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집단공작’으로 인해 우리가 잊게 된 증언자 윤지오의 여섯 가지 핵심증언(2009~2019)

1/[착취와 초과착취 문제] 소속사 대표가 배우들과 체결한 부당노동계약과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통해 젊은 연예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에 대한 진술

=김종승 대표는 출연기회를 얻고 싶어하고 또 출연기회를 얻어야 살 수 있는 배우들의 욕망과 약한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그 계약에 대한 해석권리까지 독점함으로써 소속배우를 술자리에 불러내 술접대를 시키는 등의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소속배우들이 계약을 중도해지하려고 해도 막대한 위약금(1억원) 때문에 중도해지할 수도 없는 노예상태를 강요했다.[김종승 대표가 유죄선고 받음]  

2/[수탈문제1]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연예노동자들의 술접대를 받고 심지어 그들을 성추행한 언론인에 대한 진술

=술접대 자리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언론인이 장자연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이 언론인은 이후 전 조선일보 기자로 밝혀져 재판중]

3/[수탈문제2]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 재계, 법조계의 권력자들이 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힘 없는 신인배우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한 것에 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서 유장호가 넘겨준 것으로 연예인들의 피해사실이 적힌 4장의 문건과 (김종승과 다툴 때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형식의 글 3장, 도합 7장을 보고 읽었다.

4/[수탈문제3]언론계와 정치계의 권력자들이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했을 가능성과 관련하여 장자연 리스트에 기록된 그 권력자들 중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진술

=그 리스트에서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있고 기억나는 이름도 있는데 방씨 성의 세 사람과 이름이 특이한[=‘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흡사한] 국회의원의 이름이 기억난다.

5/[수탈문제4]장자연에게 마약을 모르게 주입하고 장자연의 신체에 특수강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진술

=장자연 언니가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 모습이 언니가 마약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입당한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방식으로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해 달라.

6/[국가권력의 부당이용 혹은 남용문제]국가기구인 국정원이 신인배우 장자연 사건에 개입한 것에 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 유장호와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유장호가 경호인으로 소개했는데 나중에 유장호는 그가 국정원 직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3월 13일 유장호가 입원한 병원에도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가 있었다.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윤지오의 각 증언이 다루어지고 있는 현상태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를 느낀다.

-1/과 2/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고가 유죄선고를 받거나 재판중이므로 이것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3/, 일명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과거사 진상조사단은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 외에 피해사실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명단’이 기재된 문건, 즉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제시하였으므로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법적 승인이 이루어진 셈이다. 

-4/의 증언과 관련해 검찰은 방씨 성의 사람들에 대한 수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수사무마를 위한 외압을 행사한 것 외에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여러 건의 보도를 했으며 홍준표는 자신의 실명을 거론한 정의연대를 형사고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증언자의 진술을 훼손시키기 위한 여러 유형의 폭압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압이 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의 진술은 장자연이 문서를 처음 작성할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적은 적이 있다”는 유장호의 면담 전 진술,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들었다는 정감독의 진술(2011년 8.1일 진술조서, 2019년 진상조사단 진술) 등에 의해 교차검증되었다.

-6/의 진술과 관련하여 정의연대는 국정원, 국정원 박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윤지오의 옛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두 개의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이로써 윤지오의 증언은 물증을 갖게 되었다.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SBS

“SBS 임원(총괄상무), SBS USA대표이사를 지냈던 고대화는 장자연 사건 당시 올리브나인의 대표이사였으며, 이 올리브나인은 더 컨텐츠의 주식 54%를 소유했던 실질적 소유주였습니다. 버닝썬 사건 최초보도로 장자연 사건 덮기, 장자연 전남친 기사 최초보도, 궁금한 이야기 Y의 왜곡보도 등 SBS에서 윤지오씨를 공격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네티즌 흰동가리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http://amelano.net/?p=876)를 쓰면서 나는 <궁금한 이야기 Y>(2019. 6.21)에서 박준영이 한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도 검증해 보고 싶었으나 그 프로그램을 재시청할 수 있는 조건에 있지 않아 그의 글만을 다루었다. 오늘 그의 인터뷰 내용 중 특히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는 김종승의 문자메시지에 관해 박준영이 한 인터뷰 말과 <궁금한 이야기 Y>(이하 <Y>)의 해설자가 덧붙인 말에 대해 lamer297님이 해당 프로그램을 놓고 검증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있어 해당 대목 전체를 인용하고 나의 생각을 조금 덧붙여 보고 싶다.


