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끝)

요점: ‘호모 사케르’가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고 또 퇴출시키는 ‘지탄 공동체’의 범죄행동이 문제이며 이 문제의 극복은 포함과 배제의 이중구속 상태에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락”과 “성스러움” 사이 

당신이 지탄의 무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하기 전에 한 번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타락’(墮落)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목적에 타락이란 말을 이용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타락’이란 말은 ’제사상에 올릴 고기가 풀잎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다’는 뜻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용어로서 어떤 것이 신께 바칠 제물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상 클립 속 여성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여성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기에 바람직한 여성이 아니라는 것, 즉 가부장적 성권력에게 바칠 제물(이른바 ‘먹잇감’)로는 부적절하다는 의미이다. 김종승, 김학의, 승리 등으로 인해 유명해진 (그러나 참으로 잔인한) 현세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여성이 ’접대’에 사용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되는) 일반 시민으로 되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타락했다’고 보는 여성들을 제물로 ‘접대’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타락한’ 여성이란 현세에서 이들 성폭력-권력자들의 접대상에 올릴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렇게 ‘접대’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그 ‘타락한’ 여성을,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는 그 누가 짓밟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범죄로 되지 않을 존재로 간주하곤 한다.

조르죠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이런 존재의 원형을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이 그것이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의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는 호모 사케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인민에 의해 고발당한 자를 성스럽다(sacer)고 한다. 그를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의 호민관 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투표를 통해 성스럽게 된 사람을 죽이더라도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악하고 불결한 사람을 가리켜 ‘성스럽다’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 인용을 보면, 로마법은 특이하게도 우리가 앞서 ‘타락했다’고 표현한 존재를 ‘성스럽다’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표현방식이야 어떻든 이 인용은 로마 사회가 ‘인간 접대’의 문화를 갖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은 ‘접대’ 제물로 사용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접대’ 당할 수 있는 인간이라 함은 그 ‘접대’ 당함을 통해 신의 세계, 신의 질서로 넘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딸이 왕에게 ‘상납’됨으로써 왕의 질서(“궁녀”)로 넘어가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접대’용으로 사용될 수 없는 “범죄자”들은, 그 “성스러움” 때문에 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의 세계 내부에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든지 죽여도 무방한 존재, 항상적 배제상태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는 경계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모두에서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의 존재이다. 아감벤은 로마법 속의 이 개념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시대로 가져와 현대의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로마법에서 말한 이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현대의 국가주권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이라기보다 법을 멈추고 예외상태를 선포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저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현대적 국가주권에 의해 법질서 외부로 추방당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겨우 포함되는 생명형태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나치 하의 ‘유대인’, 일제 하의 ‘조센징’, 전후 대한민국에서의 ‘빨갱이’, 1990년대 말 이후의 ‘종북’, ‘좌빨’, 9/11 이후의 ‘테러리스트’, 트럼프 하의 ‘미등록자’ ’이주민’, ‘난민’ 등등등. 여성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면서 특별히 붙이는 이름으로는 ‘마녀’, ‘풍기문란녀’, ‘꽃뱀’, ‘매춘부’, ‘창녀’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특수한 생명형태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국가주권이라 불리는 폭력에 의해 바로 이런 식의 예외존재로 낙인 찍히고 법질서 바깥으로 추방당해 임의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영상 클립 속의 그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형상화하고 댓글러들로 하여금 그 여성을 마음 대로 짓밟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호객을 하는 것은 로마 사회나 현대의 국가주권이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방식을 흉내낸다. 그런데 영상 속 인물이 로마법에서 말하는 범죄자인가? 그들이 마구 짓밟는 그 영상 속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는가? 그 인물이 타인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한 후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가? 영상 속의 그 인물이 누구를 폭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에게 ‘성접대’를 강요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특수강간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추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희롱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협박하는가? 그 인물이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외압을 행사하는가? 가해자를 감추기 위한 부실수사를 하는가? 그 인물이 불법으로 획득한 영상물을 고객들에게 송출하는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범죄가 될 만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윤지오가 터무니 없는 무고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과 똑같이 영상 클립 속 그 인간도 그가 누구이든 터무니 없는 지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타자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를 부여받지는 않았다.  

