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기업에 대한 다중의 섭정을 위한 상상

공무원을 국민이 섭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무원이 국민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섭정이 정치적 과제로서 나타나는 것은 대의제가 과도한 나머지 공무원이 자립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 공무원이 주인인 공무원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민주제의 간접 민주제로의 대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왔다. 공직의 사유화와 권력화는 그것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래로부터 국민-다중의 섭정은 공직을 부름에 대한 응답, 즉 소명(Beruf)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유화된 공직을 다중을 공통화시키는 봉사활동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국민-다중의 권력에 봉사하는 서비스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배심제 하의 AI검찰’이라는 형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어 자본가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다.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위치지워지며 대다수 국민들은 기업 영역에서 주권을 잃고 노예로 전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 국민-노동자의 주권됨과 모순된다. 또 기업체제가 지배적으로 되면 국민-노동자는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성을 망각하게 되며 자신의 기관인 국가와 자신을 고용한 기업의 배신적 유착도 심화되게 된다. 대의제가 기업제와 동화되면서 정치적 대의자들이 기업주처럼 군림하고 국민이 노예처럼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주권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정치영역에서 국민-다중의 주권회복이 기업영역에서 노동자의 주권쟁취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업영역에서도 노동자-다중이 주인으로 될 때에만 다중에 의한, 다중을 위한, 다중의 정치/경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다중통제 하의 AI기업’의 형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영역의 공통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해방이 현재는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계화, 정보화, 자동화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경향이 그것인데, 노동(여기서는 ‘고용노동’을 지칭한다)과 소득을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결합시켜온 자본주의의 오랜 경향과 장치들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무소득, 저소득과 묶어 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고용노동=강제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삶정치적 활동은 노동으로 평가되지 않고 무상수취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소득 및 무조건적 보장소득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고용되어 노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소득 문제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활동은 기업적 고용세계 바깥에서도 전개되고 있고 기업들은 이 활동들을 외부효과로서 전유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없이 소득 없다’(예컨대 무노동무임금)는 관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노동자가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자유롭게 종사하면서도 그것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행복한 느낌으로 충실할 수 있을 때 국민과 노동자 사이의 현재의 배리현상(주인이 노예되는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삶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섭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업은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관이 아니라 (비)노동자-다중의 부름을 받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소명기관(Beruf-organ)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착취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 것과 국가가 권력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이다. 하나의 과정이란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섭정능력이 향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다중의 공통화 없이 국가와 기업의 공통화 없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섭정 능력을 위한 사유실험과 행동실험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그 성과들의 공통화-연결망(commoning-network)이 섬세하게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을 통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이 첫 걸음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의 분화,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한 관찰메모

  •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는 서초동과 여의도로 분산 개최되었다.
  • ‘분열’이 아니라 ‘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집회의 이슈와 강조점이 다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촛불은 반드시 단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화하고 분산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 연결되고자 한다면 분산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물론 현재는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전체 촛불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 9차까지의 서초동 촛불집회의 주최측을 자임했던 개국본이 10월 12일을 갑작스런 마지막 집회로 선언한 것이 이 경쟁적 분화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집회의 종료를 선언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암묵적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종료 선언이었고 이것이 촛불을 지속하자 하는 사람들을 별도의 경향적 세력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즉 서초동인가 여의도인가의 분화가 있기 전에 종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화가 있었다.
  • 북유게 사람들이 촛불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국이 사퇴한 날과 겹치는 월요일(10월 14일)이었다. 개국본이 여의도 촛불을 결정한 것은 수요일(10월 16일)이었다. 종료나 계속이냐의 분화가 여의도인가 서초동인가의 분화로 나타났다.   
  • 섭정의 관점에서 두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이유는 없다. 촛불다중에게는 두 주최측, 두 집회의 에너지가 사회개혁의 집합적 에너지로 공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두 집회의 공통점은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검찰이 범인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현존하는 검찰권력의 불법성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에 윤석열 수사, 구속 등 검찰총장에 대한 강한 사법적 압박 요구가 더해졌다.
  • 여의도 집회는 “공수처 설치”와 “응답하라, 국회” 등의 입법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서초동과 여의도의 뚜렷한 차이는 여의도에서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구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서초동 집회는 이전 9차 집회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국 수호’를 외치면서 조국을 이슈화했다. 여의도 집회는 ‘조국 수호’라기보다 ‘조국 계승’(수고했습니다) 쪽으로 초점을 옮기는 분위기였다. 서초동이 조국을 현재화한다면 여의도가 조국을 과거화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초동 집회보다 여의도 집회에 더 많은 사람(감으로는 약 1.5배~2배)이 모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여의도 집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고려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성별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여성이 주축이었다. 8대 2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반면 여의도 집회는 5:5로 동등하거나 6:4 정도로 남성이 더 많은 집회였다.
  • 세대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2~30대가 주축이고 여의도는 그보다는 연령이 더 놓은 세대가 주축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참가자들의 자유발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집회는 공연과 유명인사들의 연설 중심이었다. 
  • 서초동 집회에 비해 여의도 집회가 미디어 동원이 많았다. 여의도 집회는 스크린이 과잉동원되었다는 느낌이었다. 9월 28일의 과소동원과 대조되는 풍경. 전체적으로 너무 큰 마이크 소리로 집중이 어려웠다. 국회의사당역 출구의 포스트잇 시위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초동의 경우는 미디어 동원이 적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히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주요 슬로건을 담은 큰 깃발들 대오가 외곽을 오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 전체적으로 여의도 집회의 방식이 전통적 조직운동의 집회방식이라면 서초동 집회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킹 방식을 오프라인 집회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구심점을 이루면서 촛불다중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19년의 촛불집회는 개국본이나 북유게 등 개별 단체나 커뮤니티가 주최측이 되어 집회를 개시하고 다중들이 그것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최측의 정치적 색깔이 집회 전체의 색깔을 좌우할 수 있고, 주최측 간의 의견차이나 갈등이 촛불 다중들의 갈등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생산적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주최측이 뚜렷한 데서 오는 이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나타난다. 

