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개념의 가해자중심주의적 전도

2009년 대한민국 경찰은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았던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의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를 ‘적색수배’하기는커녕 부실한 조사로 덮어 버렸다. 2018년부터 시작된 과거사 재조사조차도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대통령의 엄정조사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가 보여주는 대한민국 수사기관(검경)의 적나라한 실태가 이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찰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결과가 발표된 지 경우 반 년 만에, 마치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도 한 듯이, 바로 그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에 대해 증언한 증언자를 도리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의 혐의자로 적색수배 요청하고 ‘엄정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2차, 3차, n차 가해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도대체 증언자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들이 무엇인가? 경찰에 따르면 그것은 ‘사기와 명예훼손’이다. “명예훼손과 사기 혐의 모두 인터폴 자체의 적색수배 요건인 2년 이상 징역에 포함되는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기와 명예훼손 혐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그 행동의 범죄화를 통해 사법권력이 사람들에게 던지고자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사기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증언하는 동안에 혹은 그 이후에 신변위협이 있었다고 말했고 당신의 지지자들로부터 경호비와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으로 1억 3천여 만 원의 돈을 모금했다.”가 그 혐의의 지시내용이다. 이것이 범죄혐의라는 주장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당신이 증언자라면, 기자가 당신의  소재지를 추적하며 가해자 입장에서의 질문을 퍼붓더라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그런 것을 대중 앞에서 발설하면 안 된다. 국가가 당신을 증언자로 불렀더라도 증언자를 보호해 달라고 국가에 요구해서도 안 된다. 증언자에게 닥쳐오는 신변위협과 고통을 달게 받아 들여라.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경호비를 보내겠다고 아우성을 치더라도 결코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계좌번호를 공개해서 그곳으로 후원금이 입금되면 후원자를 기망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 즉 사기죄로 단죄될 수 있다. 혹시 그렇게 당신에 대한 연대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 증언을 위한 경호비로 사용하여 신변안전을 도모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의 말을 의심하라. 당신을 지지한다,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믿지 마라. 증언에 대한 지지자가 당신의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당신에게 경호비를 후원한 사람이 후원금반환소송을 제기하여 당신의 사기혐의를 뒷받침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원금 외에 고리대를 요구하는 사채업자처럼 돌변할 수 있도 있다. 후원회비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말라. 증언자 피해자 목격자가 겪는 고통에 무관심하라.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라. 당신이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후원회비를 모집하게 되면 언제든지 그것이 기부금품법 위반의 대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무엇보다도 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그들이 성추행을 하건 성폭행을 하건 오직 방관하라. 그것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사회적 중요범죄’로 지목될 수 있다. 권력자들 앞에서 침묵하라. 그들에게 굴종하라. 그것이 신변위협을 받지 않고 당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며 적색수배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둘째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김수민 작가를 ‘이수역 사건 2차 가해자’라고 말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인물을 특정하여 제3자가 들을 수 있는 공연성의 환경에서 그를 비난하면 명예훼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흔한 사건으로서 ‘사회적 중요범죄’로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정치인’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한 후 홍준표 의원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로부터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으니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즉각 당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홍준표 의원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고 그가 당신을 범죄 혐의로 고발했다는 것은 당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이 설령 장자연 리스트에서 ‘홍준표’라는 이름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름을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시민단체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권력자들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받아들이며 사법적 보복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범죄가 될 수 있다. 권력자들의 탈법이나 부패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단죄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이렇게 ‘사회적 중요범죄’로 규정된 두 가지 혐의는 가해권력자들의 불의에 대해 증언을 하지 않도록, 침묵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 온다.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이 명예훼손죄로 제소될 수 있으며 후원금 모금을 통해 가해권력자들의 보복으로부터 증언자의 신체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사기죄로 제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 실현의 노력이 사법에 의해 부정의로, 범죄로 정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기자, 작가와 같은 전문가들,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 같은 언론사들, SNS 계정주 같은 시민사회 행위자들만이 아니라 경찰, 검찰, 법원, 정당, 그리고 국회의원 같은 국가권력의 기구들이 가해권력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증언자의 범죄화’를 위한 총력전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맥락에서 보면 “경찰청 자체 기준에 비춰 봐도 윤씨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안인 만큼 중요사범으로 볼 수 있다”는 경찰관계자의 설명은 증언자의 고립과 범죄화를 위해 가해권력이 주도하는 이러한 전 사회적 총력전의 하나의 전술단위처럼 들린다.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촛불시민들은 윤지오가 증언한 권력형 성폭력 범죄 혐의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수사와 재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했다. 그런데 경찰은 지난 10년간 이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 결과가 2009년 KBS의 장자연 문건 보도 이후의 수사에서 성범죄를 비롯한 다양한 범죄 혐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가해권력자들이 무혐의 처분된 것이고 2018년에 재개된 과거사 재조사가 혐의자들에 대한 재수사로 연결되지 않게 된 것이다. 촛불시민의 요구와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가 행한 증언 자체와 그에 따른 부대 행위들(후원금, 숙소제공 등)을 ‘사회적 파장이 큰’ 범죄 혐의로 정죄하면서 지난 수 개월간 그에 대한 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해 왔다. 그 결과가 윤지오에게 열 가지 이상의 고소고발장이 날아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경찰관계자는 정확히 가해권력자들과 동일한 입장과 방향에서 윤지오의 증언행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범죄화하라는 가해권력자들의 시각과 요구를 고스란히 ‘경찰청 자체’의 시각과 요구로 대변하고 있다. 요컨대 경찰 관계자가 말하는 범죄 혐의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가 촛불시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내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탈진실 시대 진실의 운명: 범죄로 되는 증언, 수배자가 되는 증언자(1)

