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개념의 가해자중심주의적 전도

2009년 대한민국 경찰은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았던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의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를 ‘적색수배’하기는커녕 부실한 조사로 덮어 버렸다. 2018년부터 시작된 과거사 재조사조차도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대통령의 엄정조사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가 보여주는 대한민국 수사기관(검경)의 적나라한 실태가 이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찰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결과가 발표된 지 경우 반 년 만에, 마치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도 한 듯이, 바로 그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에 대해 증언한 증언자를 도리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의 혐의자로 적색수배 요청하고 ‘엄정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2차, 3차, n차 가해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도대체 증언자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들이 무엇인가? 경찰에 따르면 그것은 ‘사기와 명예훼손’이다. “명예훼손과 사기 혐의 모두 인터폴 자체의 적색수배 요건인 2년 이상 징역에 포함되는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기와 명예훼손 혐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그 행동의 범죄화를 통해 사법권력이 사람들에게 던지고자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사기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증언하는 동안에 혹은 그 이후에 신변위협이 있었다고 말했고 당신의 지지자들로부터 경호비와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으로 1억 3천여 만 원의 돈을 모금했다.”가 그 혐의의 지시내용이다. 이것이 범죄혐의라는 주장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당신이 증언자라면, 기자가 당신의  소재지를 추적하며 가해자 입장에서의 질문을 퍼붓더라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그런 것을 대중 앞에서 발설하면 안 된다. 국가가 당신을 증언자로 불렀더라도 증언자를 보호해 달라고 국가에 요구해서도 안 된다. 증언자에게 닥쳐오는 신변위협과 고통을 달게 받아 들여라.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경호비를 보내겠다고 아우성을 치더라도 결코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계좌번호를 공개해서 그곳으로 후원금이 입금되면 후원자를 기망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 즉 사기죄로 단죄될 수 있다. 혹시 그렇게 당신에 대한 연대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 증언을 위한 경호비로 사용하여 신변안전을 도모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의 말을 의심하라. 당신을 지지한다,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믿지 마라. 증언에 대한 지지자가 당신의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당신에게 경호비를 후원한 사람이 후원금반환소송을 제기하여 당신의 사기혐의를 뒷받침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원금 외에 고리대를 요구하는 사채업자처럼 돌변할 수 있도 있다. 후원회비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말라. 증언자 피해자 목격자가 겪는 고통에 무관심하라.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라. 당신이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후원회비를 모집하게 되면 언제든지 그것이 기부금품법 위반의 대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무엇보다도 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그들이 성추행을 하건 성폭행을 하건 오직 방관하라. 그것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사회적 중요범죄’로 지목될 수 있다. 권력자들 앞에서 침묵하라. 그들에게 굴종하라. 그것이 신변위협을 받지 않고 당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며 적색수배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둘째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김수민 작가를 ‘이수역 사건 2차 가해자’라고 말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인물을 특정하여 제3자가 들을 수 있는 공연성의 환경에서 그를 비난하면 명예훼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흔한 사건으로서 ‘사회적 중요범죄’로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정치인’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한 후 홍준표 의원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로부터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으니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즉각 당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홍준표 의원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고 그가 당신을 범죄 혐의로 고발했다는 것은 당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이 설령 장자연 리스트에서 ‘홍준표’라는 이름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름을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시민단체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권력자들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받아들이며 사법적 보복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범죄가 될 수 있다. 권력자들의 탈법이나 부패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단죄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이렇게 ‘사회적 중요범죄’로 규정된 두 가지 혐의는 가해권력자들의 불의에 대해 증언을 하지 않도록, 침묵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 온다.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이 명예훼손죄로 제소될 수 있으며 후원금 모금을 통해 가해권력자들의 보복으로부터 증언자의 신체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사기죄로 제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 실현의 노력이 사법에 의해 부정의로, 범죄로 정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기자, 작가와 같은 전문가들,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 같은 언론사들, SNS 계정주 같은 시민사회 행위자들만이 아니라 경찰, 검찰, 법원, 정당, 그리고 국회의원 같은 국가권력의 기구들이 가해권력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증언자의 범죄화’를 위한 총력전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맥락에서 보면 “경찰청 자체 기준에 비춰 봐도 윤씨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안인 만큼 중요사범으로 볼 수 있다”는 경찰관계자의 설명은 증언자의 고립과 범죄화를 위해 가해권력이 주도하는 이러한 전 사회적 총력전의 하나의 전술단위처럼 들린다.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촛불시민들은 윤지오가 증언한 권력형 성폭력 범죄 혐의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수사와 재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했다. 그런데 경찰은 지난 10년간 이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 결과가 2009년 KBS의 장자연 문건 보도 이후의 수사에서 성범죄를 비롯한 다양한 범죄 혐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가해권력자들이 무혐의 처분된 것이고 2018년에 재개된 과거사 재조사가 혐의자들에 대한 재수사로 연결되지 않게 된 것이다. 촛불시민의 요구와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가 행한 증언 자체와 그에 따른 부대 행위들(후원금, 숙소제공 등)을 ‘사회적 파장이 큰’ 범죄 혐의로 정죄하면서 지난 수 개월간 그에 대한 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해 왔다. 그 결과가 윤지오에게 열 가지 이상의 고소고발장이 날아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경찰관계자는 정확히 가해권력자들과 동일한 입장과 방향에서 윤지오의 증언행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범죄화하라는 가해권력자들의 시각과 요구를 고스란히 ‘경찰청 자체’의 시각과 요구로 대변하고 있다. 요컨대 경찰 관계자가 말하는 범죄 혐의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가 촛불시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내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탈진실 시대 진실의 운명: 범죄로 되는 증언, 수배자가 되는 증언자(2)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라는 규율장치의 등장과 경찰의 범주 혼동

