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사건과 국가의 장면들: 얼굴, 몸짓, 행동(1)

장자연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의문에 가득찬 죽음을 당했는데도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사기관은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는커녕 증거인멸에 조력했으며 행정, 입법, 사법을 보충하는 권력의 제4부라고 불리는 언론기관은 이 죽음과 관련해 유일하게 유의미한 증언을 해 오던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그 증언의 능력을 박탈해 버림으로써 비밀의 규명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후의 증거인멸 시도를 벌이고 있는 이 기이한 사건에서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국가가 국민들이 기대하는 바의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해자와 피해자, 수탈자와 피수탈자,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나눠진 적대적 사회를 은폐하는 ‘가면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데 머물고 있는지 살펴 보고 싶다. 

Scene #1 계약과 해약

장자연과 윤지오가 소속사 더콘텐츠에서의 활동을 고통으로 느끼기 시작한 이후에도 선뜻 소속사를 떠나지 못한 것이 김종승과 체결한 계약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억의 위약금에다가 추가적인 제재 및 손해보상의 조항 그리고 사장중심의 계약해석권 등을 담고 있는 이 계약서는 이들을 연예활동을 빙자한 이른바 “술접대” 노동에 단단히 결박시켜 놓는 노예계약과 다를 바 없었다. 계약서가 갖는 그 단단한 결박의 효과가 계약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이 갖는 힘은 국가가 그 계약을 자신의 합법적 폭력을 통해 보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계약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계약관계 속에서 공포의 권력이었던 사장의 주먹이나 발길질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장의 고소고발에 반응하여 배달될 경찰의 출두요구서와 수사,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원의 재판과 벌금, 그리고 감금장치인 감옥과 그에 부속된 간수, 징벌방 등의 폭력장치들이다. 시장에서의 사적 계약은 이 일련의 국가 폭력 기구들이 그 이행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그 계약관계 속에 단단히 결박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과 윤지오가 계약관계 속에서 부당함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소속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궁극적 힘은 김종승의 불법적인 주먹폭력보다는 그 배후에서 기능하고 있는 국가의 합법적인 제도폭력에 있었다고 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적어도 장자연・윤지오가 김종승과 체결한 계약에서 최소한 그 계약이 사장에게 유리한 바로 그 만큼은 국가가 사장을 편들고 사장의 권력을 보증하는 배후의 불평등 폭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계약으로부터의 중도해약을 통한 출구 외에 쌍방합의를 통한 계약으로부터의 출구가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1억의 위약금을 물지 않고도 계약에서 탈출할 수 있는 쉬운 경로이지만 사장의 동의를 끌어내야 하는 어려운 조건이 붙어 있었다. 윤지오의 경우는 이 합의를 통한 탈출에 성공한 운좋은 경우에 속한다. 계약금 300만원에 지출경비 보상금 300만원을 합친 총 600만원, 그리고 다른 소속사에서 연예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 장자연도 이 합의를 통한 탈출을 시도하지만 2009년 3월 7일 사망하기 전까지 그것에 성공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마약과 강제추행 혐의로 일본에 도피 중이었던 김종승 측이 합의금을 계속 상향 제안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장자연이 윤지오보다 훨씬 더 깊이 더콘텐츠와 연관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밖의 이유들도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이유들을 그 이후 사태들을 통해 오직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장자연은 합의를 통한 윤지오식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자 (호야의 대표 유장호와 함께) 김종승의 근로기준법 위반을 이유로 김종승과의 계약관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로기준법 19조 1항은 “제17조에 따라 명시된 근로조건이 사실과 다를 경우에 근로자는 근로조건 위반을 이유로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며 즉시 근로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 문건과 리스트에서 적시한 사항들은 하나 같이 김종승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김종승이 폭행, 협박, 강요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건이나 김종승으로 인해 “성상납을 강요당한”(즉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 리스트는 폭행과 협박에 의해 계약과는 다른 노동을 강요당한 사실에 대한 육필 기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건과 리스트는 김종승과의 계약관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될 증언조서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증언조서는 작성되자마자 장자연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호야 소속 연예인인 이0숙은 이 증언조서를 자신과 김종승과의 계약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푸는 데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이 증언조서는 장자연의 기대범위를 훨씬 넘어서까지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던가는 장자연이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부터는 이틀 뒤이고 편지글형식의 리스트를 유장호에게 전달한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경 ‘동료로 추측되는 인물’과의 육성대화 녹음 파일(이 파일은 SBS를 통해 2019년 4월 27일 처음 공개되었다)을 통해 드러난다. 이 대화에서 장자연은, 잘못한 것도 없고 회사에서 하라는 거 그대로 충실히 하고 있는 자신에게 김종승이 “엄청난 말들과 엄청난 입을 가지고” “내가 무슨 늙은이랑 만났다는 둥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면서 장난을 쳤”고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나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그쪽”이 누구일까?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자연은 알고 있었던 “그쪽”. 장자연은 우리에게 “그 사람은 발이 넓고 힘 센 사람이야. 김 사장도 소리 못 지르고 ‘아, 예’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라는 암시적 증언만을 남겨 두었다. “그쪽”은 “힘 센 사람” 즉 권력자라는 뜻이다. 장자연은 자신과 “그쪽”의 관계를 이렇게 권력관계 맥락에서 파악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자신과 대비시킨다. 나는 “누구도 백도 없고 지금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힘센 사람” 대(對)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과의 이 절대적 권력 비대칭을 “바위” 대(對) “계란”의 적대적 비대칭 관계(“나는 아무 힘도 없고 바위에 계란치기 밖에 되지 않아.”)로 파악하면서 장자연은 이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풀 힘이 자신에게는 없고 그것의 압박을 약으로도 해결할 수 없으니 “죽이려면 죽이라고 해. 나는 미련도 없어”라는 체념의 자세로 받아들인다. 장자연은 신고라거나 고발과 같은 흔하디 흔한 법률적 호소의 방법으로 국가에 의지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장자연은 마치 “그쪽”이 국가 자체이거나 국가와 한 패임을 보았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생명을 조용히 국가 ‘공동체’의 바깥에 내려 놓는다. “저는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며 해약을 시도했던 몸부림이 이렇게 불과 이틀만에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으로 되돌아온 지 닷새 뒤 장자연은 실제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 주검 곁에 유서는 없었다. 

