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와 김지은 문제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해 민주당이 침묵한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연설에서 문재인은 이렇게 말한다.

1. 위안부 할머니들이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진전시켰다.

‘27년 전 오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김학순 할머니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그 용기가 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 대한민국은 할머니들께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광복 후에도 오랜 세월 은폐되고 부정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가족들에게도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안으로 삼키며 살아야했습니다. 국가조차 그들을 외면하고,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복원해낸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할머니들 자신이었습니다. 침묵의 벽을 뚫고 나온 할머니들은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또 세계 각국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하고 호소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연대의 폭이 크게 확장되었고, 아시아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의 여성인권과 성폭력 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크게 진전시켰습니다.’

2. 위안부 문제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유엔의 모든 인권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의 매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되고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명예회복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나비기금을 통해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파봤기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울림이 너무도 큽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승화시켜 이 순간에도 인권과 평화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

우리는 내일 광복 73주년을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령이 되신 피해자 할머니들께는 여전히 광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이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이고 이 규범에 따라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겠으며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겠다.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지속적인 소통에 성의를 다할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 문제 해결이라는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에 따라, 할머니들을 문제해결의 주체로 존중하겠습니다.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기념사업도 최선을 다해 추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 학계의 노력으로 진실의 뼈대는 드러났지만, 아직 길이 멉니다. 기록의 발굴부터 보존과 확산, 연구지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상처를 넘어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양국 간의 외교적 해법으로 해결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을 때 비로소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민주당과 문재인은 김지은이 겪은 피해에 대해 외면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재판부에 대해 침묵하고,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바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경험과 충북도지사의 수행비서가 겪은 경험이 본질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전자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위안부 할머니들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냈다면 김지은도 똑 같은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위안부 할머니에게서 배운 바가 있다면 김지은에게서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판사 조병구가 안희정의 공범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당과 문재인도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공범으로 자리매김 되고자 하는가?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미투 운동에 대한 사법적 판결은 냉소적이었다. 피고 안희정은 무죄. 미투 운동은 이제 무고 운동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어떤 힘들이 미투 운동을 무고로, 범죄로 역전시키는 것일까?

1. 남성이자 민판연 소속 판사인 조병구의 성차별주의적 법해석
2. 한국 사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성차별적 작동 원리
3. 한국 입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법체계의 성차별적 구도
4. 이러한 입법 사법 구조에 기대 성차별과 성폭력을 일상화하고 있는 한국 행정부(아니 한국의 관료 체계 자체)와 언론, 예술, 종교, 스포츠, 교육, 기업 계 등의 성차별적 작동양식(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그것의 한 사례일 뿐)
5. 성차별에 의지하여 축적률을 높이는 한국 및 전 세계자본주의의 축적기제

미투 운동의 고발과 폭로가 직면한 장애물은 이러한 것들이다. 이 사실은 미투 운동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을 타격하는, 누구의, 어떤 운동이어야 할 것인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부의 성차별 논리

1. 증거는 김지은의 진술뿐이다. “그러므로” 안희정의 유죄를 인정할 증거는 전혀 없다. 여자의 진술증거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2. 김지은에게 적극적 거부의 증거가 없다. 적극적 거부에도 불구하고 강제되는 성행위가 성폭력이이므로 성폭력은 없었다. 적극적 거부를 어렵게 만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은 없다.

3. 현행법은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대하고 개방적이다. 그 법은 국회에서 만들었으므로 재판결과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법부가 아니라 입법부다.

“사법부와 국회가 적폐”(신지예)라는 반응은 이 사법/입법 기관들이 해체되고 아래로부터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임을 시사한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그 조직력으로 적폐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구를 구축하는 길 이외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태의 이른바 ‘성정체성 혼란’

김성태는 ‘동성애자’와 ‘성정체성 혼란자’를 혼동하면서 임태훈 군인권센터소장을 성정체성 혼란자로 비난했다.
자유한국당의 이성애-주의는 뿌리 깊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이 착취를 위해 다중의 성적 분할과 차별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다중의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근본적 사실에서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전략이다. 비이성애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정치가는 자본의 인격적 도구며 정당은 자본의 조직적 도구다.