검찰개혁의 발본화를 위한 조건: 2019년 9월 28일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검찰권력은 행정권력 중에서 군사권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전쟁을 통해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권력임에 반해 검찰권력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타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원칙적으로는 타국의 국민들을 겨냥하지만(전두환 시기의 군부에서 보듯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검찰권력은 자국의 국민들을 겨냥한다.

군사권력과 검찰권력의 수뇌는 선출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뇌들은 위로부터 대통령의 통제보다도, 오랜 시간 속에서 재생산되는 군부 및 검찰 관료집단들의 통제를 더 많이 받는다. 해당 관료조직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익을 위배하면서 관철될 수 있는 여지는 여기서 발생한다. 검찰이 형벌권을 관료조직과 관료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 국가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국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주장을 통해 검찰개혁을 추진해 온 인물이다. 이 두 방안을 통해 검찰이 실제적으로 현재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생각일 것이다. 관료는 이미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만큼 완강한 세력이다. 조국의 개혁 방안은 관료체제와 관료계급을 온존시키면서 관료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은 관료계급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료계급 내부 역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도 관료조직이며 관료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료계급의 문제를 방기하는 한, 공수처도 그러한 관료계급의 일부로 편입되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경검 사이의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직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행위를 하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관료계급 내에서의 일정한 세력균형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관료계급의 지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방안에 머문다면 그러한 검찰개혁의 방향은 계급으로서의 관료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관료조직의 역관계 재배치를 통해 실질적 변화가 도입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질적 변화는 다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다중을 대상으로 통치행위를 수행하는 관료계급을, 자기조직화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에 맡겨 관료들이 독자적 계급으로서 재구성될 수 없도록, 국가기관이 다중의 절대민주적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관료권력의 재분배와 재조직을 넘어 권력체제 그 자체의 아래로부터의 재구성과 권력기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조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그 조직력을 기초로 대의기구에 대한 섭정 능력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관료계급을 약화시키고 궁긍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에서 검찰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장기혁명의 방향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넘겨주어야 한다. 자기조직화된 국민들이 원칙적으로 수사권을 갖고 필요한 수사행위를 자율적 시민수사기구, 각 분야의 전문 수사기구, 경찰 등에 필요에 따라 위임, 배당한다는 구상 위에서 검찰개혁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의 수사를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수사권을 갖는 시민주도의 특별조사위원회가 제안된 바가 있는데 이것은 검찰 개혁을 사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례로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검찰이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여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등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범죄혐의를 운위하면서다. 이 담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을 통해 지배적 담론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러한 ‘부적격’ 담론은 조국이 말과는 달리 실제에서는 정의롭지 못하며 사회 하층의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계급)에 살고 있으므로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적 생활과 공적 발언 사이에 격차가 크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메시지)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메신저)에 주의를 돌리는 주장이다.

보수언론, 보수정당, 경검 등 제도적 보수세력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혁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혁과 혁명을 지향하는 좌파이다. 개혁과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구해온 좌파 세력의 상당 부분이 조국 사태에서는 무관심을 표명하거나 이러한 우파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보수우파가 그렇게 반응한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에서건 좌파가 무관심하거나 반조국 전선에 가담함으로써  반조국전선은 의도되지 않은 좌우합작 전선으로 강화되어 왔다.

혁명적 사회변혁은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의 개혁노선은 어중간하여 실질적 변화의 필요성과 실질적 변화의 방안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때문에 좌파가 검찰개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되는 상황에서 우파 주도의 반조국전선에 가담하여 공조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조국이 법무부장관 자격이 없으므로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던 주장은 이제 조국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통령이 조국을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타난다. 임명 전과 비교해 이제 조국이 ‘범죄자’라는 미확인의 주장까지 더해졌다.

조국이 만약 범죄자임이 확인된다면 그가 장관직을 수행해서는 안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수정당들과 보수언론들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퇴나 해임 심지어 구속을 주장하는 것은 불확실한 여론으로 여론재판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이런 식의 재판에서는 언론, 방송 등을 장악하고 있는 우파 언론 집단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조국이 법무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무부 장관’이라는 부르주아 사회기관과 직책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법과 법무행위가 좌파적 시각에서 그토록 ‘정의’로운 것이었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법과 법무행위는 원리상 부르주아적 정의와 부르주아 체제를 재생산하는 기관일 뿐 프롤레타리아 다중의 정의와 다중의 해방을 실현하는 기관이 아니다. 역대 법무부 장관의 면면은 이 사실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지금까지 어느 법무부 장관에게도 적용하지 않던 ‘프롤레타리아적 정의’라는 기준을 조국에게만 적용하는가?