‘지탄 공동체’의 범죄성에 대해

오히려 범죄적 행동을 하는 것은 영상 속 인물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영상 클립들을 바라보고 조롱하고 댓글을 달고 그 계정을 응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인지 모를 동영상 속의 실제 인물로부터 어떤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물의 사생활 장면들을 공중 앞에 드러내 공연(公然)히 전시하고 성희롱적 댓글들을 역시 공연(公然)히 전시한다. 이 지탄의 제의(祭儀) 속에서 이들은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동의 없는 저작물의 사용은 명백히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사실이건 허위사실이건 타인의 명예를 공연히 훼손하는 것은 형법상의 명예훼손죄에 해당되는 범죄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계정 운영자들과 “악플러”들은 이런 범죄적 행동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부품이 되어 죄의식도, 도덕감정도, 양심의 가책도, 주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이 이 불법들을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좌시(坐視)’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사실상의 범죄혐의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범죄 행동도 하지 않는 영상 속 인물의 도덕성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적반하장식 아이러니다. 이들 중 A씨는 윤지오를 규탄하는 1인시위 쇼를 하더니 며칠 전에는 영상클립 속 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하며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발(김수민에 따르면 이 사람은 고발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준혁”으로 밝혔다고 한다)을 하면서 윤지오를 잡기 위해 캐나다까지 가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 ‘언론’은 그의 1인시위와 고발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한겨레21>(https://news.v.daum.net/v/20190108113802124)에 따르면 “서준혁”은 2016년 게이오대병원 정신과 의사를 사칭하다 걸렸고, 부동산 전문가를 사칭해 피해자를 만들었으며, 서울시 도시재생 연구위원을 사칭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제출한 고발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가 슛맨과 짜고 윤지오 마녀사냥 놀이를 통해 슈퍼챗을 챙기려 한 것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슛맨은 그 슈퍼챗이 실수로 들어온 것이며 모두 돌려줄 것이라는 황급한 해명을 해야 했다. 기자였던 적이 없는데 전직이 기자였다고 사칭했지 않느냐는 의혹은 빼고 말이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소문난 조선일보가 이렇게 정권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 이런 사기전문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과 행동을 홍보해주고 더러운 이미지를 세탁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그래도 이제 조선일보가 대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언론이 ‘증언자 윤지오’에게 ‘놀아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기전문가’에게 ‘놀아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이들 범죄혐의자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로마의 노예제 권력이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 특수한 인간존재를 창출하고 로마법이 누구나 그를 죽여도 좋은 것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법률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에 누구나 짓밟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특수한 인간존재는 없다. 로마에서 ‘호모 사케르’로 되는 사람들은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이었는데 이 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영상 속 인물이라기보다 영상 클립의 자의적 이용으로 타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저작권법을 침해하는 계정주와 댓글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고대 로마법과 다르며 누구든지 짓밟고 죽여도 될 ‘벌거벗은 생명’을 적어도 법 속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구든지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은 사법적 단죄가 필요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왜 이토록 죄의식이 없을까?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어떻게 이토록 국법을 우습게 볼까? 이것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리는 다시 아감벤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은 현대의 국가주권이 부시가 그러했듯이 법을 중지시키는 권력으로, 법 위의 권력, 법 밖의 권력으로 행세하며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고 했다. 윤지오도 장자연 사건의 가해권력들을 여러 차례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계정주들도 자신을 예외권력으로 사고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이들 계정주들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가해권력의 일부, 마디, 톱니바퀴, 끄나풀, 심부름꾼, 알바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범죄혐의자, 가해권력의 톱니바퀴들은 영상 속 인물 즉 타인의 인권, 명예, 성적 자기결정권, 저작권을 짓밟으면서 그것에 ‘정의’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1980년대 초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시민에 대한 자신의 학살행위를 “폭도”를 처단하는 ‘정의’의 행동이라고 불렀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정당은 “민주정의당”(1981~1990)이라는 이름으로 폭력통치를 수행했다. 그 통치행위가 범죄행위로 입증되기까지(아직도 충분치 않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산재한 가해권력의 작은 기계입들이 나날이 자행하는 인권침해, 명예훼손, 성희롱, 저작권침해 등이 범죄로 입증되는 데에도 그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전두환은 계엄군으로 광주를 포위할 수 있었고 계엄령으로 전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지금 윤지오를 2차, 3차… n차 가해하고 있는 장자연 사건의 그 가해권력자들은 돈을 통해 전문가를 매수하고 언론을 통해 가짜진실=환상을 창출하고 고소고발의 사법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진실을 가리는 것 이상의 수단 외에는 마땅히 사용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근대적 디지털 세계는 진실을 가리는 것도 쉽게 만들지만, 가려졌던 진실이 지하에서 더 큰 폭발력을 모아 되돌아오는 것도 더 쉽고 빠르게 만든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저 진실을 가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어내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적나라한 범죄적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형상을 새로이 그려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계를 뒤흔든 1968년의 혁명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에 뜻밖에 찾아 왔듯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2008년, 2016년의 촛불봉기와 촛불혁명도 그렇게 몰래 그리고 갑자기 찾아 왔었다. 진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이다.

맺음말: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하지만 혁명을 신비화하지는 말자. 2016년의 촛불혁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유가족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끈질긴 연대투쟁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촛불혁명의 스모킹건은 태블릿 피시 이전에 세월호 가대위의 진상규명 투쟁이었다. 박근혜에 대한 탄핵도, ‘세월호 7시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부책임자의 그 무책임성 때문이었다.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으로 인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되지 못했다. 이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려면 그것을 켜켜이 뒤덮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중인 윤지오 음해공작의 쌓이는 잔해들을 먼저 걷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가해권력이 지금 윤지오를 음해하는 바로 그 권력인 한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가해권력에 대한 투쟁과 음해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떻게 과거의 그 가해권력의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영상클립들의 두 가지 목적과 세 가지 목표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2)

요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동영상 계정주들의 사업들이 경제적 이득을 거두려는 목적과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운영되는데,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세 개의 목표가 있다. 1)댓글러들로 하여금 디지털 성폭력을 행하게 함으로써 성폭력 체제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것, 2)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인 장자연 사건을 덮는 것, 3)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로 증언자 윤지오를 지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여 성폭력 체제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것.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임의의 라이브영상들의 클립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그 영상들 속의 등장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영상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인물의 여러 장면들인지 아니면 여러 인물들의 여러 장면들인지 알지 못한다. 또 만약 그것들이 한 인물로 수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증언자 윤지오”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윤지오의 증언이 갖는 흐름의 일관성과 신빙성에 어떤 의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라이브영상 클립들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등은 적어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장자연 사건에 관한 증언의 일관성과 신빙성은 일차적으로는 진술조서들의 일관성, 다른 여러 진술자들의 진술과의 교차, 남겨진 증거물들과의 조회 등을 중심으로 검증하는 것이 맞고 필요하다면 당대의 사회구성이나 정치구성과의 관련 속에서 판단할 문제이지 직업적 이유나 취미상의 이유를 갖고 한 라이브 방송의 장면들에 조회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 클립들 속의 등장인물의 직업이 엘리트직종인가 평범한 직종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학력이 높은가 낮은가, 영어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맞춤법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도덕성이 고매한가 저속한가, 인성이 좋은가 나쁜가, 성격이 까칠한가 부드러운가  따위는 증언을 검증하는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증언에 대한 검증을 증인에 대한 검증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박준영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인종주의적 검증관만이 그런 몰상식을 허용한다. 만약 동영상클립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증언에서도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추론하여 전자를 후자의 근거로 삼는다면 변호사, 정치가, 성직자는 원천적으로 증언에 부적격한 인종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세 직업은 거짓말로 먹고 사는 직업군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직업상 웃는 사람이 집에 오면 좀체 웃지 않듯이, 거짓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직벙외의 영역에서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좀더 근본적인 것으로는 로버트 펠드먼의 연구가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진실은 “우리 모두가 10분에 세 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해 본 적이 없어”라는 말이라는 지적도 상통하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들에 따르면 인류 자체의 증언이 신빙성을 잃어버리므로 증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거짓말쟁이라는 말하려는 게 아니라 증언에 대한 검증은 증인에 대한 검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이 영상 클립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윤지오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일까? 그러한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구독자나 팔로워를 불러 모으기 위한 것, 즉 자신의 계정을 홍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경제적 동기일 수 있을 것이다. 광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이들에게 주어질 모종의 댓가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 계정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사업”인 셈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사업이 거두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이다. 이것은 이 사업의 두 번째 목적을 구성한다. 우리는 이 이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두 가지 목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측면의 목표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화, 다르게 표현해서 강간문화와 강간연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들의 영상클립들에 등장하는 것은 한 사람의 “여성”이다. 이 여성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구독자나 팔로워들이 무엇을 하는가? 그 여성을 훔쳐보고 조롱하며 짓밟는 것이다. 훔쳐보면서 관음적 만족을 취하고, 조롱하면서 자기기만과 위선에 들뜨고, 짓밟으면서 성폭력의 쾌감을 향유한다. 그러면서 그 영상의 제작자(나 유통자)에게 지지한다, 응원한다, 존경한다고 찬사를 던지고 ‘한 번만 더, 조금만 더’ 식으로 갈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강간문화와 강간연대가 남성에 의해 주도되고 되고 있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이지만 그 참여자가 남성만인 것은 아니다. 남성권력의 노예임을 받아들이거나 “나는 다르다, 혹은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적극적 참여자인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는 억압과 동의로 구성된 헤게모니 질서로서 남성 폭력을 배후에 깔고 있는 점에서는 억압적 질서이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여성들의 협조 위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동의의 질서다.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은 남성권력에 유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게는 사활이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가사노동을 하는 무상수탈에 의존해 왔고 또 노동 전반의 가사노동화와 여성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인지자본주의는 여성노동을 저비용으로 이용함으로서 착취율을 높이지 않고는 존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여성을 별개의 인종으로, 또 이렇게 인종화된 특수계급으로 차별하는 성차별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축적의 핵심적 메커니즘이다. 