박준영은 윤지오씨가 2009년에 무엇에 대해 ‘모른다’라고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증언 기록은 어디에 있습니까? 윤지오씨가 그 문자에세지를 장자연씨가 받은것에 대해 모른다고 했는지, 장자연씨가 마약을 한것에 대해 모른다고 했는지 밝혀야 합니다. 박준영은 다만 윤지오씨가 거짓말을 하고있다라는 인상만을 주고 있습니다. 윤지오씨의 증언에 대해 왜 장자연 사건을 담당하지도 않은 박준영씨가 평가를 합니까? 실제로 장자연 사건을 담당했던 여섯분의 진상조사위원중 단 한분도 인터뷰를 하지않았습니다. 박준영은 (1)윤지오는 거짓말장이이며, (2)진상조사위원이 윤지오씨께 최근에 마약에 관해 주입시켰다. (3) ‘니동생이랑 함께 마약했다’는 문자메세지는, 실제로 장자연이, 누가 몰래 마약을 장자연씨께 주입시켰든 어쨌든, 오직 협박이었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주입’시키고 있는겁니다. ‘장자연씨가 마약에 의해 강간 당했을 가능성’ 만이 공소시효가 남아 있고, 이 가능성이 증언에 의해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단하나의 경우에만 가해자들을 처벌할수 있기 때문에 이 가능성만 제거하면 가해자들은 영원히 발 뻗고 편히 잠 잘수 있게 되겠죠? 박준영은 장자연씨가 마약에 의해 강간 당했을 가능성을 전면부인 하도록 가해자들의 총알받이로 전면에 나선것 처럼보입니다.

박준영은 방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 그것은 장자연씨가 마약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기위한 ‘협박의도’로 보낸문자였고 했는데 그 문자를 근거로 (2009년에) 경찰이 질문했을때 (윤지오씨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 라고 조사단원애서 오히려 주입하려 했단 말이에요. 이거 모순아니에요?” 그러나, (1) 장자연사건 진술조서 전문에는 2009년에 경찰이 윤지오씨께 이 문자메세지에 관해 질문한 기록도 없고, (2)윤지오씨가 2009년에 이 문자메세지에 대해 대답한 기록도 없습니다. (3)박준영은 저 문자메세지가 사실이 아니고 다만 ‘협박의도’ 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4)박준영이 주장하는 진상조사단원이 윤지오씨에게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 라고 주입하려 했단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주장은 진상조사단원에 대한 아주 심각한, 법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수 있는, 비난이라고 보여집니다.

궁금한이야기 방송중, 윤지오씨는 “그 두줄에 대해 단한번도 그동안 질문조차 없었다”라고 하자, 궁금한 이야기 해설자는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수없었다는 윤씨, 그런데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해설자의 말은 마치 윤지오씨가 거짓말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들리죠? 그러나 이 말의 모순은 (1)윤지오씨에게 아무도 마약에 관해 질문을 안한것 하고, 마약에 관해 (2) ‘다른 증인들’이 증언 한것하고 무슨 상관이죠? 한국일보가 제공한 장자연사건 진술조서 전문에는 윤지오씨에게 마약에 관해 질문한 것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연씨와 마약에 관해 다른 증인들이 언급한 것은 있습니다.”

lamer297 님의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점은 무엇인가? 박준영이 <Y> 인터뷰에서, 김종승이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고 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동기를 단순한 ‘협박문자’였다고 말(인터뷰)했는데, 김종승의 말에 대한 이러한 자의적 해석의 첫 번째 효과는 가해자들이 장자연에게 마약을 먹여 성폭행했을 가능성을 지워 없애버리는 것이라는 것. 즉 특수강간 혐의의 제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재수사 가능성을 영구히 말소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가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었다. SBS는 이 목적을 박준영과 <Y> 해설자 두 사람의 확인되지 않은 말들(나는 그것들이 거짓말일 것으로 추정한다)을 함께 엮어짜는 방송편집기술을 통해 달성한다. 박준영은 [1]2009년에 그 문자메시지에 관해 경찰이 질문을 했을 때 윤지오가 모른다고 해놓고 [2]2019년에 진상조사단에서 그 문자 메시지가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즉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술책이다.  [여기서 나는 “조사단원애서(sic!) 오히려 주입하려 했단 말이에요.”라는 박준영의 불명확한(아니 비문이라 할 수 있는) 말을 lamer297 님과는 다르게 해석했다. 이 비문에서 “주입하다”의 주어는 윤지오일 수도 있고 조사단원일 수도 있다. lamer 297 님은 그것을 ‘조사단원’으로 읽어 (4), 즉 진상조사단에 대한 모독의 문제점을 추론했다. 나는 박준영이 “조사단에서”를 “조사단원애서”로 잘못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주어를 ‘윤지오’로 읽었다].

lamer297 님은 박준영에게 “윤지오씨가 2009년에 무엇에 대해 ‘모른다’라고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자료를 확인해 보니 수사관은 윤지오에게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 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는다. 윤지오는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답한다.

이 문장을 박준영은 “언니”에게 마약을 주입하여 성폭행했을 가능성에 대한 최근의 진술과 모순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최근의 진술이 사적 목적을 갖고 지어냈을 가능성에 대한 근거로 이용된다. 