조국이 계급적으로 비정규직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논점도 같은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지금까지 어떤 법무부 장관이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앓으며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 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법무부 장관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대를 기준으로 조국의 자격 문제를 논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직책은 관료지배계급의 고위직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 혁명의 주체가 아니다. 나는 반조국전선에 서 있는 좌파 부분이 혁명의 대상과 주체를 혼동하는 심각한 범주 착오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법무부장관 임명, 직위의 문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개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 계급간 문제 즉 혁명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혁의 문제는 혁명의 문제로 전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으로는 우파 주도의 반개혁노선과 공조하게 되는 도덕주의적 행위양식을 통해서 달성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개선할 힘은 그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법무부 장관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대의할 수 있는 법무부 장관이 임명되도록 만드는 것도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반조국 흐름은 지금 명확하게 개혁에 반대하는 지배계급 내 우파 주도로 개시되고 또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한 행동은 이러한 우파 흐름에 맞서 조국과의 연합을 통해 조국을 더 급진적인 개혁방향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 즉 혁명의 대상인 법무부장관을 혁명의 동반자로 전용하는 섭정의 정치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반개혁 우파 흐름에 실천적으로 연합하게 되는 반조국좌우연합전선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서초동 대검찰정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이런 점에서 교훈적이다. 150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이 집회에서 촛불시민들은 정치검찰 퇴진, 자유한국당 해체, 조중동 폐간, 검찰 개혁, 공수처설치, 조국 수호를 외쳤다.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이 박근혜를 파면시킨 2016-7년의 촛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구호, 깃발, 리듬, 호흡 등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좌파 일부의 촛불로부터의 철수였다. 이 철수는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관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좌파 대오를 서초동 촛불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반면 반촛불 우파는 비록 왜소한 형태였지만 대검찰청 앞에서 촛불시민과 대치하며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었고 문재인 탄핵, 조국 구속을 외쳤다.

촛불시민은 박근혜를 탄핵했던 아래로부터의 섭정정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것은 다중의 섭정감각을 간과하는 엘리뜨주의 지식인의 편협한 관점일 수 있다. 좌파는 조국 수호에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인다. ‘조국 수호’ 슬로건이 ‘메신저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국 수호’는 인격으로서의, 계급으로서의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메시지’, 즉 검찰개혁이라는 메시지를 개혁에 반대하는 우파의 기도로부터 수호하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제도적 청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사법적 인적 청산으로 만듦으로써 적폐권력인 검찰의 힘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이 전개되어 왔다. 조국 사태는 적폐를 통해 적폐를 청산해온 이 역설의 효과가 드러나는 현장의 하나이다. 조국은 스스로 ‘가진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약하고 불충분하나마 대한민국의 적폐권력인 검찰의 개혁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드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가진 자’로서의 행보와 ‘사회개혁’의 행보 사이에 드러난 간극과 모순을 단순히 ‘위선’으로 평가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을 넘어서려는 지적 노력으로 볼 수는 없을까? 조국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그것이 비록 불철저하고 불충분한 노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노력이 실제로 성과를 얻고 더 발본적으로 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다중 전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위험은 흔히 주장되듯이 그가 검찰개혁을 주장했으면서 사생활에서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도덕적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존재와 의식 사이의 이 괴리와 모순은 조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겪고 있고 또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검찰개혁 구상이 불철저하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개혁행보가 관료계급과 자본의 공동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반개혁적 관료세력과 타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사모펀드를 통해 치부를 추구하고 대입제도를 이용해 자녀의 영달을 추구한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가장이라는 점을 들어 지명철회를 요구하고 해임을 요구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촛불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것이다. 치부와 영달의 추구는 부르주아 사회가 모든 개인에게 강제하는 생활 논리, 즉 생리의 문제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가진 자’의 집단은 치부와 영달추구를 위한 매우 많고 다양한 수단들을 갖고 있는 반면 ‘못 가진 자’의 집단은 그 수단이 지극히 협소하거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를 벗어나는 길로서 유력한 것은 타인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사회를 공동생산 및 공동증여의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의 개인을 도덕적으로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고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인 다중 자신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사회의 구조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다중이 연합하여 조국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검찰개혁을 법무부 장관의 권한을 사용하여 더 발본적으로 실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박하는 것이지 그의 해임, 사퇴, 구속 등의 요구로 그의 검찰개혁 노선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응양식은 실천적으로 검찰개혁을 급진화하고 발본화해야 할 시기에 검찰개혁에 반대함으로써 문재인 정부 이후 더욱 비대해진 검찰 적폐권력의 독주를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이 좌파라면 조국에 대한 도덕적 계급적 비판을 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논리를 기초로 촛불시민들과 함께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그 검찰개혁이 더욱더 근본적인 개혁이 될 수 있도록, 즉 사회혁명의 문을 여는 개혁으로 될 수 있도록 법무부장관인 조국과 관련 기관에게 촉구하고 압박하는 개혁적 섭정행동에 나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검찰개혁의 발본화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아래로부터의 길, 좌파적 길이지 않을까?

피해자다움의 강제적 수용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의 결단으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2)

“결국 올바른 피해자다움이란 이번 판결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피해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최대한 격렬히 저항하고, 피해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신고한다. 피해 이후에는 가해자가 두렵고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티내고 싶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무조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 신고 과정에서는 자존감이 강해 보이는 단호한 모습 대신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해리 상태에 빠져야 한다. 평소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도 소송 과정에서는 신뢰할만한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상태’다. 모순 그 자체다.” -도우리[미디어스 기자]