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목표 외에 2009년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목표가 있다. 물론 이 목표는, 장자연의 죽음 자체가 앞서 말한 성차별주의와 성폭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사건을 은폐하고 덮어버리려는 것은 성차별과 성폭력의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첫번째의 장기적 목표의 달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들이 지금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고 그의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려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장기적 목표와는 구별성을 가지며 거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 그 영상들 속에 미시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무엇일까? 그것은 임의 편집된 라이브방송 클립들의 등장인물들과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를 동일한 것처럼 혼동시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지각적 착시 때문에 발생하고(이에 대해서는 나의 글 “‘숨어살던’ 시기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지각적 착시에 대해”(http://amelano.net/?p=967)를 참조하라.)  다른 한편에서는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정체성 혼동은 중요한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다. 윤지오는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까지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얼굴도 실명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데 계정주들은 이 클립 영상들이 그 10년 동안에 촬영된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정들은 클립 영상 속의 인물과 증언자 윤지오가 동일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즉 증언자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이 거짓말이면 증언도 거짓말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억지 논리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증언자 윤지오가 10년 동안 대중에게 얼굴을 보여주지도 이름을 밝히지도 못하고 숨어서 살았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의 TV 탐사 프로그램(예컨대 PD수첩의 ‘고 장자연’)이나 JTBC 전화 인터뷰 같은 데에서 혹은 다른 자리에서 증언을 할 때에는 ‘이순자’라거나 ‘김지연’ 같은 가명으로 혹은 이름 없이 성만으로, 혹은 기호화된 이름으로 얼굴과 실명을 가리고 나오는 증언자 윤지오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제작된 모든 프로그램들에서 윤지오는 얼굴을 뿌옇게 블러 처리하지도 않으며 이름을 숨기지도 않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숨어 살았음’을 입증하기 위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한가? 

클립에 등장하는 그 “여성”은 춤을 추거나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거나 혹은 또 다른 동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지는 않다. 그 디지털 여성의 정체성은 (설령 생물학적으로 동일인의 영상인 경우라고 가정할지라도) “증언자 윤지오”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다. 영상클립들의 등장인물이, 얼굴을 공개하고 이름을 공개하여 지금 윤지오로 살고 있는 인물과 형태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인물로 지각되므로,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산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동안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살았다고 자꾸 생각되는 사람들이 혹시 있다면, 자신의 지각능력과 사유능력에 대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게 두 개의 정체성을 고의적으로 혼동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거나, 한 자리 할 수 있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병리학적 문제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당신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가해권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고의적 혼동에 동참하고 있다면 자신이 가해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인격과 지성과 양심을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지, 그러한 자기매매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디지털 영상물의 세 번째 목표가 있다. 그것은 증언자 윤지오와 공공연히 활동하는 영상 클립 속 인물의 동일시를 통해 그 동안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과는 다른 목표이다. 양자의 정체성 혼동=동일시가 ‘거짓말한다’는 이미지를 낳기 위한 조작이라면 이 세 번째 목표는, 두 번째의 동일시에 기초하여, 영상 클립 속 여성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손가락질함으로써 구독자/팔로워들로 하여금 증언자 윤지오를 손가락질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가 말하듯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성폭력을 당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지만 더 큰 고통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탄과 그 지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한자로 指彈으로 쓰는 우리말 지탄은 글자 그대로 손가락-탄환이라는 뜻이다. 포탄이나 총탄이나 지탄이나 탄환인 한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강간동맹체들에 의해 주도되는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에서는 가해자들보다 피해자들이 늘 지탄의 표적으로 대두되곤 한다. 그리고 죽게 되는 것도 이상하게 대부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 장자연이 이 어처구니 없는 체제의 희생제물이었다는 것에 재론의 여지가 있을까?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1)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 클립의 출처는 어디인가?

요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계정들에서 적극적으로 유통되면서 윤지오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영상클립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묻고 그것이 가해권력자들의 수중에서 나와 조직적으로 유포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글이다. 

