마에서 민중운동이 새로운 투쟁 수준에 도달했다. 1988년 3월에 들어서면서 학생들과 소수민족들이 광주만큼 많은 수로 랑군의 거리에 나섰다. 끔찍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네윈 대통령으로 하여금 27년 간의 통치를 종식하도록 강요하였다. 8월에 학생들이 주도한 5일간의 항의는 그의 복귀를 저지하였다. 노동자, 작가, 승려, 그리고 학생을 대표하는 총파업위원회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적 운동을 조직했지만, 군부는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 해에 군부가 죽인 사람의 수가 1만 명에 달했다. 100명이 넘는 선출된 대표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 이상을 체포한 뒤 미얀마 군사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철권을 휘둘렀다.
그 다음해 중국의 학생활동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한 공개적 요구를 부르짖었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총격을 당했고 그후 수년 동안 수배당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반란들의 연쇄반응이 지속되자 심지어 공산주의의 영역 안에서 조차, 즉 베트남 정치국원인 트람 도 장군은 1989년에 베트남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폭발을 경험한 다음 나라는 태국이었다. 지도적인 야당정치인들의 20일 간의 단식파업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1992년 5월 거리로 나섰다. 군부가 거리시위를 진압할 때 수십 명이 죽었고, 이러한 잔인한 행동 때문에 수친다 크라파윤 장군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학생들은 “민중권력 혁명”을 호소하였고 성공적으로 수하르토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공적 공간의 점거라는 혁신적 전술과 마찬가지로 이중권력이란 구호를 필리핀에서 받아들였다. 학생들은 성공적으로 의회건물에 밀고 들어갔고 수하르토의 퇴진에 의해서만 갈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코뮌 20년: 민중항쟁의 신화와 함의』

번역/원영수 노동자의 힘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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