강요된 피해자다움의 부득이한 수용: 기자로부터의 도피

‘동료배우 윤 모 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3번째 증언> 14장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를 받으면서 느낀 혼란에 대한 서술이며, 그 피해자다움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윤지오에 대한 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장자연을 대신하여)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자들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윤지오에게 “걸려 오는 전화도 마음 편히 받지 못할” 정도로 “나를 통해 언니의 일을 캐려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168)로 다가왔다. 기자들은, 취업을 위해 찾아간 치어리더 에이전시에도 찾아왔고 연예기획사를 찾아가면 그곳으로도 찾아왔다. “잠깐 동안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라며 그렇게 얼굴을 팔고 나면 지금보다는 더 활동하기 편해질 것”이라고 부추기며 “지상파 TV의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서 언니와의 관계나 그간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무명배우이다 못해 지망생”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존감을 갖고 살고 싶었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169)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자존의 ’떳떳함’은 이상하게도 당당함이 아니라 TV 출연을 거부하고 인터뷰를 거부하고 “ㄷ엔터 소속이었다는 말도, 자연 언니와 친분이 있었음”도 말할 수 없음을 통해서 겨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윤지오 자신에게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167)이었다. 그가 그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 것은 미인대회 관계자로부터 대회 출전을 하지 않도록 권유받았을 때였다. 그 관계자가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자신이  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미인대회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그런 권유를 한 것을 알았을 때, 윤지오는 장자연의 동료배우였다는 사실이 “낙인, 주홍글씨”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장자연이 겪었던 그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일까? 기자들이다. 윤지오는 소속사의 노예계약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소망이 김종승과의 다툼에 장자연의 삶을 이용하고자 했던 이미숙/유장호의 야망의 덫에 걸려 탄생한 것이 장자연 문건/리스트라고 파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약직 연예노동자 장자연이 경험한 성착취와 성수탈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조서이자 고발장으로 남아있다. 이 문건/리스트의 작성으로 인해 결국 장자연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장자연은 누가 봐도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2019년 4월 16일 이후 김수민이 윤지오와 관련해 맡고 있는 역할이 이런 성격의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게 피해자다움과 증언다자움을 강요하려는 가해권력의 필요를 여성의 위치에서 충족시키는 것, 즉 윤지오가 피해자 답지 않고 증언자 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 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 ‘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배우였던 자신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발아들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는 결단

거듭말하지만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2019년 3월 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였다. 이 유튜브 방송의 5: 37~7:04 구간에 김어준과 윤지오가 나눈 인터뷰 대화는 흥미롭다. 그 대화는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김어준: 지금까지 본인이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했는데 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지오: 국내에 거주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 살면서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모두 얼굴과 이름이 공개됩니다. 이런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존중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어준: 내가 숨어 살 이유가 뭐가 있냐, 나는 피해잔데…

윤지오: 가해자가 떳떳이 사는 것을 보면서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던 게 사실입니다.

김어준: 10년만에 장자연 사건이 다시 조사된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숨어살고 싶지 않다, 내가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잔데 가해자는 다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내가 10년간 숨어살다시피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그래서 결심을 하신거고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고 이야기해야 겠다 생각하신거죠. 이름이 윤지오씨입니다. 처음 모셨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gS_KHy4akx8&t=2s: 대화 내용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을  조금 고침.)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살았던 저 ‘숨어 살기’를 버리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결단은 무엇보다도 사건 이후에 윤지오가 보고 겪었던 캐나다의 경험에서 주어진다. 캐나다에서는 성폭력 관련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동등하게 공개되며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은 캐나다와 정반대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사는 데 피해자는 얼굴도 이름도 가리며 고개숙인 채 숨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고 가해자가 계속 가해할 수 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지오는 캐나다와 한국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점점 한국의 피해자들이 부당함과 억울함을 겪고 있음을 더 강하게 감각한다. 

이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정동적 변용의 체험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오가면서 그 문화적 차이공간 속에서 한 곳에 머물렀다면 몰랐을 것을 깨닫고 느끼지 못했을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인지적 정동적 변용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증언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결단은 행동으로 옮겨 졌는데, 거기에는 ‘강요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도 피해자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자’라는 사회개혁적 제안이 함축되어 있다.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윤지오의증언이장자연의유가족이패소하는데결정적역할을했다는”윤지오 이모부”의 마타도어(matador: 흑색선전)에대하여

ID “윤지오 이모부”는 유튜브를 통해 지근 거리에서 윤지오를 비난하는 대표적인 네티즌이다. 고기술로 만들어졌으나 사실인지 주장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제공하는 “윤지오 이모부”의 동영상을 통해 윤지오는 사생활이 까발려지고 가차 없이 찔리고 상처입는다. 이 동영상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인격을 말살하는 사이버명예훼손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하는 콘텐츠들을 담고 있다. 실업자, 비정규직으로 넘쳐나며 빈부격차가 세계1위를 향해 치닫는 현실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워야 할” 이름을 청년 세대가 “헬조선”(지옥민국)으로 부르듯이 “윤지오 이모부”의 동영상들 때문에 우리는 가족이라는 “포근해야 할” 이름이 얼마나 잔인하고 흉포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가부장적 가족은 “옳은 길을 가르치겠다”며 가부장이나 그 대행자들이 가족구성원들에게 무작위 린치를 가해도 공적 제재가 잘 통하지 않는 낡은 조직적 유제이다. 민주주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조직형태가 바로 가부장적 가족이다. 게일 루빈은 <일탈>(현실문화, 2011)에서 결혼과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친족구조의 형성이 ‘여성 거래’를 만들어 왔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성접대’의 기원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 제도 그 자체에 놓여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윤지오와 3촌 관계인 “윤지오 이모부”가 자신의 조카 윤지오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인용들 중의 하나가 다음의 것이다. 여기에 인용된 진술문을 읽을 때, 묻는 사람이 윤지오에게 장자연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윤지오의 경험에 대해 묻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것은 2010년 6월 25일 윤지오의 진술문으로부터의 인용이다. 이 인용을 “윤지오 이모부”는 다음처럼 단정적으로 해석한다.

