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의 강제적 수용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의 결단으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2)

“결국 올바른 피해자다움이란 이번 판결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피해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최대한 격렬히 저항하고, 피해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신고한다. 피해 이후에는 가해자가 두렵고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티내고 싶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무조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 신고 과정에서는 자존감이 강해 보이는 단호한 모습 대신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해리 상태에 빠져야 한다. 평소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도 소송 과정에서는 신뢰할만한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상태’다. 모순 그 자체다.” -도우리[미디어스 기자]

강요된 피해자다움의 부득이한 수용: 기자로부터의 도피

‘동료배우 윤 모 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3번째 증언> 14장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를 받으면서 느낀 혼란에 대한 서술이며, 그 피해자다움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윤지오에 대한 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장자연을 대신하여)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자들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윤지오에게 “걸려 오는 전화도 마음 편히 받지 못할” 정도로 “나를 통해 언니의 일을 캐려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168)로 다가왔다. 기자들은, 취업을 위해 찾아간 치어리더 에이전시에도 찾아왔고 연예기획사를 찾아가면 그곳으로도 찾아왔다. “잠깐 동안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라며 그렇게 얼굴을 팔고 나면 지금보다는 더 활동하기 편해질 것”이라고 부추기며 “지상파 TV의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서 언니와의 관계나 그간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무명배우이다 못해 지망생”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존감을 갖고 살고 싶었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169)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자존의 ’떳떳함’은 이상하게도 당당함이 아니라 TV 출연을 거부하고 인터뷰를 거부하고 “ㄷ엔터 소속이었다는 말도, 자연 언니와 친분이 있었음”도 말할 수 없음을 통해서 겨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윤지오 자신에게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167)이었다. 그가 그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 것은 미인대회 관계자로부터 대회 출전을 하지 않도록 권유받았을 때였다. 그 관계자가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자신이  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미인대회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그런 권유를 한 것을 알았을 때, 윤지오는 장자연의 동료배우였다는 사실이 “낙인, 주홍글씨”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장자연이 겪었던 그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일까? 기자들이다. 윤지오는 소속사의 노예계약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소망이 김종승과의 다툼에 장자연의 삶을 이용하고자 했던 이미숙/유장호의 야망의 덫에 걸려 탄생한 것이 장자연 문건/리스트라고 파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약직 연예노동자 장자연이 경험한 성착취와 성수탈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조서이자 고발장으로 남아있다. 이 문건/리스트의 작성으로 인해 결국 장자연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장자연은 누가 봐도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2019년 4월 16일 이후 김수민이 윤지오와 관련해 맡고 있는 역할이 이런 성격의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게 피해자다움과 증언다자움을 강요하려는 가해권력의 필요를 여성의 위치에서 충족시키는 것, 즉 윤지오가 피해자 답지 않고 증언자 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 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 ‘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배우였던 자신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발아들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는 결단

거듭말하지만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2019년 3월 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였다. 이 유튜브 방송의 5: 37~7:04 구간에 김어준과 윤지오가 나눈 인터뷰 대화는 흥미롭다. 그 대화는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김어준: 지금까지 본인이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했는데 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지오: 국내에 거주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 살면서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모두 얼굴과 이름이 공개됩니다. 이런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존중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어준: 내가 숨어 살 이유가 뭐가 있냐, 나는 피해잔데…

윤지오: 가해자가 떳떳이 사는 것을 보면서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던 게 사실입니다.

김어준: 10년만에 장자연 사건이 다시 조사된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숨어살고 싶지 않다, 내가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잔데 가해자는 다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내가 10년간 숨어살다시피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그래서 결심을 하신거고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고 이야기해야 겠다 생각하신거죠. 이름이 윤지오씨입니다. 처음 모셨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gS_KHy4akx8&t=2s: 대화 내용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을  조금 고침.)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살았던 저 ‘숨어 살기’를 버리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결단은 무엇보다도 사건 이후에 윤지오가 보고 겪었던 캐나다의 경험에서 주어진다. 캐나다에서는 성폭력 관련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동등하게 공개되며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은 캐나다와 정반대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사는 데 피해자는 얼굴도 이름도 가리며 고개숙인 채 숨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고 가해자가 계속 가해할 수 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지오는 캐나다와 한국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점점 한국의 피해자들이 부당함과 억울함을 겪고 있음을 더 강하게 감각한다. 

이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정동적 변용의 체험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오가면서 그 문화적 차이공간 속에서 한 곳에 머물렀다면 몰랐을 것을 깨닫고 느끼지 못했을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인지적 정동적 변용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증언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결단은 행동으로 옮겨 졌는데, 거기에는 ‘강요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도 피해자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자’라는 사회개혁적 제안이 함축되어 있다.

<지상의 빛> 김상민 상임이사가 윤지오 대표를 대리하여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후원금 계좌와 관련하여 소명한 내용에 대한 메모

이후 아래로부터의 공통장의 구성에서 후원 및 자발적 기탁의 역할에 대해 고찰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후원금의 성격에 대한 김상민 상임이사의 소명 내용을 메모해 둔다.


1. <지상의 빛>(대표 윤지오)은 최근 이사회와 총회를 열어 <정의 연대> 사무총장 김상민을 7월 8일자로 상임이사로 임명하였다. (출두시에 해당 임명장은 경찰에 제출하였다.)
2. 김상민 상임이사는 그동안 방학썬 특검 촉구 비대위 활동을 하면서 윤지오씨와 연대활동하는 과정에서 서로 잘 알게 되었으며 <지상의 빛> 설립취지에 동감하여 회원가입을 했다. 김상민 상임이사는 정의연대 사무총장으로서 행정안전부 OGP(열린 정부 파트너십)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OGP 활동의 정신에 따라 가해자들로부터 온갖 음해를 받으면서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공익제보자 윤지오씨의 국내 대리인 역할을 자원하기로 하였다.
3.박훈 변호사가 고발한 후원금 건과 관련하여 김상민 상임이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였다. 신한은행 통장은 이상호 기자가 고발뉴스에서 윤지오씨의 신변보호를 걱정하여 경호비 등의 목적으로 후원할 계좌번호를 달라고 요청하여 유튜브에 공개한 것이고 윤지오씨는 그 통장에 얼마가 들어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또 윤지오 씨는 혹시나 음해세력들이 시비를 걸 것에 대비하여 서울시 민간협력과에 이상호 고발뉴스 피디 및 경호원과 함께 방문하여 “혹시 후원금 등록을 해야 하냐?”고 문의하였으나 신고나 등록대상이 아니라는 공무원의 답변을 듣고 돌아왔다.
4. <지상의 빛> 후원금 계좌인 국민은행 통장에 입금된 금액에 대해 기부금품법과 관련한 위법성을 묻는 경찰의 질문에 대해 김상민 상임이사는 <지상의 빛> 후원금은 기부금품금에 규정된 모금행위를 통한 후원금이 아니라 소속원으로부터 모은 금품이거나 자발적 기탁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조선일보와 박훈 등 음해세력들에 동조하여 이 기부금품법을 무리하게 적용하여 문제 삼는다고 하면 정의연대의 경우도 천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고 있으므로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자수하여 계좌 압수수색을 포함하여 수사를 요청할 계획임을 밝혔다. 또한 유튜브 등에서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는 수십만명도 고발하여, 압수수색 등 <지상의 빛>을 수사했던 방식으로 수사하지 않는다면 시민단체들이 나서 사이버수사대장을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6. 김상민 상임이사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조선일보와 결탁하여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무리한 압수수색을 진행한 점에 대해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 상을 받아 후원금 반환소송을 벌이고 있는 최나리 변호사, 박훈 변호사등과 공모한 점이 있는지, 사건청탁과 관련하여 변호사법 위반과 관련하여 사이버수사대장, 조선일보, 박훈, 최나리의 은행계좌를 압수수색을 검찰에 요청할 것이라고 하였다.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_프롤로그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성범죄를 방치하고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해온 공동체로 인해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갔던 것일까요? 피해자들의 입을 열 수 없게 만든 것이 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피해사실, 진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들을 꽃뱀, 창녀로 부르고 의심하고 손가락질해온 공동체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성폭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문제였고, 약자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홀로코스트였습니다.” -서지현