객관진실, 탈진실, 공통진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미치코 가쿠타니의 얇은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진실이 무의미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원제는 The Death of Truth: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인데, 한국어 번역본에 저자의 집필의도를 잘못 전달할 수 있는 제목이 달린 것으로 보인다. 해제를 쓴 정희진 연구자의 생각과 유사하게 나는 근대적 객관진실에 대한 강한 애착과 애도를 표현하는 저자의 심경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진실’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객관진실에 대한 비판이 곧장 진실혐오로 나아가서는 안 되며 객관진실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진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객관진실도 탈진실도 아닌 그 새로운 유형의 진실을 나는 스피노자의 공통관념(common notion)을 응용하여 공통진실(common truth)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그런데 돌아보면 현실에서는 진실에 대한 무관심, 진실에 대한 혐오, 진실에 대한 적대가 이미 일상화되고 널리 대중화되었다. 2019년 4월말 이후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대한민국의 반응양식이 그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언론과 SNS가 증언자의 사적 생활에 의심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후부터 ‘증언’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증언이 진실을 밝히는 말인 한에서 증언에 대한 무관심은 진실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낸다. 장자연의 고발문건에 이름이 등장했고 그래서인지 이 무관심의 공간을 조성하는 데 남다른 역할을 한 조선일보는 이후 그 공간에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증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그것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증언자에 대한 적대를 불러오는 방법이다. 

적색수배의 배경맥락들

마침내 2019년 11월 6일 인터폴은 증언자 윤지오에게 수배단계 중 가장 강력한 조치인 적색수배조치를 내렸다. 이름도 으스스하지만 살인자,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죄 관련 사범이나 폭력조직 중간보스 이상 조직폭력 사범, 50억원 이상 경제사범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에 이 조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분노를 일으킨 조치이다. 여성단체들은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조치에 대한 항의로 민갑룡 경찰청장의 사직을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경찰청장으로 내정되고(2018년 6월 15일) 취임한(7월 24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를 강행하고 적색수배를 인터폴에 요청하는 결정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민갑룡 청장이 2019년 5월에 청룡봉사상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청룡봉사상 폐지 여론이 높아진 것은  CBS 보도로 ‘장자연 사건’의 의혹 당사자인 조선일보와 이 사건 수사 당사자인 경찰 간의 수상한 연결고리가 드러난 이후다. ‘장자연 수사’에 관여한 것으로 파악된 경찰관이 그해에 조선일보로부터 청룡봉사상을 받아 특진을 한 것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유착이 분명하게 의심되는 이러한 대목 외에 특진후보 경찰관들에 대한 세평과 감찰내용이 조선일보 측에 제공되어 경찰이 조선일보의 영향력에 종속되었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갑룡 경찰청장은 청룡봉사상을 존치시키고 조선일보가 최종심사를 진행하며 수상자를 1계급 특진시키는 방식의 기존 청룡봉사상 제도를 강행하기로 결정해 진실과 정의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킨 바 있다.

    이러한 이력을 가진 경찰청장이 적색수배를 요청했다고 해도 국제기구인 인터폴이라면 국내정치에서 독립적으로 사고하여 그것을 기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보통 일주일에서 두 달까지 걸린다고 하는 인터폴 심사는 불과 사흘 만에 끝나고 인터폴은 참으로 신속하게 윤지오에게 적색수배령을 내렸다. 이 상식을 초과하는 신속한 조치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2019년 11월 11일 여성조선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내보냈다.

현재 인터폴(ICPO, 국제형사경찰기구) 수장은  제30대 경기지방경찰청 청장을 지낸 김종양 총재다. 한국인 대상의 인터폴 공조가 어느 때보다 수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캐나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날 한 매체의 이메일 질의에 보낸 회신서에서 “캐나다 정부는 지난 1995년 이래 한국 정부와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고 있다. 윤지오 사건만이 아니고, 전반적인 사건들을 인도협약에 따라 처리하고 있다”고 답했다.

국제기구지만 총재가 한국인인 것이다. 김종양 인터폴 총재는 인터폴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총재며 중국 출신의 멍홍웨이 전임 총재가 비리혐의로 구속된 후 약 한 달 반 가량 권한대행을 하다가 약 1년 전인 2018년 11월 21일 인터폴 총회에서 인터폴 총재로 선임되었다. 이때 경쟁후보가 러시아내무부 출신의 알렉산드르 프로콥추크였는데 김종양이 다수 득표를 한 것은 “러시아 정부가 인터폴을 통해 자국 출신의 야권 지도자,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적색 수배 명령을 내릴 것을 우려한 서방권 국가들의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이 배경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인터폴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국제정치에 이용되고 있는 정치기구임을 시사한다.

김종양 총재는 어떤 사람일까? 여성조선이 쓰고 있는 것처럼 그는 2009년에 장자연 사건의 담당청이었던 경기지방경찰청의 청장을 역임(2014년)한 바 있다. 또 그는 2018년 인터폴 부총재를 맡고 있던 당시 창원시장 선거에 출마 선언을 한 바 있는데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우리는 살인, 강도, 강간, 다액경제사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윤지오에 씌워진 혐의만으로 인터폴 적색수배라는 과잉대응을 연출한 정치적 네트워크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네트워크는 조선일보-경찰/검찰-자유한국당-인터폴을 잇는 네트워크로 추정된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다중의 섭정을 위한 상상