언제부턴가 ‘윤지오’의 이름을 내걸고 유튜브 구독자를 호객하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불러들이는 사업이 일대 유행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이 사업의 주요 서식처로 되는 것은 아마도 이 플랫폼들이 다른 플랫폼들에 비해 동영상과 이미지에 강점을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플랫폼들에 또아리를 튼 사업계정들은 시선을 끌만한 동영상이나 정지영상으로 손님들을 불러모은다.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이 계정들은, 손님을 더 많이 끌어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태세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제기하고 싶은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저 수많은 동영상 클립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 윤지오의 이름을 내건 여러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주들의 주장대로 그 클립들이 ‘증언자 윤지오’의 다른 정체성인 어떤 라이브방송 계정주의 방송영상에서부터의 클립이라면 그 클립들의 출처 문제는 참으로 신묘해진다. 라이브방송 계정주 본인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고 그 플랫폼인 아프리카 방송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그 방송화면들이 어디에 채록, 저장되어 있다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계정주의 동의도 없이 인터넷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유통되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대두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인가가 개인의 라이브 방송을 녹화하여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그 수많은 라이브방송 모두를 녹화하여 보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표적을 정하고 필요에 따라 녹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그토록 끈질기게 해 왔던 것일까?

만약 특정한 개인이 이 일을 행했다면 아마도 그는 영상 클립속 그 인물의 (아마도 외면당했을) 열렬한 스토커였었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열성적인 스토커라면 지난 10년 동안에 충분히 노출되고 또 스캔들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가정은 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개인보다는 규모가 큰 기관이 상시적으로 ‘증언자 윤지오’를 표적 삼아 그의 라이브방송을 기록하고 보존해 왔다고 가정하는 편이 그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읽은 언론자료 중에 전직 국정원 직원의 이런 증언이 있다. 장자연 사후 정확히 한 달 만에 나온 <일요신문>과의 구술인터뷰에서 전직 국정원 직원이 한 말들이다.

“구 정권 당시 국정원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국가도 연예인 성접대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국가가 연예인을 통한 성접대를 암암리에 이용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다음은 전직 국정원 인사들의 증언을 모아 일문일답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여자 연예인의 성접대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 이것은 비단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연예계 성접대 비리는 언제나 고위층과 연결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사가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이번 정권에선 아직 성접대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정권들에 비해 다소 자유롭겠지만 그래도 현직 권력자들 중 일부가 포식자이기 때문에 수사는 쉽지 않을 것이다. 

▲ 국정원에서 연예인 성접대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나.

– 당연히 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누가 어떤 여자 연예인과 잠자리를 했고 그들이 즐겨 찾는 연예인이 누구인지까지 파악하고 있다. 이번 장자연 리스트가 터지기 전 KBS에서 이 문건을 입수한 상태라는 것도 이미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었다. 리스트 속의 인물까지 파악했는진 모르겠다. 국정원은 과거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그들에게 성접대하는 일도 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 군사정권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2009년 4월 7일, <일요신문>,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26)

국정원이 이렇게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의 동태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면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이런 정보기관들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일 수 있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국정원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진 언론사나 기업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표적 채록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통되는 영상클립들은 개개 계정주들의 정보입수 창구가 어떠하든 간에, 가해권력과 연관된 어떤 기관에서 유출되는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출의 목적이 증언자 윤지오를 매장하여 증언의 신빙도를 떨어뜨리고 추가 증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을 것이라는 것은 현재의 상황과 상식에 비추어 자연스런 추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수 년 간 지속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법투쟁 과정에서 이 영상클립들의 출처에 대한 수사는 불가피할 것이고 또 개별 계정들이 이 영상클립들을 어디서 확보했는지에 대한 수사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정을 기초로 나는 얼핏보면 경쟁적으로 보이는 저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의 분산된 사업들이 실제로는 가해권력을 수호하고 또 가해권력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조직적 정치사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작성 하던 중에 읽게 된 기사에서, 이 클립들을 근거로 A씨가 윤지오 씨를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소했다고 하는데, 이 A 씨의 행동도 역시 이 조직적 정치사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조직적으로 영상클립을 유통시키고 있는 저 계정주들인데 윤지오 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엄정한(?) 고소행동에 나선 A씨가 편파적이게도 이들의 범죄적 행동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주고 있는 것을 보아 서로 한 패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만약 A씨가 이 글을 읽고 저 계정주들을 동등하게 고소한다면 나는 이 견해를 공개적으로 취소할 의사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견해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더 굳게 믿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가 고삐를 쥐다

요점: 6월 15일에 초고를 썼지만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공개하지 않았던 글이다.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국민들을 배반하게 함으로써 국민을 무력하게 만들고 국가권력의 비선실세로 행세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2019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대한민국 권력자들(그 중의 하나가 언론권력인 조선일보 자신이다)의 마녀사냥 놀음을 ‘거짓 증언 논란’으로 부름으로써 5월에 유행했던 ’증언 신빙성 논란’이름을 한 단계 더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든 후, 조선일보는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었던 9인의 국회의원과 청와대를 그 거짓의 방조자, 협력자로 고발하는 정치공세에 나서고 있다. 6월 14일자로 나온 몇 개의 기사제목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일보가 지금도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권력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경기지방경찰청장을 협박했던 그 조선일보가 이제 국회의원을 무릎 꿇리고 청와대를 질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거꾸로 서있다. 제 대로 된 나라라면 그 나라를 구성하는 나랏사람들이 주인이어야지 사기업체가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주권이 나랏사람들로부터 나와야지 사기업체에서 나오면 안 된다. 국민들이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해야지 일개 사기업체의 신문이 그런 짓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하고 퇴출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변호사 직함을 가진 자유한국당 소속인 박민석, 강연재, 그리고 조선일보의 친구인 최누리, 그리고 사법행동에서 이들과 공조하고 있는 ‘사회주의자’ 박훈 등이 고소고발로 윤지오를 짓밟아 그가 들고 있던 증언 촛불의 마지막 불씨까지 구둣발로 비벼끄고 나면, 그리하여 지금은 “거짓 증언자”로 부르는 윤지오를 “사기꾼 윤지오”로 명확히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면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언론권력으로, 공식 체계 바깥에서 공식적 대의권력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秘線實勢)의 권력으로 우뚝 서게 되지 않겠는가?