윤지오의 위의 진술이 장자연에게 불리한 증언이었고 장자연 유가족이 패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자신의 조카인 윤지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한 해석이고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해석이다. 바로 이런 해석이 가해자들과 권력자들의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는 윤지오의 증언신빙성을 떨어뜨려 그들을 “법 위의 세력”으로 재옹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5월 20일 게시되고 있는 이 유튜브 동영상의 주장은 그 내용에서 보면 약 한 달 전인 2019년 4월 17일 변호사 박훈이 올린 페이스북 주장의 동영상 버전이고 그 내용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는 박훈 변호사의 주장이 어떻게 윤지오의 진실을 가려버렸나?”(http://amelano.net/?p=578)에서 박훈의 주장이 얼마나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주장이었는지에 대해 비판했다.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와 보면 “윤지오 이모부”의 주장은 인용된 그 문답에 대한 잘못된 독해이며 사실에 대한 곡해이고 윤지오에 대한 무고이다. 왜 그런가?

“윤지오 이모부”의 유튜브 속도와 그가 짜놓은 프레임을 따라가지 말고 질문과 답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자. 정확한 이해를 위해 복자(覆字)는 벗기도록 하자.

“문: 증인은 피고인 김종승이 부르는 자리에 갔다고 하였는데 피고인 김종승이 증인에게 술을 따르라거나 성접대를 하라고 강요한 사실이 있나요.

답: 그런 것은 없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게 된 것도 강압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증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윤지오다. 질문자는 윤지오에게, “김종승이 당신에게 술을 따르라거나 성접대를 하라고 강요한 사실이 있나요?”라고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장자연에 대해서 답할 자리가 아니라 윤지오 자신의 경험에 대해 답해야 할 자리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강압이 없었다“고 답한다. 그런데 박훈과 “윤지오 이모부”는 이것이 윤지오가 마치 장자연의 경험에 대해 진술한 내용인 것처럼 곡해한다. “장자연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조금 더 나가보자. 여기서 질문자는 술을 따르라(술접대)와 성접대의 차이를 무시하면서 그냥 나열적으로 묻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해야 한다. 

윤지오가 성접대를 강요받은 사실이 있는가? 윤지오는 출판물로 된 <13번째 증언>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여러 차례의 증언에서 일관되게 김종승으로부터 성접대를 자신이 강요받은 적은 없다고 진술한다. (증언에 따르면 오히려 성접대 제안은 더콘텐츠를 나온 후, 모 드라마 제작자로부터 은밀하게 받은 바 있다.) 그러므로 윤지오가 강압적으로 성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유불리를 따진 이해타산적 진술이 아니다. 

박훈과 “윤지오 이모부”는 이 문답에서 윤지오가 가해자 편을 들었다고, 즉 장자연과 유가족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질문자가 윤지오의 경험을 묻는 이 문답 과정에서 윤지오가 장자연과 그 유족에게 유리하도록 “자신이 강압적으로 성접대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어야만 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것을 시간을 무시하고 대입시켜보면, 윤지오가 위증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훈과 “윤지오 이모부”가 윤지오에게 위증교사(僞證敎唆)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정황이다.

다음으로, 술을 따르라고 강요받은 적 없다는 말(‘그런 것은 없다’)은 말은 어떤 의미인가? 윤지오는 2009년 7월 8일 진술에서 김종승이 직원을 폭행하는 것을 보았고, 술자리에 40여회 정도 술자리에 불려나간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자신은 술접대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나갔다고 진술했다. 장자연도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표정이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윤지오는 그것이 김종승의 직접적 강압(폭언, 폭행, 협박)이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미 한 번 인용한 적 있지만 중요한 대목이므로 다시 한 번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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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오의 진술 취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종승은 술접대 자리에 나오라면서 자신을 폭언하거나 폭행하지는 않았다. 즉 강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자리에 억지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윤지오는 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제가 소속사와 계약이 되었기 대문에 나가지 않으면 피해가 올 것 같아 참석한 것”이다. 윤지오는 계약에 의한 경제적 압력폭언, 폭행, 협박과 같은 인신적 강압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맑스가 자본주의적 강제와 전(前)자본주의적(노예제적, 봉건적) 강제를 구분할 때 사용한 개념범주이기도 하다. 강탈을 위해 전자본주의에서는 인신적 비경제적 강제가 사용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강제가 사용된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박훈과 (정치적 경향으로는 거의 박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윤지오 이모부”다.

유가족을 위해서는 윤지오가 2010년의 진술 문답에서 “강압에 의해 술접대를 받았다”고 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박훈과 “윤지오 이모부”의 사고는 경제적 압력과 인신적 강압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윤지오에게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즉 경제적 압력이 있었으니 인신적 강압이 있었던 것이라고 진술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윤지오에게 결과적으로 위증을 교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윤지오는 이들보다는 사태를 훨씬 더 명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자신이 본 바의 사실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진술한다.

그 진술이 정말 장자연에게 불리한 진술이었고 장자연 유가족이 패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인가?

1심 판사는 윤지오의 진술로부터 ‘김종승이 장자연을 폭행 협박하여 식사나 술자리에 참석하도록 강요하였다거나 술접대를 강요하였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성매매를 알선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생각을 끌어냈고 이 이유로 성매매 알선에 대해 혐의 없음과 불기소 처분을 하고 욕설과 폭행만 인정해 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박훈이나 “윤지오 이모부”가 말하는 유가족 측의 패소가 아니라 부분승소다.)

