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에서 제도 대 개인

제도 대 개인

영화 <서치>. 피터 킴(주이공)이 담당경찰과 제도의 가면극 및 여론의 장막을 뚫고 실종된 마고(딸)를 찾아내는 이야기.

이 영화에서 경찰(제도)이 범죄 수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고 범죄를 은폐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담당경찰의 특수한 개인적 이유(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제도 일반이 사실은 이와 유사한 개인적 이유들로 엮여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것이다. 공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들의 제도적 네트워크일 뿐이다.

피터 킴은 마고의 실종에 직면하여 실종현장인 호수를 찾아내고, 딸이 마리화나를 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담당경찰이 사건 은폐를 위해 자백범인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자주 개인 자율성, 특이한 개인들의 자율성을 그린다. 대개는 그것이 개인의 영웅화와 얽혀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집단적 자율은 좀체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도 앎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필요(마고를 찾고 싶다, 마고를 찾아야 한다)에서 나온다는 것, 제도는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비록 흥행의 필요에서이겠지만) 자주 강조한다.

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법리에 밝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기획 감각을 두루 인정받아 사법정책과 재판에 대한 공식적인 해설 등을 도맡는 자리인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역임한 ‘엘리트’ 판사”(한겨레, 임재우 기자)

이번 재판에 비추어 이 기사를 유물론적으로 재해석해 보면 이런 뜻으로 읽힌다: “한국 법의 성차별 논리를 철저히 체득하여 가부장주의 권력자들과 유능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이들을 위해 미투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여성 저항 운동을 척결하는 사법실천을 단행하는 자. 즉 기성의 자본권력에 의해 전쟁도구로 선발된(el) 자(ite).”

위안부 문제와 김지은 문제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해 민주당이 침묵한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연설에서 문재인은 이렇게 말한다.

1. 위안부 할머니들이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진전시켰다.

‘27년 전 오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김학순 할머니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그 용기가 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 대한민국은 할머니들께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광복 후에도 오랜 세월 은폐되고 부정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가족들에게도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안으로 삼키며 살아야했습니다. 국가조차 그들을 외면하고,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복원해낸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할머니들 자신이었습니다. 침묵의 벽을 뚫고 나온 할머니들은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또 세계 각국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하고 호소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연대의 폭이 크게 확장되었고, 아시아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의 여성인권과 성폭력 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크게 진전시켰습니다.’

2. 위안부 문제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유엔의 모든 인권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의 매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되고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명예회복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나비기금을 통해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파봤기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울림이 너무도 큽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승화시켜 이 순간에도 인권과 평화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

우리는 내일 광복 73주년을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령이 되신 피해자 할머니들께는 여전히 광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이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이고 이 규범에 따라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겠으며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겠다.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지속적인 소통에 성의를 다할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 문제 해결이라는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에 따라, 할머니들을 문제해결의 주체로 존중하겠습니다.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기념사업도 최선을 다해 추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 학계의 노력으로 진실의 뼈대는 드러났지만, 아직 길이 멉니다. 기록의 발굴부터 보존과 확산, 연구지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상처를 넘어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양국 간의 외교적 해법으로 해결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을 때 비로소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민주당과 문재인은 김지은이 겪은 피해에 대해 외면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재판부에 대해 침묵하고,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바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경험과 충북도지사의 수행비서가 겪은 경험이 본질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전자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위안부 할머니들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냈다면 김지은도 똑 같은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위안부 할머니에게서 배운 바가 있다면 김지은에게서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판사 조병구가 안희정의 공범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당과 문재인도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공범으로 자리매김 되고자 하는가?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미투 운동에 대한 사법적 판결은 냉소적이었다. 피고 안희정은 무죄. 미투 운동은 이제 무고 운동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어떤 힘들이 미투 운동을 무고로, 범죄로 역전시키는 것일까?

1. 남성이자 민판연 소속 판사인 조병구의 성차별주의적 법해석
2. 한국 사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성차별적 작동 원리
3. 한국 입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법체계의 성차별적 구도
4. 이러한 입법 사법 구조에 기대 성차별과 성폭력을 일상화하고 있는 한국 행정부(아니 한국의 관료 체계 자체)와 언론, 예술, 종교, 스포츠, 교육, 기업 계 등의 성차별적 작동양식(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그것의 한 사례일 뿐)
5. 성차별에 의지하여 축적률을 높이는 한국 및 전 세계자본주의의 축적기제

미투 운동의 고발과 폭로가 직면한 장애물은 이러한 것들이다. 이 사실은 미투 운동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을 타격하는, 누구의, 어떤 운동이어야 할 것인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부의 성차별 논리

1. 증거는 김지은의 진술뿐이다. “그러므로” 안희정의 유죄를 인정할 증거는 전혀 없다. 여자의 진술증거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2. 김지은에게 적극적 거부의 증거가 없다. 적극적 거부에도 불구하고 강제되는 성행위가 성폭력이이므로 성폭력은 없었다. 적극적 거부를 어렵게 만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은 없다.