공무원을 국민이 섭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무원이 국민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섭정이 정치적 과제로서 나타나는 것은 대의제가 과도한 나머지 공무원이 자립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 공무원이 주인인 공무원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민주제의 간접 민주제로의 대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왔다. 공직의 사유화와 권력화는 그것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래로부터 국민-다중의 섭정은 공직을 부름에 대한 응답, 즉 소명(Beruf)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유화된 공직을 다중을 공통화시키는 봉사활동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국민-다중의 권력에 봉사하는 서비스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배심제 하의 AI검찰’이라는 형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어 자본가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다.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위치지워지며 대다수 국민들은 기업 영역에서 주권을 잃고 노예로 전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 국민-노동자의 주권됨과 모순된다. 또 기업체제가 지배적으로 되면 국민-노동자는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성을 망각하게 되며 자신의 기관인 국가와 자신을 고용한 기업의 배신적 유착도 심화되게 된다. 대의제가 기업제와 동화되면서 정치적 대의자들이 기업주처럼 군림하고 국민이 노예처럼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주권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정치영역에서 국민-다중의 주권회복이 기업영역에서 노동자의 주권쟁취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업영역에서도 노동자-다중이 주인으로 될 때에만 다중에 의한, 다중을 위한, 다중의 정치/경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다중통제 하의 AI기업’의 형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영역의 공통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해방이 현재는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계화, 정보화, 자동화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경향이 그것인데, 노동(여기서는 ‘고용노동’을 지칭한다)과 소득을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결합시켜온 자본주의의 오랜 경향과 장치들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무소득, 저소득과 묶어 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고용노동=강제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삶정치적 활동은 노동으로 평가되지 않고 무상수취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소득 및 무조건적 보장소득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고용되어 노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소득 문제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활동은 기업적 고용세계 바깥에서도 전개되고 있고 기업들은 이 활동들을 외부효과로서 전유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없이 소득 없다’(예컨대 무노동무임금)는 관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노동자가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자유롭게 종사하면서도 그것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행복한 느낌으로 충실할 수 있을 때 국민과 노동자 사이의 현재의 배리현상(주인이 노예되는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삶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섭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업은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관이 아니라 (비)노동자-다중의 부름을 받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소명기관(Beruf-organ)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착취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 것과 국가가 권력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이다. 하나의 과정이란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섭정능력이 향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다중의 공통화 없이 국가와 기업의 공통화 없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섭정 능력을 위한 사유실험과 행동실험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그 성과들의 공통화-연결망(commoning-network)이 섬세하게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을 통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이 첫 걸음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의 분화,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한 관찰메모

  •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는 서초동과 여의도로 분산 개최되었다.
  • ‘분열’이 아니라 ‘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집회의 이슈와 강조점이 다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촛불은 반드시 단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화하고 분산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 연결되고자 한다면 분산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물론 현재는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전체 촛불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 9차까지의 서초동 촛불집회의 주최측을 자임했던 개국본이 10월 12일을 갑작스런 마지막 집회로 선언한 것이 이 경쟁적 분화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집회의 종료를 선언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암묵적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종료 선언이었고 이것이 촛불을 지속하자 하는 사람들을 별도의 경향적 세력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즉 서초동인가 여의도인가의 분화가 있기 전에 종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화가 있었다.
  • 북유게 사람들이 촛불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국이 사퇴한 날과 겹치는 월요일(10월 14일)이었다. 개국본이 여의도 촛불을 결정한 것은 수요일(10월 16일)이었다. 종료나 계속이냐의 분화가 여의도인가 서초동인가의 분화로 나타났다.   
  • 섭정의 관점에서 두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이유는 없다. 촛불다중에게는 두 주최측, 두 집회의 에너지가 사회개혁의 집합적 에너지로 공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두 집회의 공통점은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검찰이 범인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현존하는 검찰권력의 불법성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에 윤석열 수사, 구속 등 검찰총장에 대한 강한 사법적 압박 요구가 더해졌다.
  • 여의도 집회는 “공수처 설치”와 “응답하라, 국회” 등의 입법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서초동과 여의도의 뚜렷한 차이는 여의도에서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구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서초동 집회는 이전 9차 집회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국 수호’를 외치면서 조국을 이슈화했다. 여의도 집회는 ‘조국 수호’라기보다 ‘조국 계승’(수고했습니다) 쪽으로 초점을 옮기는 분위기였다. 서초동이 조국을 현재화한다면 여의도가 조국을 과거화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초동 집회보다 여의도 집회에 더 많은 사람(감으로는 약 1.5배~2배)이 모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여의도 집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고려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성별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여성이 주축이었다. 8대 2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반면 여의도 집회는 5:5로 동등하거나 6:4 정도로 남성이 더 많은 집회였다.
  • 세대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2~30대가 주축이고 여의도는 그보다는 연령이 더 놓은 세대가 주축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참가자들의 자유발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집회는 공연과 유명인사들의 연설 중심이었다. 
  • 서초동 집회에 비해 여의도 집회가 미디어 동원이 많았다. 여의도 집회는 스크린이 과잉동원되었다는 느낌이었다. 9월 28일의 과소동원과 대조되는 풍경. 전체적으로 너무 큰 마이크 소리로 집중이 어려웠다. 국회의사당역 출구의 포스트잇 시위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초동의 경우는 미디어 동원이 적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히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주요 슬로건을 담은 큰 깃발들 대오가 외곽을 오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 전체적으로 여의도 집회의 방식이 전통적 조직운동의 집회방식이라면 서초동 집회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킹 방식을 오프라인 집회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구심점을 이루면서 촛불다중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19년의 촛불집회는 개국본이나 북유게 등 개별 단체나 커뮤니티가 주최측이 되어 집회를 개시하고 다중들이 그것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최측의 정치적 색깔이 집회 전체의 색깔을 좌우할 수 있고, 주최측 간의 의견차이나 갈등이 촛불 다중들의 갈등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생산적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주최측이 뚜렷한 데서 오는 이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나타난다. 