증언과 신변위협에 대하여(1)

2019년 8월 2일 정의연대는 박훈 변호사를 윤지오에 대한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였다. 이 고발장은 ‘윤지오가 후원금을 받은 것은 기망행위 혹은 사기다’라는 법률적 판단을 끌어내기 위해 내세우는 박훈의 두 가지 주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그 두 주장 중의 하나는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윤지오에 대한 신변위협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박훈의 고발에 기초하여 손해배상과 부당이득을 청구하는 고소장을 작성한 여성 변호사인 최나리는, 리스트도 위협도 없었다는 박훈의 이 강한 버전을,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은 믿기 어렵고 위협은 과장되었다는 식의 약한 버전으로 바꾼다. 2019년 5월 20일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 이후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상황에서 심의발표와 너무 배치되는 박훈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대중에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이 고발문건을 기초로 박훈의 두 가지 주장을 비판함으로써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고 신변위협도 있었다는 점을 좀더 분명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확인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박훈의 고발이 허위주장에 기초해서 조작된 가짜고발임을 밝히고자 한다.

위에서 말한 ‘윤지오에 대한 무고 및 명예훼손 고발’의 원인이 된 것은 2019년 4월 26일 변호사 박훈이 서울지방경찰청에 제출한 윤지오에 대한 고발장이다. 이 고발장에서 박훈은 다음과 같은 고발사유를 제시했다. 

“피고발인은 고 장자연 씨가 쓴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면서 존재하지도 않은 ”장자연 리스트“[를] 봤다고 하면서 ”법 위의 사람들 30명과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고 하고, 사실은 전혀 신변위협을 당한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변위협을 당하였다는 허위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기망하여 거액의 후원금을 모금하였는 바 이는 정확히 형법상 ”사기“ 범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인바 피고발인을 엄정하게 조사하시어 엄벌에 처해 주시기 바랍니다.”(강조는 인용자)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고 윤지오는 위협당한 바 없으며 따라서 후원금 모금은 허위주장에 기초한 사기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김대오의 거짓말에 기초하고 있고 김수민의 왜곡된 4.16 문건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최나리 고소장에서 고소의 근거로 인용된다. 박훈의 이러한 그릇된 주장이 언론과 유튜브, 악플을 통해 무한 재생산되고 여론화됨으로써 당시 한창 장자연 사건을 조사중이던 과거사재조사위원회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이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는 동력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심지어 고발장에서 박훈 자신조차 윤지오의 증언이 유의미하다고 인정한 조0천의 강제추행 1심 판결에서조차, 판사 오덕식이 윤지오의 사기죄 피소 등을 이유로 윤지오의 진술 신빙성을 의심하면서 결국 무죄를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건은, 윤지오에 대한 박훈의 사기죄 고소가 명백히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무죄방면하는 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사회정의 실현에 큰 장애물로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훈의 고발사유에 대한 상세한 비판을 통해 진실을 회복하는 일이 절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 장자연 리스트는 있었다.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박훈의 주장에 대해서다. 박훈은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기 때문에 윤지오가 그것을 보았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박훈의 생각과는 달리 자료는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를 보았고 또 읽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없는’ 리스트를 보고 또 읽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진술자료 등을 통해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를 보고 읽었던 그 사실과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윤지오는 노컷뉴스와 조선일보가 장자연이 남긴 문건(유서라고 잘못 알려진 것)이 있음을 보도한 직후인 2009년 3월 10일 호야엔터테인먼트의 유장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때 유장호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의 명함을 고소인이 갖고 있는지 차례로 대조하며 확인했다. 이것이 윤지오가 이후 ‘리스트’라고 불리게 될 명단을 최초로 경험한 시간이다. 이 때 윤지오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녹음기로 통화내용을 녹음했고 그 녹음내용을 수사기관에 증거물로 제출했다. 당시의 통화에서 유장호는 ‘명단은 경찰에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장호가 장자연이 남긴 문건에 ‘명단’(즉 리스트)이 있음을 윤지오에게 처음으로 알려 준 것이며 그 명단=리스트가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을 것임을 처음으로 시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2009년 3월 12일 윤지오는 봉은사에서 유장호를 만났다. 그곳에 주차된 승용차 뒷좌석에서 윤지오는 실내등을 켜고 유장호가 건네준 장자연의 문건을 읽었다. 거기에는 피해사실을 적은 장들이 있었고 그와 별도로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말 아래에 명단이 적혀 있는 장들도 있었다. 윤지오는 이와 관련해 장자연의 사망 뒤 약 일주일 뒤인 2009년 3월 15일의 진술에서 문건의 맨 끝에 편지글 형식으로 씌어진 “지인들, 가족들, 특히 친언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보았다고 말했고 2010년 6월 25일 법정에서는 “어떤 장에는 성함만 기재되어 있으면서 어떠한 언론사에 누구, 어디 무슨 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고 그때 본 것의 다른 부분을 진술했다.

2009년 3월 12일 장자연 씨의 오빠와 언니를 포함한 유가족들은 경호원이 땅 밑에서 파내온 별개의 문건을 보고 읽었는데 윤지오는 이때 그 문건도 친언니와 함께 보았고 그것이 자신이 보고 읽은 것과 내용상 동일한 것임을 확인했다. 그것들 중 하나는 원본이고 다른 하나가 사본이라면 윤지오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봉은사에서 보고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종의 문건과 리스트는 유가족의 요구로 그곳에서 모두 소각되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3월 13일 KBS가 유장호 숙소의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다며 A4 4장의 문건을 공개했다. 이것은 태워진 원본과 사본 외에 또 다른 문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단이 포함된 편지글 형식의 3장의 리스트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윤지오는 피해사실을 기록한 그 문건의 내용은 자신이 본 것과 대동소이하나 자신이 봉은사에서 본 것과는 글씨체가 다르며 또 리스트가 없는 것은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이후 리스트는 끝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장자연 리스트를 윤지오가 봉은사에서 보고 읽었다는 사실은 그의 혼잣말이 아니다.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장자연 문건은 호야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배우이자 실질적 소유주인 이0숙이 더 콘텐츠의 김종승과의 송사를 유리하게 끌고갈 목적으로 대표인 유장호로 하여금 장자연과 함께 작성토록 한 것이다. 그것은 2월 28일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장자연 리스트는 그 다음날인 3월 1일 장자연이 작성하여 유장호에게 건네준 편지형식의 글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리스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우선 그 작성자인 장자연(고인)이고 그것을 보고 읽은 사람에는 최소한 유장호와 윤지오, 그리고 유가족이 포함된다.