11월 6일 적색수배 조치가 내려진 후 있었던 여성단체의 항의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 윤지오에게 씌워진 혐의는 인터폴 적색수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윤지오도 이에 대해 인터폴 적색수배는 강력범죄자로 5억원 이상의 경제사범, 살인자, 강간범 등에 대해서 내려지는 것인데 이러한 적색수배를 자기한테 내린 것은 불법적인 것이며 자신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더불어서 적색수배까지 내리면서 자신을 송환받으려 하는 것이 ‘공익제보자 보호법’과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항의에 대해 경찰이 언론 앞에 내놓은 대답은 이러하다.

윤씨는 캐나다에 거주해 수사공조가 필요하고, 명예훼손과 사기 혐의 모두 인터폴 자체의 적색수배 요건인 2년 이상 징역에 포함되는 범죄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경찰 관계자는 또 “경찰청 자체 기준에 비춰봐도 윤씨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안인 만큼 중요사범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명예훼손과 사기 혐의가 적색수배 요건인 2년 이상 징역에 포함되므로 윤지오가 적색수배 대상이라면 적색수배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우선 명예훼손은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범죄로서 일상에서 누구나가 언제든지 그 범죄 혐의를 뒤집어 쓸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명예훼손 혐의는 감기 바이러스처럼 우리 모두의 주변에 산포되어 있다.

사기는 어떨까?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기혐의는 최대 1억 3천 만원을 넘지 않는다. 이것이 적색수배 대상이라면 50억원 이상의 다액경제사범을 대상으로 한다는 규정은 왜 넣어 두었는가? 이런 식의 답변은 경찰과 인터폴이 적색수배 제도를 통해 시민과 대중 일반을 잠재적인 강력범죄자로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눈길을 끄는 답변은 후자, 즉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안인 만큼 중요사범으로 볼 수 있다”는 답변이다. 이것은 인터폴 적색수배의 또 다른 사유에 “수사관서에서 특별히 적색수배를 요청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범”이 포함되어 있음을 근거로 한다. 이호영 변호사도 “흔히 적색수배라고 하는 것은 사형, 무기 등 중범죄자 그리고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이상의 어떤 조직폭력 사범 그리고 특정 금액 이상의 고액 경제범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발령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윤씨의 그런 말은 일정부분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또 하나 사유가 뭐가 있냐면 기타 수사 관서에서 특별히 적색수배를 요청하는 사안 이것도 적색수배는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사법경찰 기관에서 윤지오씨가 가지는 그러한 사회적인 파장이 되게 크기 때문에 윤지오씨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건 맞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적색수배를 요청을 했고 그에 따라서 적색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어서 윤지오씨가 다소 억울하다고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적색수배 자체가 불법적이거나 이렇게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찰의 답변과 이호영 변호사의 해설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 증언자가 일반적인 적색수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특별히” 윤지오 증언자를 적색수배 요청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요청에 따르는 판단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중요사범”이라고 본 것이다.

나는 여기서 경찰이 오히려 ‘중대한’ 범주 혼동, 범주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언과 범죄를 혼동하는 것이다.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재계 언론계 연예계 정치계 법조계를 망라한 모든 권력층의 부패와 성폭력 관행에 대한 기록인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이 가지고 온 사회적 파장은 분명히 컸고 증언이 지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는 이 큰 사회적 ‘파장’이나 높은 ‘수사요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으로 기소된 사람조차 1심에서 무죄 처분되었다.

경찰은 돌연 여기서 ‘수사 요구’를 가해 혐의자가 아니라 증언자에게로 돌린다.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다”는 사실을, 경찰은 윤지오의 “범죄”가 “사회적 파장이 크고” “윤지오”의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다”는 생각으로 바꿔치기 한다. 증언과 범죄, 증언자와 가해자를를 순식간에 대치하는 이 마술을 통해 적색수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윤지오 증언자의 “범죄혐의”가 실제로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요구가 높은 혐의인가? 보복우려가 높은 증언을 한 증언자에게 뜻있는 사람들이 경호비 후원을 해 준 것이 정말로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요구가 높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혐의”에 해당하는가? 증언자 목격자 피해자 보호를 위해 만든 비영리단체에 뜻있는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보내 준 것이 정말로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혐의”에 해당하는가? 카톡 친구였던 김수민 작가가  윤지오를 “고인을 이용한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윤지오 증언자가 김수민 작가를 “이수역 사건 2차 가해자”로 말하면서 쌍방간 명예훼손으로 제소된 혐의들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요구가 높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혐의”에 해당하는가?

