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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nter le Commun des Hommes(A. Negri) 강독
2010. 10. 1 ~끝날 때까지(매주 수 오후 7시 30분) @ 다지원
●「아랍혁명의 세계사적 위치」(『오늘의 문예비평』 , 2011년 여름)
●「맑스주의의 진화를 가로막는 경제주의적-‘맑스주의’주의적 퇴행에 대한 비판--서동진의 『인지자본주의』 서평에 대한 반론」
●「생명과 혁명 : 생명의 정치화를 위한 서설」(<맑스코뮤날레>, 2011년 6월 발표)
●「인지장치로서의 자본: 『인지자본주의』의 스펙트럼」([인지와 자본] 심포지엄 발표 , 2011년 5월 19일, 숨도) http://book.interpark.com/event/EventFntTemPlate.do?_method=GenTemplate&sc.evtNo=106322
●세계화의 갈림길(가제)
●혁명의 세계사(가제)
●인지와 자본(공저)
●John Holloway, Crack Capitalism, Pluto, 2010
●Antonio Negri, GlobAL, Édition Amsterdam, 2007
자본 내재성에서 삶 내재성으로
노동가치론이 보편성을 입증받으려면 노동 외부에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즉 정치, 문화와 같은 노동 외 범주들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적어도 노동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전희상(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사유경향을 "중요한 것은, 정치, 문화 등의 분석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의 근본적 규정성을 인정하고 여기에 자본-노동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특수한 요소들을 분석에 적절히 반영하는 것이다"(287-8)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그는, 사회적 삶과 생명체의 세계를 "개체들이 함께 만들어 낸 세계"로 보면서 "이 사회적 세계에서 모든 개체는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보는 나의 공통되기의 존재론([인지자본주의], 167-8)을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이라고 비판한다. 이 조급한 비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에게, 공통되기의 존재론은, "생명이 본원적으로 그리고 항상적으로 공통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공통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본래 공통적임을 의미하기보다 공통되기의 노력을 통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인지자본주의, 168)고 한 나의 글을, "사회적 삶은 생명의 사회적 표현이며 생명적 개체는 "본래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전희상, 286)로 읽는 오독이 필요했다는 것에는 안타까움을 끔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를 자본-노동 관계로 이해할 때 노동은 임금wage노동이며 강제노동이다. wage라는 영어는 "담보로 잡히다"는 뜻의 프랑스어 gagier에서 나온 말로 "담보를 잡히고 전쟁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wage에는 이렇게 채권-채무 관계의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노동'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ravail는 세 개의 말뚝을 이용한 고문도구였던 tripalium에서 나온 라틴어 tripalar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산고'의 진통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 말 travail는, 영어 labor도 그렇지만, 수고, 고통, 아픔을 겪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노동이 사회적인 것의 기초로 되는 것은 전희상도 인정하고 있듯이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서다. 그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인 착취관계는 상품경제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으로, 경제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되고, 경제와 비-경제 사이의 구분은 내적인 구분(287)이라고 단언한다. 이 믿음에 기초하여 그 내부에서 맑스에 대한 그의 표상들과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표상이 서로 충돌한다.
"마르크스는 초역사적인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오히려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를 사상한 자연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사회를 분석하지 않으며, [인지자본주의]에서와 같이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 ― 공통되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사회― 에 입각하여 (산업)자본주의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오히려 내재적 비판이다."(전희상, 286-7)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도 공통되기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인지자본주의]의 생각이다. "회복해야 할 것은 교환과정 이전에, 혹은 그것과는 별개로 부의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 사이, 그리고 인간, 기계, 자연 사이의 창조적 공동협력에 대한 인식이다."([인지자본주의], 492) 그러나 이러한 공동협력, 즉 공통되기는 전희상에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가진 표상과는 달리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본관계가 그것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 창조적 공동협력을 가치 술어로 환원한 후, 이것을 가치라는 척도에 따라서 필요한 것과 남는 것으로 분할한다. 즉 여러 힘들 사이의 공동협력과 공통되기를 가치 요소들로 분할한다."([인지자본주의], 492) 같은 페이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맑스는 잉여가치의 착취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생산과정의 이 요소적 분할의 논리를 받아들였고 그 중에서 노동 요소의 근본성과 가치형성에서의 유일성을 단언했다." 교환가치적 맥락에서 노동시간이라는 요소의 근본성과 유일성 강조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사용가치적 맥락, 부의 맥락에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의 맥락에서는, 자연력과 노동력 그리고 기계력은 각각의 요소로서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긴밀한 접속과 연결을 통해, 아니 오히려 단일하고 공통된 자연력으로서 생산적 창조력으로 기능한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노동이 자연력인 노동력의 표현일 뿐이며, 노동은 여러 수단들 및 부속 주체들과의 협력 속에서만 수행된다고 말한다."([인지자본주의], 492)
이러한 생각이 과연 '초역사적인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일까? 이것은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일까? 맑스는 정말로 자본주의 비판을 자본 외부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자본에 내재적인 방식으로 수행했을까? 그는 과연 사회적인 것의 자연주의적 존재론을 거부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나의 생각을 미리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본 내재적인 자본 비판, 자본 중심적인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온갖 개혁주의의 뿌리이며 (임금노동을 사회적인 것의 근본적 기초로 삼는 관점과 더불어서) 바로 자본가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정식화하는 방법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편-맑스와 총체-맑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단편-맑스는 맑스의 이러저러한 단편적 언급들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총체-맑스는 맑스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단편-맑스들은 자본내재적 비판을 맑스주의 방법의 모델이라고 정당화해 줄 수 있다. 예컨대 [자본론]과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평조]만이 고유하게 맑스적인 것이라고 본 알뛰세의 방법은 전형적인 단편-맑스의 사례다. 초기 맑스와 중기 맑스를 대립시키거나 중기 맑스와 후기 맑스를 대립시키는 방법도 단편-맑스적 방법론에 속한다. 물론 총체-맑스가 맑스의 작품들에 수미일관성만 존재하며 모순이나 공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맑스의 사유들 속에서 모순, 공백, 수정, 자기비판 등이 무수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경향적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그것은 착취비판, 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등의 술어로 요약할 수 있는 일관성이다.
