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

아침에 일어나 박준영 변호사가 쓴 다음 글 <공범>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재심>을 통해 쌓은 정의의 이미지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을 내려치는 망치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경악과 분노 때문에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켜가며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

국민 개개인에 대해 인간주의적 이해보다 국가의 비용 배분의 향방과 양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관료주의다.

관료들은 “내(국가)가 너희(인간)에게 은혜(복지)를 베푼다. 너희의 선함을 나에게 입증하라”고 주장한다.

관료들은 이렇게 국민 앞에 자신이 시혜집단임을 내 세움으로써 자신을 국민 위에 옹립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그 관료집단에게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관료집단에게 지출되는 국가비용이면 가난한 국민들의 대다수가 선함을 입증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꾸리는 데 충분할 것이다. 왜 국민이 자신들의 노복들(servants)에게 선함을 입증해야 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 배우에게 정말 “헤어샵으로 와 달라고 통보”한 적이 있는지 물어 사실확인을 했는가?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고 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경호원과 함께 택시 타고 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는가?

국민이 국가기관을 시켜 대한민국으로 불러온 증인에게 국가가 보호목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에 대해 박준영 변호사가 자신의 경험(저는…본 적이 없다)을 잣대로 비난의 글을 올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박준영 변호사가 술접대 자리에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노래하고 춤춰 본 적이 있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실세 권력자들의 불의와 부정을 증언하는 자리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증언 후에 누가 뒤따라 오지 않나 뒤돌아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걸려오는 전화마다 녹음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 불안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인기척에 소스라쳐 떨어본 적이 있는가?

이 사회가 적대로 가득차 있고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사람들이 약자들을 향해 어르릉대고 있음을 느껴 본적이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미지에 왜 아이들이 앞모습을 보이지 않고 뒷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자신의 두려움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두려움이고 윤지오 배우가 느끼는 두려움과 그에 대한 표현은 “가해의 실체에 대한 의혹을 부풀리는 의도”의 표현으로서 부당하고 의심스런 두려움인가?

“긴 시간 윤지오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이런 윤지오의 문제점을 몰랐을까요.” 

어떤 문제점 말인가?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며 정신감정 결과를 제출한 것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에 살면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사는지 아는가?

장자연의 주검이 부검도 없이 유족의 뜻에 따라 경찰에 의해 처리된 후 대한민국은 10년이 넘는 사회적 갈등 속에 휩싸여 있다.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명확한 증거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시신을 처리함으로써,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인 시신을 불투명하게 처리함으로써 왜 국가기관은 이토록 국민들을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만드는가?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이 명확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의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죽게 되거든 유가족이 뭐라하든 부검해 달라는 윤지오 배우의 이 유언 아닌 유언이 왜 문제점인가?

지금 윤지오가 악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일에 그의 가족인 이모부가 앞장 서 있다.

만약 윤지오에게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 일이 그의 “유가족”의 뜻에 따라 처리되어도 되는가? 

나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나의 꿈은, 유태우 박사의 가르침대로, 9988234,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을 끙끙 앓고 죽는 것이다. 나는 시신이 악의에 따라 임의처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의 시신을 기증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유서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한, 반드시 부검해 달라.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의 정신감정 결과 제출에 대해 문제점을 느꼈다고 자신 외에 진상조사단의 그 누구로부터 또 이야기를 들었는가? 확인했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왜 “이를 알거나 알 수 있었으면서 침묵 했던 모두가 공범입니다”라며 애매한 가정법 기술을 써서 윤지오 배우를 범죄자로 모는가? “뒤늦게 이야기한 저도 공범이구요”??? 박준영 변호사가 어떤 유형의 범죄자일지는 모르나, 윤지오 배우는 범죄자가 아니며 따라서 박준영 변호사의 공범이 아니다. 왜 변호사의 신분을 갖고서 헌법 제27조 제4항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해 한 인간을 유죄로 단죄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조선일보 기자의 추행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폄하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윤지오 증언자가 박준영 변호사의 무고로 인해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그 조선일보 기자도 무혐의 처분에 준하는 약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 증언을 폄하하는 실제적 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조선일보의 전직 기자를 구하고, 조선일보를 구하는 실행방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조선일보 구하기의 행동인가?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과거사진상조사단원들은 바보들로 만들고, 그들을 모독하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그럴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증언들을 교차 비교하고 물적 증거와 대조하여 사실인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나름 대로의 검증작업을 하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은 유지되었다. 