실제로 유장호는 2010년 10월 법원에 제출한 변론요지서에서, 장자연과 함께 2009년 2월 28일 작성한 4장의 피해사실 문건 외에 장자연 씨가 3월 1일 신사동 소재 세0000라는 곳에서 장자연을 만나 장자연이 쓴 편지형식의 A4 3장을 따로 받았고 그 편지의 내용은 “문서로 작성된 내용은 다 사실이라는 내용, 법률적으로 잘 알아봐 달라는 당부의 내용, 김종승과 관련하여 조심해야 할 사람들 등”이었다고 진술했다. KBS가 보도한 문건은 장자연 등의 피해사실을 기록한 내용만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장호의 이 진술에 따를 때 리스트가 따로 있었음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명단(리스트)는 제출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유장호의 3월 10일 통화중 말과 일치한다.

그리고 장자연의 오빠 장00 씨도 경찰조사에서 사람 이름이 나열된 문건이 있었던 것으로 진술했다.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에 “유족 장□□은 경찰 조사에서 마치 사람 이름이 나열된 문건이 있는 것처럼 진술한 바 있으나”라고 표현된 문장이 그것이다.   

이상 윤지오, 유장호, 유가족 장00의 사건 당시 진술이 리스트와 관련하여 서로 일치하고 또 유장호가 윤지오와의 통화에서 명단을 불렀으며 그 명단은 경찰에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점에 비추어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장호와 오빠 장00가 최근에 자신의 진술취지를 바꾸었다는 것이 이미 10년 전 교차검증된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 유장호의 경우는 문건이 공개된 직후 윤지오에게 전화를 걸어 ‘문건을 네가 공개했다고 해주면 안 되겠냐’는 식의 위증교사[윤지오는 이 부탁을 거절했으며 해당 녹음을 경찰에 제출했다.]를 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과거사진상조사단이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 외에 피해사실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명단’이 기재된 문건, 즉 ‘리스트’가 있었을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과거사진상조사단은 장자연 리스트에 실려 있었을 최소 13명의 명단을 재구성하여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제출했다.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는데 윤지오가 보았다고 한다는 박훈의 주장은 이 모든 것과 배치되는 성급하고도 맹목적인 것이었다.

가해권력과 가해자중심주의의 논리: 조0천 강제추행 사건에 대한 오덕식 판사의 판결에 대해(1)

2019 8 22서울중앙지법 6 509호의 풍경

2019년 8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2층 ‘오늘의 공판’ 게시판에는 몇 번씩이나 확인했지만 조0천 공판 게시글이 보이지 않았다. 강제추행이라는 죄목이 딱 하나  있었는데 조0천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전 공판이 형사2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가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다시 ‘오늘의 공판’ 게시판으로 가서 마침내 오덕식 부장판사 이름을 찾았다. 6관 509호를 사용하는 판사였다. 그런데 6관 509호의 오전, 오후 공판 일람에는 이미 확인했듯이 조0천 강제추행 건 공판이 게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509호로 갔다. 재판은 이미 진행중이었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이 경험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피고인에 대한 ’조직적 은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사건번호를 모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문턱에서 공판 참관을 못했거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나는 509호실 우측 입구에서 발돋움을 하며 선고 내용을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들리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간간히 윤지오가, 윤지오는…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지 문장맥락을 따라잡기는 완전히 불가능했다. 

아마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일 부장판사 오덕식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판사석의 높은 의자의 한 귀퉁이가 조금씩 움직였지만 인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흰색 옷을 입은 경관(?)이 방청석을 마주하고 판사석 정면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 무료한 시간이 한참 지났을 무렵, 그 경관이 다리가 아픈지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그 짧은 순간에 한 사람이 판사석에 앉아 앞으로 웅크린 자세로 청중을 외면한 채 손에 든 판결문에 시선을 파묻고 그것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좀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리고는 그 경관이 다시 바른 자세로 서고 나서는 그 경관 뒤에 숨은 그 인물의 모습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판사석을 바라보는 중앙 피고석에는 정장 차림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마도 조0천일 것이었다. 그 사내 때문에 검사석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약 30여분이 지난 뒤 갑자기 재판정이 술렁이더니 조0천이 뒤돌아 섰다. 살짝 미소가 배인 얼굴이었다. 이 때문에 선고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조0천에게 유리한 판결일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조0천이 몇 사람과 함께 나의 옆을 지나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는 선고 이후 법정을 나와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법정은 벌써 다음 피고를 불러내 다음 재판을 시작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고형량이 뭐냐고 물어도 잘 알지 못했다. 이러저리 확인하고서야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제추행 가해자를 지목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2008년 8월 5일 김종승 생일 날에 김종승, 변0호, 조희천[당시 39세], 장자연, 윤지오 등이  22시 30분에서 23시 30분까지 청담동의 한 가라오케에 있었다는 것은 이제 확인된 사실이다. 윤지오는 당시 좌석 배치도를 제출하면서 그곳에서 벌어졌던 강제추행 상황을 이렇게 처음으로 진술한다. 

“술테이블에 자연이 언니가 올라가서 춤을 출 때 밑에 앉아 있는 김종승과 손님들이 자연이 언니가 마침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밑에서 치마속 팬티를 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손님 중에 신문사에 사장님이 자연이 언니를 테이블에서 손목을 잡아 당겨 자기 무릎에 앉아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만지고, 곁으로 가슴을 만졌을 때 자연이 언니가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제추행을 한 것이 누구인가? 그 사건의 장소 일시, 어느 신문사인지 등 인적 사항을 묻는 수사관의 질문에 윤지오는 이렇게 답한다. 