이 일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맑스의 비판은 자본내재적이기보다 삶내재적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관계로 보았는데, 그 사회관계는 어느 시대에나 공통된 존재론적 생명활동의 특수한 역사적 현상방식이다. 맑스는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갖고 있는 경향, 즉 특수한 사회관계를 일반화하는 경향과 투쟁하는 가운데 공통성과 일반성으로부터 상이성과 특수성을 구분하고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3쪽) 하지만 이 특수성에 대한 강조는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공통성에 대한 그의 서술과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공통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1844년 수고]에서 집중적으로 서술되는 노동소외론 혹은 소외된 노동론에 잘 나타나 있다. 소외Entausserung란 외부로(äußer) 떨어져(Ent-) 나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외과정에서 외부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1. 자연과 2. 자기자신 곧 인간자신의 활동기능.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키므로, 이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유(類)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을 소외시키며 둘째 개인생활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이를 유적 생활의 목적으로, 그것도 추상적이고 소외된 형식을 통해 그러한 목적으로 만든다."([경제학-철학 수고], 61)
맑스에게서 인간이 유적 존재인 것은 (전희상도 말하고 있듯이) 어떤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유 곧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그밖의 다른 사물들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금 살아 움직이는 유로서의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고, "인간이 보편적인universel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경제학-철학 수고], 60) 맑스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동물이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되어있음에 반해 인간은 자기의 생명활동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적인 생명활동을 하는 데서 찾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생활을 대상으로 대하는 의식적인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이 유적 존재이기 때문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연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이 된다.[인간의 유적 생명력이 자유로운 활동이 되는 인지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황수영, '생명과 인지'([인지와 자본], 갈무리, 2011, 근간 참조] 나아가 맑스는,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자연전체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표준과 필요에 따라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표준에 따라 생산하는 법을 알며 미의 법칙에 따라 대상을 조형하기도 한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은 대상세계의 가공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현실적으로 실증하는데 바로 이러한 생산이 곧 활동적인 유적 생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을 통해서 자연은 인간의 작품과 인간의 현실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맑스를 따라,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62)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을 의식에서처럼 지적으로 이중화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처럼 활동적으로 이중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나 인간의 이 유적 생명은 노동의 소외로 인하여 박탈되고 전도되어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되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산대상을 탈취함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유적 생활 곧 인간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아 버리며 인간의 비유기적인 몸인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탈취함으로써 동물에 비한 인간의 이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전화된다. 또 소외된 노동은 자기활동 즉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 생활을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인간이 유에 대해 가졌던 의식 역시 소외를 통해 유가 그에게 수단이 되는 식으로 변형된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노동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인간들이 자기자신에 대해서뿐만 서로에 대해 대립하게 된다.(경철수고, 62-63 참조)
내가 말한 바 "환경과의 상호섭동을 통해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자기생성적 조직으로서의 생명"이 맑스가 말하는 바,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몸으로 삼으면서 자기자신과 자연전체를 재생산하는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유적 생명"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맑스는 자연주의를 거부하기는커녕 인간주의가 곧 자연주의(Naturalismus)라고 누누이 표현했고 혁명도 자연사적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규정했다. 맑스는 철저하게 자연내재적이고자 했고 생명/삶 내재적이고자 했으며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형태로 나타나는 노동인 임금노동을 유적 생명의 소외(외부화)로 정의했다. 유적 생명의 존재론적 운동을 맑스에게서 제거하는 것은 맑스의 급진성(뿌리에 이른다는 의미에서)을 제거하는 것이며, 맑스의 비판을 뿌리 없는 비판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내재성을 자본내재성으로 전도시킴으로써 하나의 소외된 역사범주로서의 경제(적인 것)을 나머지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범주로 위치지우려는 경제주의의 전략에 속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제적인 것에 의존하는 자본에게 커다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일부의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곤 하듯이 유적 생명과 소외라는 개념이 청년 맑스의 헤겔주의적 잔재에 불과하고 맑스가 [자본론]에서는 청산해 버린 낡은 개념이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중년에 이른 맑스는 '자본론] 초고인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소외'의 테마를 반복할 뿐 아니라 발전시킨다.