대한민국에 윤지오가 숨어 살아온 이유를, 또 그것을 강제한 억압적 조건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감각이 마비되고 지성이 혼탁해진 그런 사람들은,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이유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지각적 착시 속에서,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실명의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던 가명들의 윤지오와 혼동된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 윤지오는 숨어살지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이제 와서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할 이유도 권리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2019년 3월 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의 저 실명 공개와 얼굴 공개는 무엇이란 말인가?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실명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마치 수 십 년부터 자신이 윤씨, 김지연씨, 이순자씨, A씨, Y씨가 윤지오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틀며 오래 전부터 실명의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가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살지 않았다’를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숨어 살도록 강제하는 것은 권력이다. 힘의 비대칭이 눈을 부라리고 쫓아 다니는 사람과 숨 죽이며 숨어 사는 사람 사이의 기우뚱한 관계를 만든다. 숨어 산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유린당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 권력의 일부인 사람들은 이 비대칭과 유린의 상황에 둔감하다. 그것이 그냥 늘 그러한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낀다. 혹은 그 자신이 권력의 일부는 아니면서도 권력에 혼을 빼앗겨 권력의 지배와 권력 질서 없이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혼돈과 무질서 때문에 붕괴할 것이라고 여기고 그 붕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망각해 버린다. 즉 숨어서라도 살아가면서 언젠가 권력 질서를 해체하면서 밝은 대낮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 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할 수 있는 자아능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둔감함이나 아둔함 속에서 윤지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망막에 윤지오는 숨어 살지도 않으면서 숨어 살았다고 거짓말하는 형상으로 나타나며, 공개할 삶도 실명도 얼굴도 없으면서 공개-쇼를 하는 사기꾼의 형상으로 비춰진다. 동일한 물체도 거울이 일그러져 있으면 일그러져 보인다. 그로 인해 생기는 환영은 필연적이다. 이 필연적 환영을 수정할 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으로(materially) 그 거울을 반듯하게 펴는 것뿐이다. 즉 일그러진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힘의 비대칭관계를 실제로 없애는 것뿐이다. 망막이 일그러져 있는 한, 말로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한다 해도 그 필연적 환영이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울을 평평하게 펼 필요에 대한 감각을 좀더 절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단했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나는 2019년 3월 4일의 공개행동이 (숨어 살지 않았던 사람이 행한 사기행위라는 음해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10년간 숨어 살다가 그 나름의 인식론적 변용을 거쳐 행한 인간적 결단, 특히 강요된 ‘피해자다움’, 강요된 ‘숨어 살기’에 대한 거부의 행위임을 밝히고자 한다.

‘숨어 살던’ 시기 윤지오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지각적 착시에 대해

“나는 숨어 살았다”의 경험분석

윤지오에게서 “나는 숨어 살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이름과 관련된 것으로 자신의 진짜 이름인 실명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기자 등에 쫓겨 살면서 대인기피증으로 숨어 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뼈속까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곡해하고 또 그 곡해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함에 아연(啞然)할 뿐이다.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나이먹은 어른들이 기자에 앵커, 편집장에 발행인까지 다 맡고 있는 일부 언론방송들까지 이런 철없는 천진난만함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순진해서라기보다 이런 것과 유사하거나 동질적인 피억압의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이땅의 다중들과는 딴판의 세상, 억압자의 세상에서, 혹은 그 세상과 연루되어 살아온 탓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경험에 공감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피해에 대한 호소가 괜히 엄살과 거짓말로 보이고 적대적으로 보여서 짓밟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나는 숨어 살았다’는 고백이나 폭로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숨어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왜곡>이 선택한 텍스트 분석 방법과는 달리, 나 자신이 겪어온 “숨어 살았다”를 가지고 윤지오의 “숨어 살았다”를 유비적으로 설명하는 추체험적 방법을 사용해서 윤지오의 “숨어 살다”의 의미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나는 1988년 이전까지는 실명[본명] 하나만을 갖고 살았다.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친구들을 사귀거나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거나 모두 이 실명을 사용해서 살았다. 내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가을, 그러니까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나는 두 가지 정체성으로 분할되었다. 기고를 하거나 친분관계를 맺을 때는 실명을 사용했지만 활동은 가명(’정상우’)으로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 때문에 실명이 사회적 실천의 영역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억압되었다. 1990년 10월 30일 공개수배 후에 나는 이미 오염된 기존 가명을 버리고 신분증에 씌어진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집필의 필요가 발생하면서 ’이원영’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가명과 글자 하나만 다른 것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실천에서는 물론이고 기고나 생활에서도 실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나의 정체는 실명, 가명, 필명으로 삼분할되었다. 월세방 계약, 은행통장 개설, 검문을 당할 때 등에는 신분증명인 가명을 사용하고 글을 기고할 때에는 필명을 사용했다. 실명은 억압되었으며 실명을 아는 사람과의 만남은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통제 가능한 범위, 즉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 이내로. 이런 식으로 ‘실명의 나’는 10년간을 조용히 숨죽이며 “숨어 살았다.” 

실명에 대한 이러한 억압은 ‘대인기피증’으로 나타났다. 월세방을 구할 때에는 주인의 출입구와 입구를 완전히 달리하는 곳을 구해야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위장한 나는 하루 종일 골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시장이나 거리로 나가곤 했다. 낮에 거리를 걷는 경우는 ‘실명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초조한 발걸음이 되었다. 멀리 제복을 입은 경찰이 보이면 심장이 두근댔다. 그래서 미리 아무 골목으로나 꺽어들어가 다른 길로 돌아갔다. 미행이 있지 않을까 골목을 꺾어돌 때마다 뒤를 살폈고 지하철을 탈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탄 후 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재빨리 올라탔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낌새가 이상하면 버스를 내려 갈아탔다. 해충이나 동물보다 사람이, 그 중에서도 경찰이 내게는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윤지오에게는 기자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나에게는 경찰이 그랬다. 경찰은 나로 하여금 실명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직접적인 위협세력이었다. 10년 간 딱 한 번 노상검문을 받았다. 경찰에게 ‘가명의 나’(신분증)을 당당한 체 내밀었지만, 그 순간에 가명의 나 속에 숨어사는 ‘실명의 나’는 두근거리며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실명의 내가 ‘인도로 갔다’거나 ‘죽었다’고들 말하고 있었지만 ‘실명의 나’는 ‘가명의 나’ 속에 깊이 ‘숨어 살았다’. 