물론 불만스러운 판결이다. 그러나 판사의 그러한 판결과 처분을 윤지오의 진술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윤지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술했다. 이 진술은 2009년에서 2010년까지 큰 흐름에서 일관된다. 이 진술로부터 어떤 판결, 어떤 처분을 이끌어내는가는 판사의 법률적 판단과 사법의지(한국의 경우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조항에 따라 법관의 주관적 판단에 상당한 여지를 허용하는 국가이다.)에 달려 있다.

1심 판사는 이러한 진술로부터 술접대, 성접대 강압에 대한 무혐의라는 판결을 이끌어 냈다. 만약 1심 판사가 피고 김종승에 대한 처벌의지가 있었다면 당시 노동계약의 불공정성을 상세하게 진술한 위의 2009년 윤지오의 진술과 2010년 성상납 리스트에 대한 진술(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한다)로부터 김종승과 장자연 사이의 노동계약의 불공정성을 확인하고 이 불공정노동계약으로 장자연이 술접대와 성접대를 사실상 강요 당했음을 판시하면서 장자연이 당한 피해에 대한 높은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심 판사는 윤지오의 진술로부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구절을 뽑아내 명백하게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내렸다.

이러한 점은 이 사건의 2심 판결이 1심 판결을 뒤집는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 다음에 이 사건 2심 판결 내용에 대한 5년전의 보도기사가 있다.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장자연씨(사진)가 소속사 대표로부터 접대를 강요받은 사실이 민사소송을 통해 법원에서 처음 인정됐다. 서울고법 민사합의10부(김인욱 부장판사)는 장씨의 유족이 소속사 대표였던 김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는 유가족들에게 24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12일 밝혔다. 신인배우였던 장씨는 “연예계 생활이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씨가 숨진 뒤 그가 성상납 등을 강요받았다는 내용의 ‘장자연 문건’이 유출됐고, 장씨의 가족들은 김씨가 장씨에게 술자리 접대 등을 강요하고 수차례 폭행하며 욕설을 한 것이 자살 원인이 됐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욕설과 폭행만 인정해 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재판부는 접대강요까지 인정하며 배상액을 높였다. 재판부는 “장씨가 접대장소에 나간 것은 김씨의 요구나 지시에 의한 것이지 장씨의 자유로운 의사만으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장은교 기자, 경향신문, 2014.10. 12일)

2심 재판부가 접대강요를 인정하는 근거는 윤지오의 2009년 7월 진술내용에 의거하고 있다. 윤지오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접대장소에 나갔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나갔고, “가기 싫어도 계약서를 작성할 때, 모든 시키는 일은 해야된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간 일이 더 많습니다”, “전속 계약서가 없었다면”,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뒤로 미뤄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있다. 유가족이 제기한 장자연 관련 성매매 알선(성상납, 성접대 강요) 혐의와 관련하여 윤지오가 동일한 진술조서에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윤지오의 진술이다.

윤지오가 이 증인신문에서 “사람별로 피해사실이 적혀 있었나요?”라는 판사의 물음에 “피해 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성함과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고, 어떠한 장에는 성함만 기재되어 있으면서 어떠한 언론사에 누구, 어디 무슨 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박훈과 “윤지오 이모부”가 술접대와 성접대(성상납)에 대한 강압을 윤지오가 부인함으로써 가해자를 편들었다는 그릇된 해석을 끌어내는 바로 그 진술서에서임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런데 1심 판사는 논외로 하고 오늘날 변호사인 박훈, 윤지오의 삼촌인 이모부가 이 명백한 진술을 무시하고 윤지오를 비난하기에 급급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윤지오가 거짓말쟁이라는 선입견(어쩌면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관념일지도 모른다. 관념은 이해관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즉 눈에 낀 백태(白苔) 때문에 장자연 리스트(리스트 증언조서)에 관한 윤지오의 증언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지오는 자신이 성접대(성상납)을 강압받은 바는 없지만, 장자연이 “성상납을 강요 받았다”고 쓴 장자연 리스트(리스트 증언조서)를 보았다고 함으로써 장자연에 대한 성접대 강요있었음을 증언했다. 윤지오는 결코 장자연이나 장자연의 유가족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리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 주장의 영향에 좌우되는 사람들이 윤지오에게 어떤 식의 비난을 퍼붓는가? 하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윤지오가 성접대에 대한 김종승의 강요가 없었다고 진술하여 장자연과 유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판결을 가져온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지오로부터 증언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오는 술책이다.

이 비난과 정반대의 또 하나의 비난이 있다. 윤지오가 장자연의 (강요된) 성접대 사실은 인정하고 자신은 성접대를 강요받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고인이 된 장자연과 그 유가족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비난은 윤지오가 아프리카 방송을 통해 “음탕한” 방송을 한 BJ였음을 보여주려는 추악한 사이버행동들에 동기를 부여한다. ‘너 장자연과 마찬가지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여자는 다 똑 같애!”라는 성차별, 인종차별로 나아가며 이러한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관념에 근거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지는 것이 강간, 특수강간, 강간치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메커니즘이다. 이것이야말로 윤지오를 모독할 뿐만 아니라 고인이 된 장자연을, 그리고 모든 여성을 모독하고 남성을 짐승으로 만드는 논리가 아닌가?

이 두 비난을 종합해 보면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윤지오가 성접대에 대한 강요를 부인했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접대에 대한 강요를 인정했다고 비난한다. 정신병리학에서는 이처럼 상반되는 요구나 메시지를 통해 상대방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구속하는 질병을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구속 증상을 김수민의 인스타그램과 그 댓글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윤지오의 지성적 명민함과 “영리함”(smartness)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자신들의 정신적 나약함으로 인한 환상들을 윤지오에게 투사하는 것 이상일까? 한국의 주류 언론들 대부분의 정신상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에 대한 윤지오의 항변에 대해 생각한다.

