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금 집단반환소송에 대한 윤지오의 항변에 대해 생각한다.

후원금 집단반환소송 움직임과 관련하여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나는 한 번도 돈을 달라고 구걸하거나 협박한 적이 없다
  2. 후원계좌를 열어달라고 제발 열어달라고 무엇이라도 돕고 싶다고 누차 거듭 말씀 하셨던 분들은 내가 아닌 시민 여러분이었다.
  3. 현재까지 모금되어진  두 번의 후원금은 내 의견이 아니었다. 후원금에 관해 누차 고민을 해도 내가 함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고 여러 차례 그러한 입장을 말씀드렸다.
  4. 그 후원금조차 나는 한 푼도 안 썼다.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본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해 달라고 캐나다에 있던 나를 한국으로 부른 것은 대한민국국민이고, 나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증언할 수 있도록 경호를 위한 후원을 하게 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대한민국국민이고, 후원통장을 개설하도록 조언한 것도 내가 아닌 대한민국국민이다. (참고로 후원통장 개설은 윤지오의 안전에 대해 진실로 걱정을 하고 있던 고발뉴스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를 후원해준 그 국민들이 마치 채권자처럼, 그리고 내가마치채무자인것처럼 후원금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후원금은 돌려줄 의무가 있는 돈이 아니다. 빚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입금된 후원금 중의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에게 반환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거짓목적으로 당신들을 기망하여 후원금을 걷음으로써 돈벌이를 했다’는 이유로 가해져 오는 반환소송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 나는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지상의 빛>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싶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은 나에게 약주고 병주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모독하고수치스럽게하는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빛> 굿즈 제작 사업의 강제중단에 대해서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언니를 추모하는 굿즈가 아닌 ‘제5대 강력범죄’에 속하지 않아서, 보호시설도 어떠한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제2의 피해자, 목격자, 증인을 위해서 실질적인 보호시설 경호 인력 생활비 등 도움을 드리고자 제작하려 했다.
  2. 이런 굿즈를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둥 말도 안되는 모함과 욕설과 증오가 가득 섞인 저주를 퍼부어댔다. 굿즈는 제작조차 되지 못했고 당연히 판매는 되지도 않았다.
  3. 그런 내가 왜 사기꾼, 범죄자 또 저도 모자라 아무런 죄도 없는 저희 엄마는 공범이라는 발언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역시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지상의 빛>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 목격자, 증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했다. 이 비영리단체의 기금 안정성을 위해 굿즈 제작 판매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굿즈 판매를 ‘시체팔아 돈번다’고 모함하고 욕설하는 또 다른 국민들때문에 굿즈 제작은 포기되었고 판매는 물론 되지 않았다. 내가 범죄자, 사기꾼인가? 아니면 나를 사기꾼, 범죄자로 모는 당신들이 사기꾼이고 범죄자인가? 아무 죄 없는 나의 엄마를 공범으로 모는 당신들이 바로 범죄혐의자이지 않은가?’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윤지오의 항변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를 불러 위험한 증언대 위에 세운 후, 증언이 끝나고 나서는 보호는커녕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나아가 윤지오에게 사기, 명예훼손, 표절 등 닥치는 대로 범죄혐의를 씌우고 있다. 인간적 성찰은 온데간데 없고 사법주의가 판을 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민을 앞세워 소송전쟁을 시작한 변호사 박훈의 책임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윤지오의 과거 삶으로부터 특정한 이미지를 문맥 밖으로 추려내 타락하고 음탕한 몸파는 여자라는 식의 여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계급차별적인 이미지로 조작하고 이것으로 윤지오를 집단학대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것과 다름 없는 짓을 대한민국 국민이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다. 이순간대한민국이라는국가공간은 ‘승리의단톡방’과본질에서전혀다를것이없다. 

또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버젓이 걸어놓고 실제로는 어떤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심지어 소송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윤지오를 범죄자로 단정하여 단죄하고 희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입증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혐의를 만들어 윤지오에게 덧씌우고는 윤지오를 범죄자로 몰면서 이제 증언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는 이 모순에 찬 광기에 대해 성찰하고 윤지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증언자를 검증해야겠다면 그 전에 검증에 나설 국민들이 제대로 된 국민인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인지부터 검증해보는것이 절실하다.

물론 이러한 광기의 배후에 장자연을 죽게 만든 바로 그들, 정치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 들의 음험한 지배야욕과 지배계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야욕과 계략에 이끌리고 휘둘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 자신의 자기결정에 따른 사고와 행동을 면책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금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위선자-국민, 사기꾼-국민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기모순일 뿐만 아니라 헌법위반 행동이며 그 자체로 범죄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지오에게 진실로부끄럽고죄스러우며 대한민국을 위선자의 나라, 사기꾼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금할수없다. ‘촛불정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아직나라가아니다. 나라다운나라는누가어떻게세울것인가?

다시 순수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른바 ‘<지상의 빛> 후원금 집단반환 소송’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2019년 6월 6일자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윤지오가 창립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에 대한 집단반환 소송 준비 뉴스로 요란한다. <중앙일보>의 기자(?) 백희연은 아예, ’윤지오에 등돌린 후원자들, 결정타는 거짓증언.작품표절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윤지오의 후원자들이 모두 윤지오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또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인 것처럼 제목을 뽑아놓았다. 