“날짜는 잘 모르고 장소는 청담동 엠넷 방송국 건너편에 있는 가라오케이고 어느 신문사인지 모르고, 나이는 약 50대초반으로 일본어를 유창하게잘했고, 그 당시 5명 정도가 참석을 하였습니다.”(2009년 3월 15일)

이후 윤지오는 자신이 받아두어 보관하고 있던 명함들 중에서 유일하게 언론사 사장 직함이었던 머니투데이의 홍0근이 강제추행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사흘 뒤인 3월 18일 참조인 조사에서 거의 동일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정확한 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카키색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고 갔으니까 여름이고, 김 대표님 생일이기 때무에 기획사 사무실 3층 VIP홀에서 직원들과 소속 연예인 고00, 장자연이 참석을 하고, 대표님이 부르신 머니000 홍0근 대표, 보0인베스트먼트 변0호 대표가 참석하여 식사를 마치고 저녁 9시경에 자리를 옮겨 청담동 엠넷 방송국 건너편에 있는 상호는 모르는데 5층 정도 건물에 2-3층에 가라오케에 갔습니다.”

그러자 수사관은 머니000 홍0근 대표와 보0인베스트먼트 변0호의 인상착의에 대해 진술하라고 한다. 수사관은 남자 셋 중 김종승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둘 중에서 강제추행 가해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머니000 신문사 대표 홍0근은 나이는 약 40대중반이고 신장은 약 168정도이고 체격은 보통이고 안경은 착용하지 않았고 얼굴형이 넓은 편이면서 얼굴이 긴편이고 머리스타일은 그 당시 하이칼라 형이면서 양머리가 짧은 편이고(윗머리는 긴편), 밝은 계통의 남방을 입은 것으로 기억하고,(진술인이 제출한 명함 참조)

주식회사 보0인베스트먼트 대표 변0호는 나이는 약 50대 초반이고 신장은 약  170 초반이고 체격은 좋은 편이지만 근육질이 아니라 살이 많았고 얼굴형이 보통 사람보다 옆으로 큰 편이고 피부가 검은 편이고 쌍꺼풀은 없고 머리스타일은 그 당시 나이에 비해 많은 편이고 하이칼라를 하였는데 양쪽 머리는 짧은 편이고 그 분은 항상 정상을 입었는데 그 날은 남방에  마이를 입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진술인이 제출한 명함 참조)”(강조는 인용자)

이 진술로써 변0호는 강제추행 당사자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윤지오가 “항상 정상[장]을 입었는데”라고 말할 정도로 윤지오가 잘 아는 사람이었고, 만약 그 사람이 강제추행을 했다면 그 당사자를 지목하는 것은 너무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대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강제추행 당사자는 윤지오가 처음 만난 남자, 3월 18일에 “머니000 신문사 대표 홍0근”으로 지목한 그 남자로 좁혀진다. 그런데 명함을 제출하면서 이루어진 이 두 번째 진술에서 그 신문사 사장의 나이는 5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으로 낮추어진다. 당시 조0천의 나이는 39세로 약 6세 정도의 차이가 난다. 홍0근은 그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위이므로 당시 49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를 찾는 이 과정에서 경찰이 사용한 방법은 지극히 불합리한 것이었다. 위의 진술이 보여주듯이 윤지오의 기억 속에는 강제추행한 사람의 구체적 이미지가 이미 들어 있다. 그런데 진술은 그 구체적 이미지를 분석해 추상적 특징들로 세분한다. 나이, 언어, 옷, 체형, 체격, 키 등으로.  이제 다시 그 추상적 특징들이 지목된 인물의 실제와 부합하는지를 따져야 한다. (1)기억 속의 구체적 이미지 (2)기억을 말로 표현하면서 추상된 특징들 (3)인물의 실제,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경찰은 (1)과 (3)을 대질을 통해 바로 조회토록 하면 되는 것을, 진술로 표현된 (2)의 추상특징들이 실제 (3)과 맞는지를 확인하면서 고의로 먼 길을 돌아가는 방법을 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우회방법은 개개의 특징들에 대한 진술자의 혼선을 자아내어 진술자를 공격하기(즉 진술자의 진술 진빙성을 낮추기) 위한 방법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사진을 놓고 맞추는 과정에서조차 조0천의 사진을 꺼내놓지 않았다. 조0천이 그 자리에 참석했는지 안 했는지를 경찰이 몰랐을 리는 없다. 장자연은 고인이 되었으므로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조0천을 초대했던 김종승과 변0호의 진술이 이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경찰이 윤지오 증언자를 교란시키고 구두 색깔이 뭐냐 따위를 묻는 해괴한 최면 조사를 통해 윤지오의 진술 신빙성을 떨어뜨렸지만, 윤지오는 참고인(피의자가 아니라!) 조사를 받으러 온 조0천을 우연히 본 후, 즉각 “저 분이 바로 자신이 말한 홍0근 대표이고 강제추행의 당사자”(“그 분이 오셨네요.”)라고 말한다. 즉 (1)기억 속의 구체적 이미지와 (3)인물의 실제가 조회되는 순간에 바로 양자의 일치가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우연히! (2)의 추상적 특징들을 뽑아내 그것을 (3)과 매치시키려는 경찰의 노력은 바보같은 일이었거나 조0천을 숨겨주기 위해 고안된 속임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그런데 윤지오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이름은 홍0근이 아니었고 조0천이었다. 윤지오는 기억 속에 처음부터 이름을 모르는 “조0천”의 형상을 갖고 있었지만 갖고 있던 명함 때문에 그것을 “홍0근”으로 오인했으며, “조0천” 없는 사진들 속에서 “조0천”을 찾는 경찰의 수수께끼 깥은 대조작업, 진술자를 고문하는 최면수사 등을 받으며 기억 속의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지 못한 채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0천의 실물이 윤지오의 눈 앞에 나타나자마자 윤지오는 바로 저 사람이라고 지목했고 이후 단 한 번도 조0천이 강제추행의 당사자라는 증언을 바꾼 적이 없다. 

이상이 윤지오가 조0천을 강제추행의 당사자로 지목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요약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끝)

요점: ‘호모 사케르’가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고 또 퇴출시키는 ‘지탄 공동체’의 범죄행동이 문제이며 이 문제의 극복은 포함과 배제의 이중구속 상태에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락”과 “성스러움” 사이 

당신이 지탄의 무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하기 전에 한 번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타락’(墮落)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목적에 타락이란 말을 이용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타락’이란 말은 ’제사상에 올릴 고기가 풀잎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다’는 뜻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용어로서 어떤 것이 신께 바칠 제물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상 클립 속 여성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여성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기에 바람직한 여성이 아니라는 것, 즉 가부장적 성권력에게 바칠 제물(이른바 ‘먹잇감’)로는 부적절하다는 의미이다. 김종승, 김학의, 승리 등으로 인해 유명해진 (그러나 참으로 잔인한) 현세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여성이 ’접대’에 사용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되는) 일반 시민으로 되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타락했다’고 보는 여성들을 제물로 ‘접대’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타락한’ 여성이란 현세에서 이들 성폭력-권력자들의 접대상에 올릴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렇게 ‘접대’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그 ‘타락한’ 여성을,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는 그 누가 짓밟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범죄로 되지 않을 존재로 간주하곤 한다.