상식적으로는 결코 “그렇다”고 답할 수 없을 이 질문들에 경찰이 “그렇다”고 답하고 또 그에 따라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특별히”(상식에 비추어서는 ‘과잉되게’) 요청하는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혐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터폴은 윤지오에 대한 적색수배 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지난 수개월 동안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님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연구하다가 윤지오 님의 증언이 진실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언자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윤지오 님의 증언 신빙성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 부당함을 느끼고 있던 중 오늘 아침 인터폴이 윤지오 님을 적색수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대한민국이지만, 한국 경찰의 인터폴 적색수배 신청을 윤지오 님이 한국으로 들어오도록 압박하기 위한 절차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고 장자연

2009년 3월 7일 신인배우 장자연 님이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장자연 님은 자신은 힘센 사람들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 자신은 힘이 없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내용의 애절한 문건과 재계 정계 언론계 문화계 권력자들의 이름이 담긴 리스트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 문건에는 자신을 협박하고 폭행한 사람들, 술접대를 강요한 사람들, 성상납을 강요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경찰은 이 죽음을 단순변사로 처리했습니다.

경찰은 KBS에서 문건을 입수하여 보도한 이후에야 여론에 떠밀려 재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재수사에 착수한 후에도 경찰은 권력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수사하기는커녕 장자연 님이 허위로 문건을 작성하여 소속사를 옮겨 돈을 벌려고 했다는 시각에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문건에 등장하는 조선일보는 갖은 방법으로 수사를 방해했고 경찰은 방상훈 사장을 황제를 대하듯 형식적으로만 수사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권력자들은 단 한 사람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장자연 님이 왜 죽게 되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장자연 님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되풀이 되지 않을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증언

윤지오 님은 장자연 님의 후배이고 동료배우입니다.

윤지오 님은 소속사 더콘텐츠에서 장자연 님과 함께 활동했고 권력자들을 접대하는 술자리에 장자연 님과 수 십 차례 동행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장자연 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윤지오 님은 유가족보다 먼저 봉은사에서 장자연 님이 남긴 문건과 리스트를 읽었습니다.

봉은사에서 태워진 리스트는 KBS에 입수되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분들이나 유장호 대표도 편지글 형식의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를 증언했지만 윤지오 님은 그 장자연 리스트의 내용에 대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유일한 증인입니다.

윤지오 님은 2018년까지 13번에 걸쳐 이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기관인 과거사조사위원회가 불러서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와서 또 세 차례 증언했습니다. 

윤지오 님이 무엇을 증언했던가요?

(1)윤지오 님은 소속사 대표가 연예 노동자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착취했다고 말했습니다.

(2)윤지오 님은 조선일보 기자가 배우의 술 접대를 받고 심지어 그 배우를 성추행했다고 말했습니다.

(3)윤지오 님은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 재계, 법조계의 권력자들의 이름이 장자연 님이 남긴 리스트에 적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4) 윤지오 님은 그 리스트의 이름들 중에 기억이 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방 씨 성의 세 사람과 이름이 특이한 국회의원의 이름도 기억난다고 했습니다.

(5)윤지오 님은 장자연 님이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이후에 캐나다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이것이 누군가가 몰래 마약을 넣은 술을 먹고 그것에 취하게 된 모습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증언했습니다.

(6)윤지오 님은 장자연 님이 죽은 직후 봉은사와 유장호 대표가 입원한 병원에서 국정원 직원과 만났고 이후에 통화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윤지오 님의 증언은 이렇게 소속사 대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권력층의 관련자들에게 민감한 사안들입니다. 그들의 부패와 탈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형 성폭력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인정한 것처럼 이 증언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에 대한 신고”입니다.

3. 마녀사냥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증언을 시작하기 전부터 윤지오 님에게는 인스타그램 DM으로 ‘공항에 도착하면 칼로 찌르겠다’거나 ‘손톱을 드릴로 뚫고 싶다’는 식의 끔찍한 문구들이 날아 들었습니다.

증언 중인 4월 7일에 뉴시스는

(1) 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 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 중이다 

(3) 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 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 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 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고 이것은 이후 윤지오 님에 대한 음해와 마녀사냥의 기본 프레임이 되었습니다.

증언을 끝마친 4월 16일에 김수민 작가가 뉴시스와 거의 동일한 시각으로 윤지오 님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4월 26일에는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는 김대오 기자의 주장을 근거로 박훈 변호사가 윤지오 님의 증언이 거짓이고 사기라며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오 기자는 10년 전에 “자신은 장자연 문건의 [널리 알려진] 단 한 구절 외에는 본 적이 없고 그 문건의 내용은 KBS 보도를 보고 대강 알게 되었다”고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진술한 사람입니다.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근거는 리스트가 있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4. 여론폭탄

윤지오 님이 캐나다로 귀국한 후 더 많은 고발이 이어졌습니다. 

고발고소는 지금까지 열한 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특히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언을 하여 신변위협을 꾸며내고 후원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신한은행 후원금은 윤지오 님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으로 겪을 수 있는 신변위협을 염려하여 뜻있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한 것이었습니다. 

국민은행 후원금은 비영리단체 <지상의빛>을 통해 “5대 강력범죄 외의 피해자, 목격자, 증언자들의 안전과 생활을 보호하라”고 국민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해 준 것이었습니다.

윤지오 님은 통장 공개를 통해 후원금을 사적으로 사용한 바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윤지오 님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마녀사냥 담론은 시민사회-언론-국가기관을 순환하면서 단단한 여론으로 굳어졌습니다.

