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대정권의 정치체계


최한수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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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 국토에 두 개의 상이한 정치체계를 갖고 있다. 남한은 자본주의적 민주정치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체계이다. 이러한 배경은 명백하다. 2차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의 지배로 양분되면서 남한은 미국체계, 북한은 소련체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즉 한국내의 자발적 세력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외세의 타율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20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강점되었다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일어진 것이다. 문제는 일본의 강점기가 없었다면 어떤 체계로 존속되었을 까 하는 점이다.


한나라의 정치체계를 말할 때는 크게 민주정치체계이냐 또는 독재정치체계냐로 구분한다.민주정치체계는 대부분의 정권들이 표방하는 정치체계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이다,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많은 나라에서는 외적 표현과는 달리 민주성이 아주낮아 실제는 권위주의 체제와 흡사하거나 사실상 권위주의 체계인 경우가 많다. 권위주의 독재와 독재는 사실상 같은 속성이지만 권위주의 독재에서 권위주의가 빠지고 「독재」라고만 하면 전체주의 독재와 혼동되거나 통용된다. 그러나 권위주의 독재와 전테주의 독재체계는 아주 다르다. 전체주의 독재(totalitarian Dictatorship)는 전체주의 독재, 전체주의 지배, 전체주의 국가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전체주의에 관한 문헌은 광대하고 복잡하며, 아주 논쟁적이고 50년 이상 거술러 뻗혀있다. 독재의 두 주요한 형태인 권위주의 독재와 전체주의 독재간의 가능한 보다 현저한 구별이 필요하다. 물론 어떤 분석이 요구되지만 권위주의 체계와 전체주의 체계사이의 기본적인 대비점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권위주의체계는 “멘탈리티”나 순수한 실용주의를 분명히 하는 경향인 반면, 전체주의체계는 이념을 확충시킨다. 이념-정신성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 것은 사회정책에 관한 문제이다. 전체주의 독재의 근본적인 사회정책은 “총체적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C.W.Cassinelli,1976). 권위주의 정권들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사회정책중의 하나는 변화에 대한 반동이나 단순한 거절이며, 때로는 지배하는 과두제에 대하여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최근의 발전을 소멸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또다른 개혁은 사회나 정체의 요소를 증진시키려는 점진주의자의 시도도 있다.


권위주의 정권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부합성에 만족한다. 즉 시민이 요구된 사항을 저항없이 수행하는 한 당국은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독재에서 정권은 시민이 정부(또는 지도자)의 지시나, 또는 소망에 대하여 불평하면 유죄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내적인 부합성을 요구한다. 권위주의 정권은 또한 정부나 집권당이 국민의 정치적 각성이나 관여를 자극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무관심을 즐긴다. 권위주의 체계에서 문제는 참여를 축소하기보다는 그 참여가 정권에 위협적 요소가 되지 않도록 참여의 방향을 전환(channel)한다. 전체주의 동원은 근대 민주주의에 의하여 육성된 자발적인 활동주의가 아니나 통제된 것이다. 권위적인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극복할 수 있고 그를 위하여 합리적-법률적 또는 전통적 주제(theme)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이러한 것들이 전체주의 정권에는 위협적 요소가 된다. 전체주의 독재는 북한의 정치체계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는 이승만 정권이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정부에 대해 권위주의정권 또는 독재정권 즉 권위주의 독재정치체계로 평가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우리 나라의 역대 정권별 정치체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나를 알아보기로 한다.


1. 이승만 정권 :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체계


현대정치는 봉건정치와 구별되는 대의정치를 의미한다. 한국의 현대정치는 봉건정치가 일본의 강점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후 1945년 광복을 맞고 1948년 선거를 통해 대의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막이 오른다. 1948년 5월 10일 한국최초로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7월17일 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이 공표되며,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8월 15일 내외에 정부수립을 선포하여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게되었다.


독립운동과정에서 획득한 카리스마와 잔존하고 있는 유교문화 속에 노령,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으로 이승만은 권위와 권력을 독점하게되었다. 독립운동과정에서 나타났던 유아독존적이며 경쟁자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메마른 이승만의 권력 행태는 대통령이 됨으로 더욱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정부수립과정에서 지원을 받았던 김성수 등 한민당 인사들을 비롯한 잠재적 세력들을 외면하고 순종적인 인사들과 함께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권력의 공유를 기대했던 한민당 인사 등 지식인들은 이러한 이승만의 독선과 전횡에 대하여 저항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반대세력들은 내객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이승만 권력의 뇌관을 빼내려고 시도했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간선에 의한 재선이 염려되었고 정권유지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이 와중에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3년간의 민족상잔 속에서도 이승만은 권력확대와 장기집권터전을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52년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국회간선을 직선으로 바꾸어 재선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승만은 건국초기에는 정당을 기피했다. 그러나 야당의 조직적 저항에 대한 대응과 자신의 영구집권의도를 행동으로 옮겨줄 전위대로서의 정당이 필요했고, 이에따라 자유당을 성립시켰다. 이어 자유당을 중심으로 54년 4사5입 개헌을 통해 헌법의 대통령중임제한규정을 개정하여 영구집권가도에 들어섰다. 이승만의 추종세력은 고령의 이승만 후계를 염려해 3.15부정선거의 감행을 통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60년 4.19학생혁명에 의해 12년 집권의 막을 내렸다.


이승만정권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였다. 권위(authority)는 라틴어 동사인 augere(augment:증가하다)와 관련된다(Givanni Sartori,1987,186). 궁국적으로 권위의 가장 간결한 의미는 "도덕적 영향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체계에 대한 이름으로써 권위주의는 파시즘에 의하여 찬양하는 이름으로 주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용어는 약간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정당한 정부는 권위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주위라는 용어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자유에 대치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권위가 행사되는 방법에 대하여 거의 어떤 통제도 없는 정권, 즉 독재정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유사한 개념들에 의하여 종종 의미가 혼돈된다.


독재정치(autocracy)와 전제정치(tyranny),권위주의(authoritarianism)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들은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정권의 본질과 정권의 관리구조에 대한 본질을 나타내는데 반해 전자의 둘은 지배자의 본질을 나타낸다.(Amos Perlmutter,1981,p.1). 독재정치는 일인의 지배자가 절대적인 집행권을 휘두르는 지배를 말한다. 독재정권은 권력을 제한하는 법률적인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권력에 대한 책임성이나 질서있는 승계도 이루어 지지 않는다. 지배는 독단적이고 오직 힘에 의하여 지탱될 뿐이다. 권력구조의 영속성과 제도화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우 한정된 권위와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불완전하다. 전제정치도 법률에 의하여 제도화된 왕의 지배가 아닌 독단적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독재정치와 사실상 동의어지만 16-7세기의 고전적인 형태다. 전제적 권위는 정복에 의하여 확보되고 공포로 유지된다.