3. 현행법은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대하고 개방적이다. 그 법은 국회에서 만들었으므로 재판결과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법부가 아니라 입법부다.

“사법부와 국회가 적폐”(신지예)라는 반응은 이 사법/입법 기관들이 해체되고 아래로부터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임을 시사한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그 조직력으로 적폐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구를 구축하는 길 이외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가족>의 모색

영화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혈연주의 가족이 도달해 있는 참상을 드러내면서 비혈연적 비제도적 가족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이다. 아쉬운 것은 그 모색 속에서도 계속 아빠, 엄마, 오빠와 같은 혈연적 어휘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고 그 오이디푸스적 구도[의 잔재]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는 것. 그냥 각자의 이름들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시정잡배’

시정잡배는 엘리트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우물터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무리”, 즉 다중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임태훈의 생각과는 달리 시정잡배는 김성태와 같은 종류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 시장이나 우물터는 다양한 정보가 소통되는 공간이지 특정한 편견을 유통시키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태의 이른바 ‘성정체성 혼란’

김성태는 ‘동성애자’와 ‘성정체성 혼란자’를 혼동하면서 임태훈 군인권센터소장을 성정체성 혼란자로 비난했다.
자유한국당의 이성애-주의는 뿌리 깊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이 착취를 위해 다중의 성적 분할과 차별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다중의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근본적 사실에서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전략이다. 비이성애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정치가는 자본의 인격적 도구며 정당은 자본의 조직적 도구다.

예멘 난민, 한국 국민, 지구 다중에 관한 어떤 인용문

“영국의 모든 공업 중심지와 상업 중심지는 이제 두 개의 적대적 진영 ―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 ― 으로 나뉜 노동계급을 갖고 있다. 보통의 영국 노동자는 자신의 생활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서 아일랜드 노동자를 증오한다.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는 자신을 지배 민족의 구성원으로 간주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일랜드에 대항하는 영국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도구가 되어 그들의 그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민족적 편견을 품고 있다.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그의 태도는 미국의 과거 노예제 주들에서 ‘가난한 백인들’이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인 ‘니그로들’에 대해 보였던 태도와 거의 같다. 아일랜드인은 영국 노동자에게 원금에 이자까지 붙여서 보복한다. 그는 영국 노동자에게서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지배자들의 공모자를,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은 도구를 본다. 이 반목은, 언론, 설교단, 만화신문 등에 의해 요컨대 지배계급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온존되고 강화된다. 이 반목은, 영국의 노동계급이 조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다. 또 그것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밀이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칼 맑스

자유한국당의 정치-이미지

자유한국당의 정치-이미지

이명박의 구속에 대한 정진석의 발언은 자유한국당의 정치-이미지가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는 “1. 조선시대의 사화도 이렇지 않았다. 2. 역사는 반복된다. 다음은 너희들 차례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유한국당이 수 백 년 전 봉건 전제군주시대의 정치-이미지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근혜의 구속은 2016년 촛불의 직접적 여파이며, 이명박의 구속은 2008년 촛불의 오래 지속되는 여파이다. 국민과 다중의 촛불행동(아래로부터의 정치)을 삭제함으로써 그는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사화’의 이미지(위로부터의 정치)를 부여한다. 역사는 5백여년 전으로 퇴행하며, 그것도 물구나무선 채로 퇴행한다. 사화는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공격당한 사건인데, 만약 비교를 한다면 자유한국당과 박근혜, 이명박은 공격한 훈구파에 가깝지 피해자인 사림파와 가깝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임의적인 역사적 퇴행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관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다음에는 자신들이 문재인과 민주당을 공격할 차례라는 생각이 여기서 따라나온다. 그런데 정진석에게는 불행하게도,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 속에서 생성되는 변이이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의 본질이 아니라 피질(皮質)이다. 수구 보수주의 정당은 이승만의 망명(자유당), 박정희의 피살(공화당),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민주정의당), 이명박(한나라당)과 박근혜(새누리당)의 구속이 보여주듯이 범죄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반복된 것은 범죄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변이는 있다. 피/돈의 범죄가 돈/돈의 범죄로 변이한 것이다. 자유한국당에 다시 기회(‘다음 차례’)가 주어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범죄의 정치일 것이다. 하지만, 미투와 위드유, 3.31뛰뛰빵빵 택시 희망버스, 평화촛불집회 등으로 나타나는 지금의 촛불혁명이 지속되고 확산된다면 그러한 기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러므로 ‘다음 차례’가 아니라 ‘소멸의 때’이다. 당내의 자중지란은 그 시간이 가까왔음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