조국 사퇴의 정치적 의미와 사퇴 이후의 검찰개혁에 대한 연구노트

  1. 조국의 조기사퇴는 검찰개혁 전선에서의 후퇴다. 조국에게 맡겨졌던 최소한의 개혁목표조차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기사퇴는 검찰개혁에 저항해온 언론과 검찰 및 자유한국당의 압력에 민주당 지도부가 동화된 결과이다. 
  2. 검찰-언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를 사법과 문화로 비선(秘線)지배하면서 강탈적 축적을 가속시키는 두 개의 ‘비선(秘線)축’으로서 서로 연합하여 작동한다. 이것은 과거 발전주의 국가를 군부가 권위주의적으로 비선지배했던 것에 비교할 수 있다.
  3. 언론과 검찰은 표적보도(편의보도)와 선별기소(편의기소)를 통해 다중의 인지적 정치적 삶을 왜곡하며 착취적이고 수탈적인 사회관계를 온존, 강화한다. 
  4. 이 두 축은 국가에 대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능력을 찬탈하고 왜곡한다. 이 두 축은 국내적으로 지배하는 엘리뜨와 복종하는 군중,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지배하는 제국과 종속하는 주변국 사이의 구조적 연합(국민통합과 미일한 동맹)으로서의 국가를 표상한다. 지배, 사대, 전쟁, 경쟁, 승리가 이들의 지향성이다. 이 두 축은 전쟁으로서의 삶이라는 호전적 이미지를 삶의 본질로 제시한다. 
  5. 이것은 자율, 자주, 평화, 연대, 공통이라는 현시기 촛불다중의 염원과 대립한다. 그러므로 현 시기에 전 국민적 의제가 되어 있는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이 두 비선축의 비선지배를 촛불다중의 민주적 섭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필수적 통과절차다.
  6. 조국의 법무부 장관임명은 촛불다중의 검찰개혁 요구에 대한 자칭 촛불정부의 최소한의 부응조치였다. 즉 다중 섭정의 정치적 첨점이었다.
  7. 검찰은 국민의 검찰개혁 요구에 저항했고 그 수단이 조국 일가에 대한 먼지 털이식수사였다. ‘검찰개혁’ 메시지에 ‘사기꾼 일가’라는 메신저 죽이기로 응수한 것이다. 이것은 ‘권력형 성폭력 리스트(장자연 리스트)’ 메시지에 ‘사기꾼 윤지오’라는 메신저 죽이기로 응수한 것과 동일하다. 
  8.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성착취-성수탈 관계가 사회적 의제로 표면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작업은 조선일보가 주도했고 ‘조국 일가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검찰권력을 침식하지 못하도록 막는 작업은 검찰 특수부가 주도했다.
  9.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는 윤지오의 인성, 도덕성에 대한 비난을 통해 증언의 신빙성을 추락시키는 마녀사냥을 통해 이루어졌고 조국 일가 사기꾼 만들기는 조국 일가의 자산가적 계급성을 비난하고 말과 삶의 불일치를 집중 공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도덕’과 ‘정의’의 담론은 ‘인권’을 짓밟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10. 이 두 공격 모두에서 “누구를 사냥하는가?”는 분명했지만 “누가 사냥하는가?”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져보면, 실제 상황은, 성폭력 가해권력이 피해여성의 노출을 비난하고, 거대한 규모의 착취수탈자가 임금 외의 가외지대(extra-rent)를 수취하는 정규직노동자를 비난하는 아이러니한 성격의 것이었다.
  11. 좌파 일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규직 노동자 상층의 (상당히 일반화된) 지대수취(‘사모펀드’), 기회수취(‘장학금’, ‘표창장’)를 비판하기 위해, 도덕주의적 정의를 내걸고 거대 권력이 주도하는 이 마녀사냥에 동참하거나 쟁점회피하면서 기권하는 태도를 취했다.
  12. 조국은 검찰발 사퇴압박을 거부했고 검찰개혁의 ‘최소한(불쏘시개)’을 전진시켰다. 그것을 뒷받침한 힘은 조국 자신에게서 나왔다기보다 촛불 집회에 결집한 수백만 다중에게서 나왔다.
  13. 9월 28일 이전에 개국본은 다른 시민단체와의 연대 없이 단독으로 촛불을 꾸려가면서 사법개혁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9월 28일 국민-다중의 분노의 폭발은 개국본/사국연을 놀라게 하고 후퇴시켰다. 더 이상 ‘주최측’이 무의미해지는 다(多)중심의 시간이 열렸다. 이것은 검찰개혁의 급진화, 더 급진적인 검찰개혁을 가져올 다중지성적 에너지였다. 10월 12일을 마지막으로 한 집회중단(그것은 ‘최후통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결국 검찰이 아니라 문재인과 조국을 향한 최후통첩이 되고 말았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국본/사국연의 대응방식이다.
  14. 촛불의 혁명적 폭발이 집회에 가져온 충격(‘중단’) 외에 권력장에 가져온 충격도 있다. 9월 28일의 촛불혁명은 조국을 일거에 대선 유력 후보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10월 5일 촛불다중의 더 폭발적인 참여는 민주당까지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 검찰 및 광화문 집회의 압박에 짓눌린 상태였지만 서초 집회의 촛불에 결정적으로 놀라서 후퇴를 시작했다.(다음날인 10월 6일 조국, 주진우 만남. 주진우-김건희[윤석열]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이것은 의미심장한 만남이다. 대화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사퇴의 의사타진과 일정 조율 및 사퇴형식의 조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5. 지금까지 조국사퇴를 요구해온 자유한국당, 노동당 외에 이제 민주당 지도부가 조국사퇴 대오에 가담한다. 명분은 대통령과 당의 지지율 하락이다. 그런데 리얼미터의 통계적 지지율이 하락을 보이는 순간에 거리에서 촛불이 보여준 현실적 지지율은 상승하고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거리의 현실다중이 아니라 통계 속의 가상 군중을 입장선택의 근거로 삼았다.