대체 어떻게 이러한 헌법유린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어떻게 나랏사람들의 주권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고 비선(秘線)의 의제된 주권이 들어서는 것일까? 여러가지 조건과 이유가 작용하고 있겠지만 국회의원 안민석이 2019년 6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조선일보는 이 글을 “궁색한 사과문”이라고 부른다. 누구에 대한 사과문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 속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안민석입니다.

우리 사회의 큰 잘못이었던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증언자로 자처한 윤지오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선한 의도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그분들은 저의 제안으로 선한 뜻으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습니다.

윤지오 증인 국회 간담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이후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윤지오 출판기념회는 성직자 한분께서 선의로 도와 달라고 요청하셔서 제가 도와 준것이니 다른 국회의원들과는 상관없음을 밝힙니다.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보 기사를 쓴 기자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윤지오 증인을 도운 것이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평소 공익제보자는 보호되야 한다는 믿음이고 노승일 부장 박창진 사무장 박관천 경정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서로 도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피해를 걱정해서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것입니다. 정치인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의정활동 하겠습니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지오가 “증언자로 자처”했는가? 아니다. 윤지오를 증언자로 불러들인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대의하는 정부(법무부)였고 직접적으로는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 이후 국민의 이 부름에 응한 후, 윤지오가 자신이 “유일한 증언자”로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증언, 즉 진실말하기에 나서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유감과 안타까움을 함축한 것이었다. 함께 진실을 말하자는 제안을 담은 것이었다. 안민석은 윤지오가 마치 스스로 “증언자”로 나선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증언자로 자처하고 신변위협을 과장해 국민을 기망한 사기꾼”으로 몰아 붙이는 가해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어 안민석은 곧장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의 “난처한 입장”에 관심을 돌린다. 그러면서도 지금 가해권력자들의 유도(誘導)에 따라 수천수만의 군중들의 손가락질과 욕설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죽은 장자연과 성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 노예계약에 시달리는 연예노동자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개돼지로 학대당하는 국민들을 대표하여 촛불증언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증언자 윤지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짐짓 스스로 윤리적인 체하며 핏발선 눈으로 사람들은 외친다. ’허언증 환자’, ’사기꾼’, ‘탕녀’는 감옥으로, 라고.  로마권력자들의 눈에는 예수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계속 주장하는 ‘허언증 환자’, ‘미친 사람’이었고 천국이라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기망”하여 주변에 불러 모으는 “사기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했는가?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조차 예수를 비난했다. 

왜 십자가의 역사가 교훈이 되지 않고 동일하게 반복될까? 왜 안민석은 “증언자 윤지오”와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지금은 윤지오를, “선한 의도”로 그를 도우려 했던 의원들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는 마치 악한 의도를 가진 말썽꾸러기처럼 묘사하는가? 동행하겠다는 약속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그리고 재판도 열리기 전에 왜 안민석은 가해자들의 안내를 받아 군중이 윤지오에게 덧씌운 범죄자 혐의를 사실로서 묵인해 버리는가? 윤지오의 증언이 어느 것 하나 진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조작되어온 가짜진실을 바로 잡아온 상황에서 왜 그 증언, 공익제보를 외면하는가? 왜 안민석은 “촛불국민이 부른 윤지오”의 증언을 배신하는 유다의 길을 선택하는가? 

물론 안민석도 “모두 제탓”이라고 하며 십자가를 짊어진다. 그 십자가가 누구의 십자가인가? 국민의 십자가인가? 촛불국민의 십자가인가? 아니다. 동료 국회의원들을 위한 십자가일 뿐이다. 여야 가릴 것 없는 동업자 국회의원들의 십자가일 뿐이다. 안민석은 말한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윤지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하는 동안 국회의원들은 무얼 했는가?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혔는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수 있도록 가해자들을 찾아냈는가? 안민석은 윤지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지오와의 동행을 약속한 국회의원들이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국회의원의 동행 방식인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손놓고 있을 때 국민이고 증언자인 윤지오는 국정감사보다 살벌하고 청문회보다 더 가혹한 신상털이를 당하고 있었다. 오직 힘 없는 네티즌들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국민과 증언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선의를 표현하는 방식인가? 물에 빠진 자가 살려달라고 외치며 손을 뻗어 구조를 요청하지 않을 때는 방관하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윤리학인가? 그 윤리학이,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구조요청이 들려오지 않는다고 손놓고 있었던 해경의 방관과 무엇이 다른가? 촛불국민, 미투여성, 윤지오가 탄 증언의 세월호가 마녀사냥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있는 지금 그 배에 동행을 약속했던 국회의원 안민석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떠한가?  해경123정을 타고 기관원들(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친 세월호의 선장의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

안민석은 말한다. 나의 동료 국회의원들은 윤지오와 “상관없”다고.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다.”라고. 나의 몸은 “나병”에 옮지 않은 깨끗한 몸이라고. ….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이 사정의 말은 누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촛불국민들에게 하는 말인가? 미투여성들에게 하는 말인가? 증언자 윤지오에게 하는 말인가?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공익제보자들에게 하는 말인가?

국민들은 ‘나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안민석의 당부의 말이 촛불국민, 미투여성, 증언자 윤지오, 공익제보자 들보다는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자들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말임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또 국민들은 안민석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권력자들 앞에서 무릎꿇고 비는 모습에 상황판단이 흐려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어서 앞으로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그 손이 공익제보자들을 결정적으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겪고도, 모를 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대인공격을 통해 그 대표들이 국민을 배반하고 자신들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비선실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가해권력자들의 입 TV조선이 ‘탐사보도 세븐’에서 증언자 윤지오를 음해하는 정치적 이유

요점: 1.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밝혔다. 2.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고 문건이라면 장자연의 죽음은 원점에서 재수사되어야 한다. 3. 장자연의 글을 유서라고 보게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이로부터 이익을 편취해온 가해권력자들이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을 시작했다. 4.그럼에도 윤지오는 장자연 죽음의 진실을 직접 국민들께 알리기 위해 책으로, 인터뷰로 증언을 이어갔다. 5.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음해공작이 시작된 후 정치권은 윤지오를 음해하는 세력과 그 음해를 방조하는 세력으로 구분될 뿐이다. 6. 이 음해공작을 깨뜨릴 조직된 저항세력이 없는 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 음해를 향후 총선과 대선의 주요 이슈로 밀고 나갈 것이다. 7. 윤지오의 증언을 지켜서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할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이 절실한 시간이다. 8. 미투시민행동의 페미시국광장은 그 첫걸음일 수 있다.  