이것은 윤지오 님만이 아니라 후원한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판단과 결의에 따라 증언자를 보호하기 위해 후원을 한 사람들을 “심각한 착오에 빠져 기망당한 사람”으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것은 뉴시스와 같은 언론사의 보도에서 시작되어 변호사의 고발로 이어지고 다시 SNS의 계정의 피드와 악성댓글 속에서 재생산되었습니다.

윤지오 님에 대한 이러한 비난과 음해는 다시 역으로 SNS 피드에서 출발하여 지식인들의 칼럼으로 되고 조선일보의 기사, SBS의 방송프로그램으로 증폭되었습니다.

마침내 이것은 경찰의 수사문건 속으로 흘러들어가 마치 증거자료인 것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증언자를 파괴하는 집단적으로 조작된 여론폭탄입니다. 이것은 힘없는 한 사람의 인격을 파탄내는 여론 집속탄에 다름 아닙니다. 장자연 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비난과 협박의 폭력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강한 여론폭력을 나약한 한 사람에게 퍼붓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론폭탄이 증언의 신빙성을 어떻게 떨어뜨리는지는 조희천 사건의 1심 무죄판결에서 확인되었습니다.

5. 경찰의 과잉대응

이 음해폭격으로 인해 윤지오 님은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장자연 사건의 후유증으로 오래 전에 자살기도를 한 바 있는 윤지오 님이 다시 사법공격과 여론공격의 트라우마로 심한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으로 불러온 증인이 지금 그 증언으로 인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불과 몇 개월 전인 3월 말에 ‘보복 우려가 있는 범죄 신고자에 대한 미흡한 신변보호조치’에 대해 윤지오 님에게 사과한 바 있는 경찰이 이제 윤지오 님에게 두 번에 걸쳐 체포영장을 신청해 발부받아 내고 그것도 모자라 여권무효화 조치를 외교부에, 적색수배를 인터폴에 신청했습니다. 인터폴 적색수배는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범죄와 폭력조직 중간보스 이상의 조직폭력범, 5억원 이상의 경제사범 등을 대상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윤지오 님을 대상으로 제기된 열 한 건의 소송 중 그 어느 것도 이런 강력범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찰이 왜 이런 과잉대응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호 기자는, 윤지오 님이 지난 10년간 경찰에게 불리한 증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경찰이 이런 과잉대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경찰이 증언자에 대한 보복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 혐오게임

실제로 우리는 윤지오 님을 사기꾼으로 만들어내는 여론조작과정에서 조선일보, SBS, 뉴시스, 머니투데이 등의 언론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언론사들은 윤지오 님이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한 인물, 술자리에서 윤지오 님을 만났거나 명함을 준 바 있는 인물 등이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언론사들입니다. 

윤지오 님의 증언에 대해 보복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추가 증언을 예방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언론들입니다.

지금 많은 언론들이 윤지오 님에 대한 이러한 보복사냥과 혐오게임을 지켜보면서 재미있는 게임을 즐기는 듯한 잔인한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윤지오, 인터폴 적색수배될까? 과연 강제송환 가능할까?” 식의 기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보도 태도는 국민들을 진실의 주체가 아니라 마녀사냥의 구경꾼으로 만드는 행태입니다.

7. 호소

기자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윤지오 님에 대한 세간의 음해를 받아쓰지 말고 진실을 파악해 보도해 주십시오. 근거 없는 마녀사냥에 동참하지 말아 주십시오.

경찰에 호소합니다. 윤지오 님에 대한 피의사실을 마구잡이로 공표하지 말고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조사해 주십시오. 국민의 공권력을 국민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 주십시오. 

경찰은 공황장애와 정신과 치료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에게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해서 한국에 건너와 조사를 받아야 한다, 오지 않으면 체포영장을 발부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는 무리한 요구입니다. 

조사를 건강회복 이후로 미루거나 원격 화상통신조사가 가능하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아무리 조사가 중요하다 해도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악성댓글이 설리를 죽게 만들었다는 각성이 전 국민적 수준에서 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각종 고소고발과 악성댓글만으로도 윤지오 님의 삶을 파탄내기에 충분합니다. 환자에 대한 경찰의 무리한 수사방식이 이에 더해 윤지오 님을 지금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해 주십시오.

윤지오 님을 강력범죄자처럼 각인시켜 사회로부터 인위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여권무효화 신청과 인터폴 적색수배 신청을 즉각 철회하십시오.

문재인 정부에 호소합니다. 

윤지오 님은 문재인 정부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청탁을 받고 한국에 와서 증언한 공익제보자입니다. 

공익신조자 보호법 제15조는 “① 누구든지 공익신고자 등에게 공익신고 등을 이유로 불이익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든지 공익신고 등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공익신고자 등에게 공익신고 등을 취소하도록 강요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익신고(증언)를 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윤지오 님은 너무나 큰 불이익을 겪고 있습니다. 

공익제보자에 대한 온갖 불이익 조치가 중단될 수 있도록 조처해 주십시오.

증언을 해 달라고 청탁한 후 범죄자로 만들어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정부로 역사에 남지 말아 주십시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공익제보자와 진실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인터폴에 호소합니다. 윤지오 님은 살인자가 아닙니다. 강도도 아닙니다. 강간범도 아닙니다. 폭력조직의 보스도 아닙니다. 5억원 이상의 경제사범도 아닙니다. 윤지오 님을 적색수배하는 것은 인터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조치입니다. 적색수배를 즉각 해제해 주십시오.    