분명히 마약의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한 사람이 10년이 지나 마약에 의한 피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며 둘 중 하나만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인지는 정보의 축적이라기보다 정보들의 네트워킹이다. 새로운 사실, 새로운 경험과의 접속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지각/인지를 준다.

장자연이 입었을 마약의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한 당시의 윤지오는 22살로 마약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마약이 무엇인지, 마약이 주입된 사람이 어떤 증상을 나타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바로 옆에 마약을 먹는 사람이 있다해도 그가 드러내는 상태를 통해서는 그가 마약에 취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인지 상태에 있었다. 윤지오는 당시 장자연이 맥주 반 컵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를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지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특히 캐나다에서의 사회적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인지력의 변화로 ‘맥주 반 컵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이고 동공에 초점이 없’었던 언니의 상태를 술이 약한 사람들의 신체 상태가 아니라 마약에 주입된 사람들이 보이는 신체 상태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윤지오는 진상조사단 진술에서 장자연이 마약에 강제 주입되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을 진술하고 그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마약 문제와 관련해 윤지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준영이 인간의 인지변화 가능성의 측면을 간과함으로써 현재의 윤지오의 말을 사적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거짓말로 오인하고 증인 윤지오에 대한 검증이라는 과도한 대응을 하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박준영 외에, <Y>에서 해설자가 개입하여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씨, 그런데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라고 했다는 lamer297 님의 지적은 참으로 흥미롭다. 해설자야말로 SBS가 <Y>를 통해 시청자들의 뇌 속에 어떤 생각을 주입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다양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마약 관련 내용이 그토록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수사기관은 왜 장자연의 사회적 타살을 이와 연관지어 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윤지오가 제기한 마약 주입과 성폭행 가능성에 대한 추정을 정세호 감독의 교차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경시하는가? SBS가 진정한 언론이었다면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 내용[마약 관련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로부터 국민들의 이러한 공적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끌어내고 그 방향의 탐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SBS는 이로부터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진술과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이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윤지오 진술이 거짓이었다는 섣부른 결론을 도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공적 방송이 아니라 사적 방송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최근 진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이 10년 전 수사기관에서의 질의와 답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말일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장자연이 보인 특정한 신체상태를 10년 전과는 달리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 즉 ‘마약 주입 후 성폭행했을 가능성’에 관해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lamer297 님이 지적하듯이 [1]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진술과 [2]과거의 다양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마약 관련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런데 왜 해설자는 [1]과 [2]를 상반(相反) 관계를 표현하는 접속부사인 “그런데”로 연결하는가? 이것은 명백히 고의적이고 또 악의적인 해설이다. 윤지오 진술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의도적으로 상처내는 것이다. 나는 해당 프로그램의 결론 부분에서 “대의를 위해 작은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는 취지의 해설자 발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서 해설자는 중립성을 내팽개치고 윤지오를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단정하는 폭력주체로 발벗고 나선다. 이것은 SBS가 공익성을 저버린 유사언론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진실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눈에 들어오는 이토록 뻔한 조작과 폭력을 SBS가 수백만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이 국민들을 ‘기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동기를 앞에 쓴 다른  글(http://amelano.net/?p=868)에서 “권력의 비위를 맞추면서 돈을 버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lamer297 님이 인용하고 있듯이, 흰동가리 님이 2019년 6월 22일 나의 블로그에 댓글로, 나의 글이 밝히고 있지 못한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것은 그 “권력”의 실체들 중의 하나에 대한 지적이다.

“SBS 임원(총괄상무), SBS USA대표이사를 지냈던 고대화는 장자연 사건 당시 올리브나인의 대표이사였으며, 이 올리브나인은 더 컨텐츠의 주식 54%를 소유했던 실질적 소유주였습니다. 버닝썬 사건 최초보도로 장자연 사건 덮기, 장자연 전남친 기사 최초보도, 궁금한 이야기 Y의 왜곡보도 등 SBS에서 윤지오씨를 공격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적은, 마약 투약과 성추행 혐의로 수배되고 일본으로 도주했던 김종승이 대표로 있었던 더 콘텐츠가 실질적으로는 SBS와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장자연 문건에서 마약, 술접대와 성접대 강요, 협박, 폭행 등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김사장(’김종승’)을 실제로는 ‘SBS’로 바꿔 읽는 것도 필요함을 의미하지 않는가? 진상조사가 한창 진행중인 2019년 4월 27일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 ’故 장자연 문건 미스터리- 누가 그녀를 이용했나?’>를 통해 장자연의 육성 절규를 공개하면서 조선일보 방용훈, 방정오에게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춘 것은 SBS가 자신에게로 향할지도 모를 화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연막전술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 설 때 비로소 우리가, lamer297 님이 박준영의 <Y> 인터뷰와 해설자의 말을 검증함으로써 드러난 SBS의 “마약-성폭행 지우기 공작” 및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의 실상과 그 정치적 사법적 의미를 분명히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

아침에 일어나 박준영 변호사가 쓴 다음 글 <공범>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재심>을 통해 쌓은 정의의 이미지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을 내려치는 망치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경악과 분노 때문에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켜가며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

국민 개개인에 대해 인간주의적 이해보다 국가의 비용 배분의 향방과 양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관료주의다.