  • 2009년 3월 7일 직후의 첫 언론보도(사실은, 조작)로 인해 국민 대다수는 지난 10년간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10일, 노컷 뉴스의 기자 김대오 기자, 조선일보의 기자 박은주가 호야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유장호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이미지가 장자연이 유서를 남겼다는 가짜-이미지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글”이라고 보도했고 박은주는 사망하기 직전 남긴 “장문의 글”(“유서’의 사전적 의미가 바로 죽기 전에 남긴 글이다)이라고 보도했다. 김대오는 제2보에서 그 글이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달라”고 장자연이 부탁해서 보관하고 있었던 글이라는 유장호(‘장자연의 한 측근’)의 말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보도함으로써 그 글이 유서임을 의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장자연의 문건을 실제로 본 경찰, 검찰, 법관은 그것이 유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언론이 대중을 대상으로 꾸며낸 이 가짜 이미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국민으로 하여금 유서라고 오인하게 하는 것이, 또 그 오인을 방치하는 것이 가해권력을 무혐의로 만드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연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가능성은 배제되는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그 죽음에 연루되었을 수 있는 다층다양한 가해권력들이 샅샅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언론권력, 경찰권력, 검찰권력, 사법권력이 계약직 연예노동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국민을 기망하는 연합된 사기권력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알고 있으면서” 국민을 속이는 고의적인 국민 기망의 권력이었다. 이 권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고 통제되지도 않는 권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국민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감시해야 할 것은 이들 권력들이 국민들을 속일 위험이라는 문제이며 국민의 안전이라는 시각에서 그 위험을 통제할 장치를 실제적으로 고안하는 문제다.
  •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이고 그 문건에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일관되게 증언해온 유일한 증언자이다. 시민사회는 몰랐지만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증언조서(문건)라는 것은 법정에서는 공인된 사실이었으며 이상호가 재판과정에 대한 취재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낸 사실이고, 심지어 장자연이 남긴 글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이라고 보도했던 김대오도 [아무런 이유설명도 사과도 없이 말을 바꿔] 인정한 사실이다. 
  • 윤지오의 <13번째 증언>과 언론 인터뷰 이후 한국 국민들 중에 장자연의 글이 문건이 아니라 유서라고 우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 즉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는 것은 장자연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 그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면 장자연이 그 문건을 왜, 어떤 정황 속에서 작성하게 되었는지 명백한 조사가 필요하며 국민들에게 그것들이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왜 국민들이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라고 잘못 알게 되었는지, 왜 국민들이 그토록 장기적인 오해무지 속에 방치되어 왔는지 조사되고 규명되어야 하며 진실을 은폐한 책임자를 찾아내 문책해야 함을 의미한다. 
  • 윤지오의 증언으로 인해 분명해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난 10년여 동안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로 풀어주는 데에 봉사해온 언론, 경찰, 검찰에 의해 기망(欺罔) 당했으며 그 이득을 편취(騙取)한 것은 가해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국민을 대신해서 수사를 맡아온 사람들과 기관들은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는 관점에서 국민들에게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해내야 하며 그 관점에서 범죄행위자를 다시 조사해서 처벌을 해야 한다. 이것이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 및 엄정한 처리를 지시하게 된 조건이다.
  • 윤지오의 증언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증언을 통해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진실을 알리고 처벌을 촉구했다. 그는 2018년 말 조희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증언들에 힘을 실어 실제적 처벌로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2019년 3월에는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 그가 공개적으로 책을 내고 방송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진실을 증언해도 진실이 국민들께 전달되지 않는 것을 10년 내내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가해자를 비호하는 권력기관들에 의해 철저히 기망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론, 경찰, 검찰 당당자들이 사실을(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법정투쟁용 문건, 즉 증언조서임을) 알고 있으면서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숨기고 수사를 부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 처분하는 것을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취급하는 조사/수사기관과 국민 사이의 이 간극 속에서 국민들이 조작된 무지 상태에 방치되고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의 힘으로 장자연 사건이 재조사 대상으로 오른 것(“이슈화”)을 이용하여 허구가 가려버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 그는 이를 위해 2018~9년에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와 별도로 조사나 수사기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국민들께 직접 사실을 널리 알려서 국민으로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지난 10년간 계속된 그의 증언경험을 토대로, 국민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탄핵-파면하고 이어 권력형 성범죄자들을 단죄해온 촛불과 미투의 경험을 자기성찰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슈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해 보지 못했던 것을 영리하게 해 보려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영리한 행동’이라는 계획은 내가 <절대민주주의>(2017)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攝政)’이라고 불러온 것, 즉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절대화하는 삶정치적 운동과 상통하는 구상이다.
  • 일정기간 동안 이 영리한 섭정의 행동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청원행동에 나선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를 수평적으로 조직화한 연합세력이 아니었고 흩어져 있으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역관계에 반응하는 흩어진 개인들이고 언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론적 존재였다. 일부 여성단체들과의 협력이 있었지만 일시적 협력이었고 윤지오는 개인인 증언자로서 움직였다. 
  • 아래로부터의 섭정력이 충분히 자기조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윤지오의 증언행동과 그에 대한 시민연합은 SNS, 유튜브와 같은 기업적 소셜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었다. 녹색당과 같은 원외정당, 정의연대와 같은 일부의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증언을 통해 제기되는 이슈를 사회적 의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윤지오의 증언이 첨예한 것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하고 사회이슈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화 역량이 미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개인으로서 국민청원을 통해 과거사위원회 조사기간 연장을 청원하거나 윤지오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를 요청하거나 경호를 위한 후원금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적 연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안민석을 비롯한 몇몇 국회의원들(이른바 ‘동행모임’)이었다. 지금 수개월에 걸쳐 점점 규모를 키워가며 지속되고 있는 ‘사기꾼 만들기’ 집단음해공작의 강도에서 반증되다시피, 윤지오의 증언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보호가 필요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이 국회의원들이 윤지오에 대한 실질적 보호조치를 했는지, 그 보호조치가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연대력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힘을 발휘했는지는 의문이다. 
