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예술진화론적 관점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예술적대적이라면 그것은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 등과 같은 전통적 개념의 예술에 대해서일 것이라고 본다. 그는 오히려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생산조건 속에서 예술의 발전 방향과 경향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술작품에 대한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것이고 또 복제기술을 응용한 영화가 부상한 것이다.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개념이 기술복제에 대해 갖는 부정적 태도에 대해 먼저 논한다. 확실히 기술복제된 예술품은 원작이 아니고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인 아우라를 갖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기술복제가능성의 시대에 위축되고 있는 것은 아우라이다"(벤야민의 예술이론, 202) 기술복제된 예술작품은 아우라를 파괴하며 그것에 대해 적대적이며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를 통해 복제품을 전통적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로써 전통은 동요하며 위기에 처한다. 예술종말론은 이 위기감의 이론적 표현이다.

 

벤야민은 이 위기를 지각양식의 역사적 변화과정으로 이해한다. 아우라의 붕괴는 자연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지각매체의 발전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서 아우라 붕괴의 사회적 조건을 탐색한다. 그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의 등장이다. 대중은 오늘날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가까이 끌어오고자 한다"(204), 그리고 대중은 복제를 통해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고자 한다(204). 대중은 그림을 통해, 그리고 그것의 복제를 통해 대상을 가까이 소유하고자 한다. 대중은 대상의 껍질을 벗겨내는, 분위기를 파괴하는  지각을 선호한다. 그 결과 일회성과 지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전통적 회화와는 달리 복제그림은 일시성과 반복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벤야민은 이러한 변화를 자본주의의 예술적대로서가 아니라 "현실이 대중에게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으로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204)으로 이해한다.

 

이어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이 갖는 아우라가 마땅이 벗겨져야 할 것임을 입증한다.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예술의 사용가치가 마술이나 종교의식에서 발휘되었던 것의 흔적이다. 즉 진품 예술작품의 일회성은 종교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술의 등장은 이 전통을 깨뜨리는 획기적 사건이 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206)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이다. 그는 사진술의 등장으로 인한 예술위기 상황에서 예술지상주의가 취한 예술신학적 반동적 태도를 거부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종교에의 봉사라는 낡은 사회적 기능을 벗어버리고 사회적 실천과 정치라는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획득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다.(207)

예술이 정치적 기능을 획득하면서 예술의 가치는 의식가치Kultwert에서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로 중심을 옮긴다. 심지어 그는, 예술작품의 상품으로의 변화 과정에서 낡은 예술작품 개념이 그 상품화된 물건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그 물건의 기능을 버리지 않기 위해 예술작품 개념을 "조심스러고도 신중하게 그러나 아무런 두려움 없이"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한 브레히트의 생각을 인용하면서, 아직 남아 있는 예술적 기능 역시 사회적 기능에 부수적인 것으로 될지 모른다고 전망한다.(209) 아우라는 의식가치의 징표이다. 대중의 출현으로 인해 전시가치가 두드러지면서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은 예술진화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이다.

 

예술을 역사적 진화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의 고유한 방법론이다. 전통예술을 지탱하던 예술의 자율성 이념은 기술복제시대의 도래를 통해 붕괴된다. 영화의 등장은 결정적 분기점이다. 처음에 영화를 예술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은 영화에서 종교의식적 요소(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동화적인 것)를 찾으려는 방식으로, 즉 반동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촬영기술이나 영화 관중의 지각양식과 부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우라가 사라지는 세 가지 특징을 영화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무대에서의 연기와는 달리, 카메라동작에 의해 매개되고 감독에 의해 편집된 결과로서 나타난다. 영화배우의 연기는 카메라 및 감독의 눈의 시험을 거쳐서야 연기로서 자리잡는다. 그 결과 "관중의 눈은 배우와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비평가의 태도를 취한다."(212) 즉 관중도 카메라처럼 배우의 연기를 시험하는데, 연기와 관중 사이에 형성된 이 간극은 종교의식적 가치가 드러날 수 있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213) 둘째로 영화에서는 인간과 사물이 동렬동위로 놓여진다. 영화촬영소에서 배우의 연기는, 무대에서 맥베드 역을 하는 연극배우와는 달리, 관객과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연기자를 둘러싼 아우라는 사라진다. 오히려 연기자는 카메라에 비치는 소도구와 다를바 없는 위치에서 그 소도구들과 더불어 영화구성의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에서 사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아우라의 붕괴는 필연적인 것으로 된다. 셋째 연기자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적 행위로서 촬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차를 둔 단편들로 그리고 상황적 아우라를 전혀 갖지 못하는 우연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스타 생산은,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아우라가 소멸하는 것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장치이다.