1999년 말 수배가 풀리고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한겨레신문에 ‘조정환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전후로 여러 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자들의 많은 질문이 “어떻게 숨어 살아왔냐?”는 것에 집중되었다. 가족, 친지 등 연고자와의 연락을 끊고 “나는 10년 동안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답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말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정체성이 실명, 가명, 필명으로 분할된 복수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다른 답을 얻게 된다. 주어 ‘나’가 실명을 가리키는가, 가명을 가리키는가, 필명을 가리키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던 것은 필명의 나도, 가명의 나도 아닌 실명의 나이다. 실명의 나는 실제로 10년 동안 열손가락 이내의 사람들만을 만났다. 실명의 나를 아는 경제적 후원자나 실천적 동료들은 결코 열명을 넘지 않았다. 고맙게도 10년 동안 그들은 나를 만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명의 내가 죽었다, 인도로 갔다는 소문은 아무도 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고 한국에 살아 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나는 10년 동안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글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하지만 ‘가명의 나’는 어떤가? 가명의 나는 10년 동안 꽤 많은 집주인들, 집주인의 가족들, 부동산중개업자들, 비디오 테잎 대여점 주인 등을 스쳐지나가며 만났다. 신분증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생활 영역에서 나는 가명으로 관계를 맺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찰과도 그랬다. 이 관계는 내가 원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맺는 관계들이었다. 이 관계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보다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가명의 나’를 주어로 놓고 술부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또 ‘필명의 나’는 어떤가? 당시에 나는 필명으로 출판사의 창립과 운영에 관여했으며 필명으로 번역서를 내고 다양한 매체에 기고도 했다. 기자들과 메일 교환을 하고 해외 필자들과도 메일 교환을 했다. 해외 필자들이 방한했을 때 면담을 하기도 했다. 참가자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에도 참석했다. 얼굴을 대하지 못하지만 필명의 나는 신문, 잡지, 단행본을 통해 수만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과 이미 만나고 있었다. ‘필명의 나’는 숨어살지 않았다. ‘필명의 나’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나’였다. 수배가 풀린 후 나는 ‘이원영’이라는 나의 필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필명의 나’를 주어로 놓고 그 술부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큰 거짓말이다.

그런데 나와 인터뷰한 기자들이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왔을 때, 그 ‘나’는 ‘가명의 나’나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기 때문에 내가 “나는 숨어 살았고” 그 기간에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결코 거짓말일 수 없고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원영=조정환”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밝히고 또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된 후, 소급해서 나의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은 혼동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공개적으로 활동한 이원영의 글이나 책을 읽고 또 직접 만난 사람들이 이 인터뷰를 읽을 때 그 사람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원영은 숨어 살지도 않았고(즉 상당히 공개적으로 활동했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를 훨씬 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은 분할되었던 정체성들이 뒤섞이고 시차(時差)가 간과됨으로써 나타나는 지각적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윤지오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들과 언론들의 지각적 착시

다행스러운 일일까? 아직까지 나의 당시 인터뷰를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묻거나 따지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윤지오는 나와 매우 흡사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숨어 살았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군중 및 언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나는 이 현상에, 다른 요소들 외에 성차별,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불신문화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접어두고 어떤 의미에서 윤지오의 경우가 나의 경우와 흡사한지를 살펴 보는 데 집중하겠다.

윤지오의 이름, 그의 정체성은 몇 개로 분할되어 있는가? 장자연의 동료배우의 이름이 윤지오이고 그것이 예명이며 그의 실명(본명)이 윤애영이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19년 3월 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통해서였다. 이후 대중들은 시차(時差)를 잊어버리고 윤지오가 각각의 시간들 속에서 달리 사용했던 이름들을 뭉뚱그려서 지각하는 착시에 빠진다. 이제 지배적 이름으로 된 ‘윤지오’는 장자연의 문건/리스트에 관한 증언자로 나선 그 윤지오이다. 이제 그 윤지오를 중심으로 모든 이름들이 환원(reduction)되어 지각된다.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의 이름인 실명 윤애영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연예계에서 사용했던 이름인 예명 ‘윤지오’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던 ‘이순자’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 ‘윤모씨’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2018년 MBC PD수첩에서 ‘얼굴을 부옇게’ 가리고 인터뷰 증언을 하는 ‘김지연’(<13번째 증언>, 226쪽)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각종의 언론에서 등장한 기호화된 이름인 A씨, Y씨 등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아프리카 방송에서 라이브방송을 하고 있는 그 얼굴도 윤지오로 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이 놓치는 것은 이순자, 김지연, 윤모씨, A씨, Y씨라는 가명들 속에 ‘실명의 윤지오’(윤애영)가 “숨어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각이 포착할 수 없는 것은 ‘실명의 윤지오’가 이 “숨어 삶” 속에서 겪었던 아픔이다. 이러한 지각이 간직할 수 없는 것은 장자연의 죽음 이후 단지 장자연의 동료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기자에게 쫓기고 다양한 기회에서 배제되면서 ‘실명의 윤지오’가 느꼈던 좌절의 기억이다. 이러한 지각이 숨기는 것은 ‘가해자가 당당하고 피해자가 숨어 살아야 하는’ 거꾸로 물구나무 선 사회현실 앞에서 ‘실명의 윤지오’가 내쉬었던 억울함의 한숨이다.

2019년 3월 4일 실명공개와 그것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에서 비롯된 이 지각적 착시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영상자료 등을 보면 윤지오 씨가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들이 많은데, 왜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지?” 따져 묻거나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나며 숨어 살았던 것이 ‘가명의 나’나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듯이, 윤지오에게서도 숨어 살았던 것은 ‘실명의 윤지오’이지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이름 없이 기호화된 윤지오’가 아니었다. 가명이나 예명, 기호의 윤지오는 ‘실명의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증언자가 된 이후 다양한 위험들과 위협들 때문에 숨죽이며 ‘숨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다양한 이름의 윤지오들의 존재야말로 윤지오가 ‘숨어 살았음’을 뚜렷이 증명하는 지표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제 거꾸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난 10년간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이 과연 ‘실명의 윤지오’가 맞는가? 아니면 당신의 지각적 착시 속에서 ‘실명의 윤지오’와 혼동되며, 실명의 윤지오가 그 속에 ‘숨어 살았던’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기호의 윤지오’인가? 

“나는 숨어 살았다”(윤지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어떤 주석

윤지오에 대한 널리 퍼진 다양한 왜곡들을 바로잡기 위해 한 네티즌이 꼼꼼한 필치로 쓴 글 중에 <왜곡된 내용의 근거에 대해>(이하 <왜곡>)가 있다.  이 글은, 윤지오가 지난 10년 동안 미인대회에 나갔다거나 라이브 방송을 했다는 식으로, 그의 삶의 몇몇 단면을 들추어 내어 ’나는 숨어 살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한 김수민 작가의 인스타그램 피드글이 과연 맞는 말인가를 검토하는 항목을 담고 있다. 

  “[나는 숨어 살았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숨어살았으며 10년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라고 말했어야 거짓임이 성립한다. 그런데 윤씨는 이미 책에서부터 고인의 사건 이후 일과 학업을 병행했고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미인대회를 전전했으며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일 등을 얘기했고 인터뷰에서도 일을 하거나 여행 등의 얘기를 한 바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말한 적이 없으며 숨긴 적도 없다.” 

그런데 김수민이나 ‘justicewithus’ 등의 인스타그래머들은 윤씨의 사진들을 피드에 올려놓고 ‘고인 때문에 슬프다는 사람이 저렇게 미인대회에 나가고 여가를 즐기며 웃고 있다, 즉 슬프다라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조롱하며 댓글러들과 함께 자기기만과 위선을 즐긴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오딧세이>에서 트로이 전쟁에서 동료를 잃고 살아남은 슬픔 때문에 통곡하던 사람들은 허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 이내 곤한 잠에 빠져든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을 보니 그들의 슬픔은 거짓이었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일까?