  16. 10월 11일 ‘동교동계 원로들’이 이낙연 총리를 불러 조국 사퇴를 권유한다.(https://news.v.daum.net/v/20191011145155705 ) 이후 민주당 내에서 11월 조국의 명예사퇴론이 나왔다. 10월 12일 촛불집회는 ‘주최측’에 의해 잠정 마지막 집회로 계획되었는데(김어준은 그 잠정성과 관련하여 “다시 집회가 열리는 상황은 없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이것은 권력장 내에서 이미 일정정도의 교감이 있었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17. 10월 12일 집회에 대학생진보연합을 비롯한 단체가 촛불 집회 지속을 주장한 것.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계속하겠다는 플랭카드를 내건 것은 촛불집회의 중단에 대한 거부심리가 촛불 다중 속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주최측은 집회계속 플랭카드 철거를 요구했다. 이미 인쇄되어 참가자들이 든 피켓은 검찰개혁-조국수호인데 연단에서 조국수호 발언은 억제되었다. 일찍이 조국이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8월 28일 후보자사퇴를 주장했던(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908284024H) 이부영을 촛불집회 연사로 내세웠다. 이런 현상들은 촛불집회 주최측이 다중의 폭발적 참여로 인해 점점 ‘조국수호’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가는 ‘검찰개혁’을 ‘조국수호’로부터 분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8. 10월 12일 촛불집회의 열기가 여전히 폭발적이었던 것, 그리고 노무현-문재인-조국을 잇는 이미지가 자생적으로 등장하면서 조국을 더욱 더 확고하게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시키는 것을 확인한 후 11월 퇴진보다 더 이른 ‘조기’퇴진을 권유할 필요성이 민주당 기득권 세력 내에서 더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19. 또 다른 계기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윤석열 원주 별장 접대 진술에 대한 수사회피 보도(한겨레)가 나오고 이 문제가 가져올 파장에 대한 조기단속의 필요성. 12일의 촛불집회에서 윤석열체포 주장의 대중적 등장. 윤석열이 국회의 뜻에 따를 의사를 표현한 것. 이런 여러 계기들이 결합하여 국회-검찰이 합세하여 서초집회의 촛불을 끄고 청와대를 포위하여 조국의 사퇴를 부분 명퇴의 형식(‘검찰개혁의 불쏘시개’)으로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20. 조국 사퇴 후 자유한국당은 “국민승리”를 외치며 환호하고 나경원, 황교안이 패스트트랙 안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검찰개혁의 길이 난망하고 험난할 것임이 예상된다. 민주당은 사퇴 계획을 “몰랐다”고 발빼면서 적어도 말로는 검찰개혁을 지속하겠다고 주장하고 있고 검찰개혁을 더 잘 할 인물을 찾자고 주장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해하고 존중한다”, 노동당은 “환영한다”, 이다. 즉 국회와 제 정당들은 조국 사퇴 사건의 연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오히려 긴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묵묵부답”의 윤석열이다.) 그런데 문재인 지지층은 조국 사퇴를 범 동교동계(이해찬-이낙연-이재명)의 압박의 산물로 해석하고 있고 김어준-주진우-시사타파가 이에 동조했다고 보고 있다. 연착륙은 쉽지 않을 것이며 지지율 회복도 순조롭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 조국 사퇴는 어떤 방식으로도 검찰개혁 전선의 승리로 규정할 수 없다. 조국 사퇴가 검찰개혁의 후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조국 사퇴 압박이 거셌고 지지율 하락이 견디기 어려웠다는 점에 동의한다. 즉 조국 사퇴가 외압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조국의 입장에서 사퇴외압은 두 종류다. 하나는 검찰, 자유한국당, 언론에서의 사퇴압력, 그리고 또 하나는 민주당 내부에서의 사퇴압력.
  22. 조국 사퇴는 검찰개혁을 주장하면 신상이 털리고 가족이 걸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다. 검찰로서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개혁을 실제로 주장하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23. 그런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진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당 내에 있지 않다. 9월 28일을 분기점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검찰개혁을 한 목소리로 외친 사람들, 즉 촛불이 있다. 조국 사태는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절박성을 학습하는 집단지성적 공간이었다. 촛불이 강하게 밀어준다면 촛불국민의 뜻을 받아 나설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24. 촛불은 조국수호를 외쳤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잔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조국사퇴가 닥쳐온 것은 조국수호라는 촛불의 주장이 정면에서 거부된 것이다. 이것은 촛불집회의 갑작스런 ‘폐지’와 때를 같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다중이 나서지 않으면 검찰개혁의 완수가 이번에도 난망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군사독재”를 대체한 “검찰공화국”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10월 12일 마지막 촛불집회”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집회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관건이다.
  25.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검찰개혁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국민들 덕분입니다.”“검찰개혁을 응원하는 수많은 시민의 뜻과 마음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라는 조국 사퇴 문구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당정청이 힘을 합해 검찰개혁 작업을 기필코 완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에서의 ‘당정청’보다 훨씬 근본적인 역량에 대한 호소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민주당의 검찰개혁 립서비스가 립서비스에 그칠 것인가 실질적인 것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서초 촛불집회의 의미와 양상에 대한 몇가지 생각