관료들은 “내(국가)가 너희(인간)에게 은혜(복지)를 베푼다. 너희의 선함을 나에게 입증하라”고 주장한다.

관료들은 이렇게 국민 앞에 자신이 시혜집단임을 내 세움으로써 자신을 국민 위에 옹립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그 관료집단에게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관료집단에게 지출되는 국가비용이면 가난한 국민들의 대다수가 선함을 입증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꾸리는 데 충분할 것이다. 왜 국민이 자신들의 노복들(servants)에게 선함을 입증해야 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 배우에게 정말 “헤어샵으로 와 달라고 통보”한 적이 있는지 물어 사실확인을 했는가?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고 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경호원과 함께 택시 타고 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는가?

국민이 국가기관을 시켜 대한민국으로 불러온 증인에게 국가가 보호목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에 대해 박준영 변호사가 자신의 경험(저는…본 적이 없다)을 잣대로 비난의 글을 올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박준영 변호사가 술접대 자리에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노래하고 춤춰 본 적이 있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실세 권력자들의 불의와 부정을 증언하는 자리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증언 후에 누가 뒤따라 오지 않나 뒤돌아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걸려오는 전화마다 녹음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 불안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인기척에 소스라쳐 떨어본 적이 있는가?

이 사회가 적대로 가득차 있고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사람들이 약자들을 향해 어르릉대고 있음을 느껴 본적이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미지에 왜 아이들이 앞모습을 보이지 않고 뒷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자신의 두려움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두려움이고 윤지오 배우가 느끼는 두려움과 그에 대한 표현은 “가해의 실체에 대한 의혹을 부풀리는 의도”의 표현으로서 부당하고 의심스런 두려움인가?

“긴 시간 윤지오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이런 윤지오의 문제점을 몰랐을까요.” 

어떤 문제점 말인가?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며 정신감정 결과를 제출한 것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에 살면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사는지 아는가?

장자연의 주검이 부검도 없이 유족의 뜻에 따라 경찰에 의해 처리된 후 대한민국은 10년이 넘는 사회적 갈등 속에 휩싸여 있다.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명확한 증거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시신을 처리함으로써,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인 시신을 불투명하게 처리함으로써 왜 국가기관은 이토록 국민들을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만드는가?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이 명확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의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죽게 되거든 유가족이 뭐라하든 부검해 달라는 윤지오 배우의 이 유언 아닌 유언이 왜 문제점인가?

지금 윤지오가 악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일에 그의 가족인 이모부가 앞장 서 있다.

만약 윤지오에게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 일이 그의 “유가족”의 뜻에 따라 처리되어도 되는가? 

나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나의 꿈은, 유태우 박사의 가르침대로, 9988234,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을 끙끙 앓고 죽는 것이다. 나는 시신이 악의에 따라 임의처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의 시신을 기증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유서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한, 반드시 부검해 달라.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의 정신감정 결과 제출에 대해 문제점을 느꼈다고 자신 외에 진상조사단의 그 누구로부터 또 이야기를 들었는가? 확인했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왜 “이를 알거나 알 수 있었으면서 침묵 했던 모두가 공범입니다”라며 애매한 가정법 기술을 써서 윤지오 배우를 범죄자로 모는가? “뒤늦게 이야기한 저도 공범이구요”??? 박준영 변호사가 어떤 유형의 범죄자일지는 모르나, 윤지오 배우는 범죄자가 아니며 따라서 박준영 변호사의 공범이 아니다. 왜 변호사의 신분을 갖고서 헌법 제27조 제4항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해 한 인간을 유죄로 단죄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조선일보 기자의 추행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폄하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윤지오 증언자가 박준영 변호사의 무고로 인해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그 조선일보 기자도 무혐의 처분에 준하는 약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 증언을 폄하하는 실제적 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조선일보의 전직 기자를 구하고, 조선일보를 구하는 실행방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조선일보 구하기의 행동인가?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과거사진상조사단원들은 바보들로 만들고, 그들을 모독하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그럴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증언들을 교차 비교하고 물적 증거와 대조하여 사실인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나름 대로의 검증작업을 하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은 유지되었다. 