하지만 <왜곡>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꾸짖기보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그들에게 윤지오가 ’숨어 살았다’, ‘숨어 지냈다’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길을 택한다.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했는지의 근거는 방송에서 윤씨가 한 말 속에 그대로 나와 있다. 윤씨는 방송 또는 인터뷰에서 ‘숨어지냈다.’ 또는 책에서 ‘숨어지내듯 숨죽여 보내야만 했다.’의 뜻을 두 가지로 말한 바 있다. 하나는 그동안 사건에 있어 스스로를 공개하지 못하고 ‘음성변조라던지 a씨 또는 이순자 등의 가명을 사용했다는 의미’로, 또 하나는 ‘실제 생활에 있어서 힘들었던 사례들을 얘기하면서’이다. 사례를 들어 언급할 때는 ‘몇달 간’ 등의 기간적 표현을 꼭 함께 했다.”

다시 말하면,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하여 (1)자신의 진짜 이름인 실명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는 것 그리고 (2)기자 등에 쫓겨 살면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숨어 살았다는 것이 ‘숨어 살았다’라는 말로 윤지오가 표현하고자 한 두 가지 의미이다. <왜곡>은 이런 설명에 머무르지 않고 이 두 가지 의미가 윤지오의 언어행위에서 구별되고 또 다른 조건에서 표현된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밝혀 준다.

먼저 (1)의 예로 <왜곡>은  3월 7일 c방송에서의 예를 든다. 이 방송에서 질문자는 “‘실명을 공개안하고’ 말하자면 일종에 숨어서 지냈어요?”라고 묻는데 이것은 질문자가 윤지오의 이야기를 들은 후 “숨어 지냈다”라는 말을 실명 공개를 안했다라는 의미로 대신 설명하는 경우에 속한다. 

다른 예로 3월 29일 k방송의 예도 든다. 여기에서 윤지오는 “‘말씀해 주셨다시피’ 계속 숨어서 지내고 내 이름도 함부러 얘기 못하고 이랬었는데.. 이게 조금은 바뀌어졌으면 좋겠어서 아직 이례적으로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서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씀해 주셨다시피”가 받는 [그 앞의] 말이 무엇일까? 

박 : 그전에는 사실 윤모씨라고만 알고 있었거든요. 

윤 : 성자체도 거의 보도가 안됐었구요. 

박 :  a모씨나 b모씨로? 

윤 : 증언할 때도 이순자라는 가명으로.. 

박 : 가명으로 하다 얼굴과 실명을 공개한 적 있어요? 

이 대화맥락을 받아 “말씀해 주셨다시피 계속 숨어서 지내고 내 이름도 함부러 얘기 못하고 이랬는데”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숨어지냈다”라는 말은 증언자로 이름을 말할 수도 없고 얼굴을 드러낼 수도 없는 억압적 상황 속에 살았다는 의미다. (나중에 윤지오는 이 상황을 가해자는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고 피해자는 고개를 숙이고 숨어 다니는 전도된 상황으로서 보면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이 전도된 강요를 거부하고자 하는 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서술할 것이다.)

(1)의 “숨어서 살다” “숨어서 지내다”가 증언과 관련하여 실명과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강요된 피해자다움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2)는 실제 생활에서 일정 기간 동안 숨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억압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곡>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하나는 3월 29일 y방송 인터뷰에서 윤지오의 말이다.

“지금도 밝아요. 물론 마냥 밝을 수만은 없었고 저도 아팠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집 밖을 ‘몇 달’ 안 나간 적도 있어요. ‘몇 달 동안’ 집 밖을 안 나가고 나가도 차안에서 담요 같은 걸 덮고 숨어 있었어요. 창문 밖을 잘 못 봤고 빛 자체를 싫어 했어서 대인기피증도 생기고 우울증도 생기고 그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죠. 엄마가 빨리 발견 해주셔서 응급이송이 되고 목숨 자체가 위협이 있다라고 판단을 하셔서 입원치료를 ‘두달 넘게’ 했어요.”

3월 14일 유튜브방송에서 윤지오가 한 말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숨어 살도록 만드는 저 강요의 주체가 명시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조사 당시 이후) 또 따라붙으시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질문하시고 집에서 나오면 계시고 몰래 이사하면 또 어떻게 찾아 수소문해오시고. 그때 당시에 대학원에 재학중이면서 제가 넥센이라는 팀 치어리더를 했었어요. 아르바이트로 한 시즌동안. 구단에도 찾아오시고, 가는 데를 다 찾아오시고, 기자분들이 찾아오시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시니까 주변에서 다 알게 되는거죠.”

여기서도 윤지오는 당시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숨기지 않았으며 기자들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고초와 그 고초가 자신으로 하여금 숨어 살도록 강요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목할 것은, <왜곡>이 검토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2) 유형의 사례에서는 ‘몇달’, ‘몇달 동안’, ‘두달 넘게’ ‘한동안’ 등의 기한 표현이 반드시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곡자들은 이 말을 “10년 내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숨어 지냈다]”라는 식으로 왜곡/조작함으로써 윤지오가 마치 거짓말을 한 것처럼 만든다. <왜곡>에 대한 우리의 주석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자행하는 이러한 왜곡과 거짓말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고,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러한 왜곡과 거짓말을 일삼고 있는지, 즉 왜곡과 거짓말을 통해 이들이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지난 3개월간 대한민국의 하늘을 검게 뒤덮고 있는 ‘윤지오 음해 집단공작’과 관련하여 000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보내주신 원고청탁서 잘 받았습니다.

전화에서 말씀 드린 대로, 아무래도 단기간 내에 나의 관심을 선생님이 청탁해 주신 주제로 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고 장자연 씨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국민들의 청원을 받고 증언에 나섰던 윤지오 씨가, 10년 전에 장자연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힘들에 의해 10년 후인 지금 겪고 있는 정치적 배제와 시민사회적 고립이라는 사건입니다. 