미디어 이데올로기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인간과 그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체험된 관계들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인간과 존재조건 사이에 미디어들이 깊숙히 개입하여 우리들의 체험을 매개한다. 체험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면서 우리가 존재조건을 직접 맛보고 체험할 여지를 뺏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질러대는 거대한 소리에 눌려 우리 마음의 고유한 진동을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갖지 못한다. 잡음이 고요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물어 본다. 사람들이 왜 지금 자신이 낸 후원금을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라는 폭력

후원자들의 법률대리인인 변호사 최나리는 윤지오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이유가 ‘윤지오가 말한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며 ‘후원자들을 기망해서 후원금을 모은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 단정만 있을 뿐 소송 사유를 보도한 동아일보에도 윤지오가 설정한 목적이 어떤 근거에서 거짓이라고 단정하는지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최누리 변호사는 이제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설립이라는 목적이 왜 거짓인지를 입증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처럼 증언자 보호장치가 미흡한 나라에서는, 어려움 속에서 증언을 한 증언자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하여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거짓임을 과연 입증할 수 있을까? 적어도 2개월여 이 사건을 지켜보고 연구해온 나로서는 변호사 최나리의 주장이 인간 윤지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만약 후원받는 목적이 거짓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다른 이유로 이미 낸 후원금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원금은 후원을 받는 쪽이 일정한 채무를 부담하는 부담부 증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후원받은 돈을 1원도 쓰지 않았고 <지상의 빛>이 정상화되면 그 목적에 맞게 그 후원금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모호한 의심은 ‘윤지오 죽이기’의 집단적 생산물

그런데 이처럼 승소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 소송에 왜 37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가하게 되었을까? 참가의 조건을 살펴보면 변호사 최나리가 무료 소송을 진행해 준다는 김수민 측의 홍보가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참가의 원인은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 김모씨는 채널A와 인터뷰에서 “모금 진행 중 윤씨의 말이 조금씩 번복되는 모습을 봤고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됐다”라며 “모금된 후원금이 얼마인지, 어디에 썼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했다(세계일보, 2019.6.6; 강조는 인용자)

윤지오의 말이 어디에서 어디로 번복되었다는 것일까? <지상의 빛> 설립목적이 변경되었다는 것인가? 윤지오의 말에 따르면, 후원금은 아직 1원도 쓰지 않았다고 하므로 어디에 썼는지는 이미 밝힌 것이며 모금된 후원금은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했으므로 그 단체가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 후 필요할 때 문제를 제기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닐까?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윤지오의 진실하지 못함이라기보다 윤지오를 뒤흔들어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목적을 실행할 사업을 할 수 없도록 밤낮으로 공격하는 무리들 때문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때로는 친구, 애인, 자녀, 부인, 남편 등의 진실성조차 의심하는 경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대개 진실 대 허위의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풀어야 할 실천적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말이다. 그것은 윤지오에 대한 막연한 의심이다. 그 의심이 막연한 것은 그것이 사실근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 선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생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원금 반환소송의 정치재판적 성격

만약 위와 같은 의미의 추상적이고 막연한 진실성이 후원금 반환소송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면 후원금을 받는 모든 단체는 항상 소송에 휘말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상시적 불신의 조건에서라면 후원행위는 사회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진술의 진실성이 문제라면 나는 적어도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 없도록 만든 주도자였던 김대오의 진술보다는 윤지오의 진술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증거를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 개월간 지속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불가능할 만큼 훼손시키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경우 윤지오의 향후 있을 수 있는 증언투쟁을예방하기 위해 이런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투쟁을미연에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소송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촉구되고 홍보된 일종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순수주의의 환상과 그 위험성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 걸면서 할 때에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는 행동을 하면 그의 증언은 진실성을 잃는 것인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에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체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요컨대 증언자는 순교자일 때에만, 혹은 인간이 아닌 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강한 순수성을 요구하면 할수록 증언자는 보호받을 수 없고 상처입기 쉽고 위험해지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기대하는 순수주의의환상이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데 꼭 필요한 증언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범죄자들을 보호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늘 순수주의는 다중을 무력하게 만드는 지배자들의 무기였다.  “윤지오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최초 폭로글의 제목이 바로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구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정말 “김수민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방식으로 물어도 되는 것일까?

헐리우드 영화에서 제도 대 개인

제도 대 개인

영화 <서치>. 피터 킴(주이공)이 담당경찰과 제도의 가면극 및 여론의 장막을 뚫고 실종된 마고(딸)를 찾아내는 이야기.

이 영화에서 경찰(제도)이 범죄 수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고 범죄를 은폐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담당경찰의 특수한 개인적 이유(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제도 일반이 사실은 이와 유사한 개인적 이유들로 엮여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것이다. 공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들의 제도적 네트워크일 뿐이다.

피터 킴은 마고의 실종에 직면하여 실종현장인 호수를 찾아내고, 딸이 마리화나를 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담당경찰이 사건 은폐를 위해 자백범인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자주 개인 자율성, 특이한 개인들의 자율성을 그린다. 대개는 그것이 개인의 영웅화와 얽혀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집단적 자율은 좀체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도 앎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필요(마고를 찾고 싶다, 마고를 찾아야 한다)에서 나온다는 것, 제도는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비록 흥행의 필요에서이겠지만) 자주 강조한다.

<어느 가족>의 모색

영화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혈연주의 가족이 도달해 있는 참상을 드러내면서 비혈연적 비제도적 가족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이다. 아쉬운 것은 그 모색 속에서도 계속 아빠, 엄마, 오빠와 같은 혈연적 어휘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고 그 오이디푸스적 구도[의 잔재]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는 것. 그냥 각자의 이름들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전근대적인 것의 대안근대적 잠재력

제와 굿이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경우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연속과정에서 전근대적 비합리(미신)로 간주되어 타파대상으로 된 후 사회의 비주류로, 후미진 구석으로 내몰렸다는 김수남 작가의 관점은 근대화의 폭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제와 굿, 무속 속에 깃들어 있는 비근대적 생명력을 대안근대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주어진다. 백남준이 서구의 과학기술과 몽골적 샤머니즘을 결합시키려 했을 때 이미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