 

기술복제시대에 대중과 예술이 맺는 관계는 달라진다. 독자와 필자의 경계는 소멸하고 대중은 구경꾼이 아니라 배우로 상승할 기회를 갖게 된다. 노동과정이 언어습득과정으로 되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벤야민은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기술교육을 통해 배양되저이고 그럼으로써 그러난 능력은 공동소유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217)고 말하면서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의 종말 시대이기는커녕 대중예술의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진화에는 첨예한 분화가 있다. 자본에 포섭된 영화는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수행하면서도 소유관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은 감춘다. 러시아에서는 작업과정 속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이 배우로 등장함에 반해 서구의 영화산업에서는 대중을 스펙타클의 구경꾼으로서만 동원한다.

 

벤야민은 한 예술형식의 사회적 중요성이 줄어들 때 수용자의 감상적 태도와 비평적 태도가 분리된다고 본다. 예컨대 회화에서 전통적 작품은 무비판적으로 향유됨에 반해 새로운 작품은 혐오감을 갖고 비판되어진다. 그런데 영화에서 관중의 비판적 태도는 감상적 태도와 일치한다. 아우라의 소멸이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관중의 개인적 반응은 집단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다. 즉 영화는 집단적 성격의 예술이다.  프로이트가 드러나지 않던 지각의 넓은 흐름을 분석가능하게 만든 것처럼, 카메라는 지각되지 않던 것들을 집단적 지각의 영역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외과의사적 역할을 수행한다. 카메라는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을 대신 들어서도록"(223) 만든다. 그것은 상승과 하강, 중단과 분리, 확대와 축소, 위치의 재배열 등을 통해 (마치 정신분석학이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드러낸 것처럼)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들 드러낸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모든 변화에서 대중의 등장은 결정적이다.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화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226)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예술작품에 집중Sammlung하지 않고 산만함Zersteuung 속에서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들어오게 만든다. 어떤 과제를 산만한 오락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며 그것은 대중 속에서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는다. 대중은 영화에 대한 비평적 태도를 가지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로써 관중은 종교의식적 가치를 뒤로 밀어낸다. "관중은 시험관이지만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이다."(229)

 

파시즘은 이러한 대중(프롤레타리아화한 대중)을 정치의 예술화를 통해 조직하려 한다. 정치의 예술화는 대중이 요구하는 소유관계의 변화를 감추면서 대중을 기술적으로 복제한다(축제행렬, 대규모집회, 스포츠경기, 전쟁 등). 대중의 기술적 복제과정에서 생산력은 부자연스럽게 이용된다. 전쟁은 기술적 수단, 기술의 속도, 에너지 증대가 부자연스럽게 이용되는 마지막 출구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기술발전 자체의 문제로 보지 않고 기술이 사회의 근원적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것의 증거로 본다.(231) 제국주의 전쟁은 기술적 수단들(생산수단)이 사회 속에서(생산과정에서) 충분히 활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기술의 반란"(231)이다. 파시즘은 전쟁을 예술로서 승화시키면서 예술지상주의를 최후로 완성한다. 그것은 인류의 자기소외의 극한으로서의 정치의 예술화이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가 정치의 예술화에 대항하는 코뮤니즘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인지적 변화를 일정하게 예상하게 하면서 인지자본주의에서 예술의 진화방향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던진다. 노동이 언어화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노동의 언어화는 노동이 공통되기의 행위로 됨을 의미한다. 언어화하는 노동, 예술화하는 노동을 통해 이제 새로운 주체성으로서의 다중이 탄생한다. 대중은 다중으로 이행한다. 이 과정은 기술복제를 넘어 전자복제를 가능케 한다. 이 과정에서 생산은 더욱 영화적인 것으로 된다. 물과 인간, 기계의 혼종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삶은 이 세 가지 것들이 혼종되는 물적인 것이다. 생산에서 인간중심성은 사라진다. 생산은 영화에서처럼 인간, 기계, 사물이 혼종되면서 이루는 사건이자 흐름으로 된다. 예술은 노동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게 되며, 삶과 노동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정치도 노동이나 삶과 구분될 수 없게 된다. 예술은 삶이고, 삶은 노동이고, 노동은 정치고, 정치는 예술이다라는 식의 총체적 동어반복 상황이 전개된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정치의 예술화에 예술의 정치화가 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세계 자체가 정치인 상황 속에서 이 정치적 과정을 소유관계를 강화하면서 사유화하려는 운동과, 소유관계를 해체하면서 그것을 공통되도록 만들려는 운동 사이의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