내가 보기에 윤지오 씨는, 그 자신도 말하듯, 영웅도 아니요 사기꾼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고 국민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을 살고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자부할 만한 삶의 내용을 갖고 있는 만큼이나 흠잡으려면 흠잡을 것이 있을 수 있는 보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부분 언론과 SNS, 유튜버들이 나서서 한 나라의 핵심 공직자 후보에게나 요구해 오던 청문회나 국정감사 같은 검증을, 아니 그런 것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강도이고 폭력적인 조사를 증언자에게 강요했고, 또 시민의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사생활을 샅샅이 뒤져 그 꼬투리 하나하나를 부정적으로 뉴스화해 왔습니다. 국민연금을 가로챈 삼성의 분식회계나 정권 쟁탈을 위한 권력자들의 댓글조작에는 침묵하던 사람들이 일개 시민, 그것도 증언자를 향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증언자를 난도질하고 있는 사태는 실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엄청난 광기가 폭발하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묘사할 언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아무런 성찰적 태도 없이 서로 경쟁적으로 증언자의 삶을 낱낱이 카메라로 해부하고 자신의 가치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저 없이 비난하는 이 거대한 마녀사냥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위선과 자기기만일 뿐만 아니라 인권을 짓밟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헌법유린 행위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 범죄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이 내놓는 뉴스들이 대개는 거짓정보와 추정으로 가득찬 가짜뉴스였으며 센세이셔널한 관심을 부추켜 대중의 두뇌와 심장을 혼탁하게 하는 선동의 릴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선정적 가짜뉴스를 공공연히 허용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가 아니며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실재할 수 없는 가상의 성녀나 성자의 자격을 평범한 증언자에게 요구함으로써 실제로는, 자신을 고발하는 증언(진실말하기)을 봉쇄하고 증언하기를 두려워 하도록 만들려는 권력자들의 집단공작 앞에 대한민국과 우리의 시민사회가 처참하게 굴복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라고 판단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윤지오 씨에게 증언을 청탁한 후 증언이 가져올 후과(後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증언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를 설득하여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건너오게 만들었습니다. 윤지오 씨는 새로 촛불정부를 자임하며 들어선 문재인 정부, 촛불대중, 그리고 미투운동이 자신을 도와주리라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10여년간의 증언에서 사용했던 가명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실명과 실명으로 그 청탁에 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윤지오 씨는 지난 3월 2009년 당시 한국사회 권력자들의 성착취, 성수탈, 국가권력의 부당사용 등에 대한 약 1달 여의 증언이 끝나자마자 4월 초부터 지금까지 3개월 여동안 언론과 여론에 의해 집단적 여론조작의 매질을 당해 캐나다로 강제 추방당했고 ‘사기꾼’이라는 올가미에 꽁꽁 묶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연예노동자들의 노예적 실태, 권력자들의 성착취와 성수탈, 그리고 국가권력의 남용 등에 관한 그의 증언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개쳐 졌으며 권력자들 및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여러 건의 사법적 재판이 그의 삶을 죄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진실말하기가 불가능한 사회로 추락했으며 2016년에 정의의 이름으로 타올랐던 촛불도 처참하게 꺼졌습니다. 이제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조차 잦아든 캄캄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돌아보면 125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이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한 직후였고 독일에 패한 것에 대한 울분과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독일에 대한 반감 때문에 대중 속에 프랑스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비등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부는 대중 속에 들끓고 있던 이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이용하여 독일계 유태인 드레퓌스 대위를, 독일을 위해 일하는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국방부 최고 장성들이 이렇게 ‘가짜진실’을 만들어 대중을 움직이고 있는 동안, 드레퓌스 대위는 기아나의 악마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강요된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것을 알고난 이후에도 프랑스 군부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모는 여론조작과 재판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것과 동일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적폐 세력이, 그리고 한국 대중 속에 들끊고 있는 여성혐오 및 성차별주의 심성이 지금 윤지오 씨를 ‘사기꾼’으로 조작하여 그의 증언 신빙성을 격하시키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장자연 리스트를 영구 미제로 만들고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진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는 그 진범들이 진실을 파묻기 위해 집단적으로 공연하는 사기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 드레퓌스의 목소리를 파묻어버린 것은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프랑스 대중의 성난 목소리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라 증언자다”라고 절규하고 있는 윤지오 씨의 목소리를 파묻고 있는 것은 “장자연을 이용한 사기꾼을 처벌하라!”는 대한민국 대중의 거친 목소리입니다.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주요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이 본질적으로는 각종의 ‘사기’에 의해 축적하고 집권하며 사람들에 대한 ‘기망’을 통해 나날이 연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증언자 윤지오’ 씨를 대상으로 하는 이 집단적이고 전국가적인 사기극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윤지오 씨가 겪고 있는 현재의 불이익에 침묵하면서 가해권력들의 행동을 방조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공익신조자 보호법은 제15조 불이익조치 등의 금지 항목에서 “① 누구든지 공익신고자등에게 공익신고등을 이유로 불이익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든지 공익신고등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공익신고자등에게 공익신고등을 취소하도록 강요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윤지오 씨는 국가가 불러 증언에 임한 공익신고자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지난 3개월간 헤아릴 수 없는 강도와 규모의 불이익조치가 자행되어 왔습니다. 국가가 공익신고자가 당하고 있는 이 불이익에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누가 앞으로 법을 따르고 지키겠습니까?

공익신고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집단공작의 행위자들인 조선일보, SBS, 뉴시스 등의 신문, 방송, 통신사는 실제로 장자연 문건에 이름이 등장하거나 장자연의 소속사였던 더 콘텐츠의 대주주였거나 술접대 자리에서 윤지오씨에게 명함을 줬던 사람 등이 대표나 간부로 있었고 또 있는 바로 그 언론사들, 즉 장자연 사건의 당사자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10년 전 장자연 사건에 대해 고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부실수사를 하고 온데 간데 없이 핵심 증거를 빼돌리도록 허용했던 적폐검찰과 검찰출신 정치인들이 작금의 사태의 배후세력으로 기능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권력공학에 비추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윤지오 씨에게 굳게 씌워진 언론과 여론의 올가미가 터무니 없이 부당한 것이며 그것이, 권력자들이 통신, 신문, 방송, 인터넷 등 자신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엄청난 스펙터클 기관들을 통해 조작해 낸 ‘가짜진실’이라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렇게 조작된 ‘가짜진실’이 어떻게 증언자의 소박한 진실을 덮어버리고 있는가를 증언하는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내가 짊어져야할 최소한의 책무로서 받아들이고자 하며 이를 위해 부득이 선생님의 청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드리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군부독재와 계엄군에 맞서 광주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항쟁의 정치공동체를 세워냈던 국민이고 1987년 시민과 노동자들의 항쟁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세계만방에 역설했던 국민이며 2002년 월드컵 응원부대를 레즈(Reds)라고 부름으로써 냉전시대에 미국과 그에 영합한 권력자들이 공고하게 구축해 놓았던 반공지배질서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었던 국민이고 2008년과 2016년의 촛불봉기를 통해 시민사회로부터 유리된 낡고 부패한 권력을 끝내 물리친 바 있는 국민입니다.

이런 역사를 고려할 때, 이 광기의 마녀사냥을 지금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침묵하는 다중들이 언젠가는, 가치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집어삼키고자 하는 자본권력자들의 탐욕과 그들이 조장하고 있는 부패와 타락의 풍조를 쓸어버릴 태풍으로 일어설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그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금 벌어지는 사태를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귀 잡지가 수행해온 작업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의미있고 소중한 시각의 하나로 자리잡아 나갈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번 호가 많은 독자들의 응원을 얻어 새로운 출발의 동력을 얻는 기폭제로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조정환 드림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집단공작’으로 인해 우리가 잊게 된 증언자 윤지오의 여섯 가지 핵심증언(2009~2019)

1/[착취와 초과착취 문제] 소속사 대표가 배우들과 체결한 부당노동계약과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통해 젊은 연예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에 대한 진술

=김종승 대표는 출연기회를 얻고 싶어하고 또 출연기회를 얻어야 살 수 있는 배우들의 욕망과 약한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그 계약에 대한 해석권리까지 독점함으로써 소속배우를 술자리에 불러내 술접대를 시키는 등의 부당한 노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소속배우들이 계약을 중도해지하려고 해도 막대한 위약금(1억원) 때문에 중도해지할 수도 없는 노예상태를 강요했다.[김종승 대표가 유죄선고 받음]  

2/[수탈문제1]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연예노동자들의 술접대를 받고 심지어 그들을 성추행한 언론인에 대한 진술

=술접대 자리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언론인이 장자연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이 언론인은 이후 전 조선일보 기자로 밝혀져 재판중]

3/[수탈문제2]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 재계, 법조계의 권력자들이 김종승 대표를 매개로 힘 없는 신인배우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한 것에 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서 유장호가 넘겨준 것으로 연예인들의 피해사실이 적힌 4장의 문건과 (김종승과 다툴 때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형식의 글 3장, 도합 7장을 보고 읽었다.

4/[수탈문제3]언론계와 정치계의 권력자들이 장자연의 신체를 이용했을 가능성과 관련하여 장자연 리스트에 기록된 그 권력자들 중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진술

=그 리스트에서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있고 기억나는 이름도 있는데 방씨 성의 세 사람과 이름이 특이한[=‘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흡사한] 국회의원의 이름이 기억난다.