우리가 더 이상의 검증을 요구한다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최종 심의발표가 진상조사단의 조사와 일치하는지, 또 진상조사단의 조사가 충분히 증인들의 증언들과 증거들을 실사구시적으로 비교검토했는지, 증인은 충분히 확보했는지, 강제수사력이 없음으로써 생긱 구멍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적 검증과정 바깥에서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 (증언이 아니라) 증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인간 윤지오의 사생활을 발가벗기고 증언자를 심문대에 세워 마녀사냥을 한 것 아닌가? 박준영 변호사가 원한 것이 그것이었는가? 노출이 어느 정도인지, 학력은 속이지 않았는지, 왜 그리 학력이 보잘 것 없는지, 작품이 표절은 아니었는지, 정치색이 뭔지, 평소에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왜 말할 때 눈을 굴리는지, 계좌에 후원금은 얼마나 모였는지, 왜 자신의 계좌를 공개하지 않는지, 혹시 계좌에서 사적 목적으로 쓴 돈은 없는지, 왜 기자들에게 오만하게 구는지, 목소리가 왜 그렇게 짜증나는지, 유가족을 혹시 비난 한 적은 없는지, 왜 왕진진의 글이 가짜라는 것을 식별하지 못하는지…. 이 악무한적 의혹들과 비난들의 광기가 ‘증인도 검증되어야 한다’고 박준영 변호사가 제안하면서 의도했던 그것이었는가?

2019년 늦봄과 초여름에 대한민국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전 시민사회적이고 전 국가적인 사업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하려는 자는 반드시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세계만방에 천명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짓밟는 이 반헌법적 광기의 선봉에 박준영 변호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똑 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미 공인인 박준영 변호사의 말과 삶은 이제, 그가 윤지오 배우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일거수일투족 검증되어야 한다. 혹시 그가 출마의 기회를 얻거나 관직을 얻거나 돈을 벌거나 하는 등의 사적 목적으로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지나 않았는지/않은지 검증되고 또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이후 박준영 변호사가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치부를 하거나 언론의 칼럼 자리를 얻거나 하는 식의 이득 취득의 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이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사적 목적을 위해 부풀려 얻은 사익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토론을 공정하게 끌고 가기 위해 아래 내 스스로 박준영 변호사에게 페친 신청을 했고 아래 댓글도 달았다.

<궁금한 이야기 Y>의 취재와 편집 노하우 뒷이야기: 어떻게 SBS는 하이테크 거짓말과 사기술로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 수 있었나?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보면서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나 사기로 지각되지 않을 수준 높은 거짓말과 고도의 사기술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지난 4월 이후 대한민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마녀사냥 놀이처럼, 이 프로그램이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드는 공작(工作)형 프로그램이었기에 더 밀도 높은 ‘수업’이 되지 않았나 싶다. SBS <궁금한 이야기 Y>가 자신들의 하이테크(high-tech) 거짓말과 사기를 통해 출연자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어 내는 비법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2013년 레이디경향에 실렸던 ‘궁금한 이야기 Y’ 이덕건 PD의 방송 뒷이야기를 참조했다. 특히 이 부분:

https://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5&artid=201311221655331

이번 프로그램을 만든 PD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하이테크 거짓말과 사기술의 비법들:

  • 출연자들(취재원)에게 출연자들의 입장에서 당신들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약속한 후 출연자들의 진심과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 취재원의 사소한 부분까지 귀담아 듣지만 가해권력의 비위에 맞고 대중의 광기에 불을 질러 돈 될 이야기만 골라내기
  • 한 방울 마음 속에 찌꺼기로 남아 있을지 모를 양심 때문에 취재자가 취재원의 진심에 이심전심되지 않도록 주의하기
  • 작은 실수로 피디의 처음 목적과 다르게 편집되지 않도록 취재원의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나 사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 갈등을 전제로 하는 사연들은 최대한 중립의 입장에 서서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면서 가해권력의 비위를 맞추고 대중의 광기에 호응하여 돈벌이에 이용할 사연들만을 기술적으로 부각시키기
  • 방송 후 왜 이야기가 다르냐고 털어놓는 출연자의 불만에 무관심하기
  • 욕 정도는 일상으로 알고 가해권력의 비위를 맞추면서 대중의 광기를 이용하여 돈을 벌기
  • 이 목적을 위해서 절대 소심해지지 말고 오지랖을 넓히기
  • 명예훼손 고소로 인한 피해 정도는 ‘김밥값’(박문덕) 정도로 여기기
  • 출연자들이 방송으로 인해 죽든 말든 뒤돌아보지 말고 다음 프로그램 준비에 매진하기
  •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에 갈아 넣어질 원료라는 사실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이용하기
  • 시청자 대중이 거짓말과 사기에 속는 멍청이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취할 수 있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제공하기

그런데 여기 그러한 방송 사기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SBS가 방송국이길 포기했다는 시각까지:

이런 분위기를 보면 그래도 SBS는 ‘살인병기’라고까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상당히 절제하고 있는 태도일 것으로 짐작된다.