우리가 더 이상의 검증을 요구한다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최종 심의발표가 진상조사단의 조사와 일치하는지, 또 진상조사단의 조사가 충분히 증인들의 증언들과 증거들을 실사구시적으로 비교검토했는지, 증인은 충분히 확보했는지, 강제수사력이 없음으로써 생긱 구멍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적 검증과정 바깥에서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 (증언이 아니라) 증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인간 윤지오의 사생활을 발가벗기고 증언자를 심문대에 세워 마녀사냥을 한 것 아닌가? 박준영 변호사가 원한 것이 그것이었는가? 노출이 어느 정도인지, 학력은 속이지 않았는지, 왜 그리 학력이 보잘 것 없는지, 작품이 표절은 아니었는지, 정치색이 뭔지, 평소에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왜 말할 때 눈을 굴리는지, 계좌에 후원금은 얼마나 모였는지, 왜 자신의 계좌를 공개하지 않는지, 혹시 계좌에서 사적 목적으로 쓴 돈은 없는지, 왜 기자들에게 오만하게 구는지, 목소리가 왜 그렇게 짜증나는지, 유가족을 혹시 비난 한 적은 없는지, 왜 왕진진의 글이 가짜라는 것을 식별하지 못하는지…. 이 악무한적 의혹들과 비난들의 광기가 ‘증인도 검증되어야 한다’고 박준영 변호사가 제안하면서 의도했던 그것이었는가?

2019년 늦봄과 초여름에 대한민국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전 시민사회적이고 전 국가적인 사업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하려는 자는 반드시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세계만방에 천명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짓밟는 이 반헌법적 광기의 선봉에 박준영 변호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똑 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미 공인인 박준영 변호사의 말과 삶은 이제, 그가 윤지오 배우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일거수일투족 검증되어야 한다. 혹시 그가 출마의 기회를 얻거나 관직을 얻거나 돈을 벌거나 하는 등의 사적 목적으로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지나 않았는지/않은지 검증되고 또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이후 박준영 변호사가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치부를 하거나 언론의 칼럼 자리를 얻거나 하는 식의 이득 취득의 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이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사적 목적을 위해 부풀려 얻은 사익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토론을 공정하게 끌고 가기 위해 아래 내 스스로 박준영 변호사에게 페친 신청을 했고 아래 댓글도 달았다.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에 대한 윤지오의 항변에 대해 생각한다.

후원금 집단반환소송 움직임과 관련하여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나는 한 번도 돈을 달라고 구걸하거나 협박한 적이 없다
  2. 후원계좌를 열어달라고 제발 열어달라고 무엇이라도 돕고 싶다고 누차 거듭 말씀 하셨던 분들은 내가 아닌 시민 여러분이었다.
  3. 현재까지 모금되어진  두 번의 후원금은 내 의견이 아니었다. 후원금에 관해 누차 고민을 해도 내가 함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고 여러 차례 그러한 입장을 말씀드렸다.
  4. 그 후원금조차 나는 한 푼도 안 썼다.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본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해 달라고 캐나다에 있던 나를 한국으로 부른 것은 대한민국국민이고, 나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증언할 수 있도록 경호를 위한 후원을 하게 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대한민국국민이고, 후원통장을 개설하도록 조언한 것도 내가 아닌 대한민국국민이다. (참고로 후원통장 개설은 윤지오의 안전에 대해 진실로 걱정을 하고 있던 고발뉴스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를 후원해준 그 국민들이 마치 채권자처럼, 그리고 내가마치채무자인것처럼 후원금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후원금은 돌려줄 의무가 있는 돈이 아니다. 빚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입금된 후원금 중의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에게 반환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거짓목적으로 당신들을 기망하여 후원금을 걷음으로써 돈벌이를 했다’는 이유로 가해져 오는 반환소송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 나는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지상의 빛>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싶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은 나에게 약주고 병주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모독하고수치스럽게하는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빛> 굿즈 제작 사업의 강제중단에 대해서 윤지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 언니를 추모하는 굿즈가 아닌 ‘제5대 강력범죄’에 속하지 않아서, 보호시설도 어떠한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제2의 피해자, 목격자, 증인을 위해서 실질적인 보호시설 경호 인력 생활비 등 도움을 드리고자 제작하려 했다.
  2. 이런 굿즈를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둥 말도 안되는 모함과 욕설과 증오가 가득 섞인 저주를 퍼부어댔다. 굿즈는 제작조차 되지 못했고 당연히 판매는 되지도 않았다.
  3. 그런 내가 왜 사기꾼, 범죄자 또 저도 모자라 아무런 죄도 없는 저희 엄마는 공범이라는 발언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역시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지상의 빛>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 목격자, 증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했다. 이 비영리단체의 기금 안정성을 위해 굿즈 제작 판매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굿즈 판매를 ‘시체팔아 돈번다’고 모함하고 욕설하는 또 다른 국민들때문에 굿즈 제작은 포기되었고 판매는 물론 되지 않았다. 내가 범죄자, 사기꾼인가? 아니면 나를 사기꾼, 범죄자로 모는 당신들이 사기꾼이고 범죄자인가? 아무 죄 없는 나의 엄마를 공범으로 모는 당신들이 바로 범죄혐의자이지 않은가?’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윤지오의 항변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를 불러 위험한 증언대 위에 세운 후, 증언이 끝나고 나서는 보호는커녕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나아가 윤지오에게 사기, 명예훼손, 표절 등 닥치는 대로 범죄혐의를 씌우고 있다. 인간적 성찰은 온데간데 없고 사법주의가 판을 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민을 앞세워 소송전쟁을 시작한 변호사 박훈의 책임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윤지오의 과거 삶으로부터 특정한 이미지를 문맥 밖으로 추려내 타락하고 음탕한 몸파는 여자라는 식의 여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계급차별적인 이미지로 조작하고 이것으로 윤지오를 집단학대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것과 다름 없는 짓을 대한민국 국민이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다. 이순간대한민국이라는국가공간은 ‘승리의단톡방’과본질에서전혀다를것이없다. 