집회와 의회

  1. 대의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집회(assembly)는 의회(parliament)가 기능장애에 빠진 때에 의회를 치유하고 개혁하기 위해 출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정치장이다. 그것은 일종의 의회밖의 의회, 거리의회이다.
  2. 집회는 언어, 분석, 이성에 의해 이끌리는 의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 직관, 정동의 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 
  3. 집회는 의회를 대체하기보다 의회를 섭정한다. 의회의 가능조건과 기능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다.  
  4. 집회의 언어는 이 때문에 주로 명령어이다.

9월 21일, 9월 28일, 10월 5일/10월 12일의 집회변이

  1. 내가 참가한 주말집회는 6, 7, 8, 9 총 4회 중 3회였다. 내가 참가하지 못한 8차 집회(10월 5일)는 9차 집회와 유사한 질/량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 첫 주말집회였던 6차 집회는 사법개혁국민운동본부(초기의 개싸움하는국민운동본부)라는 명확한 집회주체가 있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를 통해 전개되었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사국본은 시민사회단체들과의 연대 없이 단독으로 집회를 주최했다. 1차 집회를 수백명에서 시작하여 9월 21일 6차 집회에서는 내가 참석한 시간에 대검 정문 앞에서 수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다. 검찰이 이것을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전의 검찰 수사 관성이 집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 7차 집회에서는 빅뱅이 일어났다. 서초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나갈 때부터 여기저기서 검찰개혁을 외치는 구호소리가 요란했다. 페스티벌이 있었던 예술의 전당 방향을 제외하고 교대역 방향과 서리풀터널 방향, 그리고 검찰청 방향으로 집회군중이 서 있었다. 주최측은 대검 정문 앞에 고속터미널 방향으로 무대를 설치했는데(수 만 명의 참가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 무대는 집회군중에 떠밀린 왜소한 섬처럼 보였다. 7차집회는 주최측의 예상을 넘어선 다중의 폭주공간이었다. 통행이 어려웠고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켓도 없고 촛불도 없이 스마트폰 랜턴 앱으로 집회를 이어갔다. 무대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꽤 많은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구호도 다양했다. 통신폭주 때문인지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았다. 촛불혁명의 시간이 있었다면 9월 28일 7차 집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9차 집회는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6시 50분에 도착하여 한자 십(十)자형 집회대오를 외곽으로 취재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보았다. 예술의 전당방향 한 블럭 반을 돌았다. 교대역 방향이 가장 길었는데 강남역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대오였다. 대검 방향은 서초경찰서를 분기점으로 태극기 집회 수천명과 대치/분리되어 있는 형상. 서리풀 방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나 군데 군데 빈자리가 많았다. 2시간 10분이 걸려 9시에 출발점인 서초 사거리에 도착했다.
  5. 6차 집회가 결의를 했지만 불안한 선구자들의 형상이었고 7차 집회가 성난 군중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9차 집회는 자신감 넘치는 축제참가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터가 생겼다. 어린이를 등목 태운 사람들, “검찰개혁, 윤석열체포” 피켓을 두른 반려견, 일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9차 집회에서 7차 집회의 아나키스러움은 사라졌다. 교통경찰이 통행을 관리하고 자원봉사자들이 군중을 관리했다. 서초 네거리에 설치된 거대한 중앙 무대는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 복제되었다. 거대한 복제 스크린이 대충 열 개는 되어 보였다. 집회는 다중의 자발적 운동이라기보다 중앙이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는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 이 때문에 구호는 “검찰개혁, 조국집회”로 일정하게 수렴되는 분위기. (태극기 집회 쪽은 “문재인 퇴진, 조국구속”만을 반복적으로 외쳤다.)
  6. 태극기 상징의 재전유/탈환이라는 이유로 태극기 문양 피켓들 및 대형 태극기가 집회 도구로 도입되었다. 9차 집회에서는 그것이 애국가와 결합되었다. 이것이 애국주의로 나아갈지 “나라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모색으로 나아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앙 무대의 지배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전자로 귀결될 위험성이 높다.
  7. 집회 무대에서 먼 곳, 특히 교대역과 강남역 사이에서는 중앙 무대의 복제 스크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독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 무대를 등진 대오를 꾸리는 모습도 보였다. 자세히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중앙 무대의 방향에서 크게 벗어난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보완하는 것?
  8. 지역에서 올라온 참가자들의 대오도 일정하게는 무형의 독립성을 갖고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9. 주최단체인 사국본이 9차 집회를 잠정적 마지막 집회로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대학생진보연합은 19일 26일에도 대학생 주도로 집회를 계속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

단상

  1. 촛불다중들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위해할 수 있는 검찰권력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검찰개혁을 하라는 명령을 하기 위해 모였다.
  2. 조국은 검찰개혁을 수행할 최소 행위자(최소강령의 이행수임자)로 호명된다.
  3. 국민의 사법주권이 현재 주어진 최소강령인 검경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설치를 통해 달성되지는 않는다. 대법관 및 검사장 직선, 재판배심원제(국민참여재판)를 보충할 기소대배심제(Grand jury), 법관 및 검사장에 대한 국민소환제 등 국민의 사법주권을 보장하면서 대의기관들을 통제할 제도들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4. 이러한 과제들은 사법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완수될 수는 없기 때문에 국민-다중이 행정주권과 입법주권을 획득하는 과정과 동시병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동물과 집회

“[네팔의 자나 안돌란 당시] 비라트나가르에서는 당나귀와 개와 고양이도 검은색 스카프와 민주주의 구호로 장식한 채 거리를 뛰어 다녔다”(조지 카치아피카스, <아시아의 민중봉기>, 원영수 옮김, 오월의봄, 347쪽)

서초동에서도 “검찰개혁, 윤석열체포” 띠를 두른 반려견이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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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조사편의주의와 윤석열 총장의 과잉대응에 대해

1.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겨레 하어영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은 과잉대응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자의 기사는 윤총장이 윤중천으로부터 ‘접대’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진술이 있는데 검찰의 조사나 수사가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왜 조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답해야 할 순간에 검찰총장이 나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며 논점을 벗어난 대응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잉이고 그것이 언론의 질문에 말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두 번째 과잉이다. 이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협박으로 느껴진다.

2. 윤석열 총장이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공직자인 때에 그 공직자의 접대 혐의에 대한 윤중천의 과거사진상조사단 진술이 있었고 이에 대해 추가 조사/수사가 없었다는 것이 하기자의 보도내용이다. 검찰이 누구를 조사하고 누구를 조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주권자 국민의 주권행사의 필요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검찰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보도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기소편의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수사편의주의의 악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된다.