‘방송’을 자처하는 가해권력의 자객이 휘두른 칼로 대한민국이 빠져든 피의 홍수 속에서 진실의 좌표를 다시 찾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나는 장자연의 죽음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는 이 체제의 폭력성과 모순을 가시화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체제의  극복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 체제는 사회적 노동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본질로 삼는 것만큼이나 본질적으로 성차별주의적이고 성폭력적이다. 이 때문에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김용균들의 고통과 죽음은 계속될 것이고 장자연들의 고통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불구화하는 체제이므로 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합과 공통되기를 통해 이 체제를 혁파하고 반(反)성폭력적이고 반(反)노동착취적인  공통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 2016년 촛불혁명은 이 체제의 극악한 상태를 바로 잡는 데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이 체제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는 촛불혁명 속에서도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못했다. 2018년의 미투는 촛불 이후 체제의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게릴라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투의 실명 폭로는 백래쉬에 직면하여 체제의 반동을 충분히 밀어낼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또 미투는 SNS를 통한 여론전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여론전이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하층 노동여성의 성폭력 문제는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바로 이러한 한계는 백래쉬에 대응할 만한 전 사회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데 제약으로 작용했다. 
  • 하지만 촛불혁명과 미투의 힘은 10년전 여성연예노동자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와 현실성에 주목하도록 만들 만큼은 힘이 있었다. 이 힘은 거대 다중이 참가한 국민청원을 매개로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시키도록 압박하는 섭정의 에너지였다. 촛불에게 있어서 윤지오는 바로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그리고 그것을 넘어 그 죽음의 현재성과 현실성을 밝힐 초점이었다. 왜냐하면 윤지오는 장자연과 동일한 여성연예노동자였고 장자연과 고난을 함께 한 노동동행자였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장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촛불-미투 공통인들(commoners)은, 윤지오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 부활한 장자연을, 그리고 가해권력의 이름들을 피로 눌러쓴 그 장자연의 절규와 고발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장자연-윤지오는 사시나무처럼 두려움에 떨며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여성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목적은 이와는 달랐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가기관이었고 특히 적폐검찰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관이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을 역사화시키는 선에서 촛불-미투 주체들의 요구를 봉쇄, 봉합하려고 했다.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서, 그리고 많은 언론 인터뷰에서 ‘증언해 봐야 아무 것도 바뀔 것이 없네요’라며 한숨을 내쉬고 좌절의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이 좌절의 한숨이, ‘재수사를 통해 가해권력을 처벌하라!’는 촛불-미투 주체들의 현실화[현재화] 요구가, 사실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처벌이라고 보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역사화[과거화] 장벽 앞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민에게는 차단되어 있고 그들 끼리만 돌려 볼 문헌적 기록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문헌적[역사적] 징계를 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기록은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경쟁의 수단이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 우리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에게 지출한 900만원에 대해서는 아깝다, 불공정하다고 탓하면서 돌려막기로 국민을 기만한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지출했을 저 천문학적 비용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대한가?
  •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는 이러한 ‘역사화’ 목적의식의 압권이었다. 가해 권력자들의 리스트 문제는 더 이상 논란해 봐야 소용 없는 것으로 정리발표되었다. 비록 가해자들에게 역사적 무죄를 선고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공소시효 경과, 증거 불충분 등으로 모든 것을 과거화했다. 성폭행(특수강간)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면 재수사한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나서서 확보할 것이라고 누가 손톱만큼의 기대라도 할 수 있겠는가?
  •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백래쉬는 4월부터 본격화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촛불-미투 운동이 검찰주도의(즉 대검 산하의) 과거사조사위원회라는 형태로 자리잡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검찰에서 독립된 시민주도의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칭 ‘촛불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이중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목소리를 수렴하되 그것을 보수적 틀 속에서 해소시키는 봉합정책, 수동혁명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왔다. 물론 이것은 촛불-미투의 주체적 한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2016년 촛불과 2018년 미투는 여성=비정규직=하층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가 아직 취약하여 정규직=남성=중산층 노동자들의 이해관심의 벽을 뚫을 만큼 혹은 그 층을 견인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 윤지오는 이 불안정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과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부름을 받아 증언을 시작했다. 2019년 3월 증언의 불길이 가해권력이 앉아 있는 방석으로 옮겨붙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이고 박근혜에 우호적인 성향의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에 대한 검증론을 펴면서 군불을 때고 뉴시스의 비방보도를 신호탄으로 박훈 변호사가 나서 친구 김대오의 거짓말, 김수민의 음해담을 섞어서 결국 윤지오에게 ‘마녀=사기꾼’이라는 사법 올가미를 씌운 것이 2019년 4월이었다. 광기의 군중들이 이들의 뒤를 따랐고 제도 언론들의 돈벌이 이벤트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윤지오는 졸지에 ‘여자 왕진진’으로 조작되어 진실 증언대에서 끌려 내려와 캐나다로 강제추방 당했다.
  • 윤지오 마녀사냥에서 언론계의 군주로 군림하는 조선일보는 헤럴드경제, 매일경제 등의 경제지들과 연예지들, YTN 등이  물어뜯어 놓은 먹잇감을 조용히 가로채는 하이에나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좌파독재 타도를 내건 우파 유튜버들이 중도적이거나 중도좌파적인 박훈, 김대오, 김수민이 물어뜯어 놓은 먹익삼을 가로채는 것과 유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사이에는 좌도 중도도 우도 없는 정치적 연합전선이 펼쳐졌다. 윤지오를 죽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하는 반증언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성차별주의적 성향의 우파 가로세로연구소-슛티비 유튜브와 자칭 ‘페미니스트’ 김수민 인스타그램은 반윤지오=반증언 전선에서 서로 열애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사회주의자’ 박훈은 조선일보를 싸고 도는 이 연합전선이 자신에게 나쁜 이미지를 남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윤지오=사기꾼’이라는 조작된 관점을 이들과 공유하면서도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절제된 행보를 취했다. 김대오는 정확히 이 둘 사이에서 좌충우돌의 모터싸이클 놀이를 했다.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의 구성요소들