5/[수탈문제4]장자연에게 마약을 모르게 주입하고 장자연의 신체에 특수강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진술

=장자연 언니가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 모습이 언니가 마약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입당한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방식으로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해 달라.

6/[국가권력의 부당이용 혹은 남용문제]국가기구인 국정원이 신인배우 장자연 사건에 개입한 것에 대한 진술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 유장호와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유장호가 경호인으로 소개했는데 나중에 유장호는 그가 국정원 직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3월 13일 유장호가 입원한 병원에도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가 있었다.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윤지오의 각 증언이 다루어지고 있는 현상태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를 느낀다.

-1/과 2/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고가 유죄선고를 받거나 재판중이므로 이것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3/, 일명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과거사 진상조사단은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 외에 피해사실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명단’이 기재된 문건, 즉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제시하였으므로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법적 승인이 이루어진 셈이다. 

-4/의 증언과 관련해 검찰은 방씨 성의 사람들에 대한 수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수사무마를 위한 외압을 행사한 것 외에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여러 건의 보도를 했으며 홍준표는 자신의 실명을 거론한 정의연대를 형사고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증언자의 진술을 훼손시키기 위한 여러 유형의 폭압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압이 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의 진술은 장자연이 문서를 처음 작성할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적은 적이 있다”는 유장호의 면담 전 진술,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들었다는 정감독의 진술(2011년 8.1일 진술조서, 2019년 진상조사단 진술) 등에 의해 교차검증되었다.

-6/의 진술과 관련하여 정의연대는 국정원, 국정원 박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윤지오의 옛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두 개의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이로써 윤지오의 증언은 물증을 갖게 되었다.  

진실에 대한 혐오(veritaphobia)

봉준호의 <기생충>은 ‘냄새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를 다룬다. 혐오를 주는 그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지하의 냄새, 하층민의 냄새, 시궁창 냄새, 벌레의 냄새다. 한때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의 언어로 표현하면 ‘개-돼지’의 냄새일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냄새, 다중, 주권자 국민의 냄새다. 이들이 서로는 맡지 못하는 어떤 공통된 것이 어떤 문턱 너머의 사람들에게는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야기시키는 냄새로 다가간다. CEO 동익은 운전사 기택의 행동이 선을 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선을 넘어오는 그 냄새 때문에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은 동익의 아내나 아들이 공유하는 계급적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이 바깥으로 표현될 때 혐오로 나타난다. 

냄새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 이것을 우리는 인종주의라 부를 수 있다. 냄새 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를 통해 인류가 인종으로 구분되고 배제해야 할 인종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배제해야 할 사람들을 표현하는 흔한 표현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홍준표는 ‘윤지오의 거짓말’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에서 정작 왜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말인가는 논증하지 못한다. 수 십 년 동안 술집에 안 갔다는 홍준표의 일방적 주장이 윤지오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의 이름을 닮은 정치인의 이름을 리스트에서 보았다는 증언을 거짓말로 만들 수 있는 근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상한 여자가 국회의원을 등에 업고 설쳤다” “이상한 여자가 이상한 단체하고 합작해서 리스트에서 홍준표라는 이름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이상한 여자를 고발했다” “이런 이상한 여자가 정권과 손을 잡고 설치면 안 된다” 등으로 윤지오를 여러 차례 “이상한 여자”라고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을 훼손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스스로 창피하다고 하면서, 다시 말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말이다. 홍준표는 “이상한”과 “여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이상한 ‘냄새’가 나는 그 사람이 “여자”임을 강조한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여기서 아무런 경계도 없이 화학결합된다. 그리고 그 결합은 그 이상한 여자는 “본 정신이 아닌” 즉 “미친” 여자이므로 “동부지검”이 이 여자를 “집어 넣어 달라”는 주문으로까지 이어진다. 홍준표가 만들어낸 ‘여자다=이상하다=미쳤다’의 등식은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젊은 여성을 위험한 인간’으로 보는 편견, 즉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냄새나는 사람”, “이상(異常)한 여자”는 “수상(殊常)한 사람”이라는 표현과도 쉽게 결합된다.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멸공 포스터의 구호였다. 극우논객인 지만원은 전두환 군사독재와 계엄군에 맞서 항쟁에 나섰던 광주 시민들을 “수상한 사람들”로 불렀다. 

지만원이 제1광수로 지목했던 ‘김군’: 그의 눈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사진은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80년 5월 22~23일 찍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을 남파된 북한군 특수부대원인 “광수”(광주의 수상한 사람들)라고 부르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번호를 붙였다.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김군>은 지만원이 “제1 광수”라고 부르면서 북한군 특수부대원으로 지목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누구인지 찾아가는 영화다. 확인을 위한 긴 여정 끝에 그 “제1광수”는 광주의 어느 다리 밑에 살면서 넝마주이를 하던 사람, 부를 이름조차 갖지 않았던 ‘김군’으로 밝혀진다. 그는, 1980년 5월21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금남로에 결집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해 수 십 명이 죽은 뒤 총을 들고 무장항쟁에 나섰던 시민군 가운데 한 사람이며 5월 23일에 시작된 수습위원회에 의한 총기반납 조치 때 총기를 반납한 후 시신으로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시신이 있었던들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영화 김군은 인간의 존엄, 시민의 정의, 국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 “지하 생활자들”, “다리밑 생활자들”, “수상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이었음을 잔잔한 어조로 보여준다.

“이상한 여자”라는 인종차별적 감각양식이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일부의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음은 어떤 자칭 ‘페미니스트’ 네티즌의 말이다. 

“그녀[윤지오]는 페미니즘을 악용한 것만 같아여. (…) 페미니즘이 진짜 필요한 이들에게 페미니즘이 닿지 않아 가끔은 그들을 욕하기도 한다는 걸요. 그래서 처음엔 저도 속이 상했지만 그녀를 응원했네요.(..) 저는 근 삼개월간 눈팅으로 윤지오씨 사건을 봤고 최근 한달간은 일명 윤지오씨 까판이라는 곳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상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의심병이정말많은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에대한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응원은 했지만 계속 달라지는 발언을 들으면서 뭐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 의문점이 해결되더라구요. ”

여기서 “의심병이 정말 많은 사람”이 윤지오에 대해 처음부터 느꼈던 “이질감”과 “이상함” “의문점”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또 정착되는가? 윤지오가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며 “증인이 아니다”라는 방향이다. 요컨대 윤지오는 사기꾼이며 표절자이고 범죄자라는 방향이다. 이 혐오의 감각양식 속에서 냄새나는 존재가 개, 돼지나 벌레이지 ’인간’이 아니듯이, 이상한 여자는 ‘증인’일 수 없다. 수상한 사람은 폭도이거나 간첩이지 ‘시민’일 수 없다. 항쟁하는 사람, 증언하는 사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혐오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을 넘는 사람들’이며 ‘선을 넘어오는 견딜 수 없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선을 넘어오는’ 이 진실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만원은 항쟁에 나선 광주의 시민을 “수상한 사람”으로 몰아 남파된 북한특수부대원으로 조작하고(윤지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나의 글에도 이런 악플들이 달린다: “소위 간첩같습니다. 북한어를 하시는지 일반적소통도 안되고.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혹은 “간첩신고 111 조정환 아저씨 진짜 수상해요—“), 홍준표는 선을 넘어오는 증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이 여자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윤지오를 “이상한 여자” “본 정신아 아닌 여자”로 몰아붙여 감옥으로 보내고 싶어 한다. ‘젊은 여자’인 자칭 “페미니스트”도 같은 여성인 윤지오를 범죄자로 몰아붙여 격리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증언자 윤지오가 ‘선을 넘었다’고,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윤지오가 어떤 선을 넘었다는 것일까? 일상의 선이다. 수상(殊常)이나 이상(異常)은 모두 상(常)을 기준으로 그 ‘상’과 다른(異, 殊) 것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일상은 오래 반복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고하게 구축된 질서, 체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 2008년 촛불을 막기 위해 광화문에 설치되었던 ’명박산성’의 질서이다. 그런데 일상의 진정한 비밀, 일상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자들이 시민들에 대한 학살,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착취,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학살, 착취, 성폭력의 일상이다. 항쟁하는 사람들, 증언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 학살, 착취, 성폭력의 체제를 고발하기 위해 체제의 선, 질서의 선을 넘는 사람들이다. 체제는 이들의 이 움직임을 견딜 수 없는 냄새로 경험하고 혐오로 대응한다. 