독재정치체계는 권위주의 독재체계, 일당 독재체계, 전체주의 독재체계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독재정치(autocrac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 전제정치(tyranny)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들은 아주 유사하다. 독재정치는 일인의 지배자가 절대적인 집행권을 휘두르는 지배를 말한다. 독재정권은 권력을 제한하는 법률적인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권력에 대한 책임성이나 질서 있는 승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독단적이고 오직 힘에 의하여 지탱될 뿐이다. 권력구조의 영속성과 제도화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우 한정된 권위와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불완전하다.


독재정치와 민주정치(입헌정치)를 크게 구분한다면 그 핵심적인 차이는 모든 입헌정권이 법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는, 즉 정부가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실체적 규칙과 절차에 둘러싸여 있는데 반하여 독재는 법에 의하여 동일한 방법이나 동일한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법의 정당성이 전제된다. 법이 국민 대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 아니면 형식적 과정은 유권자의 의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는 지배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법(규칙)자체만으로도 민주성의 취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권력은 바로 이승만 개인에 의해 창출되고 지탱되면서 이승만 개인의 지도력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사유적 절대권력구조였다. 근대의 권위주의 독재가 비록 제한적이며, 배타적이라고 하드라도 정치 엘리트와 대중적지지 및 정치적 동원에 의지하며, 무엇보다도 전문화된 정치구조와 제도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승만 독재는 전근대적 권위주의 즉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라고 할 수있다. 즉 이승만의 리더쉽은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가부장과 같은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있었다. 가부장적 권위는 법이나 제도보다는 가부장의 의사가 절대적 판단과 행위기준일 수밖에 없다. 능력보다는 복종과 헌신이 최우선의 덕목이다. 가부장은 위엄은 있지만 간교하거나 매섭고 혹독한 통제력은 약하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 정권하의 반대세력은 외각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지만 나름의 목소리는 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독존적이고 독선적인 통치 속에서도 반대자들의 공간을 허용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오랫동안 미국의 정치과정에 익숙했던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독재를 경쟁적 준권위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2. 장면정권 : 위약한 유아 민주정치체계


장면정권은 제2공화국 정권을 말한다.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승만은 하야하면서 허정(許政)을 과도내각의 수반으로 지명하고 향후 정국주도권을 획득하게 된 민주당이 이를 수용해 과도내각이 탄생했다. 과도내각은 민주당과 함께 내각제 권력구조로 개헌했다. 민주당은 학생들과 시민들에 의해 집권세력들이 밀려난 공간에서 내각제하의 총선거를 통해 압도적 의석으로 집권했다.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 이어 장면정권의 제2공화국의 출발이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내각제권력구조의 민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국회는 양원제로 상원격인 참의원과 하원격의 민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전부터 치열한 집권경쟁을 전개했다. 의석수가 곧 집권자원인 내각제하에서 한 석이라도 더 늘리려는 민주당내의 신.구파는 총선거의 후보공천에서 당의 공천과 함께 각 계파의 공천으로 인해 한집안이 뒤엉켜 딩구는 선거전을 치루었고 결과는 의석수를 양분하는 백중의 세력이었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장면중심의 신파 세력은 전략상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에게 양보한 뒤 총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총리를 차지하려던 김도연 중심의 구파는 '신민당'으로 분당했다.


내각제는 안정된 정당체계와 절대다수의석을 바탕으로 집권해야 한다. 사실상 유일정당으로 의석을 휩쓸었던 민주당은 집권경쟁과정에서 양분되고 대통령과 총리가 여.야당으로 등을 돌린 가운데 국회를 권력 줄다리기장으로 삼아나갔다. 4.19학생혁명의 성공으로 정치화된 학생들은 특히 통일문제에 관해 보수세력들의 우려를 낳게 만들었다. 정치적 자유가 대폭확대되면서 정치적 열기가 뜨겁게 확산되고 그만큼 사회 분위기는 혼란스러워져갔다. 민주주의신봉자들에게는 권위주의 독재에서 벗어난 일시적 반동으로 인식될 수있지만 권위주의의 억압에 익숙해진 시민들, 그리고 규율 속의 군인들에게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장면에게는 혼란스러운 사회를 통제할만한 권위가 약했다. 시민들은 무절제된 투입욕구 속에 그에 상응하는 산출을 바라지만 장면정권은 그만한 능력을 갖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약한 정당성을 카리스마와 정교하게 조직된 행정권으로 유지했었다. 그러나 장면은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그와 함께 가야하는 효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면정권은 결과적으로 당시 신생국에 창궐하던 군부 쿠데타를 예방할만한 면역성을 상실하고 이었던 것이다. 장면정권은 혼란스럽고 무능하게 비쳐졌고 그 사이를 어느새 쿠데타 병에 감염된 정치군인들이 침투했던 것이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 병에 전염된 것은 이미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에서부터였다. 발병순간 학생들이 나서는 바람에 뒤로 물러섰다가 결국 장면정권이 들어선지 9개월 여 만인 1961년 5월16일 군부 쿠데타로 장면정권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장면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에 대한 항거를 통해서 성립된 독재의 반제정권이라는 점에서 민주정치의 기대를 갖고 탄생한 정권이다. 권력구조나 의회구조도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구성되었다. 민주정치체계는 입헌주의의 구체적 형태로서 포괄적으로는 민주주의,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정치 즉 지배자 개인의 자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정당한 헌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헌법은 정부를 안내하고 그 요점이 성문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는 규범적 구조이다. 입헌정부는 정부권력이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규정되고 강제적인 방식에서 행사되며 제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들은 실질적이거나 절차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실질적인 제한은 정부가 어떤 일들을 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에서 특정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절차상의 제한은 정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규정된 형태나 순서에 따라 하여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정치체계에 관하여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된다. 정치엘리뜨들은 기업이 소비자를 상대로 하듯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경쟁관계라는 경쟁 모델,(Anthony Downs, ,1957) 직접민주주의 이상에서 출발하여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한 대의제도에 접목시켜 민주주의 이상을 구현해 보려는 기대를 담고 있는 참여민주주의도 있다.(C.Pateman,1970).민주주의를 어떻게 기술하든 그것은 인간의 본질과 이상에 대한 최대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본질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그 자체의 사실만으로 평등한 존엄성과 자유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한다면, 그를 구현하는데 적합한 정치,경제, 사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합리적인 제도와 절차를 필요로 한다. 바버(B.Barber)는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B.Barber,1984) 그는 대의제적 자유민주주의를 약한 민주주의로 부르며,강한 민주주의는 현대적 형태의 참여민주주로써, 이것은 시민 교육에 의하여 결속되며, 시민적 태도와 참여적 태도 등을 통하여 공동목표를 추구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치공동에 의존하는 민주주의다.