이미 사회적 수준으로 확산되고 발전된 ‘반윤지오 혐오전선’과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분과 주목할 만한 경향을 갖는다.

  • 정치적 우파가 반문재인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반윤지오 혐오감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즉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는 것이 윤지오를 증언대에 세운 문재인 정권의 밑둥을 헐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윤지오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윤지오 매도는 장기적으로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가해권력의 전략적 공세지만 단기적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자유한국당파가 적폐검찰의 조력 하에, 조선일보 등의 우파언론, SNS내 반문재인파를 앞세워 수행하는 총선전술이다. 현재는 이 흐름이 윤지오에 대한 사법고발고소 등의 여론조작을 수행하는 여론 주도층으로 확실하게 기능하고 있다. 
  •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중도보수 문재인 정권과 여당인 민주당이 수구보수파의 이러한 공세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시사인의 보도에서 확인되었듯이 문재인 정권은 20대 남성 세대가 지지층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이 가져온 반발작용으로 독해하면서 득표를 위해 페미니즘/여성 이슈에서 발을 빼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남성 20대가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면 신자유주의화가 생산한 여-남 공동의 삶의 불안정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성차별적 대응 이상이 아니다. 만약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이러한 대응에 영합하여 여성, 페미니즘 이슈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윤지오에 대한 대응을 회피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면 이것은 크나큰 실책이며 자신의 발등을 찍은 것 이상의 어리석은 대응 이상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파 세력들과 조선일보 SBS와 같은 반민주적 정치언론들 이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반페미니즘 성차별 공세를 하고 있는 것에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합류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들의 발밑을 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의 유지와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적 우파가 친자본주의 입장을 반윤지오와 결합시키고 있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더불어 노동자, 그것도 계약직 노동자이다. 언론, 교회, 대학 등의 이데올리기적 국가기구가 조성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거의 무의식화된 계급차별과 노동천시 관념(그것은 국민은 개, 돼지라는 말로 집약된다)은 윤지오에 대한 언론의 악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정신적 기질로 나타난다. 이것은 표면에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흐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적 우파주의 경향은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노동에 대한 수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의 심층에 무의식화된 흐름이며 남성만이 아니라 남성체제에 동화된 여성도 공유하는 흐름이다.
  • 그런데 박훈이 보여주듯이 전통적 좌파의 일부도 반윤지오 전선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전통적 좌파는 산업공장을 모델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예인을 룸펜적이고 기생적인 프롤레타리아층(“딴따라”, 즉 부지런히 노동하는 ‘개미’가 아니라 노래부르는 ‘매미’)으로 보는 관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구축된 노조운동이 남성본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관점, 즉 성차별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이러한 관점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관념상의 시대착오가 계속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의식은 현실보다 더디게 바뀌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미투를 촉발했던 페미니스트 세력 일부의 상대적 방관도 주목되는 일이다. 물론 아직까지 윤지오의 증언자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투여성들이다. 하지만 장자연-윤지오가 미투 흐름 속에서 출현한 운동적 초점임을 고려하면 현재의 연대력은 이상하리만치 약하다. 윤지오는 진정 페미니즘의 힘과 연대를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투여성 운동이 증언자 윤지오와 윤지오의 진실을 지키지 못하면 누가 지킬 것인가?
  • 혹시 내[우리]가 증언자 윤지오와는 연대할 수 있지만 ‘사기꾼’, ‘탕녀’로 의심되는 윤지오와 연대하고 싶지는 않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이런 경우라면, 윤지오 다음으로 마녀사냥의 표적이 바로 내[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언론과 방송이 장자연 가해권력의 비수가 된 2019년 6월 21일 재앙의 날에 121년 전 에밀 졸라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발을 다시 읽는다.