이 혐오의 대응에서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시민사회가 약할 때 가장 먼저 혐오의 대응에 나선 것은 경찰과 군대였다. 국가기구가 혐오 대응의 선봉대였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두터워진 후 혐오 대응의 선봉대는 국가기구가 아니다. 시민사회 속에서 일상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성폭력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 대응에는 “아내들”이 앞장선다. 아내는 ‘안 것’을 의미하는 “안해”에서 나온 말이다. 경상도 말 “니 해라”가 ‘너의 것으로 하라’를 의미하듯이, ‘해’는 ‘물건’, ‘소유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성 가부장의 시선에서 파악된 여성,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이 ‘아내’ 관념을 내면화할 때, 이 여성은 가부장주의의 파수꾼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내로서의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여성을 위험한 여자, 이상한 여자로 보는 보편적 의심증의 주체가 된다. 아내-페미니즘은 여성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 노력은 꽃뱀으로 의심되는 모든 여자들로부터 자신의 아내 지위를 지키고자하는 방어적 투쟁으로 된다. 그 결과 남성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폭력은 위험한 여자들의 꼬임(사기)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겪는 피해로 인식된다. 아내-페미니스트들이 여성사회를 내전의 무대로 만들면서 이 세계의 여성 전체인 ’이상한 여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시민사회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체제와 가부장주의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서술하고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서술한 마녀나샹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국가기구와 남성 권력자만이 아니라 아내주의-여성, 아내-페미니스트들을 선봉대로 생생하게 되풀이 되고 있는 잔혹사이다. 

퍼시 애들론 감독의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남편과 헤어지고 실의에 젖어 있던 브렌다도 처음에는 독일서 건너온 여성 야스민을 ‘이상한 여자’로 바라보고 ‘위험’을 느끼며 심지어 그에게 총까지 겨눌 태세지만, 집과 마을을 청소하고 어린아이를 돌보며 마술-예술로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야스민과   더 없는 우정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이상함, 수상함, 위험스러움이야말로 야스민의 힘이었고 공동체를 재건하는 마력이었다. 야스민은 ‘이상한 사람’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이미지화된다. ‘이상한 여자’를 배척하기보다 환대하는 태도는 이 영화에서 야스민을 처음 만났을 때 루디 콕스(잭 팰랜스 분)에 의해 스쳐 지나가며 표출되었다. “Hello, stranger!”(반갑습니다. ‘이상한 사람’ 님!) 

증언자 윤지오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일상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들이 많다. 국정원이 봉은사에서 장자연 문건을 관리하고 유장호의 병원에서 그를 감시했다든가, 구준표와 이름이 유사한 정치가가 리스트에 있었다든가, 성이 같은 언론인들의 이름이 리스트에 있었다든가, 장자연이 마약을 모르는 새 주입 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해 달라든가….등의 이야기들이 믿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우리가 일상으로 겪고 있고 나날이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의 체제, 우리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두텁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우리가 우리의 국가, 우리의 언론, 우리의 남편이 그런 식의 악행과 추행에 연루되었으리라 추호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윤지오에 대한 혐오와 마녀사냥은 나의 국가, 나의 언론, 나의 남편에 대한 믿음을 증언자에게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의심과 불신으로 투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만약 윤지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의 국가, 우리의 언론, 우리의 남편이 정확히 윤지오가 증언한 그대로 행동해 왔다면 어쩔 것인가? 그래도 당신은 진실에 대한 그 혐오를 계속할 것인가?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 권력의 집단 사기극

-파생(derivation)을 표절(plagiarism)로 둔갑시키기

단순히 호랑이 정면 이미지만 가지고 표절이네 아니네 하는 것 자체가 3-40년 뒤떨어진 얘기죠. 표절시비 나올 때부터 우스웠지만 이렇게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네요.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 중에 차용과 페러디 개념이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기만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과 작가의 의도 등등이겠지만 여전히 일차원적인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미술작품뿐만아니라 한국사회안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일한 것 같네요.  –네티즌 white choi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은 푸르게 응시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붉게 부릅뜬 눈이 아니다.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의 치부를 고발한 증언자 윤지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호랑이의 그 푸른 두 눈은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증언자의 진실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진실의 눈’으로 다가온다. 윤지오는 이 작품에서 포식자의 눈을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시선, 호랑이의 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예술적으로 극화한 것이며 진실의 가능성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진실의 능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호랑이의 눈은 여기서 폭력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끝내 진실의 뜨거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여성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된다.    

윤지오, <진실의 눈>

한국 사회의 연예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윤지오의 증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을 쓸 데 없는 잡문집으로 만들어 매장했던 권력집단은 윤지오의 이 <진실의 눈>에도 ‘표절’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장했다. 이것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매장하기 위한 성폭력적 권력집단의 집단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언론집단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들만이 짐짓 모른체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집단사기극의 몸통이거나 하수인들로서 이 집단사기극을 공연하고 있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기극의 공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 사회적 집체극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사기극은 사기임이 드러나지 않아야 관객을 계속 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6월 27일 이 집단 사기극의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가 사기임이 드러났다. 윤지오가 <진실의 눈>에서 차용한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진 피터가 <진실의 눈>이 표절이 아니며 파생예술작품(derivative artwork)이라고 천명하고 <진실의 눈>을 출판하고 전시할 수 있는 영구적 권리가 윤지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피터는 한국 사람들이 ’표절행위’와 ‘파생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베끼거나 관념을 훔치면서 자신의 독창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이다. 반면 파생예술은 기존의 일차적 작품에 바탕을 두면서도 형태와 관념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2차 창작품을 의미한다. 번역이나 오마쥬, 패러디 등 현대 예술의 상당부분은 1차원본이 있는 파생예술이며 마르셸 뒤샹은 대표적인 파생예술가이다. 윤지오가 바탕에 호랑이 그림을 차용했다고 해서, 호랑이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의 눈으로 다르게 형상화한 윤지오의 독창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표절로 오인하는, 아니 오인하고 싶어하는, 아니 반드시 그 오인을 보편 진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저 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눈’, 악의에 가득찬 눈에 있었다.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피터가 제시한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예술작품 인가 협정서

어제 윤지오 님을 만났고 이제 윤지오 님이 자신이그린 호랑이 그림[진실의 눈]을 전시하고 출판할 수 있는 적법하게 인가되고 또 적법하게 보장된 전시출판허락권를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윤지오 님은 [<진실의 눈> 전시와 출판과 관련된] 이 문제에서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 왔습니다. 또 이 특별한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적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피터(Peter Finnie )