장면정권은 이러한 민주정치로 이행하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쿠데타로 장면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민주정치의 싹은 자리보지도 못한 채 짓밟혔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배경에 대한 설명은 군부의 정치활동을 주로 사회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반면 내적인 성향도 많이 고려한다. 예를 들어 야노비치(Morris Janowitz)는 군부의 멘탈리티를 형성하는 요인, 특히 제3세계의 군부정치에 특별히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써 과도한 민족주의(hypernationalism) 청교도 주의(puritanism), 집산주의(collectivism), 반정치(antipolitics)등 4가지를 든다( M. Janowitz,1967, 64-65). 과도한 민족주의는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민족주의를 말한다. 민족적 단결, 국가건설 그리고 심지어는 민족적 굴욕에 대한 복수의 주제는 많은 군인들의 정신상태속에 무겁게 나타난다. 민간정부를 공격하는 군부의 민족적 바탕은 대개 정부가 민족적 영광을 아주 열열히 옹호하지 않는 다든가, 외국이나 동맹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간다든가, 또는 정부가 국내의 집단을 단결시키려는 노력을 하지않는 다든가, 또는 방위비 증액의 약속을 정부가 지키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런 또는 다른 이유들은 군부로 하여금 민간인 지도자들은 사실상 민족운명을 저버리는 배신자들로 판단하게 만든다. 이 경우 그들에게 나타나는 다음의 행동은 그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쿠데타이다.


청교도주의는 실질적인 정책보다는 생활양식과 더 관계된다. 군인들은 호사스럽고 우쭐대는 것 보다 엄격하고 강인한 생활방식에 더 가치를 부여한다. 이들은 민간정치지도자들의 고급생활과 부패를 보게될 때 종종 경멸과 혐오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을 그들 스스로 및 국가에 대하여 항상 모욕적이며, 나약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기생충은 지배를 담당할 만한 가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군인의 신성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야노비치(Janowitz)에 의하면 집산주의는 "사회, 정치 및 경제적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기반으로써 집산적인 공기업(collective public enterprise)의 수용(acceptance)"( M. Janowitz,1967, 64).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프리카와 아랍의 몇몇 군부정권에서 모호한 "사회주의"가 유행하는 부분적인 속성을 알수 있다. 이러한 이유중의 하나는 집산주의는 군부 자체가 일종의 "집산적인 공기업"이라는 것이다. 군부는 집산적 공기업이 가장 효과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산적 공기업은 군부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경제에 좋다고 결론 짓는다. 더욱이 계획과 지시를 중앙기획위원회가 내리는 "지시경제"에 대한 구집산주의자 사고는 모든 강경노선의 장교들의 꿈과 아주 잘 일치한다.


가장 정치적인 행위로써 군의 개입은 원칙과 이익, 야망과 희생 등의 복잡한 혼합을 포함한다. 집정관 주의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들이나 혹은 군대의 "정신성"또는 이념을 강조하는 이론들 까지도 진실로 강조하여야 하는 요인들을 잘못 놓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예를들면 아프리카 군부의 불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야망과 불만을 가진 장교들, 그리고 그들은 분열되고, 비구조적이며, 불안정한 정치체계에서 많은 자유와 넓은 행동반경을 가진 장교들의 개인적 동기에 관한 요인의 강조가 충분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정치에 개입한 배경은 이상의 배경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적 정치사회환경과 군 내부의 복잡한 환경, 그리고 박정희를 비롯한 친위세력의 군인으로서의 개인적 이해 등이 중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의 내부요인이 어떠하던 군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당시의 정권과 사회상황이다. 이것은 박정희세력이 자유당 정권당시부터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민주당 정권에서 결행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정치적 야심가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거나 유지하는데 정치.사회 상황을 최대로 활용하게된다. 장면정권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신의 상황을 제공했고 사회적으로 무질서하고 불안한 환경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은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배경을 충족시켰고,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들도 결국 이를 거부하지 못했던 것이다.


3. 박정희 정권 : 관료적 권위주의독재 체계


박정희 정권은 군부정권기와 3공화국, 4공화국(유신정권)에 걸쳐 존재한다. 박정희는 군부세력을 주도하여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탈취한 뒤 3년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다음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3권을 장악했다. 정권탈취를 위해 정치정화법이라는 소급법으로 기성정치인들을 규제한 뒤 62년 12월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의회를 단원제로, 그리고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의 출마를 금하는 등의 정당본위정치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지방자치는 전면 중단시켰다.


1963년 10월 15일과 26일 대통령선거 및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기까지 3년여간은 정부수립후 최초의 군부정권기간이었다. 군정은 권위주의독재정권의 한 유형이다. 래파포트(David Rappaport)에 따르면 군부사회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D. Rappaport, 1970, 20).


1).정부의 형태와 기능에 관한 합의가 아주 약하다. 입헌주의는 근본적인 문제에 어떤 합의를 가정하는 반면에, 군부사회는 "게임의 규칙"에 대하여 합의뿐만 아니라 그것을 준수하지도 않는다.

2).富와 권력에 대한 무방비 상태의 투쟁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치는 이런 일들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군부사회는 특히 무자비하다. 즉 제어력이 없는 것이다.

3).소수의 거부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마지막단계에 대한 시나리오를 회상시키는 측면에서 빈곤으로 고통받는 대중들에 직면한다.

4). 전체적으로 정통성은 매우 낮고 불안정성은 매우 높기 때문에 정치 및 행정구조들은 제도화의 수준이 빈약하다. 낮은 공공도덕으로 인하여 부패와 금전에 의한 매수가 정치생활의 목적이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 헌팅톤(S.P. Huntington)은 군부사회의 유형을 3가지 즉 과두적, 중산계급적, 대중적 집정관 주의로 보았다.(S.P. Huntington,1968,chap.4)과두적 군부사회는 대중의 정치화가 제로(0)상태일 때, 중산계급 군부사회는 대중의 정치화가 중간정도 일 때, 그리고 대중적 집정관주의는 대중의 정치화가 높을 때이다.