“대부분의 여론은 매일 아침 언론이 퍼뜨리는 이 거짓말, 이 기괴하고 어리석은 뜬소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책임을 물을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때 세계만방에 우리의 명예를 실추시킨 비열한 언론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몇몇 신문이 사악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신문들은 오직 흙탕물만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이 신문들 가운데 예컨대 <레코 드 파리 L’Echo de Paris>를 목격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토론 빈번히 사상의 전위에 섰던 그 문학적 신문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그토록 개탄할 역할을 수행하다니 말이다. 폭력적 단평, 추악한 편견에는 서명조차 없다. 그러나 이 단평과 편견의 뒤에 드레퓌스의 처벌이라는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발랄땡 시몽 씨는 이 단평과 편견이 자신의 신문을 오욕으로 뒤덮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진정 정직한 사람들의 양심을 아프케 하는 신문이 있는데, 그 이름은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이다. 수천 부를 찍은 군소 신문들이 판매부수를 늘릴 목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제한적인 악일 뿐이다. 그러나 백만부를 상회하는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르 프티 주르날>, 방방곡곡의 갑남을녀들에게 읽히는 <르 프티 주르날>이 오류를 퍼뜨리고 여론을 오도하는 것은 실로 심각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수 많은 영혼을 계도해야 하고  만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의 경우 양심지성성실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자칫하면 공민적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프랑스여, 그대를 휩쓰는 광풍 속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띄는 것, 그것은 언론이 매일 아침 그대에게 전하는 얼치기 콩트, 저열한 욕설, 도덕적 타락으로 얼룩진 거짓의 방벽이다. 그들이 그대의 온갖 전설적 미덕, 투명한 지성, 견고한 이성을 이 지경으로 박살낸 지금, 어떻게 그대가 진실정의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

-1898년 1월 6일, 에밀 졸라 : <나는 고발한다>, 유기환 옮김, 책세상, 76-77쪽

SBS <궁금한 이야기Y>에 대해 제도언론들이 숨기고 있는 네티즌 반응들

  • 2019년 6월 21일 밤 8:55~10:00, SBS는 <궁금한 이야기Y>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라는 제목으로 공익제보자 윤지오를 둘러싼 여러 논란을 다루었다. 그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캐나다로 가서 11시간 윤지오를 인터뷰했다는 사실에 무색하게도, 윤지오 1인의 증언을, 김대오, 박준영, 김수민, 장자연 전 남친, 후원금 반환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윤지오 보호 국민청원 작성자, 후원금 반환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전 후원자 1인, 장자연/윤지오 전 매니저 등 윤지오를 공격하고 있는 다수 인물의 증언을 대비시킴으로써 (그리고 중간중간 윤지오 님이 웃거나 춤추고 있는 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합으로써 – 대체 11시간의 인터뷰는 어디로 간 건지? 캐나다는 왜 간 건지?) 윤지오를 거짓말쟁이에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관종으로 만들며 모욕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1그램의 객관성이라도 확보하려 했다면 윤지오의 증언진실을 지지하는 이들의 발언을 공격자들의 발언과 같은 분량으로 방송했어야 한다. SBS의 이러한 폭력과 증언자 능멸에 분노한다.
  • 정준영은 범죄 증거를 지우고 조작해서 지켜주고, 약물강간 및 마약밀매 승리와 유착한 뒤 언론에 보도돼도 묻어버리고, 교통사고 피해자는 강간하는 경찰이 고 장자연씨 사건의 증인인 윤지오씨의 계좌를 압수수색한다니 역겨운 일관성이 보인다. 
  • 궁금한 이야기 Y는 이런 반응을 바랐나봄. 윤지오씨에게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의 후원자들과 여성혐오자들의 ‘내돈내놔’와 ‘미친년’이라는 돌멩이에 맞아죽어도 마땅한 사회적 타살을 바라고 방송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보냈나보다.
  • 궁금한 이야기 Y 윤지오편은 너무 방송 방향이 “나대지마라” 인데
  • 결국 궁금한 이야기에서 윤지오를 거짓말쟁이로 모는구나…
  • 윤지오씨 인스타만 팔로윙해서 꾸준히 들여다보면 진실이 다보이는데… 
  • 말꼬리잡아서 마녀사냥하는 인간들 다들 본질은 어디갔냐??? 장자연사건에 애초에 관심이나 있었나 싶다…
  • 에스비에스 와이이야기에서 다루는 거 보니까 윤지오씨 이상한 사람이네요.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상한 사람이 증언한 건 받아들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