또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버젓이 걸어놓고 실제로는 어떤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심지어 소송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윤지오를 범죄자로 단정하여 단죄하고 희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입증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혐의를 만들어 윤지오에게 덧씌우고는 윤지오를 범죄자로 몰면서 이제 증언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윤지오에게 행하고 있는 이 모순에 찬 광기에 대해 성찰하고 윤지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증언자를 검증해야겠다면 그 전에 검증에 나설 국민들이 제대로 된 국민인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인지부터 검증해보는것이 절실하다.

물론 이러한 광기의 배후에 장자연을 죽게 만든 바로 그들, 정치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 들의 음험한 지배야욕과 지배계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야욕과 계략에 이끌리고 휘둘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 자신의 자기결정에 따른 사고와 행동을 면책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금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위선자-국민, 사기꾼-국민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기모순일 뿐만 아니라 헌법위반 행동이며 그 자체로 범죄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지오에게 진실로부끄럽고죄스러우며 대한민국을 위선자의 나라, 사기꾼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금할수없다. ‘촛불정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아직나라가아니다. 나라다운나라는누가어떻게세울것인가?

다시 순수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른바 ‘<지상의 빛> 후원금 집단반환 소송’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2019년 6월 6일자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윤지오가 창립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에 대한 집단반환 소송 준비 뉴스로 요란한다. <중앙일보>의 기자(?) 백희연은 아예, ’윤지오에 등돌린 후원자들, 결정타는 거짓증언.작품표절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윤지오의 후원자들이 모두 윤지오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또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인 것처럼 제목을 뽑아놓았다. 

미디어 이데올로기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인간과 그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체험된 관계들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인간과 존재조건 사이에 미디어들이 깊숙히 개입하여 우리들의 체험을 매개한다. 체험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면서 우리가 존재조건을 직접 맛보고 체험할 여지를 뺏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질러대는 거대한 소리에 눌려 우리 마음의 고유한 진동을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갖지 못한다. 잡음이 고요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물어 본다. 사람들이 왜 지금 자신이 낸 후원금을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라는 폭력

후원자들의 법률대리인인 변호사 최나리는 윤지오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이유가 ‘윤지오가 말한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며 ‘후원자들을 기망해서 후원금을 모은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 단정만 있을 뿐 소송 사유를 보도한 동아일보에도 윤지오가 설정한 목적이 어떤 근거에서 거짓이라고 단정하는지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최누리 변호사는 이제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설립이라는 목적이 왜 거짓인지를 입증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처럼 증언자 보호장치가 미흡한 나라에서는, 어려움 속에서 증언을 한 증언자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하여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거짓임을 과연 입증할 수 있을까? 적어도 2개월여 이 사건을 지켜보고 연구해온 나로서는 변호사 최나리의 주장이 인간 윤지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만약 후원받는 목적이 거짓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다른 이유로 이미 낸 후원금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원금은 후원을 받는 쪽이 일정한 채무를 부담하는 부담부 증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후원받은 돈을 1원도 쓰지 않았고 <지상의 빛>이 정상화되면 그 목적에 맞게 그 후원금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모호한 의심은 ‘윤지오 죽이기’의 집단적 생산물