2019년 6월 26일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의 눈>이 윤지오 작품임을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지오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음”을 밝힌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 무리의 공격자들이 제기한 그 도덕적 의혹에 일부 동조하게 된 것은 피터가 “그녀가 저와 연락한 적이 없다. 그녀가 누구와 연락한 것인지 모르겠다”(<궁금한 이야기 Y>)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책임감 없음”을 지적한 말이므로 지금 피터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responsibly) 행동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궁금한 이야기 Y>가 보도한 피터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가, 윤지오가 자신에게 연락한 바가 있음을, 즉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지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작자에게 연락한 바 있다고 했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저는 연락 받은 적 없다’는 피터의 말로, 윤지오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진실이 드러난 지금 <궁금한 이야기 Y>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윤지오의 <진실의 눈>을 표절작품인 것처럼 보도해온 모든 언론들이 윤지오에게 사과하고 정정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보도를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해온 justicewithus, 김수민 등의 계정들도 자료삭제, 폐쇄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로 만드는 국민 ‘기망(欺罔)’ 행위를 통해 <진실의 눈>과 그 작가를 매장하려다 사기로 드러난 이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2019년 4월부터 공연되고 있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이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을 잊게 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증언자인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하려는 성폭력 권력자들의 집단적 사기극임임을 또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생작품을 표절작품으로 만들기는 그 연극의 이제 실패한 한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응시하는 ‘진실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후원금 장면(scene)을 비롯한 다른 장면들도 총체적 사기극을 구성하는 장면들임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현재의 이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사기극의 구경꾼으로서 “나는 저 증언 사기꾼 윤지오와는 다르다’라고 안도하며 위선자기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 연극적 도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권력의 마수는 우리의 혼(魂)까지 빼 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 정치권력-언론권력-시민사회권력이 공모한 이 총체적 사기극의 집단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진실의 눈’으로 권력자들이 드리운 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켜 들 수 있을까? 

마약과 관련하여 10년 전의 윤지오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지금의 윤지오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

-박준영 변호사의 물질주의적, 뇌국소론적 기억 관념에 대한 비판

윤지오는 10년 전 조서에서 경찰의 마약 관련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했다. 

문:김(종승)이가 자연이 친 언니(장xx)에게 전화를 하여 동생과 같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답: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19년 3월 29일 KBS 1TV ‘거리의만찬’에서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술을 솔직히 잘 못마시는 데 별로 안 마셨는데…술취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술을 안마시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

2019년 6월 21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이 두 진술을 비교하면서 윤지오의 2019년 3월 진술을 ‘사적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이 프레임 자체의 허구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해적 성격에 대해 이미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그 비교를 위해 사용되는 기억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여기에 <Y>에서 편집된 문답이 있다.  

해설자: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총13번의 증언을 한 윤지오씨, 그때 하지않은 얘기들 지금하게된 이유는 뭘까요? 10년전의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 

박준영: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10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어디 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다른데서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한다는 것도 그 지금에 와서 하는데 또 자신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진술은 믿기 어려운 거예요.

<Y>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1)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이다. 이것은 기억과 진실의 문제다. 또 하나는 (2) “윤지오가 10년 전에 하지 않은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이다. 이것이 윤지오의 사익추구를 입증하려는 [내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사적인’]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위의 (1)의 질문 방식의 허구성을 드러냄으로써 (2)의 문제의 근거를 자동 해체시키는 방밥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1)의 질문에 대한 응답자는 변호사 박준영인데 그는 “사람의 기억은요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낡은 뇌국소론적 기억론으로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기억론이다.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 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기억장치)에 저장된 정보가 특정한 명령을 받아 화면에 디스플레이되는 것과 인간의 기억현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드디스크와 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시간의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론은 데자뷔 현상이라거나 실어증 혹은 성폭행 당한 기억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당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과학주의자들의 이러한 뇌국소론적 기억론의 오류를 비판한 후 자신의 다른 기억론, 생명론적 기억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경험들은 뇌가 아니라 ‘지속의 우주’(즉 시간)에 순수기억으로 저장된다. 뇌는 그 순수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것을 이미지기억으로 호출하고 불필요한 것은 순수기억 속으로 (다시) 망각한다. 그러므로 망각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라서 순수기억 속으로 잠재되는 것이다. 이미지로 상기되고 지각되는 것은 행동에 필요한 것이다. 기억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하듯 시간의 기계적 순서를 따라 흐려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행동의 절박한 필요가 제기될 때에는 뇌로 선명하게 호출되어 가능한 행동의 대상인 지각을 구성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자의 폭언이나 폭행을 당시에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 그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현장/당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기되면서 뒤늦게 견딜 수 없는 모독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를 경험한다. 법률에서 공소시효라는 것이 비록 소멸시기가 있다하더라도 꽤 장기적인 기간을 유효기간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즉 현장에서 지각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동안 기억하지 못해서 적절하게 사법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법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기억 개념에는 맞지 않는 기억, 10년이 지나도 흐려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술 반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장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 예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의 모습을 보았지만 22살의 사회초년생으로서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로 지각했다. 그러므로 경찰이 장자연이 마약을 한 장소, 장자연이 마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진실한 진술이다. 

그후 윤지오는 사회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자연의 그 모습이 술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행동]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마약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지오는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때는 ….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엇가 있었던걸 마셨던거 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기억 속에 잠겨 잠재되어 있던 장자연의 모습(“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이 이미지기억으로 상기되고 이 기억이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술 역시 윤지오에게서는 10년 전에 마약한 장소나 마약이 입힌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10년 전 윤지오와 지금의 윤지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요?”라고 묻는 <Y>해설자의 양자택일적(철학적 명칭으로는 배타적 이접, exclusive disjunction) 물음은 동등한 진실가치를 갖는 윤지오의 두 진술 중 어느 하나 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도록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10년이 흘렀잖아요. 또 10년이 흘러 그 긴 세월흐르는데 더 생생하게 얘기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입니다.”라는 박준영 변호사의 응답은 이 양자택일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거짓 도구에 불과하다. 그 주장 자체가 진실가치를 갖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실적 주장이 윤지오의 진실한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고 또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한편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가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 물질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산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쌓아놓은 둑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해체된다. 그런데 기억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에 대한 일반이론은 생명현상인 기억을 물질현상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은 물질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른다. 생명은 산란해진 것들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생명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물질과는 달리 더 큰 힘, 더 큰 선명함으로 과거의 체험들을 호출하여 상기하고 그것을 가능한 행동의 계획들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년전에 마약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고 10년 후 마약과 관련되었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윤지오의 두 진술을 모순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폭력행사이며 생명존재인 인간 윤지오에 대한 몰이해의 표현이자 모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 진술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의 양태로 확인되는 증언자 윤지오의 진술을 서로 상반된 것, 모순되는 것으로 몰아 붙이고, 현재의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윤지오를 사적 목적(그것을 박훈과 최나리는 국민을 기망하는 사기라고 불렀다)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사기꾼 만들기 행위야말로 국민을 기망하는 집단적 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SBS와 박준영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지각과 양심을 가진 방송이고 또 사람이라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하고 윤지오 배우를 거짓말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에 대해 윤지오 배우에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선동에 영향을 받아 윤지오에 대한 손가락질에 나선 대중들의 모욕행동이 중지되어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가 인간 윤지오의 진실의 말에 귀기울이는 양심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동일한 ’마약-성폭행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방향의 그릇됨과 수사불철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 확보의 필요성 등을 다룬 lamer297 님의 글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