후원금 집단반환소송 움직임과 관련하여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나는 한 번도 돈을 달라고 구걸하거나 협박한 적이 없다
  2. 후원계좌를 열어달라고 제발 열어달라고 무엇이라도 돕고 싶다고 누차 거듭 말씀 하셨던 분들은 내가 아닌 시민 여러분이었다.
  3. 현재까지 모금되어진  두 번의 후원금은 내 의견이 아니었다. 후원금에 관해 누차 고민을 해도 내가 함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고 여러 차례 그러한 입장을 말씀드렸다.
  4. 그 후원금조차 나는 한 푼도 안 썼다.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본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해 달라고 캐나다에 있던 나를 한국으로 부른 것은 대한민국국민이고, 나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증언할 수 있도록 경호를 위한 후원을 하게 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대한민국국민이고, 후원통장을 개설하도록 조언한 것도 내가 아닌 대한민국국민이다. (참고로 후원통장 개설은 윤지오의 안전에 대해 진실로 걱정을 하고 있던 고발뉴스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를 후원해준 그 국민들이 마치 채권자처럼, 그리고 내가마치채무자인것처럼 후원금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후원금은 돌려줄 의무가 있는 돈이 아니다. 빚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입금된 후원금 중의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에게 반환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거짓목적으로 당신들을 기망하여 후원금을 걷음으로써 돈벌이를 했다’는 이유로 가해져 오는 반환소송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 나는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지상의 빛>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싶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은 나에게 약주고 병주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모독하고수치스럽게하는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빛> 굿즈 제작 사업의 강제중단에 대해서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언니를 추모하는 굿즈가 아닌 ‘제5대 강력범죄’에 속하지 않아서, 보호시설도 어떠한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제2의 피해자, 목격자, 증인을 위해서 실질적인 보호시설 경호 인력 생활비 등 도움을 드리고자 제작하려 했다.
  2. 이런 굿즈를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둥 말도 안되는 모함과 욕설과 증오가 가득 섞인 저주를 퍼부어댔다. 굿즈는 제작조차 되지 못했고 당연히 판매는 되지도 않았다.
  3. 그런 내가 왜 사기꾼, 범죄자 또 저도 모자라 아무런 죄도 없는 저희 엄마는 공범이라는 발언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역시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지상의 빛>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 목격자, 증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했다. 이 비영리단체의 기금 안정성을 위해 굿즈 제작 판매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굿즈 판매를 ‘시체팔아 돈번다’고 모함하고 욕설하는 또 다른 국민들때문에 굿즈 제작은 포기되었고 판매는 물론 되지 않았다. 내가 범죄자, 사기꾼인가? 아니면 나를 사기꾼, 범죄자로 모는 당신들이 사기꾼이고 범죄자인가? 아무 죄 없는 나의 엄마를 공범으로 모는 당신들이 바로 범죄혐의자이지 않은가?’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윤지오의 항변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를 불러 위험한 증언대 위에 세운 후, 증언이 끝나고 나서는 보호는커녕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나아가 윤지오에게 사기, 명예훼손, 표절 등 닥치는 대로 범죄혐의를 씌우고 있다. 인간적 성찰은 온데간데 없고 사법주의가 판을 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민을 앞세워 소송전쟁을 시작한 변호사 박훈의 책임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윤지오의 과거 삶으로부터 특정한 이미지를 문맥 밖으로 추려내 타락하고 음탕한 몸파는 여자라는 식의 여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계급차별적인 이미지로 조작하고 이것으로 윤지오를 집단학대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것과 다름 없는 짓을 대한민국 국민이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다. 이순간대한민국이라는국가공간은 ‘승리의단톡방’과본질에서전혀다를것이없다. 

또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버젓이 걸어놓고 실제로는 어떤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심지어 소송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윤지오를 범죄자로 단정하여 단죄하고 희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입증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혐의를 만들어 윤지오에게 덧씌우고는 윤지오를 범죄자로 몰면서 이제 증언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는 이 모순에 찬 광기에 대해 성찰하고 윤지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증언자를 검증해야겠다면 그 전에 검증에 나설 국민들이 제대로 된 국민인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인지부터 검증해보는것이 절실하다.

물론 이러한 광기의 배후에 장자연을 죽게 만든 바로 그들, 정치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 들의 음험한 지배야욕과 지배계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야욕과 계략에 이끌리고 휘둘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 자신의 자기결정에 따른 사고와 행동을 면책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금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위선자-국민, 사기꾼-국민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기모순일 뿐만 아니라 헌법위반 행동이며 그 자체로 범죄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지오에게 진실로부끄럽고죄스러우며 대한민국을 위선자의 나라, 사기꾼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금할수없다. ‘촛불정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아직나라가아니다. 나라다운나라는누가어떻게세울것인가?