3. 장자연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국회의원의 이름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 이름이 홍준표임은 홍준표 자신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홍준표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를 혼내 주었다고 유튜브를 통해 자랑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윤지오가 자신의 이름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진술했다며 윤지오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윤석열이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홍준표가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결과는 동일하다. 문제는 왜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것은 조사하고 어떤 것은 조사하지 않는가, 하는 것 즉 조사, 수사, 그리고 기소의 임의성이다. 

4. 윤석열 총장은 혐의가 있으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하는 것으로 좋은 평판을 얻은 검사다. 조국 일가에 대한 이른바 ‘먼지털이식’ 수사도 바로 그런 논리와 이미지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혐의에 대한 검찰의 조사 회피문제를 제기한 하어영 기자를 고소한 것은 자신을 예외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어영 기자를 고소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도 한 치의 남김도 없이 먼지 털듯이 조사하고 수사하라고 말하는 것이 일관된 태도였을 것이다.

5.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식의 동문서답을 하고 있고 조국 장관은 그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검찰이 윤석열을 ‘조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하어영 기자의 주장에 기초한다면,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단정하는가? 또 조국 장관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을 무엇을 근거로 내렸는가? 공식적인 조사가 없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조사자료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런 발언의 당사자들은 윤중천 진술과 관련하여 윤석열 총장에 대해 갖고 있는 조사자료를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이며 만약 있다면 그 조사자료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김경록 인터뷰 pdf 파일

김경록 인터뷰는 최근의 사태를 이해하는 중요한 일차자료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KBS, 유시민과의 인터뷰 자료 두 종류를 정독했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언론과 검찰은 정말 조심해야 할 집단이다.’ 핵심인물의 인터뷰 진술이 위와 같은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지금 전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사건 스케치를 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의아스럽다. 추후 시간과 조건이 된다면 코멘트해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읽은 자료를 토론용으로 올려두기만 한다.

검찰개혁의 발본화를 위한 조건: 2019년 9월 28일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검찰권력은 행정권력 중에서 군사권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전쟁을 통해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권력임에 반해 검찰권력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타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원칙적으로는 타국의 국민들을 겨냥하지만(전두환 시기의 군부에서 보듯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검찰권력은 자국의 국민들을 겨냥한다.

군사권력과 검찰권력의 수뇌는 선출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뇌들은 위로부터 대통령의 통제보다도, 오랜 시간 속에서 재생산되는 군부 및 검찰 관료집단들의 통제를 더 많이 받는다. 해당 관료조직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익을 위배하면서 관철될 수 있는 여지는 여기서 발생한다. 검찰이 형벌권을 관료조직과 관료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 국가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국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주장을 통해 검찰개혁을 추진해 온 인물이다. 이 두 방안을 통해 검찰이 실제적으로 현재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생각일 것이다. 관료는 이미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만큼 완강한 세력이다. 조국의 개혁 방안은 관료체제와 관료계급을 온존시키면서 관료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은 관료계급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료계급 내부 역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도 관료조직이며 관료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료계급의 문제를 방기하는 한, 공수처도 그러한 관료계급의 일부로 편입되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경검 사이의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직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행위를 하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관료계급 내에서의 일정한 세력균형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관료계급의 지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방안에 머문다면 그러한 검찰개혁의 방향은 계급으로서의 관료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관료조직의 역관계 재배치를 통해 실질적 변화가 도입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질적 변화는 다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다중을 대상으로 통치행위를 수행하는 관료계급을, 자기조직화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에 맡겨 관료들이 독자적 계급으로서 재구성될 수 없도록, 국가기관이 다중의 절대민주적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관료권력의 재분배와 재조직을 넘어 권력체제 그 자체의 아래로부터의 재구성과 권력기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조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그 조직력을 기초로 대의기구에 대한 섭정 능력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관료계급을 약화시키고 궁긍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에서 검찰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장기혁명의 방향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넘겨주어야 한다. 자기조직화된 국민들이 원칙적으로 수사권을 갖고 필요한 수사행위를 자율적 시민수사기구, 각 분야의 전문 수사기구, 경찰 등에 필요에 따라 위임, 배당한다는 구상 위에서 검찰개혁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의 수사를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수사권을 갖는 시민주도의 특별조사위원회가 제안된 바가 있는데 이것은 검찰 개혁을 사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례로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검찰이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여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등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범죄혐의를 운위하면서다. 이 담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을 통해 지배적 담론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러한 ‘부적격’ 담론은 조국이 말과는 달리 실제에서는 정의롭지 못하며 사회 하층의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계급)에 살고 있으므로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적 생활과 공적 발언 사이에 격차가 크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메시지)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메신저)에 주의를 돌리는 주장이다.

보수언론, 보수정당, 경검 등 제도적 보수세력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혁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혁과 혁명을 지향하는 좌파이다. 개혁과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구해온 좌파 세력의 상당 부분이 조국 사태에서는 무관심을 표명하거나 이러한 우파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보수우파가 그렇게 반응한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에서건 좌파가 무관심하거나 반조국 전선에 가담함으로써  반조국전선은 의도되지 않은 좌우합작 전선으로 강화되어 왔다.

혁명적 사회변혁은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의 개혁노선은 어중간하여 실질적 변화의 필요성과 실질적 변화의 방안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때문에 좌파가 검찰개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되는 상황에서 우파 주도의 반조국전선에 가담하여 공조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조국이 법무부장관 자격이 없으므로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던 주장은 이제 조국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통령이 조국을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타난다. 임명 전과 비교해 이제 조국이 ‘범죄자’라는 미확인의 주장까지 더해졌다.