"사회적 부가 갈수록 노동자체에 의해 창출된 노동조건들로 표현된다는 것,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사호적 활동의 한 계기-대상적 노동-가 다른 계기인 주체적 노동, 즉 살아 있는 노동의 거대한 신체가 되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하여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그것들의 범위 자체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 그것이 갈수록 거대한 자립성을 띠게 되고 사회적 부가 거대한 분량의 낯설고 지배적인 노동권력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대상화됨(Vergegenstaendlichtsein)이 아니라 소외됨, 외화됨, 양도됨(팔림-인용자)에 두어져야 하며 사회적 노동 그 자체가 그 계기들 중의 하나로서 그 자신에 대립시킨 괴물스런 객관적 권력이 노동자에 속하지 않고 생산의 인격화된 조건(즉 자본)에 속한다는 조건에 두어져야 한다."(요강, 3권, 124; 번역 수정)
[경철수고]에서 맑스에 드리운 헤겔의 그림자는 소외를 대상화 그 자체와 동일시하곤 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었다.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수정하면서 대상화보다 오히려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에 속한다는 것이 소외 문제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생산조건들이 왜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속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자본론]은 응답은 다성적이다. 첫째 시초축적 장은 폭력이 그 역사적 계기였다고 답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이 계기는 역사적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 왔다. 시장은 국가(폭력)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이 측면보다 시장 메커니즘에 더 역점을 두어 설명한다.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등가적 상품교환 속에 들어 있는 부등가교환, 즉 착취라는 경제적 과정이 낳는 법적 정치적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노동자 관점에서 볼 때 노동의 소외가 자본가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 노동의 점취로 나타나는 이 착취는 실재적이고 또 필연적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 역사적 필연성이 토대에서 볼 때 생산력 발전을 위한 필연성이지 생산의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사라지는 필연성이고 이 과정의 (내재적인) 결과와 목적은 그 과정형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토대 자체를 지양한다"(요강, 3권, 125). 무엇이 이것을 사리지게 하는 것일까? 나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노동의 인지화를 통해서이다. "단순한 개별적인 노동이거나 또는 단순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일반적인 노동으로서의 살아 있는 노동의 직접적인 성격이 지양됨과 더불어, 개인들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일반적이거나 사회적인 활동으로 정립함과 더불어 이러한 소외형태는 생산의 대상적 계기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므로 대상적 계기들은 개인들을 개별자들이되 사회적인 개별자들로서 재생산되게 하는 소유로서, 다시 말해 유기적인 사회적 신체로서 정립한다."(요강 3권, 125) 이로써 유적 생명이 소외로부터 벗어날 주객관적 조건이 동시에 확립된다. "개인들의 생명의 재생산에서, 이들의 생산적 생활과정에서 그렇게 존재할 조건들은 역사적인 경제과정 자체에 의해서 비로소 정립되었다. 객관적인 조건들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조건들도 그러한데 이들은 동일한 조건들의 상이한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요강, 3권, 125)
그러나 자본은 끈질기다. 노동의 사회적 인지화의 과정이 노동을, 교환매개적인 직접적 소외노동으로 기능하기를 멈추도록 강제하는 순간, 맑스가 고려했으나 [자본론]에서 강조하지 않았던 첫 번째 계기, 즉 폭력이라는 계기가 전면으로 부상한다. 교환되지 못하는 노동력(실업노동자), 강제적으로 불평등한 교환관계에 들어간 노동력(비정규직), 비가시적 방법으로 수탈되는 노동력(외부효과) 등이 그것이다. 상품형태의 외관은 유지되지만 그것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의해 보충된다.(감시, 평가, 테러) 유적 생명의 소외의 지양은 다시 제약된다. 폭력은 사회적 인지토지에 대한 엔클로져(시초축적)를 통해 생산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의 재결합을 강제적으로 분리시킨다. 이 메커니즘의 규명은, 노동가치론의 유효성에 대한 강조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과제이며 오늘날 정치경제학 비판이 결코 피해서는 안 될 과제이다. [인지자본주의]는 현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충분히 체계적인"(전희상, 275) 이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인지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이 취하는 타인노동의 역사적 점취형태를 비판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맑스가 수행했던 착취비판을 변화된 조건에서 지속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의 조건을 밝히는 데 있다. 인지토지에 대한 엔클로져가 공통가치에 대한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이미 밝혔다. 그 명령은 핵-원자력 지배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들과 경로들을 통해 작용하면서 감시사회와 통제사회를 일반화하고 있다. 그 중 주목해야 할 하나는, 지적소유권을 통한 인지적 독점(이른바 '정보사회'에 대한 명령형태)인데 이에 대해서는 [인지자본주의]에서 비교적 자세히 규명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금융화와 채권-채무 관계의 생산(이른바 '신용사회'에 대한 명령형태)을 통한 명령인데 이 점은 만족할 만큼 규명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규명은 다른 기회를 빌어 계속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