그런데 이처럼 승소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 소송에 왜 37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가하게 되었을까? 참가의 조건을 살펴보면 변호사 최나리가 무료 소송을 진행해 준다는 김수민 측의 홍보가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참가의 원인은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 김모씨는 채널A와 인터뷰에서 “모금 진행 중 윤씨의 말이 조금씩 번복되는 모습을 봤고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됐다”라며 “모금된 후원금이 얼마인지, 어디에 썼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했다(세계일보, 2019.6.6; 강조는 인용자)

윤지오의 말이 어디에서 어디로 번복되었다는 것일까? <지상의 빛> 설립목적이 변경되었다는 것인가? 윤지오의 말에 따르면, 후원금은 아직 1원도 쓰지 않았다고 하므로 어디에 썼는지는 이미 밝힌 것이며 모금된 후원금은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했으므로 그 단체가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 후 필요할 때 문제를 제기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닐까?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윤지오의 진실하지 못함이라기보다 윤지오를 뒤흔들어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목적을 실행할 사업을 할 수 없도록 밤낮으로 공격하는 무리들 때문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때로는 친구, 애인, 자녀, 부인, 남편 등의 진실성조차 의심하는 경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대개 진실 대 허위의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풀어야 할 실천적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말이다. 그것은 윤지오에 대한 막연한 의심이다. 그 의심이 막연한 것은 그것이 사실근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 선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생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원금 반환소송의 정치재판적 성격

만약 위와 같은 의미의 추상적이고 막연한 진실성이 후원금 반환소송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면 후원금을 받는 모든 단체는 항상 소송에 휘말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상시적 불신의 조건에서라면 후원행위는 사회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진술의 진실성이 문제라면 나는 적어도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 없도록 만든 주도자였던 김대오의 진술보다는 윤지오의 진술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증거를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 개월간 지속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불가능할 만큼 훼손시키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경우 윤지오의 향후 있을 수 있는 증언투쟁을예방하기 위해 이런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투쟁을미연에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소송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촉구되고 홍보된 일종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순수주의의 환상과 그 위험성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 걸면서 할 때에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는 행동을 하면 그의 증언은 진실성을 잃는 것인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에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체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요컨대 증언자는 순교자일 때에만, 혹은 인간이 아닌 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강한 순수성을 요구하면 할수록 증언자는 보호받을 수 없고 상처입기 쉽고 위험해지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기대하는 순수주의의환상이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데 꼭 필요한 증언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범죄자들을 보호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늘 순수주의는 다중을 무력하게 만드는 지배자들의 무기였다.  “윤지오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최초 폭로글의 제목이 바로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구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정말 “김수민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방식으로 물어도 되는 것일까?

헐리우드 영화에서 제도 대 개인

제도 대 개인

영화 <서치>. 피터 킴(주이공)이 담당경찰과 제도의 가면극 및 여론의 장막을 뚫고 실종된 마고(딸)를 찾아내는 이야기.

이 영화에서 경찰(제도)이 범죄 수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고 범죄를 은폐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담당경찰의 특수한 개인적 이유(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제도 일반이 사실은 이와 유사한 개인적 이유들로 엮여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것이다. 공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들의 제도적 네트워크일 뿐이다.

피터 킴은 마고의 실종에 직면하여 실종현장인 호수를 찾아내고, 딸이 마리화나를 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담당경찰이 사건 은폐를 위해 자백범인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자주 개인 자율성, 특이한 개인들의 자율성을 그린다. 대개는 그것이 개인의 영웅화와 얽혀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집단적 자율은 좀체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도 앎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필요(마고를 찾고 싶다, 마고를 찾아야 한다)에서 나온다는 것, 제도는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비록 흥행의 필요에서이겠지만) 자주 강조한다.

<어느 가족>의 모색

영화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혈연주의 가족이 도달해 있는 참상을 드러내면서 비혈연적 비제도적 가족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이다. 아쉬운 것은 그 모색 속에서도 계속 아빠, 엄마, 오빠와 같은 혈연적 어휘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고 그 오이디푸스적 구도[의 잔재]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는 것. 그냥 각자의 이름들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전근대적인 것의 대안근대적 잠재력

제와 굿이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경우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연속과정에서 전근대적 비합리(미신)로 간주되어 타파대상으로 된 후 사회의 비주류로, 후미진 구석으로 내몰렸다는 김수남 작가의 관점은 근대화의 폭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제와 굿, 무속 속에 깃들어 있는 비근대적 생명력을 대안근대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주어진다. 백남준이 서구의 과학기술과 몽골적 샤머니즘을 결합시키려 했을 때 이미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