윤지오 님을 고소고발한 시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제기한 고“고발을 취하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윤지오 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없는 연예노동자이자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 님을 권력투쟁의 희생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끝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자 『절대민주주의』의 지은이로서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여러 가지 동기에서 오도되고 날조된 주장들이 아니라 오로지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에 입각해서만 이 사태를 판단해 주십시오. 마녀사냥의 구경꾼으로 되는 것을 거부해 주십시오. 권력기관과 권력자들은 아래로부터 주권자 국민의 감시와 통제와 섭정이 없을 때에는 국민을 공격하는 사냥꾼으로 변하며 국민을 먹잇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 8일

조정환

국가와 기업에 대한 다중의 섭정을 위한 상상

공무원을 국민이 섭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무원이 국민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섭정이 정치적 과제로서 나타나는 것은 대의제가 과도한 나머지 공무원이 자립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 공무원이 주인인 공무원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민주제의 간접 민주제로의 대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왔다. 공직의 사유화와 권력화는 그것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래로부터 국민-다중의 섭정은 공직을 부름에 대한 응답, 즉 소명(Beruf)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유화된 공직을 다중을 공통화시키는 봉사활동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국민-다중의 권력에 봉사하는 서비스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배심제 하의 AI검찰’이라는 형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어 자본가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다.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위치지워지며 대다수 국민들은 기업 영역에서 주권을 잃고 노예로 전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 국민-노동자의 주권됨과 모순된다. 또 기업체제가 지배적으로 되면 국민-노동자는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성을 망각하게 되며 자신의 기관인 국가와 자신을 고용한 기업의 배신적 유착도 심화되게 된다. 대의제가 기업제와 동화되면서 정치적 대의자들이 기업주처럼 군림하고 국민이 노예처럼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주권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정치영역에서 국민-다중의 주권회복이 기업영역에서 노동자의 주권쟁취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업영역에서도 노동자-다중이 주인으로 될 때에만 다중에 의한, 다중을 위한, 다중의 정치/경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다중통제 하의 AI기업’의 형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영역의 공통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해방이 현재는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계화, 정보화, 자동화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경향이 그것인데, 노동(여기서는 ‘고용노동’을 지칭한다)과 소득을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결합시켜온 자본주의의 오랜 경향과 장치들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무소득, 저소득과 묶어 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고용노동=강제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삶정치적 활동은 노동으로 평가되지 않고 무상수취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소득 및 무조건적 보장소득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고용되어 노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소득 문제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활동은 기업적 고용세계 바깥에서도 전개되고 있고 기업들은 이 활동들을 외부효과로서 전유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없이 소득 없다’(예컨대 무노동무임금)는 관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노동자가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자유롭게 종사하면서도 그것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행복한 느낌으로 충실할 수 있을 때 국민과 노동자 사이의 현재의 배리현상(주인이 노예되는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삶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섭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업은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관이 아니라 (비)노동자-다중의 부름을 받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소명기관(Beruf-organ)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착취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 것과 국가가 권력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이다. 하나의 과정이란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섭정능력이 향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다중의 공통화 없이 국가와 기업의 공통화 없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섭정 능력을 위한 사유실험과 행동실험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그 성과들의 공통화-연결망(commoning-network)이 섬세하게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을 통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이 첫 걸음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의 분화,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한 관찰메모

  •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는 서초동과 여의도로 분산 개최되었다.
  • ‘분열’이 아니라 ‘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집회의 이슈와 강조점이 다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촛불은 반드시 단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화하고 분산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 연결되고자 한다면 분산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물론 현재는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전체 촛불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 9차까지의 서초동 촛불집회의 주최측을 자임했던 개국본이 10월 12일을 갑작스런 마지막 집회로 선언한 것이 이 경쟁적 분화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집회의 종료를 선언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암묵적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종료 선언이었고 이것이 촛불을 지속하자 하는 사람들을 별도의 경향적 세력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즉 서초동인가 여의도인가의 분화가 있기 전에 종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화가 있었다.
  • 북유게 사람들이 촛불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국이 사퇴한 날과 겹치는 월요일(10월 14일)이었다. 개국본이 여의도 촛불을 결정한 것은 수요일(10월 16일)이었다. 종료나 계속이냐의 분화가 여의도인가 서초동인가의 분화로 나타났다.   
  • 섭정의 관점에서 두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이유는 없다. 촛불다중에게는 두 주최측, 두 집회의 에너지가 사회개혁의 집합적 에너지로 공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두 집회의 공통점은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검찰이 범인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현존하는 검찰권력의 불법성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에 윤석열 수사, 구속 등 검찰총장에 대한 강한 사법적 압박 요구가 더해졌다.
  • 여의도 집회는 “공수처 설치”와 “응답하라, 국회” 등의 입법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서초동과 여의도의 뚜렷한 차이는 여의도에서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구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서초동 집회는 이전 9차 집회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국 수호’를 외치면서 조국을 이슈화했다. 여의도 집회는 ‘조국 수호’라기보다 ‘조국 계승’(수고했습니다) 쪽으로 초점을 옮기는 분위기였다. 서초동이 조국을 현재화한다면 여의도가 조국을 과거화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초동 집회보다 여의도 집회에 더 많은 사람(감으로는 약 1.5배~2배)이 모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여의도 집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고려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성별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여성이 주축이었다. 8대 2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반면 여의도 집회는 5:5로 동등하거나 6:4 정도로 남성이 더 많은 집회였다.
  • 세대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2~30대가 주축이고 여의도는 그보다는 연령이 더 놓은 세대가 주축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참가자들의 자유발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집회는 공연과 유명인사들의 연설 중심이었다. 
  • 서초동 집회에 비해 여의도 집회가 미디어 동원이 많았다. 여의도 집회는 스크린이 과잉동원되었다는 느낌이었다. 9월 28일의 과소동원과 대조되는 풍경. 전체적으로 너무 큰 마이크 소리로 집중이 어려웠다. 국회의사당역 출구의 포스트잇 시위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초동의 경우는 미디어 동원이 적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히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주요 슬로건을 담은 큰 깃발들 대오가 외곽을 오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 전체적으로 여의도 집회의 방식이 전통적 조직운동의 집회방식이라면 서초동 집회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킹 방식을 오프라인 집회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구심점을 이루면서 촛불다중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19년의 촛불집회는 개국본이나 북유게 등 개별 단체나 커뮤니티가 주최측이 되어 집회를 개시하고 다중들이 그것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최측의 정치적 색깔이 집회 전체의 색깔을 좌우할 수 있고, 주최측 간의 의견차이나 갈등이 촛불 다중들의 갈등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생산적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주최측이 뚜렷한 데서 오는 이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나타난다. 