  • 안민석이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4월 8일 윤지오 국회초청간담회를 가진 이후 이들은 윤지오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실질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동행모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서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국회의원으로서 플러스가 될 수 있는 ‘공익제보자를 돕는다’는 이미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4월 중순 이후 윤지오에게 실질적인 음해시도가 시작되고 위험이 분명해졌을 때에는 사실상 어떤 보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수수방관했으며 자신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거의 동시에, 윤지오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윤지오를 통해 구독자를 늘렸던 고발뉴스, 뉴스공장 등의 유튜브들도 윤지오에 대한 가해권력측의 공세가 뚜렷해진 4월 말 이후로는 윤지오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 윤지오가 국민의 부름을 받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을 하고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비록 단단하게 자기조직화된 시민들의 지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국민적 여론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지오가 보호자를 자처한 동행자 국회의원들과 연결되자마자 윤지오는 정파투쟁과 정권투쟁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보수 정파와 보수 언론이 빠르게 결집하여 증언자 윤지오를 반(反)정권투쟁의 초점으로 삼기 시작했을 때 동행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신속하게 증언자 윤지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그것이 혹자가 조롱조로 말하듯이 윤지오가, 현 집권세력에게 기대하는 바의 큰 정치이슈를 갖다 주지 못한 탓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윤지오가 제기하는 문제들(조선일보 방씨 일가, 의문사와 타살 가능성, 국정원의 개입, 홍준표, 마약주입과 성폭행 의혹 등)이 현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원칙적으로 다루어 나간다면 현 집권세력 자신도 그 일부로 속해 있는 가부장제 성폭력 질서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무렵 여성주의 이슈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남성 20대의 지지율을 떨어뜨린다는 보고서까지 제출되면서 이것이, 장자연-윤지오를 둘러싼 쟁점에서, 집권세력이 남성 20대 지지율을 높이고 총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물러나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쟁점은 본질적으로 가부장제 성권력 체제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미디어스>의 전혁수 기자가 잘 정리한 것처럼,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에 대한 가해자로 지목되어 지탄 받아온 조선일보는, 윤지오에 대한 성폭력적이고 인권말살적인 융단폭격을 퍼부은지 약 2개월여에 만에, 이제 자신을 (가해자가 아니라) ‘사기꾼 윤지오’를 단죄하고 사기꾼을 방조한 정치인들을 꾸짖는 정의의 언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6월 14일 안민석의 비굴한 페이스북 항복 문서는 이러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한다’는 조선일보의 위력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내고 피해 조력자에게 비겁한 변명을 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정의의 투사처럼 우뚝 세우는 교활한 정치공작술을 통해 다시 한 번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 <탐사보도 세븐> 2019년 7월 19일자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는 이 정치공작술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종합판본이다. SBS의 ‘궁금한 이야기 Y’가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편집노하우를 보여주었다면, ‘탐사보도 세븐’은 <Y>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기초로 집권여당계 정치인들이 윤지오에게 이용당할(“놀아날”) 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집노하우를 보여준다. 10년 동안 경찰과 검찰이,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증언조서)이라는 것을 국민 몰래 알고 있었듯이, 지금 조선일보나 SBS도 국민 몰래 윤지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윤지오를 포함한 83명에 대해 포괄적 조사를 수행했던 과거사진상조사단처럼, 폭넓은 취재력을 통해 팩트를 알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론이 팩트를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팩트를 편집하는 기관이고 진실을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할 진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기관이라는 점에 있다.
  • 교활한 ‘사기꾼’에게 이용당하는 무능한 권력은 존재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통해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세븐>의 기획의도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세븐>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를 집권권력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윤지오를 둘러싼 내기판이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이 무고한 시민이자 장자연 사건의 피해자이고 또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를 총선을 앞두고 정쟁의 볼모로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븐>의  진행자 유오성의 형인 유상범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로 재직할 당시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2017년 7월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되었다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이러한 정치적 배경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여러 요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 ’거짓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윤지오’라는 구호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가해권력들이 이런 정치적 이유에서 만들어낸 날조된 구호이다. 이들은 총선에서의 다수당화와 차기 집권을 위해 이 구호를 향후 수 년 간 밀고 나가려 할 것이다. 젠더 입장에서나 계급 입장에서 여성-계약직-연예-노동자였던 윤지오나 장자연보다는 오히려 가해권력과 더 큰 공통점을 가진 현 집권세력은 윤지오를 방어하고 증언자 윤지오와 함께 고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재수사와 가해자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워나갈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미 이들은 이 사건을 (바둑에서의) ’내준 집’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악영향의 최소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고 장자연 사건을 규명할 힘은 다시 아래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7월 8일 350여개 여성단체들이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미투시민행동)을 조직하고 고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경찰과 검찰의 행태를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서울 광화문에서 ‘페미시국광장’을 무기한 열기로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사적이다. 첫 집회는 7월 12일 저녁 7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렸는데 이들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일보를 적폐언론으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의 폐간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검경 개혁, 여자들이 하자”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이 시작한 싸움에 여성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남자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이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절대민주주의적 섭정론에 따라, 국민에게 제대로 “이용당하는” 정부,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를 원한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정부들이 국민들을 개돼지로 무시하면서 재벌에게, 미국에게, 일본에게 “놀아났다”. 조선일보, 티비조선 같은 가해권력들이 (지금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서 나타나듯이) 그러한 반국민적 매판정부를 창출해 왔고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가 들어서면 그것을 퇴출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라는 비난성 질문은 정부가 국민을 위하지 말고 재벌, 미국, 일본을 위하라는 언론권력의 반동적이고 매판적인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혐오 극장의 등장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_에필로그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 활동기간이 2주 남은 때인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한국여성의전화·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의 여성단체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및 고 장자연씨 사건 진상규명촉구’ 기자회견을 열었고 윤지오도 이 자리에 참석해 발언했다. 그런데 여기서 윤지오의 발언은 기존의 통념이나 보도기조와 사뭇 결이 다르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발언의 기조를 ‘진상규명 요구’라고 보도했지만 아래의 녹취록이 보여주는 것은 그 ‘진상규명 요구’가 직접 ‘가해자에 대한 처벌 요구’와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명확하게 들리지 않아 추정으로 삽입한 부분, 보충이 필요한 부분, 발언실수로 보여 바로잡은 부분은 [ ]로 표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일한 목격자가 아닌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입니다.