조르죠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이런 존재의 원형을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이 그것이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의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는 호모 사케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인민에 의해 고발당한 자를 성스럽다(sacer)고 한다. 그를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의 호민관 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투표를 통해 성스럽게 된 사람을 죽이더라도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악하고 불결한 사람을 가리켜 ‘성스럽다’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 인용을 보면, 로마법은 특이하게도 우리가 앞서 ‘타락했다’고 표현한 존재를 ‘성스럽다’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표현방식이야 어떻든 이 인용은 로마 사회가 ‘인간 접대’의 문화를 갖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은 ‘접대’ 제물로 사용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접대’ 당할 수 있는 인간이라 함은 그 ‘접대’ 당함을 통해 신의 세계, 신의 질서로 넘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딸이 왕에게 ‘상납’됨으로써 왕의 질서(“궁녀”)로 넘어가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접대’용으로 사용될 수 없는 “범죄자”들은, 그 “성스러움” 때문에 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의 세계 내부에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든지 죽여도 무방한 존재, 항상적 배제상태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는 경계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모두에서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의 존재이다. 아감벤은 로마법 속의 이 개념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시대로 가져와 현대의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로마법에서 말한 이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현대의 국가주권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이라기보다 법을 멈추고 예외상태를 선포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저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현대적 국가주권에 의해 법질서 외부로 추방당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겨우 포함되는 생명형태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나치 하의 ‘유대인’, 일제 하의 ‘조센징’, 전후 대한민국에서의 ‘빨갱이’, 1990년대 말 이후의 ‘종북’, ‘좌빨’, 9/11 이후의 ‘테러리스트’, 트럼프 하의 ‘미등록자’ ’이주민’, ‘난민’ 등등등. 여성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면서 특별히 붙이는 이름으로는 ‘마녀’, ‘풍기문란녀’, ‘꽃뱀’, ‘매춘부’, ‘창녀’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특수한 생명형태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국가주권이라 불리는 폭력에 의해 바로 이런 식의 예외존재로 낙인 찍히고 법질서 바깥으로 추방당해 임의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영상 클립 속의 그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형상화하고 댓글러들로 하여금 그 여성을 마음 대로 짓밟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호객을 하는 것은 로마 사회나 현대의 국가주권이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방식을 흉내낸다. 그런데 영상 속 인물이 로마법에서 말하는 범죄자인가? 그들이 마구 짓밟는 그 영상 속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는가? 그 인물이 타인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한 후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가? 영상 속의 그 인물이 누구를 폭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에게 ‘성접대’를 강요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특수강간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추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희롱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협박하는가? 그 인물이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외압을 행사하는가? 가해자를 감추기 위한 부실수사를 하는가? 그 인물이 불법으로 획득한 영상물을 고객들에게 송출하는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범죄가 될 만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윤지오가 터무니 없는 무고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과 똑같이 영상 클립 속 그 인간도 그가 누구이든 터무니 없는 지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타자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를 부여받지는 않았다.  

‘지탄 공동체’의 범죄성에 대해

오히려 범죄적 행동을 하는 것은 영상 속 인물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영상 클립들을 바라보고 조롱하고 댓글을 달고 그 계정을 응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인지 모를 동영상 속의 실제 인물로부터 어떤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물의 사생활 장면들을 공중 앞에 드러내 공연(公然)히 전시하고 성희롱적 댓글들을 역시 공연(公然)히 전시한다. 이 지탄의 제의(祭儀) 속에서 이들은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동의 없는 저작물의 사용은 명백히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사실이건 허위사실이건 타인의 명예를 공연히 훼손하는 것은 형법상의 명예훼손죄에 해당되는 범죄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계정 운영자들과 “악플러”들은 이런 범죄적 행동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부품이 되어 죄의식도, 도덕감정도, 양심의 가책도, 주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이 이 불법들을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좌시(坐視)’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사실상의 범죄혐의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범죄 행동도 하지 않는 영상 속 인물의 도덕성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적반하장식 아이러니다. 이들 중 A씨는 윤지오를 규탄하는 1인시위 쇼를 하더니 며칠 전에는 영상클립 속 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하며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발(김수민에 따르면 이 사람은 고발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준혁”으로 밝혔다고 한다)을 하면서 윤지오를 잡기 위해 캐나다까지 가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 ‘언론’은 그의 1인시위와 고발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한겨레21>(https://news.v.daum.net/v/20190108113802124)에 따르면 “서준혁”은 2016년 게이오대병원 정신과 의사를 사칭하다 걸렸고, 부동산 전문가를 사칭해 피해자를 만들었으며, 서울시 도시재생 연구위원을 사칭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제출한 고발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가 슛맨과 짜고 윤지오 마녀사냥 놀이를 통해 슈퍼챗을 챙기려 한 것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슛맨은 그 슈퍼챗이 실수로 들어온 것이며 모두 돌려줄 것이라는 황급한 해명을 해야 했다. 기자였던 적이 없는데 전직이 기자였다고 사칭했지 않느냐는 의혹은 빼고 말이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소문난 조선일보가 이렇게 정권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 이런 사기전문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과 행동을 홍보해주고 더러운 이미지를 세탁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그래도 이제 조선일보가 대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언론이 ‘증언자 윤지오’에게 ‘놀아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기전문가’에게 ‘놀아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이들 범죄혐의자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로마의 노예제 권력이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 특수한 인간존재를 창출하고 로마법이 누구나 그를 죽여도 좋은 것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법률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에 누구나 짓밟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특수한 인간존재는 없다. 로마에서 ‘호모 사케르’로 되는 사람들은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이었는데 이 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영상 속 인물이라기보다 영상 클립의 자의적 이용으로 타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저작권법을 침해하는 계정주와 댓글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고대 로마법과 다르며 누구든지 짓밟고 죽여도 될 ‘벌거벗은 생명’을 적어도 법 속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구든지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은 사법적 단죄가 필요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왜 이토록 죄의식이 없을까?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어떻게 이토록 국법을 우습게 볼까? 이것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리는 다시 아감벤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은 현대의 국가주권이 부시가 그러했듯이 법을 중지시키는 권력으로, 법 위의 권력, 법 밖의 권력으로 행세하며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고 했다. 윤지오도 장자연 사건의 가해권력들을 여러 차례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계정주들도 자신을 예외권력으로 사고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이들 계정주들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가해권력의 일부, 마디, 톱니바퀴, 끄나풀, 심부름꾼, 알바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범죄혐의자, 가해권력의 톱니바퀴들은 영상 속 인물 즉 타인의 인권, 명예, 성적 자기결정권, 저작권을 짓밟으면서 그것에 ‘정의’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1980년대 초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시민에 대한 자신의 학살행위를 “폭도”를 처단하는 ‘정의’의 행동이라고 불렀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정당은 “민주정의당”(1981~1990)이라는 이름으로 폭력통치를 수행했다. 그 통치행위가 범죄행위로 입증되기까지(아직도 충분치 않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산재한 가해권력의 작은 기계입들이 나날이 자행하는 인권침해, 명예훼손, 성희롱, 저작권침해 등이 범죄로 입증되는 데에도 그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전두환은 계엄군으로 광주를 포위할 수 있었고 계엄령으로 전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지금 윤지오를 2차, 3차… n차 가해하고 있는 장자연 사건의 그 가해권력자들은 돈을 통해 전문가를 매수하고 언론을 통해 가짜진실=환상을 창출하고 고소고발의 사법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진실을 가리는 것 이상의 수단 외에는 마땅히 사용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근대적 디지털 세계는 진실을 가리는 것도 쉽게 만들지만, 가려졌던 진실이 지하에서 더 큰 폭발력을 모아 되돌아오는 것도 더 쉽고 빠르게 만든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저 진실을 가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어내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적나라한 범죄적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형상을 새로이 그려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계를 뒤흔든 1968년의 혁명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에 뜻밖에 찾아 왔듯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2008년, 2016년의 촛불봉기와 촛불혁명도 그렇게 몰래 그리고 갑자기 찾아 왔었다. 진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이다.