박정희 군부정권이 래파포트가 지적안 4가지 특성을 나타냈다고 불 수는 없다. 헌팅톤의 분류에 의한 대중의 정치화수준에서 우리는 이중적 배경이었다. 즉 정치 엘리트나 학생, 지식인들의 정치화수준은 집정관 단계지만 일반대중은 과두적 단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군부는 이른바 혁명과 반혁명사건과 박정희의 민정참여 및 군의 복귀를 둘러싼 번의파동 등 군 내부와 정치권의 다각적 갈등 속에서 유지되었다. 군부정권은 또한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감시체제를 확립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켜놓은 상황에서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는가 하면 각종 부정의혹사건이 뒤따랐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군부정권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군부는 자신들의 정권획득과 연장을 위한 수단에는 규칙을 초월했다. 박정희 군부정권은 부패를 바탕으로 금권에 의한 정권유지수단도 동원했고 이는 한국정치의 금권화를 낳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민주정치역사의 퇴영을 초래하였고 민간엘리트의 위상을 주변화시킨 반면 군부를 패권집단으로 등장시킴으로써 한국의 정치체계를 군부지배체계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따라 5.16은 민주지향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군부세력도 권위주의 억압정책을 강화함으로서 정치불안이 가중되고 억압과 저항의 악순환현상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가속화시키고 사회변동에 역동성을 강화시켜 근대화와 산업화를 가속화시켰다는 점, 기술관료주의와 행정능률을 제고시켰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김호진,1992,236).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거친 개헌안에 따른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선거를 거쳐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군부정권의 굴레를 벗고 문민정부의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반이 쿠데타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은 군부정권의 허물을 벗지 못한채 정당성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정권은 특히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제 협정의 조인을 통하여 한일관계를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및 경제협력자금을 공여받아 경제개발에 사용했다. 이에 대해 재야와 야당은 굴욕외교라는 비판과 저항을 계속했다. 박정희정권은 또한 야당 일부와 재야세력의 반대 속에 같은 해에 월남전에 국군을 파병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수호라는 명분과 함께 미국과의 동맹관계강화와 미국 및 월남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냈다.


박정희정권은 정권출범과 함께 의회의 기능유지와 언론자유의 보장 등 나름의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나 한일협정조인과 월남파병 등에 대한 야당과 재야의 반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면서 권위주의 정권의 속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정책들이 국민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면서 지지기반이 강화되었다. 1967년에 실시된 박정희의 제2기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4년전 박빙의 선거결과와는 달리 윤보선후보를 10%이상차이로 압도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박정희는 2대 마지막 임기 말에 이르면서 과거 이승만과 유사한 변칙적인 3선 개헌을 단행했다. 야당과 일부 재야는 극명한 반대에 나섰지만 국민들이 동참은 미약했다. 결국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대결하여 승리하였지만 국민들의 경계심은 높아졌다. 이것은 같은 해의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의 득표율이 48.8대 44.4의 근접한 결과에서 확인된다.


제도상으로 박정희는 자신이 변칙적으로 주도한 개헌에 의한 출마가 마지막인 선거를 통해 집권하면서 또다시 영구집권기반구축의 기도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남북관계개선을 적극화하고 71년 남북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제의하고 72년에는 남북 7.4공동성명을 도출해냈다. 정부의 이러한 대북 정책은 남북긴장완화의 기대와 안보이데올로기로 정권유지의 정당성을 확보해오던 박정권에는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영구집권기반을 확립하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12월에 들어서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11월 21일 이른바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박정권은 스스로 남북대화를 확대하면서 안보를 내세워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헌정을 중단한 상태에서 영구집권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이 절대권력과 영구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제한을 철폐했으며, 대통령의 당선은 행정기관의 통제 속에 선출되는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박정희의 무제한 당선이 보장되는 제도였다.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여 국회를 대통령이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제도에 의해 92년 12월 27일 제 8대대통령에 취임하여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유신정권은 국회와 언론,정당 노조 등 민주정치의 하부구조가 강력히 통제되고 위축되는 대신 중앙정보부, 보안사등 사찰과 통제기구는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과 재야의 저항은 반체제운동으로 확산,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6년간을 지탱한 후 1978년 7월 유신 제2기의 6년 대통령임기를 시작했으나 야당과 재야의 저항은 간접적이고 제한적 범위에서 직접적이고 방법위하게 나타났다. 10대 국회의원총선거를 통해 유권자들도 득표율에서 야당에게 1.1%를 더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유신체제를 부정하였다. 특히 야당은 온건,타협의 이철승체제 대신 유신철폐를 공개적으로 외치는 선명,강경의 김영삼 체제를 선택하고, 이에대해 유신정권은 국회에서 야당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당총재 집마저 가처분하는 어이없는 사태를 유발했다. 결국 유신체제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하여 ‘부마민중항쟁’을 초래함으로 민중의 공개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박정희는 유신 제2기 대통령에 취임한지 1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그의 심복이던 당시 중앙정부부장 김재규가 일으킨 ‘10.26사태’로 시해됨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벅정희는 3년간의 군정기를 거쳐 민간정부를 출범시켰다. 박정희의 민간정부는 3공화국과 4공화국이 완전히 구분된다. 제3공화국은 제4공화국에 비해 정치적 자유나 시민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다원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박정희가 추구하는 이른바 행정민주주의체계였다. 행정민주주의는 의회민주주의를 비능율 또는 무능으로 인식하고 관료들의 행정적 주도로 국가정책이 입안 집행된다. 따라서 정치과정에서 의회의 역할은 축소되고 시민들의 참여는 봉쇄된다. 이런점에서 제3공화국도 실상은 관료적 권위주의형 정치체제였다.


