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법리에 밝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기획 감각을 두루 인정받아 사법정책과 재판에 대한 공식적인 해설 등을 도맡는 자리인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역임한 ‘엘리트’ 판사”(한겨레, 임재우 기자)

이번 재판에 비추어 이 기사를 유물론적으로 재해석해 보면 이런 뜻으로 읽힌다: “한국 법의 성차별 논리를 철저히 체득하여 가부장주의 권력자들과 유능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이들을 위해 미투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여성 저항 운동을 척결하는 사법실천을 단행하는 자. 즉 기성의 자본권력에 의해 전쟁도구로 선발된(el) 자(ite).”

이른바 ‘시정잡배’

시정잡배는 엘리트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우물터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무리”, 즉 다중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임태훈의 생각과는 달리 시정잡배는 김성태와 같은 종류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 시장이나 우물터는 다양한 정보가 소통되는 공간이지 특정한 편견을 유통시키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1)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 노동은 잉여로 되며 노동가치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2)고전 맑스주의의 관점 :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의 지역만을 이동시킬 뿐(제3세계로!) 노동에 대한 필요를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동은 확장되고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노동에 대한 착취로 남고 기계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3)자율주의 맑스주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직접적 고용의 필요를 감소시키면서 삶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편입시킨다. 자본의 착취는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삶-공통장 전체에 대한 수탈로 바뀐다.

조지 카펜치스의 모색은 2)와 3)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노동의 일반화, 확장, 다양화라는 테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기계의 보편적 도입에 대해 말할 때는 기계와 변화된 노동세계의 관계를 고찰하기보다 고전적 맑스주의처럼 제1세계에서 공장노동의 감소에 비례하는 제3세계에서의 땀공장의 증가, 즉 고용노동의 유지 혹은 확장에 대해 말한다.

댓글전쟁

거리투쟁은 소강하지만 댓글투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댓글정치는 논리정치가라기보다 정동정치다.
댓글전쟁은 계급전쟁을 직간접적으로 투영한다.
이 정동전쟁의 첨병이 점차 비정동적 로봇으로 되고 있다는 점, 공감과 비공감이 비공감적 로봇에 대한 것으로 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