검찰개혁의 발본화를 위한 조건: 2019년 9월 28일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검찰권력은 행정권력 중에서 군사권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전쟁을 통해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권력임에 반해 검찰권력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타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원칙적으로는 타국의 국민들을 겨냥하지만(전두환 시기의 군부에서 보듯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검찰권력은 자국의 국민들을 겨냥한다.

군사권력과 검찰권력의 수뇌는 선출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뇌들은 위로부터 대통령의 통제보다도, 오랜 시간 속에서 재생산되는 군부 및 검찰 관료집단들의 통제를 더 많이 받는다. 해당 관료조직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익을 위배하면서 관철될 수 있는 여지는 여기서 발생한다. 검찰이 형벌권을 관료조직과 관료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 국가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국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주장을 통해 검찰개혁을 추진해 온 인물이다. 이 두 방안을 통해 검찰이 실제적으로 현재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생각일 것이다. 관료는 이미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만큼 완강한 세력이다. 조국의 개혁 방안은 관료체제와 관료계급을 온존시키면서 관료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은 관료계급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료계급 내부 역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도 관료조직이며 관료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료계급의 문제를 방기하는 한, 공수처도 그러한 관료계급의 일부로 편입되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경검 사이의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직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행위를 하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관료계급 내에서의 일정한 세력균형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관료계급의 지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방안에 머문다면 그러한 검찰개혁의 방향은 계급으로서의 관료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관료조직의 역관계 재배치를 통해 실질적 변화가 도입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질적 변화는 다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다중을 대상으로 통치행위를 수행하는 관료계급을, 자기조직화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에 맡겨 관료들이 독자적 계급으로서 재구성될 수 없도록, 국가기관이 다중의 절대민주적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관료권력의 재분배와 재조직을 넘어 권력체제 그 자체의 아래로부터의 재구성과 권력기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조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그 조직력을 기초로 대의기구에 대한 섭정 능력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관료계급을 약화시키고 궁긍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에서 검찰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장기혁명의 방향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넘겨주어야 한다. 자기조직화된 국민들이 원칙적으로 수사권을 갖고 필요한 수사행위를 자율적 시민수사기구, 각 분야의 전문 수사기구, 경찰 등에 필요에 따라 위임, 배당한다는 구상 위에서 검찰개혁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의 수사를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수사권을 갖는 시민주도의 특별조사위원회가 제안된 바가 있는데 이것은 검찰 개혁을 사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례로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검찰이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여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등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범죄혐의를 운위하면서다. 이 담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을 통해 지배적 담론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러한 ‘부적격’ 담론은 조국이 말과는 달리 실제에서는 정의롭지 못하며 사회 하층의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계급)에 살고 있으므로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적 생활과 공적 발언 사이에 격차가 크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메시지)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메신저)에 주의를 돌리는 주장이다.

보수언론, 보수정당, 경검 등 제도적 보수세력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혁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혁과 혁명을 지향하는 좌파이다. 개혁과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구해온 좌파 세력의 상당 부분이 조국 사태에서는 무관심을 표명하거나 이러한 우파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보수우파가 그렇게 반응한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에서건 좌파가 무관심하거나 반조국 전선에 가담함으로써  반조국전선은 의도되지 않은 좌우합작 전선으로 강화되어 왔다.

혁명적 사회변혁은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의 개혁노선은 어중간하여 실질적 변화의 필요성과 실질적 변화의 방안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때문에 좌파가 검찰개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되는 상황에서 우파 주도의 반조국전선에 가담하여 공조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조국이 법무부장관 자격이 없으므로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던 주장은 이제 조국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통령이 조국을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타난다. 임명 전과 비교해 이제 조국이 ‘범죄자’라는 미확인의 주장까지 더해졌다.