박정희의 제4공화국인 유신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독재보다도 정치적 공간이 훨씬 더 좁아진 권위주의 독재정치체계였다. 권위주의 정권 모델은 다양한데 볼세비키(Bolshevik),나찌(Nazi), 파시스트(Fascist), 조합주의(Corporatist)모델 그리고 군부정권(Praetorian)등으로 구분된다(Amos Perlmutter,1981,2) 권위주의독재정권의 또 다른 유형은 군부정권체계(praetorian society)와 1당 정권(single-party regimes)이다. 여기에서의 1당은 정당의 수적인 의미보다 정당의 활동과 세력을 의미한다. 즉 군소 정당이 있지만 그것은 화장하는데 필요한 분가루일 뿐이다. 박정희 정권의 특성에 대해 관료적 권위주의형 군부지배체제(김호진, 244)라는 평가와 집정관체제 (한배호,1994, 318-328)라는 견해 등이 있다. 권위주의에 관료주의가 합쳐진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는 특히 우리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이다. 관료적 권위주의는 1964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정착된 정치체계로서, 권위주의는 남미 정치체계들의 낮은 근대화수준 및 비민주성을 함의하고 있으며, 관료주의는 사회부문들에서 조직능력의 성장,정부의 포섭에 의한 통제전략, 기술관료들의 경력유형과 권력기반, 대규모 관료조직의 중추적 역할 등 근대화수준이 높은 특징을 나타낸다(한상진,,1984, 69).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는 관료주의가 갖는 비민주성의 일면과 군부지배의 비민주성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관료주의의 비민주성에 군부지배의 비민주성을 더하여 양적으로 비민주성이 그만큼 강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관료주의가 비민주성을 가졌다는 것은 공공정책을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가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 입장에서 볼때, 비선출된 관료들이 공공정책을 결정한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군부지배보다는 민간 관료가 지배에 가세되었다는 점에서 비민주성을 엷게 하는 희석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적 권위주의 독재는. 정신성 또는 이념적으로 “멘탈리티”나 순수한 실용주의를 분명히 하는 경향이다. 또한 어떤 원칙에 호소하거나 막연한 도덕적 또는 종교적 특성의 어떤 규칙을 따르도록 호소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 하려한다. 린즈(Juan Linz)는 이러한 원칙이나 규칙들을 정신성(mentality)이라고 부른다(Juan Linz,1975,266-67).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 근대화, 새마을 운동, 국가안보 등을 내세웠다. 현대적 권위주의 정권은 또한 전체주의독재와는 달리 외적인 부합성에 만족한다. 즉 시민이 요구된 사항을 저항없이 수행하는한 당국은 시민을 괴롭히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시민의 부합성은 위장될수도 있으나, 그가 어떤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한 안전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문화, 예술 등의 비판에는 관대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은 광범위한 정치적 무관심을 즐긴다. 칼러 TV방영을 서두르고 야구단을 창설해 놓을 테니 국민들은 이를 즐기며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바램이다. 참여를 축소하기 보다는 그 참여가 정권에 위협적 요소가 되지 않도록 참여의 방향을 전환(channel)한다(M.N.Hagopian,117-122). 이러한 경향은 박정희의 독재를 이은 전두환 정권에서 본격화된다.


4. 전두환 정권 : 집정관적 권위주의체계


전두환 정권도 장면정권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반제의 상황에서 태어 났으나 결과는 외혀려 유신독재와 유사한 정치체계로 회귀되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배경은 민주정치체계의 또 다른 유형인 입헌독재 즉 민주적 독재체계를 교묘히 권력의 찬탈과 유지에 악용한 극명한 예이다. 정부차원에서 입헌독재는 행정부에 권력이 집중됨을 의미한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그들의 정상적인 활동을 다소 포기하고 그들의 활동을 행정부에 넘기거나 그들의 기능을 일시 정지시킨다.민주적 독재라는 말은 자가당착 같이 보인다.


독재(dictatorship)는 원래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이 완전한 반민주적 의미를 준 것은 아니었다.로마 국가가 위험한 시기에 한사람 독재자는 외국과의 전쟁이나 시민 반란에 의하여 야기되는 치명적인 위험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충분한 권력을 갖고 임명되었다. 로마 독재자의 권력의 위험은 두 가지 핵심적 방향 즉 (1) 기간은 최대 6개월, (2) 범위는 개인적으로 로마 정체의 입헌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제한되었다.


로마 독재는 입헌정부의 영원한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헌법 실천과정에 있어 일종의 간이 조치였다. 이러한 로마 모델에 따른 민주적 독재는 입헌독재로 불려지며, 오늘날의 민주정권도 (1) 외국과의 전쟁 (2) 국내반란(내란) (3) 경기침체 (4) 천재지변과 같은 위기나 비상사태의 상황에 직면하면 입헌독재에 의존하도록 만든다.(M.N.Hagopian,42-43) 외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에서 외국과의 전쟁이 국가 상황의 강력한 통제를 가져왔던 점에서 분명해진다. 전쟁기간 처칠( W.Churchill)의 권력은 히틀러(Hitler)시대의 권력에 비하여 더 적지 않은 독재적 권력이었고 의회는 정상적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내란 진압은 종종 입헌독재에 의지하는 이유가 된다.

한편 민주독재체계는 실제적인 독재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빈번히 사전에 시험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조작된 위기와 실제적인 위기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1930년대의 대공항(Great Depression)과 같은 경제적 위기는 정부로 하여금 경제 통제에 관하여 비상대권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자유방임주의적 위치는 경제에 대한 개입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외국과의 전쟁이나 내전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이다. 아울러 홍수나 지진 같은 천재(天災)도 거대한 파괴적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근대 정부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처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군부는 국가 안보와 사회안정을 구실로 장기간 계엄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이 계엄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1979년 10.26으로 대통령이 유고되고 권력핵심부에 진공상태가 초래됨으로써 10.26사건의 수사를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었던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12월 12일 반란을 통해 계엄권을 찬탈하고 정권장악을 기도하였다. 1980년 유신정권의 반제요구에 따라 정치활동이 대폭 허용되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이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다가올 대권경쟁이 치열해졌고 학생과 노동계 등 각계의 자유의 요구에 대한 못물이 터져 나왔다. 특히 학생들은 필요이상으로 군이 정치,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고, 이기간 전두환 세력은 정권탈취의 기도를 현실화했던 것이다.


신군부세력은 80년 5월17일 계엄의 축소가 아니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다시 헌정이 완전 중단되고 군부의 계엄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전두환 세력의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계엄령 속에서도 신군부의 등장에 대한 공개적인 시민의 저항이 일어났고 200여명의 시민이 계엄군에 학살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이러한 과정에서도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임시 대통령 최규하를 밀어내고 동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군부세력은 정권장악과 유지방식을 대분분 박정희의 군부정권당시에서 시사 받는 것 같았다. 박정의 국가재건최고회의 대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집권에 필요한 각종 제도를 마련했다. 그리고 군부정권의 옷을 벗기 위해 10월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 당시의 대통령선출방식과 흡사한 제도를 통해 다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와 다른 점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야당의 참여를 허용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의 단임으로 정한 것과 유신정우회 대신 전국구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와 같은 소급법으로 기성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뒤 선별적으로 제외시켜 여당과 3개의 야당에 분산시켜 관제정당을 만들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관제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민주사회당)의 창당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요 국민에 대한 기만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공직자와 언론인들의 대량해직을 통해 언론을 무력화시켜 홍보기관으로 악용하는 한편 지식인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철저히 통제하며 자신들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조작하고 야당 특히 저항세력들의 언동은 거의 완벽하게 제한하였다. 정치활동이 규제된 채 가택에 연금된 김영삼은 20일 이상의 단식저항을 통해 재야세력의 반정부의식을 일깨웠다. 국내에서 전두환 세력에 저항한 김영삼과 군부정권의 씨니리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미국으로 추방된 김대중 등 야권의 두 지도자는 전두환정권의 억압에 더 이상 질식사할 수 없다는 인식 속에 1983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여 반정부 재야세력의 구심체로 등장했다.