미투의 전망

미투 운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이다. 왜 신보수주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적은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몇 가지 해석들이 있다. 이 해석들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미투의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자유주의 세력 중의 일부가 취하는 태도로서 미투 운동 자체를 신보수주의 우파의 공작의 산물로 보는 음모론적 해석이다. 이것은 미투의 실재적 근거(성차별과 성폭력의 실재성)를 부인하고 미투의 발전과 확산을 가로막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미투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는 자유주의 세력이 취하는 공격적 방어의 방식이다. 이것은 우파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투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젠더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와 투쟁을 좌/, 진보/보수 간의 정치공학적 대립과 투쟁의 종속변수로 환원시킴으로서 젠더 이슈를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로  보수우파 정치가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로서 미투가 좌파의 이중성, 즉 담론과 실제 사이의 분리를 드러낸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 역사 젠더 문제를 좌우파 대립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정치적 우파라고 해서 젠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투의 폭로투쟁이 주로 자유주의 진보 세력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수우파가 성차별, 성억압, 성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거일 수 없다. 오히려 반대다. 보수우파의 여성억압과 여성수탈은 훨씬 노골적이고 일방적이다. 이들은 여성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시각을 수차례나 드러내었다. 이건희 성매매 사건에서 보이듯이 보수우파는 여성을 그저 하나의 비인간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에 익숙하다.   젠터문제에서 보이는 자유주의 진보파의 이중성은 그에 비하면인간여성비인간여성사이에서의 심리적 갈등과 자기분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우파에게 담론과 실제 사이의 이중성이 없다면[적다면], 그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고 담론의 수준에서도 여성을 인간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미투 운동이 진보영역에 집중되고 보수 영역에서 드문 이유를, 보수 영역의 피해 여성들은 동일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데서 찾는 해석이 있다. 이것은 미투의 주체구성에 대한 해석으로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에서 시작된 최근의 미투 운동이 상대적으로 큰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주목할 만한 지위를 가진 여성들의 폭로투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정규직 여성 등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은 아직 이슈로 제기되지 않고 있다. 즉 주로 보호받아 마땅한 지위의 여성들이 겪은 피해와 그것의 구제가 주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투의 다음 단계가 현실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의 미투여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연관된 네 번째의 해석이 가능하고 또 부상하고 있다. 3 10일 집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투를 촛불의 연장으로 보는 해석이 그것이다. 지난 시기의 촛불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가 세대를 불문한 다양한 여성집단들이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탄핵으로박근혜 즉각 퇴진이라는 촛불의 일차 요구가 달성된 상태에서 촛불은 지금성폭력 즉각 퇴출이라는 이차 요구를 향해 진전하고 있다. 이 요구투쟁이 중간층 여성들의 미투에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미투 운동의 좀더 발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계급적으로 보호받는 여성층을 성적으로도 안전하게 보장하는 운동이라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성적으로는 물론이고 계급적으로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불안정여성노동자들의 미투로의 확산을 통해 미투가 새로운 사회개조, 성별평등과 계급적 평등을 결합시키는 사회건설의 동력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미투는 좌우 모두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사회상의 준거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성폭력이 일어날까?’에 대한 단상.

‘왜 성폭력이 일어날까?’에 대한 단상.

 

가부장적 일부일처제는 본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인데, 일부일처제가 매춘에 의해 보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관계와 매춘(성매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관계를 지탱하는 양축이다. 성폭력은 이 두 범주의 경계지대에 서식한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왜 어떤 근거에서 생겨날까?

진화적 심리 일반에서: 남성은 여성의 호의적 신호를 성적 신호로 환원하여 읽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한 환원이 문제점이 있었지만 번식의 기회를 잃지 않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환원 때문에 사회관계에서 여성의 다양한 유형(예의, 친절, 동정 등)의 호의적 태도를 ‘성적 구애’의 신호로 착각하는 많은 경우가 있게 되고 이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한다. 이 환원의 습관이 굳어지면 여성이 보내는 비호의적 신호마저 성적 구애 신호의 역설적 형태로 착각하게 되고 이럴 때 성폭력은 반복적 습관적인 것으로 굳어진다.

자본관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발생기에 여성 착취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했다. 그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자본주의 이전부터 유전되어온 가부장제에 이 마녀사냥을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무상으로 착취할 수 있었다. 가사노동을 무상노동화하고 여성을 남성의 임금에 의존하도록 만든 결과,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 보잘 것 없는 종속자,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의사를 무시한 성적 행동, 즉 성폭력이 생겨난다.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위계제에서 권력자는 상하관계 때문에 취할 수 밖에 없는 하위주체의 순종적 태도를 ‘성적 구애’의 제스쳐와 쉽게 혼동한다. 위계제는 정치권, 군대, 교회, 병원, 학교, 연예계, 문화예술계, 재계, 기업, 공장 등 현대 사회 제도의 모든 곳에 편재하는 동형원리이다. 기존 사회 제도에 저항하는 운동단체들도 많은 경우에 위계제를 원리로 구축된다. 오늘날의 위계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우위에 있는 경우는 여성이 남성의 우위에 있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특히 이 비대칭은 위계제 사다리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훨씬 심해진다. 그 결과 위계적 현대 사회 자체가 성폭력의 온상이 된다.

문화적 헤게모니에서: 최근의 성폭력 사건이 진보적 정치단체 예술단체 학술단체 대학 등을 중심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문화적 헤게모니가 성폭력을 조장하는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에서 새로운 헤게모니는 사회개혁과 사회변동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헤게모니는 억압과 동의의 양측면을 갖는다.  많은 부분 남성이 장악하고 있는 문화적 헤게모니 체제에서 헤게모니 주체는 남성의 진화적 경향과 결합되면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성적 헤게모니와 오인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성적 헤게모니를 전환시키는 데 실패하여 동의의 축이 빠지게 되면 억압만 남게 되고 여기에서 성폭력의 여러 유형들(희롱, 추행, 폭행)이 출현한다.