통계와 경험담이 뒷받침하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과 신빙성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13.04.10일자 <일요신문> [제1091호] 김다영 기자의 기사는 ‘연예인이 직접 전하는 성상납 실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부제는 “병아리 땐 ‘데뷔’가, 뜨면 ‘스폰’이 미끼”로 되어 있다. 이미지로는 고 장자연 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노리개>의 스틸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성 연기자의 45.3%가술시중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고, 60.2%는성상납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31.5%는성추행, 6.5%는성폭행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수치는 지난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여성 연기자 111명과 지망생 약 240명, 연예산업 관계자 11명 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다. 여성 연기자의 절반 이상이 성상납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53676, 강조는 인용자)

윤지오는 술시중이 본인(과 장자연)이 직접 그리고 여러 차례 강요 당했던 경험이라고 진술했다. 여성 연기자의 거의 절반(45.3%)이 이런 강요를 겪는 것으로 나타난다. 윤지오는 <13번째 증언>에서 자신이 성상납 제의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15장 ‘끔찍한 제안’에서 어떤 드라마 제작자로부터 성상납 제안을 받은 경험을 자존감을 파괴하는 경험으로 서술한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사서 고생하며 긴 시간을 뺑뺑 돌아가려 하냐? 신호를 어긴다고 뭐라고 나물할 사람 하나 없다. 너는 기회를 잡은 거다. 이런 제안을 받고 싶어서 나를 만나려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얼마나 유명한 배우들이 날 만나고 싶어 하는데.” 계속 되는 그의 이상한 제안은 너무나 불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쾌감을 넘어 이런 일을 당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 언니 생각이 났다. “얘기야, 넌 정말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183)

여성 연기자 60.2%가 이런 유형의 성상납 제안을 받는다는 통계는 여성 연기자들의 자존감이구조적으로파괴되고있는현실을 보여준다. 연기노동자들은 가진자들, 힘센자들의 먹잇감으로 위치지워져 있다. 

윤지오는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희천이 장자연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윤지오의 증언 덕분에 조희천에 대한 기소가 이루어지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고 전국적인 촛불과 미투 봉기가 있어야 했으며 정권이교체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성추행을 여성 연기자의 31.5%가 겪는 것으로 나타난다. 

윤지오는 취할 만큼 술을 마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장자연의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을 본 경험을 토대로 장자연이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약을 섭취당하고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문건작성 시에 장자연이 성폭행 당했다고 썼지만 자신이 지우라고 했다는 유장호의 비공식면담 진술, 이미숙이 자신에게 김종승을 혼내 달라고 압박하면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는 감독 정세호의 진술 등이 윤지오의 증언을 뒷받침해준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이 있”다는 식의 기묘한 변론술로 드러난 문제를 회피했지만 통계는 여성 연기자의 6.5%가 성폭행 피해를 당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성 연기자들의 성을 누가 착취하고 여성 연기자들을 폭행하는가? 윤지오는 장자연의 리스트 증언조서에 정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연예계 권력자들의 이름이 쓰인 페이지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의 일요신문 기사는 연예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이 증언을 뒷받침해 준다.

김현아는 매니저로부터 애인이 되는 조건으로 스폰서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스폰서가 돈/권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을 것이다. 가수 아이비는 ‘만나만 줘도 3억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함소원은 백지수표를 제안 받았다고 말했다. 정세희도 재계인사로부터 하룻밤 대가로 백지수표를 제안받은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전 대기업 법무팀장 출신인 어떤 변호사는 해당 대기업 특정 부서 관계자들이 비자금을 가지고 연예인 윤락을 한다고 고발했다. 돈이 아니면 신인데뷔, 배역(캐스팅)이 ‘미끼’가 된다. 

이 경험담은 잠입취재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2013년 3월 29일 방송된 연예계 성접대 실태에 대한 한 종편채널의 취재방송은 이렇게 요약되고 있다.

“제작진은 연예기획사 연습생으로 활동했던 한 여성을 통해 실태에 대해 파헤쳤다. 해당 여성은 “당시 미성년자였지만 술자리에 나오라는 제의를 수차례 받았다. 실제로 연습생을스폰서에게제공하는브로커로전락한기획사도 있다”고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또한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모델과연예인, 연습생을스폰서와연결시켜주는브로커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한 브로커는 “연예인 지망생, 예술대학 재학생은 물론 유명 홈쇼핑이나 대형기획사 소속 연습생의 프로필도 확보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또 “이들과의 만남은 1회에 평균 25만원 선이며 나이가 어리거나 대형기획사 소속인 경우 80~100만 원 정도”라고 덧붙였다. 이어 “하루 전 예약은 필수며 자신들의 고객리스트에 저장돼 있어야만 만남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3/03/243540/)

연예노동자와 자본가/권력자를 브로커와 기획사가 매개하는 성착취와 성폭력의 구조가 구축되어 있다. 버닝썬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마약은 이 구조를 가동시키는 윤활유다. 이것이 인지자본주의의 핵심분야인 연예산업의 적나라한 실태이다. 이 연예산업은 한류라는 이름의 준국책산업으로서 세계시장에 자신을 자랑스레 내놓고 자랑하고 있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죽음을 가져온 조건과 원인에 대한 증언자이면서 한류로 유명한 대한민국 연예산업의 민낯에 대한 증언자이다. 윤지오의 증언들은, 장자연의 죽음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 없이 어쩌면 더 심각하게 계속되고 있는 성착취와 성폭행 실태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 통계에 의해, 그리고 연예인들의 직접 경험담에 의해 그 진실성신빙성이 모두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들임이 분명하다. 증언과는 무관한 인신공격을 통해 그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성착취와 성폭행을 수행한 과거의 가해자 집단, 지금도 성착취와 성폭행을 자행하고 있는 현재의 가해자집단, 그리고 성착취와 성폭행의 의지/욕망을 가진 예비 가해자 집단이며 대개는 재력이나 권력 혹은 생산과정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생명들을 착취하는 자들(학술용어로는 ‘부르주아지’들)이다. 이들을 위해 일선에서 증언 신빙성을 격하시키는 행위를 직접 수행하는 것은 그 가해자 집단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예속된 끄나풀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