전두환 세력은 11대 총선까지는 동반야당과 밀월관계를 유지했으나 12대 총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주요 야당인사를 제외한 대분의 야당인사에 대한 정치규제를 해제하여 참여의 문을 열었다. 그 결과 민추협 참가자들은 1895년 1월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다음달 2월 12일의 12대 총선에 임하게 되었다. 미국에 체류중인 김대중은 정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2월 8일 귀국하였다. 김대중의 귀국은 필리핀의 반체제운동가였던 아퀴노가 귀국과정에서 피실된점과 관련하여 세계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사실도 은폐하려 기도했지만 마침 총선거운동기간 중이어서 유세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는 야당붐 조성에 시너지효과를 낳았다. 선거결과 신한민주당은 제1당을 차지함으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야당과 여론의 공세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85년 3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미해금자 14명을 마지막으로 해금하였고, 야권은 이를 계기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추진을 가속화시켰다. 야당과 시민의 민주화요구는 유신정권당시보다 훨씬 활발하고 거세었다. 역사의 시간이 그만큼 전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국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성 고문사건과 대학생의 고문치사사건은 소극적이던 시민의 저항을 행동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탄압에서부터 전두환 정권의 공권력행사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남한을 물바다로 만들려한다며 대응땜의 건설필요성을 들고 나와 국민의 성금을 강요한 이른바 ‘금강산 땜’사건을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가 하면 내각제 개헌으로 정권연장을 기도했지만 한번 추락한 권위와 권력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두환은 드디어 1986년 4월30일 국회가 합의하면 개헌을 하겠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국회의 미 합의를 이유로 1년 뒤인 87년 4월 13일 다시 개헌을 유보한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등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한 방황을 거듭했다. 그러나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더 이상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진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후임 대통령후보로 전두환의 육사동기생이며 12.12반란동지인 노태우를 선출하여 군부정권의 연속성을 도모하려 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 의도에 대한 저항은 야당, 재야, 학생을 뛰어넘어 일반시민들, 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여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의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약속함으로써 국면전환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시민저항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굴복이었다.


여.야는 결국 5년 단임의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마련하여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하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민주화투쟁을 함께해온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선거를 둘러싸고 분열하여 독자 출마함으로써 노태우의 당선결과를 가져와 민주화투쟁의 결과가 결국 군부정권의 연속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12.12구사반란, 5.17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자의 대량학살, 언론기관의 통폐합과 공직자 등의 대 숙정, 저항세력의 고문치사, 6월항쟁등 역사에 지울수 없는 오점을 남긴채 군부정권의 몸에 민간정부라는 화장으로 표면적인 변신을 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부터 정권탈취의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에 야당과 재야, 시민세력의 저항력은 유신정권당시보다 훨씬 더 강화되어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군부정권의 통제도 강해야 했다. 정권은 그만큼 더 탄압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약한 명분을 극복하기 위해 선진조국창조, 정의 복지사회구현 등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국민을 설득하려했으나 그 어느 것도 수행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전두환 등 몇몇 군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전두환 정권의 권력의 행사는 이들의 사유화와 중앙집중화로 나갔다. 정통성이 박약한 정권은 권력의 힘으로 지탱하기 위해 모든 정치, 사회구조를 수직적 관계로 만들었다. 특히 언론의 통제를 통해서 정권의 정당성을 분장해 나갔고, 재벌의 통제를 통해서 정권연장의 자원을 확보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부정부패가 쌓여나갔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체제가 갖는 헛점을 권력을 통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통제를 통해서 보완하고자 함으로써 결국 집정관적 권위주의 독재체제로 나아갔다.


5. 노태우 정권 : 과도적 의사민주체계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는 1987년 12월 이른바 ‘3김’의 야권 분할과 지역주의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25일 제 6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의 그러나 2개월 뒤인 2월 26일의 총선거에서는 분열된 야당이 여당을 제치고 선전하여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결과적으로 야권에 떠밀리어 권위주의 정권의 여러 제도와 관행을 타파하는 개혁과 5공 정권의 비정(秕政)에 대한 심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리게 되었다. 우선 전두환 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의 동생에 대한 사법처리부터 시작된 전두환에 대한 심판은 결국 전두환을 11월28일 백담사로 유배시키게 되었다. 아울러 노태우 정권의 최대과제인 5공 청산과 6.29선언의 실천이 야당의 압박 속에 시작되었다. 5공청산은 단순히 노태우 정권의 인계자인 전두환 정권기만이 아니라 박정희 소장의 정치개입으로 비롯한 군부정권 전기간에 벌어졌던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국회는 우선 새로 부활된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제도에 따라 5공 정권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치권력비리,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 언론 통폐합문제 등이었다. 청문회는 결국 5공의 신군부 핵심세력에 대한 시민의 단죄였다. 그러나 교묘한 변명과 위증 등으로 청문회는 관심에 걸맞는 실체규명에는 미흡했다. 특히 헌정사상 최초로 백담사에 유배된 전직대통령을 청문회에 출석시켰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내고 말았다.


5공 청산작업이 국민의 기대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자 재야와 학생 등은 정치권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고 5공의 핵심세력에 대한 사법처리,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권위주의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민간정부로 내비치려는 노태우 정권은 안으로는 여소 야대에 밀리고 밖으로는 시민세력의 저항에 직면하고 자체적으로는 5공의 승계자라는 한계로 인해 연약하고 표류하는 이른바 ‘물정부’로 비쳐지게 되었다. 이 사이에서 강한 야당과 노동계와 학생들의 진보적인 변화요구가 거세게 일었고 급기야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한편 71년 대통령선거이후 야당을 이끌어오면서 선두를 지켰던 김영삼은 대통령선거에서의 득표율은 김대중에 앞섰으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밀리면서 두사람의 경쟁관계는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김대중은 제1야당의 대표로 노태우의 파트너가 되는 반면 김영삼은 후순으로 밀려났다. 이에 김영삼은 노태우의 선거공약인 중감평가실시를 요구하는등 노정권에 강경노선을 견지했으나 김대중은 완급을 조절하면서 노태우의 정당성에 발목을 잡고 있던 중간평가의 유보에 동의해주면서 노태우의 파트너자리를 다져갔다. 김대중의 노태우 접근에 가장 강력히 반발하던 김영삼은 제4당에 머물러 있던 김종필과 함께 1990년 1월22일 노태우와 합당하는 김대중에 대한 대 반전을 이루어 냈다. 김영삼은 김대중을 제치면서 대권을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 간것이었고 김종필은 내각제를 고리로 하였다. 여소야대로 출발한 국회는 결국 3당합당을 통해 ‘거야왜야’로 전환되었고,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세력이 가담하여 과거 3-4공화국의 군부정권세력과 5공화국의 군부세력의 동거정권이 되었다.