조국이 만약 범죄자임이 확인된다면 그가 장관직을 수행해서는 안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수정당들과 보수언론들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퇴나 해임 심지어 구속을 주장하는 것은 불확실한 여론으로 여론재판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이런 식의 재판에서는 언론, 방송 등을 장악하고 있는 우파 언론 집단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조국이 법무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무부 장관’이라는 부르주아 사회기관과 직책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법과 법무행위가 좌파적 시각에서 그토록 ‘정의’로운 것이었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법과 법무행위는 원리상 부르주아적 정의와 부르주아 체제를 재생산하는 기관일 뿐 프롤레타리아 다중의 정의와 다중의 해방을 실현하는 기관이 아니다. 역대 법무부 장관의 면면은 이 사실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지금까지 어느 법무부 장관에게도 적용하지 않던 ‘프롤레타리아적 정의’라는 기준을 조국에게만 적용하는가?

조국이 계급적으로 비정규직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논점도 같은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지금까지 어떤 법무부 장관이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앓으며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 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법무부 장관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대를 기준으로 조국의 자격 문제를 논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직책은 관료지배계급의 고위직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 혁명의 주체가 아니다. 나는 반조국전선에 서 있는 좌파 부분이 혁명의 대상과 주체를 혼동하는 심각한 범주 착오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법무부장관 임명, 직위의 문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개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 계급간 문제 즉 혁명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혁의 문제는 혁명의 문제로 전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으로는 우파 주도의 반개혁노선과 공조하게 되는 도덕주의적 행위양식을 통해서 달성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개선할 힘은 그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법무부 장관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대의할 수 있는 법무부 장관이 임명되도록 만드는 것도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반조국 흐름은 지금 명확하게 개혁에 반대하는 지배계급 내 우파 주도로 개시되고 또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한 행동은 이러한 우파 흐름에 맞서 조국과의 연합을 통해 조국을 더 급진적인 개혁방향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 즉 혁명의 대상인 법무부장관을 혁명의 동반자로 전용하는 섭정의 정치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반개혁 우파 흐름에 실천적으로 연합하게 되는 반조국좌우연합전선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서초동 대검찰정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이런 점에서 교훈적이다. 150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이 집회에서 촛불시민들은 정치검찰 퇴진, 자유한국당 해체, 조중동 폐간, 검찰 개혁, 공수처설치, 조국 수호를 외쳤다.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이 박근혜를 파면시킨 2016-7년의 촛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구호, 깃발, 리듬, 호흡 등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좌파 일부의 촛불로부터의 철수였다. 이 철수는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관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좌파 대오를 서초동 촛불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반면 반촛불 우파는 비록 왜소한 형태였지만 대검찰청 앞에서 촛불시민과 대치하며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었고 문재인 탄핵, 조국 구속을 외쳤다.

촛불시민은 박근혜를 탄핵했던 아래로부터의 섭정정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것은 다중의 섭정감각을 간과하는 엘리뜨주의 지식인의 편협한 관점일 수 있다. 좌파는 조국 수호에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인다. ‘조국 수호’ 슬로건이 ‘메신저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국 수호’는 인격으로서의, 계급으로서의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메시지’, 즉 검찰개혁이라는 메시지를 개혁에 반대하는 우파의 기도로부터 수호하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제도적 청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사법적 인적 청산으로 만듦으로써 적폐권력인 검찰의 힘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이 전개되어 왔다. 조국 사태는 적폐를 통해 적폐를 청산해온 이 역설의 효과가 드러나는 현장의 하나이다. 조국은 스스로 ‘가진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약하고 불충분하나마 대한민국의 적폐권력인 검찰의 개혁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드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가진 자’로서의 행보와 ‘사회개혁’의 행보 사이에 드러난 간극과 모순을 단순히 ‘위선’으로 평가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을 넘어서려는 지적 노력으로 볼 수는 없을까? 조국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그것이 비록 불철저하고 불충분한 노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노력이 실제로 성과를 얻고 더 발본적으로 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다중 전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위험은 흔히 주장되듯이 그가 검찰개혁을 주장했으면서 사생활에서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도덕적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존재와 의식 사이의 이 괴리와 모순은 조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겪고 있고 또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검찰개혁 구상이 불철저하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개혁행보가 관료계급과 자본의 공동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반개혁적 관료세력과 타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사모펀드를 통해 치부를 추구하고 대입제도를 이용해 자녀의 영달을 추구한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가장이라는 점을 들어 지명철회를 요구하고 해임을 요구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촛불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것이다. 치부와 영달의 추구는 부르주아 사회가 모든 개인에게 강제하는 생활 논리, 즉 생리의 문제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가진 자’의 집단은 치부와 영달추구를 위한 매우 많고 다양한 수단들을 갖고 있는 반면 ‘못 가진 자’의 집단은 그 수단이 지극히 협소하거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를 벗어나는 길로서 유력한 것은 타인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사회를 공동생산 및 공동증여의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의 개인을 도덕적으로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고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인 다중 자신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사회의 구조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다중이 연합하여 조국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검찰개혁을 법무부 장관의 권한을 사용하여 더 발본적으로 실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박하는 것이지 그의 해임, 사퇴, 구속 등의 요구로 그의 검찰개혁 노선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응양식은 실천적으로 검찰개혁을 급진화하고 발본화해야 할 시기에 검찰개혁에 반대함으로써 문재인 정부 이후 더욱 비대해진 검찰 적폐권력의 독주를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이 좌파라면 조국에 대한 도덕적 계급적 비판을 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논리를 기초로 촛불시민들과 함께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그 검찰개혁이 더욱더 근본적인 개혁이 될 수 있도록, 즉 사회혁명의 문을 여는 개혁으로 될 수 있도록 법무부장관인 조국과 관련 기관에게 촉구하고 압박하는 개혁적 섭정행동에 나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검찰개혁의 발본화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아래로부터의 길, 좌파적 길이지 않을까?