맺음말: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하지만 혁명을 신비화하지는 말자. 2016년의 촛불혁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유가족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끈질긴 연대투쟁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촛불혁명의 스모킹건은 태블릿 피시 이전에 세월호 가대위의 진상규명 투쟁이었다. 박근혜에 대한 탄핵도, ‘세월호 7시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부책임자의 그 무책임성 때문이었다.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으로 인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되지 못했다. 이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려면 그것을 켜켜이 뒤덮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중인 윤지오 음해공작의 쌓이는 잔해들을 먼저 걷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가해권력이 지금 윤지오를 음해하는 바로 그 권력인 한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가해권력에 대한 투쟁과 음해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떻게 과거의 그 가해권력의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영상클립들의 두 가지 목적과 세 가지 목표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2)

요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동영상 계정주들의 사업들이 경제적 이득을 거두려는 목적과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운영되는데,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세 개의 목표가 있다. 1)댓글러들로 하여금 디지털 성폭력을 행하게 함으로써 성폭력 체제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것, 2)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인 장자연 사건을 덮는 것, 3)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로 증언자 윤지오를 지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여 성폭력 체제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것.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임의의 라이브영상들의 클립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그 영상들 속의 등장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영상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인물의 여러 장면들인지 아니면 여러 인물들의 여러 장면들인지 알지 못한다. 또 만약 그것들이 한 인물로 수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증언자 윤지오”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윤지오의 증언이 갖는 흐름의 일관성과 신빙성에 어떤 의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라이브영상 클립들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등은 적어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장자연 사건에 관한 증언의 일관성과 신빙성은 일차적으로는 진술조서들의 일관성, 다른 여러 진술자들의 진술과의 교차, 남겨진 증거물들과의 조회 등을 중심으로 검증하는 것이 맞고 필요하다면 당대의 사회구성이나 정치구성과의 관련 속에서 판단할 문제이지 직업적 이유나 취미상의 이유를 갖고 한 라이브 방송의 장면들에 조회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 클립들 속의 등장인물의 직업이 엘리트직종인가 평범한 직종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학력이 높은가 낮은가, 영어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맞춤법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도덕성이 고매한가 저속한가, 인성이 좋은가 나쁜가, 성격이 까칠한가 부드러운가  따위는 증언을 검증하는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증언에 대한 검증을 증인에 대한 검증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박준영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인종주의적 검증관만이 그런 몰상식을 허용한다. 만약 동영상클립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증언에서도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추론하여 전자를 후자의 근거로 삼는다면 변호사, 정치가, 성직자는 원천적으로 증언에 부적격한 인종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세 직업은 거짓말로 먹고 사는 직업군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직업상 웃는 사람이 집에 오면 좀체 웃지 않듯이, 거짓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직벙외의 영역에서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좀더 근본적인 것으로는 로버트 펠드먼의 연구가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진실은 “우리 모두가 10분에 세 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해 본 적이 없어”라는 말이라는 지적도 상통하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들에 따르면 인류 자체의 증언이 신빙성을 잃어버리므로 증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거짓말쟁이라는 말하려는 게 아니라 증언에 대한 검증은 증인에 대한 검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이 영상 클립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윤지오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일까? 그러한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구독자나 팔로워를 불러 모으기 위한 것, 즉 자신의 계정을 홍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경제적 동기일 수 있을 것이다. 광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이들에게 주어질 모종의 댓가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 계정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사업”인 셈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사업이 거두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이다. 이것은 이 사업의 두 번째 목적을 구성한다. 우리는 이 이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두 가지 목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측면의 목표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화, 다르게 표현해서 강간문화와 강간연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들의 영상클립들에 등장하는 것은 한 사람의 “여성”이다. 이 여성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구독자나 팔로워들이 무엇을 하는가? 그 여성을 훔쳐보고 조롱하며 짓밟는 것이다. 훔쳐보면서 관음적 만족을 취하고, 조롱하면서 자기기만과 위선에 들뜨고, 짓밟으면서 성폭력의 쾌감을 향유한다. 그러면서 그 영상의 제작자(나 유통자)에게 지지한다, 응원한다, 존경한다고 찬사를 던지고 ‘한 번만 더, 조금만 더’ 식으로 갈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강간문화와 강간연대가 남성에 의해 주도되고 되고 있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이지만 그 참여자가 남성만인 것은 아니다. 남성권력의 노예임을 받아들이거나 “나는 다르다, 혹은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적극적 참여자인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는 억압과 동의로 구성된 헤게모니 질서로서 남성 폭력을 배후에 깔고 있는 점에서는 억압적 질서이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여성들의 협조 위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동의의 질서다.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은 남성권력에 유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게는 사활이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가사노동을 하는 무상수탈에 의존해 왔고 또 노동 전반의 가사노동화와 여성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인지자본주의는 여성노동을 저비용으로 이용함으로서 착취율을 높이지 않고는 존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여성을 별개의 인종으로, 또 이렇게 인종화된 특수계급으로 차별하는 성차별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축적의 핵심적 메커니즘이다. 