3당 합당은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정계개편이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3공화국의 보수세력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 등과 함께 지배연합을 형성함으로써 지지기반을 대폭 확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신장은 결국 노태우 정권의 몸집을 불리어주었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게된 노태우 정권은 다시 다수의 힘으로 야당을 제압하기 시작함으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진면목을 늘어내기 시작했다. 노태우 세력의 지원을 기대하다보니 과거 야당시절의 요구와 주장이 사라져 버린 모습이었다. 김영삼은 차기 대권도전을 염두에 두고 노태우 세력이 기도하던 내각제개헌을 뿌리친 채 ‘한신의 고사’를 되 뇌이며 결국 대권후보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흔쾌히 김영삼을 지원하지 않은채 중립을 내세워 탈당함으로서 김영삼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승리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군부의 몸에 문민으로 치장한 의사민주체제였다. 초기에는 여소야대의 구조 속에 어쩔 수 없이 5공 청산과 개혁을 시도했으나 마지못해 떠밀리며 온갖 수단을 다해 본질을 피해가면서 위기를 피해갔다.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비롯해 국민에 대한 공약을 허울좋은 궤변으로 모면해 가면서 어느 것 하나도 근본적으로 해결해 내지 못했다. 3당합당을 통해 세력이 확장됨으로서 노 정권은 바로 자신이 속했던 5공의 행태를 그대로 내비치며 속으로는 권위주의이면서 겉으로는 민주정치를 표방하는 의사(擬似)민주정치체계였다.


6. 김영삼 정권 : 문민체계의 김영삼정권


1992년 12월 18일의 제14대 대통령선거는 30여년 간의 군부정권의 인맥을 단절하고 실질적인 민간정권이 들어서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비록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아니지만 대통령당선자 김영삼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저항해온 야당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3당 합당의 태생으로 인해 주변에는 5. 6공 세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김영삼 정권은 이러한 태생적 한계의 극복과 5,6공의 군부세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문민정권임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다. 김영삼 정권은 우선 개혁을 강도높게 추진하면서 재산공개를 통해 부패공직자를 추방하고 공직사회에 대한 사정작업을 통해 국회의장 등 고위공직자를 축재 혐의로 정치권에서 떠나보냈다. 공직자 재산공개는 5,6공의 부패세력을 선별하는 틀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권은 또한 군의 파벌을 혁파하여 정치군인의 온상을 허물었다. 이러한 개혁작업으로 김영삼 정권의 지지도는 급상승하게 되었고, 개혁에 소극적인 김종필마져도 출당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역사바로세우기작업으로 12.12군사반란에 대한 재수사를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등 2명의 전직대통령과 관련자를 구속 수감하는 대 사건을 만들었다. 김영삼 정권은 또한 지방자치를 완전 부활시키고 공정하고 깨끗한 정치를 위한 정치개혁법을 마련했다. 금융, 토지실명제를 통해 경제과정의 지각을 흔들었다.


김영삼 정권은 5.16군사쿠데타 및 유신세력과 신군부의 5,6공세력과 합동으로 정권을 획득했으나 전자의 세력은 개혁이라는 축출하고 후자는 역사바로잡기의 방향에서 단죄했다. 이로써 정권의 변동형식면에서는 집권당의 정권연장이지만 내용에서는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세력의 정권장악이었다. 김영삼정권은 세력의 평정을 통해서 강도높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과 개혁은 기득권세력과 경제계의 비판과 저항을 초래했다. 특히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사정으로 인해 표적사정과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공직사회에 대한 사정으로 공무원사회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복지부동’ 또는 ‘복지안동’이라는 용어가 회자되는 등 공개 또는 비공개적인 공직사회의 저항도 제기되었다. 금융실명제는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중소상인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정권의 개혁은 그 방향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나 국민의 이해부족, 그리고 추진과정의 독선으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와 동참을 구하는데 미흡했다. 김영삼정은 민주화투쟁의 지도자로 문민정권의 정당성을 과신한 나머지 독선적인 국정수행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초래했던 것이다. 1995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김영삼정권이 참패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었다.


김영삼정권은 그러나 1996년 4월의 15대 총선에서는 예상 외의 선전으로 임기 말의 국정수행에 안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96년 말 국회의 노동법변칙처리에 대한 노동계의 거센 반발저항과 97년 초에 터져나온 한보비리사건은 김영삼정권을 휘청거리게 만든 강펀치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 차남의 국정개입 및 재계 유착 의혹 등으로 김영삼 정권의 권위가 추락되고 권력누수현상이 급속화 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집권당의 대통령후보선출과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로 행사할 당초의 의도가 좌절된 채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집권당의 민주화시험에 긍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김영삼정권은 임기 말에 외환관리의 잘못으로 대외신인도가 추락하면서 결국 한국경제를 IMF의 관리체제로 빠트림으로써 그의 민주화와 개력에 대한 도덕성 마저도 먹칠을 하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결국 역대 권위주의정권에서 묻혀지고 가려졌던 비리들을 과감하게 파헤치고 바로잡는데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정치영역이 크게 확대되고 언론의 역할이 팽창되었으며 반대로 국가의 자율성은 축소되었는가 하면 기업의 자율화 움직임이 현저히 나타나는 등 민주정치체계의 요건이 크게 충족되는 바탕을 마련했다.