조국이 만약 범죄자임이 확인된다면 그가 장관직을 수행해서는 안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수정당들과 보수언론들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퇴나 해임 심지어 구속을 주장하는 것은 불확실한 여론으로 여론재판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이런 식의 재판에서는 언론, 방송 등을 장악하고 있는 우파 언론 집단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조국이 법무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무부 장관’이라는 부르주아 사회기관과 직책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법과 법무행위가 좌파적 시각에서 그토록 ‘정의’로운 것이었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법과 법무행위는 원리상 부르주아적 정의와 부르주아 체제를 재생산하는 기관일 뿐 프롤레타리아 다중의 정의와 다중의 해방을 실현하는 기관이 아니다. 역대 법무부 장관의 면면은 이 사실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지금까지 어느 법무부 장관에게도 적용하지 않던 ‘프롤레타리아적 정의’라는 기준을 조국에게만 적용하는가?

조국이 계급적으로 비정규직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논점도 같은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지금까지 어떤 법무부 장관이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앓으며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 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법무부 장관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대를 기준으로 조국의 자격 문제를 논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직책은 관료지배계급의 고위직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 혁명의 주체가 아니다. 나는 반조국전선에 서 있는 좌파 부분이 혁명의 대상과 주체를 혼동하는 심각한 범주 착오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법무부장관 임명, 직위의 문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개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 계급간 문제 즉 혁명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혁의 문제는 혁명의 문제로 전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으로는 우파 주도의 반개혁노선과 공조하게 되는 도덕주의적 행위양식을 통해서 달성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개선할 힘은 그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법무부 장관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대의할 수 있는 법무부 장관이 임명되도록 만드는 것도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반조국 흐름은 지금 명확하게 개혁에 반대하는 지배계급 내 우파 주도로 개시되고 또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한 행동은 이러한 우파 흐름에 맞서 조국과의 연합을 통해 조국을 더 급진적인 개혁방향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 즉 혁명의 대상인 법무부장관을 혁명의 동반자로 전용하는 섭정의 정치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반개혁 우파 흐름에 실천적으로 연합하게 되는 반조국좌우연합전선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서초동 대검찰정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이런 점에서 교훈적이다. 150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이 집회에서 촛불시민들은 정치검찰 퇴진, 자유한국당 해체, 조중동 폐간, 검찰 개혁, 공수처설치, 조국 수호를 외쳤다.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이 박근혜를 파면시킨 2016-7년의 촛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구호, 깃발, 리듬, 호흡 등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좌파 일부의 촛불로부터의 철수였다. 이 철수는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관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좌파 대오를 서초동 촛불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반면 반촛불 우파는 비록 왜소한 형태였지만 대검찰청 앞에서 촛불시민과 대치하며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었고 문재인 탄핵, 조국 구속을 외쳤다.

촛불시민은 박근혜를 탄핵했던 아래로부터의 섭정정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것은 다중의 섭정감각을 간과하는 엘리뜨주의 지식인의 편협한 관점일 수 있다. 좌파는 조국 수호에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인다. ‘조국 수호’ 슬로건이 ‘메신저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국 수호’는 인격으로서의, 계급으로서의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메시지’, 즉 검찰개혁이라는 메시지를 개혁에 반대하는 우파의 기도로부터 수호하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제도적 청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사법적 인적 청산으로 만듦으로써 적폐권력인 검찰의 힘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이 전개되어 왔다. 조국 사태는 적폐를 통해 적폐를 청산해온 이 역설의 효과가 드러나는 현장의 하나이다. 조국은 스스로 ‘가진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약하고 불충분하나마 대한민국의 적폐권력인 검찰의 개혁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드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가진 자’로서의 행보와 ‘사회개혁’의 행보 사이에 드러난 간극과 모순을 단순히 ‘위선’으로 평가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을 넘어서려는 지적 노력으로 볼 수는 없을까? 조국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그것이 비록 불철저하고 불충분한 노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노력이 실제로 성과를 얻고 더 발본적으로 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다중 전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위험은 흔히 주장되듯이 그가 검찰개혁을 주장했으면서 사생활에서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도덕적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존재와 의식 사이의 이 괴리와 모순은 조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겪고 있고 또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검찰개혁 구상이 불철저하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개혁행보가 관료계급과 자본의 공동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반개혁적 관료세력과 타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사모펀드를 통해 치부를 추구하고 대입제도를 이용해 자녀의 영달을 추구한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가장이라는 점을 들어 지명철회를 요구하고 해임을 요구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촛불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것이다. 치부와 영달의 추구는 부르주아 사회가 모든 개인에게 강제하는 생활 논리, 즉 생리의 문제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가진 자’의 집단은 치부와 영달추구를 위한 매우 많고 다양한 수단들을 갖고 있는 반면 ‘못 가진 자’의 집단은 그 수단이 지극히 협소하거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를 벗어나는 길로서 유력한 것은 타인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사회를 공동생산 및 공동증여의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의 개인을 도덕적으로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고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인 다중 자신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사회의 구조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다중이 연합하여 조국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검찰개혁을 법무부 장관의 권한을 사용하여 더 발본적으로 실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박하는 것이지 그의 해임, 사퇴, 구속 등의 요구로 그의 검찰개혁 노선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응양식은 실천적으로 검찰개혁을 급진화하고 발본화해야 할 시기에 검찰개혁에 반대함으로써 문재인 정부 이후 더욱 비대해진 검찰 적폐권력의 독주를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이 좌파라면 조국에 대한 도덕적 계급적 비판을 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논리를 기초로 촛불시민들과 함께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그 검찰개혁이 더욱더 근본적인 개혁이 될 수 있도록, 즉 사회혁명의 문을 여는 개혁으로 될 수 있도록 법무부장관인 조국과 관련 기관에게 촉구하고 압박하는 개혁적 섭정행동에 나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검찰개혁의 발본화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아래로부터의 길, 좌파적 길이지 않을까?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