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목표 외에 2009년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목표가 있다. 물론 이 목표는, 장자연의 죽음 자체가 앞서 말한 성차별주의와 성폭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사건을 은폐하고 덮어버리려는 것은 성차별과 성폭력의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첫번째의 장기적 목표의 달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들이 지금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고 그의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려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장기적 목표와는 구별성을 가지며 거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 그 영상들 속에 미시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무엇일까? 그것은 임의 편집된 라이브방송 클립들의 등장인물들과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를 동일한 것처럼 혼동시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지각적 착시 때문에 발생하고(이에 대해서는 나의 글 “‘숨어살던’ 시기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지각적 착시에 대해”(http://amelano.net/?p=967)를 참조하라.)  다른 한편에서는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정체성 혼동은 중요한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다. 윤지오는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까지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얼굴도 실명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데 계정주들은 이 클립 영상들이 그 10년 동안에 촬영된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정들은 클립 영상 속의 인물과 증언자 윤지오가 동일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즉 증언자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이 거짓말이면 증언도 거짓말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억지 논리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증언자 윤지오가 10년 동안 대중에게 얼굴을 보여주지도 이름을 밝히지도 못하고 숨어서 살았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의 TV 탐사 프로그램(예컨대 PD수첩의 ‘고 장자연’)이나 JTBC 전화 인터뷰 같은 데에서 혹은 다른 자리에서 증언을 할 때에는 ‘이순자’라거나 ‘김지연’ 같은 가명으로 혹은 이름 없이 성만으로, 혹은 기호화된 이름으로 얼굴과 실명을 가리고 나오는 증언자 윤지오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제작된 모든 프로그램들에서 윤지오는 얼굴을 뿌옇게 블러 처리하지도 않으며 이름을 숨기지도 않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숨어 살았음’을 입증하기 위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한가? 

클립에 등장하는 그 “여성”은 춤을 추거나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거나 혹은 또 다른 동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지는 않다. 그 디지털 여성의 정체성은 (설령 생물학적으로 동일인의 영상인 경우라고 가정할지라도) “증언자 윤지오”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다. 영상클립들의 등장인물이, 얼굴을 공개하고 이름을 공개하여 지금 윤지오로 살고 있는 인물과 형태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인물로 지각되므로,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산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동안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살았다고 자꾸 생각되는 사람들이 혹시 있다면, 자신의 지각능력과 사유능력에 대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게 두 개의 정체성을 고의적으로 혼동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거나, 한 자리 할 수 있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병리학적 문제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당신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가해권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고의적 혼동에 동참하고 있다면 자신이 가해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인격과 지성과 양심을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지, 그러한 자기매매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디지털 영상물의 세 번째 목표가 있다. 그것은 증언자 윤지오와 공공연히 활동하는 영상 클립 속 인물의 동일시를 통해 그 동안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과는 다른 목표이다. 양자의 정체성 혼동=동일시가 ‘거짓말한다’는 이미지를 낳기 위한 조작이라면 이 세 번째 목표는, 두 번째의 동일시에 기초하여, 영상 클립 속 여성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손가락질함으로써 구독자/팔로워들로 하여금 증언자 윤지오를 손가락질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가 말하듯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성폭력을 당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지만 더 큰 고통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탄과 그 지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한자로 指彈으로 쓰는 우리말 지탄은 글자 그대로 손가락-탄환이라는 뜻이다. 포탄이나 총탄이나 지탄이나 탄환인 한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강간동맹체들에 의해 주도되는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에서는 가해자들보다 피해자들이 늘 지탄의 표적으로 대두되곤 한다. 그리고 죽게 되는 것도 이상하게 대부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 장자연이 이 어처구니 없는 체제의 희생제물이었다는 것에 재론의 여지가 있을까?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1)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 클립의 출처는 어디인가?

요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계정들에서 적극적으로 유통되면서 윤지오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영상클립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묻고 그것이 가해권력자들의 수중에서 나와 조직적으로 유포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글이다. 

언제부턴가 ‘윤지오’의 이름을 내걸고 유튜브 구독자를 호객하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불러들이는 사업이 일대 유행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이 사업의 주요 서식처로 되는 것은 아마도 이 플랫폼들이 다른 플랫폼들에 비해 동영상과 이미지에 강점을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플랫폼들에 또아리를 튼 사업계정들은 시선을 끌만한 동영상이나 정지영상으로 손님들을 불러모은다.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이 계정들은, 손님을 더 많이 끌어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태세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제기하고 싶은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저 수많은 동영상 클립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 윤지오의 이름을 내건 여러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주들의 주장대로 그 클립들이 ‘증언자 윤지오’의 다른 정체성인 어떤 라이브방송 계정주의 방송영상에서부터의 클립이라면 그 클립들의 출처 문제는 참으로 신묘해진다. 라이브방송 계정주 본인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고 그 플랫폼인 아프리카 방송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그 방송화면들이 어디에 채록, 저장되어 있다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계정주의 동의도 없이 인터넷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유통되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대두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인가가 개인의 라이브 방송을 녹화하여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그 수많은 라이브방송 모두를 녹화하여 보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표적을 정하고 필요에 따라 녹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그토록 끈질기게 해 왔던 것일까?