오늘날 성폭력이 권력관계의 산물이라는 데에는 거의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3항이 그러한 진단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성폭력 현상의 근절을 위해서는 권력관계 외에도 자본관계, 문화적 헤게모니, 진화심리와 같은 요인들을 고려한 좀더 총체적인 관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여성문제를 억압하기와 후경화하기의 공모관계

역사적 우파는 자본의 여성착취를 옹호하기 위해 여성문제를 억압했다.
역사적 좌파는 계급문제를 전경화하기 위해 여성문제를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여성문제를 후경화했다.
미투는 이 양자의 공모를 깨뜨리면서 여성문제를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제기한다.
공모의 균열 상황 속에서 우파는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이 진보좌파만의 것인양 책임을 전가하고 진보좌파는 미투가 우파의 공작정치일 수 있다고 비난한다.
아것들은 여성문제를 다시 억압하고 후경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 동맹 프레임의 축들이다.

남성은 왜 여성에 비해 큰 권력을 갖게 되었나?

남성은 왜 여성에 비해 큰 권력을 갖게 되었나?
문단, 화단, 연극계, 법조계, 교계, 대학, 정치권…. 그러니까 우리 사회 전역이 성희롱과 성추행은 물론이고 성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라는 것은, 미투 운동을 통해 그것에 대한 폭로가 집단화, 전면화되기 전에는, ‘공공연한 비밀’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일반화된 성추행과 성폭력이 권력관계 때문이라는 것은 여러 언론의 논평을 빌지 않더라도 이제 주지의  사실로 되었다. 그렇다면 왜 남성이 여성에 대한 우월한 권력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일까?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의 근간이 되는 성차별은 왜 생겨나게 된 것일까?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은 성별 분업일 것이다. ‘원죄에 대한 처벌’로서 남성이 노동을 맡고 여성이 출산을 담당한다는 식의 분업. 하지만 분업 그 자체가 남성에게 권력을 주는 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 시대마다 이 분업적 조건 속에서 남성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는 사회관계들이 발전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긴급하게 제기해야 질문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사는 현대에 남성에게 더 큰 권력을 주는 사회관계가 무엇인가?’ 이다.
첫째로는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자본주의가 여성에 대한 공격을 통해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키는 남성권력의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이었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반과 마녀>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이 주제이다. 그런데 남성에 의해 수행되는 이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추행/폭행 피해자가 항변하거나 폭로할 때 그녀를 ‘꽃뱀’으로 몰아 집단적으로 지탄하는 것이 그 한 사례이다. 꽃뱀사냥의 본질은 마녀사냥이다.
둘째로는 가사노동의 무상화다. 자본주의는 ‘고용된 노동’만을 노동으로 평가하고 고용되지 않은 모든 노동, 특히 가사노동을 비노동으로 평가하여 무상으로 수탈한다. 여성에 대한  수탈은 자연에 대한 수탈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수탈의 양대 축을 이룬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혁명의 영점>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급 운동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가사노동은 여전히 무상으로 수탈되고 있다.
셋째로는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억압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여성의 보통선거권은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반화되었다. 선거권에 대한 억압 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의 정치적 권리는 지금도 억압되고있다.
여성의 임금노동에의 진출이 억제하기 힘든 시대적 추세가 된 20세기 이후에는 넷째의 사회관계가 작용한다.  그것은 남녀의 임금차별이다. 이것은 여성의 진출영역에 대한 정치적 제한/억압(이른바 ‘유리천장’과 ‘유리벽’)과 더불어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하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한다. 여성에 대한 수탈은 임금차별을 통해 지금도 다른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축적체제를 유지하고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의 조건은 자본관계 그 자체가 제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남성들은 이러한 관계를 수행하는 행위자들이다. 즉 남성은 자연과 여성에 대해 자본이 자행하는 수탈을 적극적으로 돕거나 적어도 방조하는 지위에 있는 행위자들이다.
여성이 이러한 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성보다 훨씬 잘 조직되어 왔고 그것의 힘으로 문화적 우월성까지 과시해온 남성집단보다 더 우월한 조직화의 수단을 발명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보여주는 조직화의 중요한 힘은 공감이다. 남성의 조직화가 이해관계와 권력의 배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것과는 달리 여성의 조직화가 정동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태이다.
공감의 대장정을 예상케 하는 미투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월한 권력을 사용하여 여성신체와 정신에 대한 희롱, 추행, 폭행을 자행한 인물들에 대한 규탄, 고발, 제척은 아마도 긴 여정의 첫 걸음일 것이다. 여성이 더 이상 자본의 수탈대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하는 것이 그 다음의, 그리고 중요한 여정으로 남아 있다.

만질 권력의 종말

최영미 시인의 ‘괴물’, En 선생은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진다.”
함덕 서우봉 입구 작은 말목장 입구에는 “만지지 마세요”라고 씌어 있다.
강형욱은 개를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입으로) 말 걸지 말고, (손으로) 만지지 말라고 권한다.
미투 운동과 더불어서 여성을 만지고 말을 만지고 개를 만지는 남성인간, 즉 맨(man)의 시대에 조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쳐다보는 권력, 말하는 권력도 자신감에 넘치는 당당함을 잃고 두리번거리고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