그러나 30여년 간 각 분야에 쌓이고 정치인과 시민의 의식에 파묻힌 권위주의 잔재가 일시에 일소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 같다. 김영삼 정권은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을 단절하고 문민정권을 강하게 표방했으나 대통령의 권한행사가 과거와 달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의사는 법과 제도에 우선하고 집권당이 대통령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 국회도 그에 따라가는 형편이었다. 김영삼은 특히 통치방식에서 민주정치이론의 핵심이며 특히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3권 분립 즉 행정부와 국회와의 균형과 견제의 틀을 무시했다. 표면적으로는 의회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행태에서는 권위주의시대의 일그러진 권력분립의 틀을 복원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를 수단화했다. 반면에 여론에 민감하고 그러한 여론몰이를 의회견제용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김영삼 정권은 언론식 표현으로는 문민독재로 규정되었다. 김영삼 정권에 대한 성격규정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 (D. O' Donnell, 1994)성격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위임민주주의는 민주적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 국회나 정당의 제약에서 벗어나 통치하려는 것이다. 위임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권자가 제도화된 정치과정 특히 의회를 통한 대의 민주정치과정보다는 유권자를 직접 대상으로 하여 설득하고 통치하는 형태이다.(Guillermo O'Donnell, 1994. 1) 민중주의는 집권자가 의회의 대표나 제도보다 민중의 의사가 우월하고 우선한다는 신념에 따라 통치하는 형태이다.(Arthur Lipow, 1996,ch.2). 1996년 말의 노동법파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통령권력에 대한 보다 엄격하고 광범위한 제한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위임민주주의나 민중주의는 개선장군처럼 나팔을 불며 요란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전염병처럼 예고 특히 찾아드는데 특히 참여민주주의와 직접민주정치의 강조가 자칫 지배자에 의해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나 민중주의(populism)로 악용될 수 있고 이 경우 자칫 중우정치나 독재 특히 나지즘과 패시즘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김영삼 정권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3가지 정치체계의 복합적 작용을 거쳐 제도상의 민주체계에 운영상의 경쟁적 권위주의체계였다. 즉 권위주의에서 의사민주체계의 단계를 거쳐 민주체계로 전환된 체계였다. 그러나 김영삼의 표면적 수사와는 달리 실제의 통치양식은 이른바 인치 즉 권력의 사인화(personalization)현상이 농후했다. 이러한 점에서는 경쟁적권위주의체계이고 위임민주주의 체계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다.


7. 김대중정권 부의 국정운영과 정치발전


김대중정권에 대해서 성격을 규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김대중 정권이 안고 있는 구조적 특성을 통해서 김대중 정권의 특성을 짚어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외형상으로는 집권당의 정권유지였지만 내용상으로는 「세력정권교체」였다면 김대중 정권은 외형상으로는 정당간의 수평적 정권교체이지만 내용상으로는「민주화세력」과 「5.16쿠데타 및 유신주도세력」이 「필요악」으로 연합해 성립된 정권이다. 따라서 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완전한 정권교체라기보다는 부분적 권력교체인 동시에 독재 및 보수세력과 민주개혁세력의 연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이 민주화세력 이외의 세력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상황이었던데 비해 김대중 정권은 정권의 획득에서부터 5.16 및 유신주도세력과 「내각제개헌」을 고리로 연합해 공동집권형태의 상황이다.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호남지역 득표율은 광주 97.3%. 전남 94.7%, 전북 92.3%였다. 반면 영남지역에서는 경남 11.0%, 울산 11.8%, 대구 12.5%, 경북 13.7%였다. X자형의 양극화 현상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외형상으로는 정당간의 수평적 정권교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민유권자의 득표 면에서 차점자와 39만여 표의 근소한 표 차로 YS의 193만여 표 차이에 비해 지지기반이 훨씬 약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국회의 세력도 정권출범 당시 80석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일부 야당의원을 입당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05석에 불과하여 현재 집권당(국민회의)단독으로 국회의 절대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또한 시민들이 경제문제가 최악의 위기 상황이라는 공포와 불안의 상황에서 출범했다. 이는 국가적으로는 불행하고 국민에게는 고통스럽지만 집권자에게는 그만큼 국민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군사정권의 잔재청산과 민주주의 완성」이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적 과제로 출범한데 비해 김대중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고 절박한 과제라는 점에서 국민의 동원과 조종이 그 만큼 용이한 상황이다. 군부지배체제에서 벗어난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문제 이미 잊혀진 관심권 밖의 일이었다. 한국 정치의 최대 중심과제였던 군부정권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사실상 이루어진 상황에서 경제문제는 모든 관심의 결정체일 수 밖에 없다.


김대중대통령은 TV를 통한 국민과의 직접대화로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설득하거나 또는 국민이나 여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통치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취임 1주년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에서 정계개편의 문제에 대해 「지금 정치는 국민의 직접 정치다. 야당이 6개월간 총리인준을 해주지 않았고 2개월 동안 실업예산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원내과반수를 만들라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생겨났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라는 답변이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위임, 또는 민중민주주의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고 특히 재벌, 은행, 정당과 정치인등이 국민으로부터 극도로 불신에 빠진 상황에서 위임, 민중주의는 시민의 저항이나 비판이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대의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방편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법의 지배와 대의정치를 훼손하게 된다. 또한 통치자는 민중의 의사를 해석하는 대표보다는 민중의 의사와 일치되도록 행동하는 경향으로 빠지게 되어 정책이 인기주의적 단기처방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위임민주주의와 민중주의는 독재와 함께 정책적 오류의 역기능을 동시에 초래할 위험스런 통치방식인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을 이를 참여민주주의 실현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는 원자화된 대중에 대한 선동을 통한 피동적 참여가 아니라 정당과 시민단체 등을 통해 조직화되어 국정운영에 견제력을 갖고 실제 견제력을 행사라는 것이어야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미 위임, 민중주의적 통치방식에 대한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1)민주화투쟁의 카리스마 2)해박한 지식과 달변 3)정연한 논리와 언술 4)연장위치에 따른 가부장적 권위 5)수평적 정권교체의 대통령 6) 경제를 살려가는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현재 김대중대통령은 최고의 정치스승이다. 따라서 적절한 통제가 결여되면 독선과 권위주의로 빠질 개연성이 충분하며 이미 그러한 개연성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야당의 지적이다. 게다가 IMF관리체제의 극복과 경제회생이라는 국가적 과제는 대통령의 권력행사에 대해 아예 브레이크를 빼버린 모습이다. 준비된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추앙되고 김대중대통령 자신은 위임․민중주의의 유혹에 빠지게 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위기관리를 이유로 국정운영재량권을 최대화하려고 시도하는 가하면 국회에 대해서도 비판과 견제보다는 추종을 요구하는 통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언론도 권력에 대해 부드러워야 하고 각 이익집단도 자제해야 한다. 대통령이 관여하고 결정해야 국정이 돌아가고 사기업의 빅딜도 대통령이 관리해야 한다. 여당은 국회에서 대통령의 의사전달의 채널이 되어 대통령의 의사와 대통령의 말이 곧 국정의 방향이요 집행방식이 된다. 입헌독재가 합법적 독재인데 비해 이러한 국정운영방식을 위기 관리적 권위주의로 부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