만약 특정한 개인이 이 일을 행했다면 아마도 그는 영상 클립속 그 인물의 (아마도 외면당했을) 열렬한 스토커였었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열성적인 스토커라면 지난 10년 동안에 충분히 노출되고 또 스캔들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가정은 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개인보다는 규모가 큰 기관이 상시적으로 ‘증언자 윤지오’를 표적 삼아 그의 라이브방송을 기록하고 보존해 왔다고 가정하는 편이 그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읽은 언론자료 중에 전직 국정원 직원의 이런 증언이 있다. 장자연 사후 정확히 한 달 만에 나온 <일요신문>과의 구술인터뷰에서 전직 국정원 직원이 한 말들이다.

“구 정권 당시 국정원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국가도 연예인 성접대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국가가 연예인을 통한 성접대를 암암리에 이용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다음은 전직 국정원 인사들의 증언을 모아 일문일답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여자 연예인의 성접대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 이것은 비단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연예계 성접대 비리는 언제나 고위층과 연결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사가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이번 정권에선 아직 성접대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정권들에 비해 다소 자유롭겠지만 그래도 현직 권력자들 중 일부가 포식자이기 때문에 수사는 쉽지 않을 것이다. 

▲ 국정원에서 연예인 성접대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나.

– 당연히 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누가 어떤 여자 연예인과 잠자리를 했고 그들이 즐겨 찾는 연예인이 누구인지까지 파악하고 있다. 이번 장자연 리스트가 터지기 전 KBS에서 이 문건을 입수한 상태라는 것도 이미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었다. 리스트 속의 인물까지 파악했는진 모르겠다. 국정원은 과거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그들에게 성접대하는 일도 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 군사정권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2009년 4월 7일, <일요신문>,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26)

국정원이 이렇게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의 동태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면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이런 정보기관들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일 수 있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국정원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진 언론사나 기업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표적 채록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통되는 영상클립들은 개개 계정주들의 정보입수 창구가 어떠하든 간에, 가해권력과 연관된 어떤 기관에서 유출되는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출의 목적이 증언자 윤지오를 매장하여 증언의 신빙도를 떨어뜨리고 추가 증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을 것이라는 것은 현재의 상황과 상식에 비추어 자연스런 추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수 년 간 지속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법투쟁 과정에서 이 영상클립들의 출처에 대한 수사는 불가피할 것이고 또 개별 계정들이 이 영상클립들을 어디서 확보했는지에 대한 수사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정을 기초로 나는 얼핏보면 경쟁적으로 보이는 저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의 분산된 사업들이 실제로는 가해권력을 수호하고 또 가해권력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조직적 정치사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작성 하던 중에 읽게 된 기사에서, 이 클립들을 근거로 A씨가 윤지오 씨를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소했다고 하는데, 이 A 씨의 행동도 역시 이 조직적 정치사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조직적으로 영상클립을 유통시키고 있는 저 계정주들인데 윤지오 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엄정한(?) 고소행동에 나선 A씨가 편파적이게도 이들의 범죄적 행동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주고 있는 것을 보아 서로 한 패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만약 A씨가 이 글을 읽고 저 계정주들을 동등하게 고소한다면 나는 이 견해를 공개적으로 취소할 의사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견해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더 굳게 믿게 될 것이다.)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집단공작’으로 인해 우리가 잊게 된 증언자 윤지오의 여섯 가지 핵심증언(2009~2019)

1/[착취와 초과착취 문제] 소속사 대표가 배우들과 체결한 부당노동계약과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통해 젊은 연예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에 대한 진술

=김종승 대표는 출연기회를 얻고 싶어하고 또 출연기회를 얻어야 살 수 있는 배우들의 욕망과 약한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그 계약에 대한 해석권리까지 독점함으로써 소속배우를 술자리에 불러내 술접대를 시키는 등의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소속배우들이 계약을 중도해지하려고 해도 막대한 위약금(1억원) 때문에 중도해지할 수도 없는 노예상태를 강요했다.[김종승 대표가 유죄선고 받음]  

2/[수탈문제1]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연예노동자들의 술접대를 받고 심지어 그들을 성추행한 언론인에 대한 진술

=술접대 자리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언론인이 장자연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이 언론인은 이후 전 조선일보 기자로 밝혀져 재판중]

3/[수탈문제2]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 재계, 법조계의 권력자들이 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힘 없는 신인배우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한 것에 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서 유장호가 넘겨준 것으로 연예인들의 피해사실이 적힌 4장의 문건과 (김종승과 다툴 때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형식의 글 3장, 도합 7장을 보고 읽었다.

4/[수탈문제3]언론계와 정치계의 권력자들이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했을 가능성과 관련하여 장자연 리스트에 기록된 그 권력자들 중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진술

=그 리스트에서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있고 기억나는 이름도 있는데 방씨 성의 세 사람과 이름이 특이한[=‘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흡사한] 국회의원의 이름이 기억난다.

5/[수탈문제4]장자연에게 마약을 모르게 주입하고 장자연의 신체에 특수강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진술

=장자연 언니가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 모습이 언니가 마약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입당한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방식으로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해 달라.

6/[국가권력의 부당이용 혹은 남용문제]국가기구인 국정원이 신인배우 장자연 사건에 개입한 것에 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 유장호와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유장호가 경호인으로 소개했는데 나중에 유장호는 그가 국정원 직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3월 13일 유장호가 입원한 병원에도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가 있었다.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윤지오의 각 증언이 다루어지고 있는 현상태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를 느낀다.

-1/과 2/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고가 유죄선고를 받거나 재판중이므로 이것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3/, 일명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과거사 진상조사단은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 외에 피해사실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명단’이 기재된 문건, 즉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제시하였으므로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법적 승인이 이루어진 셈이다. 

-4/의 증언과 관련해 검찰은 방씨 성의 사람들에 대한 수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수사무마를 위한 외압을 행사한 것 외에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여러 건의 보도를 했으며 홍준표는 자신의 실명을 거론한 정의연대를 형사고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증언자의 진술을 훼손시키기 위한 여러 유형의 폭압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압이 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의 진술은 장자연이 문서를 처음 작성할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적은 적이 있다”는 유장호의 면담 전 진술,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들었다는 정감독의 진술(2011년 8.1일 진술조서, 2019년 진상조사단 진술) 등에 의해 교차검증되었다.

-6/의 진술과 관련하여 정의연대는 국정원, 국정원 박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윤지오의 옛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두 개의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이로써 윤지오의 증언은 물증을 갖게 되었다.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