피해자다움의 강제적 수용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의 결단으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2)

“결국 올바른 피해자다움이란 이번 판결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피해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최대한 격렬히 저항하고, 피해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신고한다. 피해 이후에는 가해자가 두렵고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티내고 싶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무조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 신고 과정에서는 자존감이 강해 보이는 단호한 모습 대신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해리 상태에 빠져야 한다. 평소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도 소송 과정에서는 신뢰할만한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상태’다. 모순 그 자체다.” -도우리[미디어스 기자]

강요된 피해자다움의 부득이한 수용: 기자로부터의 도피

‘동료배우 윤 모 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3번째 증언> 14장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를 받으면서 느낀 혼란에 대한 서술이며, 그 피해자다움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윤지오에 대한 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장자연을 대신하여)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자들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윤지오에게 “걸려 오는 전화도 마음 편히 받지 못할” 정도로 “나를 통해 언니의 일을 캐려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168)로 다가왔다. 기자들은, 취업을 위해 찾아간 치어리더 에이전시에도 찾아왔고 연예기획사를 찾아가면 그곳으로도 찾아왔다. “잠깐 동안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라며 그렇게 얼굴을 팔고 나면 지금보다는 더 활동하기 편해질 것”이라고 부추기며 “지상파 TV의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서 언니와의 관계나 그간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무명배우이다 못해 지망생”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존감을 갖고 살고 싶었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169)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자존의 ’떳떳함’은 이상하게도 당당함이 아니라 TV 출연을 거부하고 인터뷰를 거부하고 “ㄷ엔터 소속이었다는 말도, 자연 언니와 친분이 있었음”도 말할 수 없음을 통해서 겨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윤지오 자신에게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167)이었다. 그가 그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 것은 미인대회 관계자로부터 대회 출전을 하지 않도록 권유받았을 때였다. 그 관계자가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자신이  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미인대회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그런 권유를 한 것을 알았을 때, 윤지오는 장자연의 동료배우였다는 사실이 “낙인, 주홍글씨”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장자연이 겪었던 그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일까? 기자들이다. 윤지오는 소속사의 노예계약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소망이 김종승과의 다툼에 장자연의 삶을 이용하고자 했던 이미숙/유장호의 야망의 덫에 걸려 탄생한 것이 장자연 문건/리스트라고 파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약직 연예노동자 장자연이 경험한 성착취와 성수탈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조서이자 고발장으로 남아있다. 이 문건/리스트의 작성으로 인해 결국 장자연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장자연은 누가 봐도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2019년 4월 16일 이후 김수민이 윤지오와 관련해 맡고 있는 역할이 이런 성격의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게 피해자다움과 증언다자움을 강요하려는 가해권력의 필요를 여성의 위치에서 충족시키는 것, 즉 윤지오가 피해자 답지 않고 증언자 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 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 ‘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배우였던 자신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발아들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는 결단

거듭말하지만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2019년 3월 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였다. 이 유튜브 방송의 5: 37~7:04 구간에 김어준과 윤지오가 나눈 인터뷰 대화는 흥미롭다. 그 대화는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김어준: 지금까지 본인이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했는데 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지오: 국내에 거주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 살면서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모두 얼굴과 이름이 공개됩니다. 이런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존중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어준: 내가 숨어 살 이유가 뭐가 있냐, 나는 피해잔데…

윤지오: 가해자가 떳떳이 사는 것을 보면서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던 게 사실입니다.

김어준: 10년만에 장자연 사건이 다시 조사된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숨어살고 싶지 않다, 내가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잔데 가해자는 다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내가 10년간 숨어살다시피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그래서 결심을 하신거고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고 이야기해야 겠다 생각하신거죠. 이름이 윤지오씨입니다. 처음 모셨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gS_KHy4akx8&t=2s: 대화 내용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을  조금 고침.)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살았던 저 ‘숨어 살기’를 버리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결단은 무엇보다도 사건 이후에 윤지오가 보고 겪었던 캐나다의 경험에서 주어진다. 캐나다에서는 성폭력 관련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동등하게 공개되며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은 캐나다와 정반대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사는 데 피해자는 얼굴도 이름도 가리며 고개숙인 채 숨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고 가해자가 계속 가해할 수 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지오는 캐나다와 한국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점점 한국의 피해자들이 부당함과 억울함을 겪고 있음을 더 강하게 감각한다. 

이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정동적 변용의 체험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오가면서 그 문화적 차이공간 속에서 한 곳에 머물렀다면 몰랐을 것을 깨닫고 느끼지 못했을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인지적 정동적 변용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증언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결단은 행동으로 옮겨 졌는데, 거기에는 ‘강요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도 피해자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자’라는 사회개혁적 제안이 함축되어 있다.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