제가 대중[앞에 보다] 더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무리해서까지 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을 전하고 싶고 여러분들도아셔야할권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가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보셨으면 했고, 꼭 보셔야 할 것이라고, 그 분들 보시라고 인터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게 해 드리[는] 인터뷰를 할 수 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또 언론이 [다른 타겟을 덮는 현상은] 저와 같이 체감하셨으리라고 보고 여러분의노력으로 나약한 제가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단순 자살이 아니라고 보고 수사가 들어간다면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닌 25년으로 변경되어 집니다.

공소시효란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 때, 일정기간이 지나서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으면 형벌권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범죄종류에 따라 그 기간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시점으로부터 10년에서 25년에 달하는데 정해진 공소시효 기간이  지나버리면 증거가 있다고 해도 벌을 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21일]에 살인죄를 범한 범인[에 대해]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10년 늘렸습니다.

그런데 2007년 [12월 20일]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의 공소시효가 그대로 15년입니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 정황을 많은 분들이 실감했을 테고 [이제] 이러한 불상사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주신국민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지오는 사건의 중요 쟁점과 관련해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라는 것, 즉 목격자는 자신 이외에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목격자들이 진상규명에서 증거가 될 만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서 자신을 [현재로서는] ‘유일한 증언자’로 칭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이 권력의 위협에, 그리고 증언자를 향한 2차, 3차 가해에 대상으로 노출될 수 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가해자들의 추가 가해의 방식은 일정하게 정형화되어 있지만 그것의 수준은 예측불허이다.

윤지오는 자신이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는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국민들께 사실을 전한다는 것이다. 윤지오가 고려하고 있는 또 하나의 특이한 청중이 있는데 그것은 가해자들이다. 윤지오는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인터뷰를 보았으면 하는 희망만이 아니라 보아야 한다는 명령을 전달한다. 가책(苛責)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만약 이것이 가책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이라면 윤지오가 처벌적 정의에 앞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해자들이 가책을 받고 자책하여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의 정의에 기대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목은 윤지오의 태도가 그러한 회복적 정의의 추구와는 다르거나 최소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월 15일의 발언에서 윤지오는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그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장자연 사건의 가능한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니라 25년일 수 있다는 주장이며 원점에서의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조희천 성추행 사건 외에는 공소시효가 다했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은 과거사일 뿐 본질적으로 재수사할 사건이 아니라는 검찰 과거사조사위 측의 주된 기류에 반하는 주장이다. 윤지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처벌되어야 한다는 ‘처벌적 정의’의 관점에서 지금도 재수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공소시효 만료된 사건을 어떻게 재수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을 단순 자살이 아니라고 보고 수사가 들어간다면” 가능하다는 것이 윤지오의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닌 25년으로 변경되어”지고 공소시효가 아직 15년이나 남게 되기 때문이다.(참고로, 2015년 7월 24일 대한민국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폐지되었다.)

장자연의 죽음을 의문사로 바라보면서 수사기관에 재수사를 요청하는 윤지오의 문제제기는 몇 가지 근거들을 갖고 있다. 이 근거들에 대해서는 “살인 혐의 수사는 왜 고려조차 되지 않았는가?”(http://amelano.net/?p=673)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나는 뒤로 돌아가지 않고 이 문제제기가 증언자 윤지오에게 미친 영향에 관심을 집중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윤지오가 3월 15일에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전 국민과 가해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국가를 향해서는 장자연의 죽음을 단순자살이 아닌 시각에서, 즉 살인의 시각에서 수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윤지오의 증언행보에 가져온 반발력에 주목하고자 한다.

윤지오의 요청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굳어진 통념을 깨뜨리는 시각이었다. 이 무렵,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 부분(경찰과 검찰 등 수사자료에 접할 수 있었고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유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던, 하지만 그것이 유서로 인식되도록 조장하고 방치했던 수사기관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은 장자연이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것을 믿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지오는 하루 전인 3월 14일 고발뉴스에서, 유서라고 알려진 그것이 실제로는 유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한 바 있다. 이날 그는, 장자연이 유장호의 요구에 따라 권력자들의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는 문건과 리스트를 작성한 후, 그 문건과 리스트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유통되는 당황스런 상황을 맞이 했을 뿐만 아니라, 며칠 후 유서조차 없는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그 주검은 부검도 없이 화장되었으며 유장호, 경찰들, 그리고 기자들이 누가봐도 유서가 아닌 그 문건과 리스트를 유서로 만들어 공표한 사실을 상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근거 위에서 3월 15일에 그는,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이 처음부터 조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수사기관이 진상규명을 위해 단순자살이 아니라 살인의 관점에서 재수사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면서 아직 처벌가능한 시효 즉 공소시효가 남았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 요구는, 한국 사회의 적어도 세 유형의 세력에게,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될문제를 던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세력이 누구일까?

첫째는 혹시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통해 그 범죄행위가 드러나게 될 지도 모를 어떤 살인 가해자이다. 실제로 그러한 살인 가해자가 숨어 있었고 윤지오의 발언을 들었다면 필사적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직접적 가해권력’이라고 불러 보자.

둘째는 장자연의 죽음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 경찰과 검찰, 즉 행정권력이다. 경찰은 초동 수사에서 장자연의 죽음을 단순자살로 처리했고, 검찰은 김종승과 유장호에게 경미한 형벌을 준 것 외에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하여 중대한 혐의를 받고 있던 대부분의 인물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 주체들 역시 지난 10년의 행적이 직접적 가해권력을 비호한 것으로 의심되고 재수사의 칼날이 자신들에게 향함으로써 자신들이 실제로 문책 당할 수 있는 상황의 도래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장자연 문건에 이름이 등장하며 장자연 사건을 한 연예인의 불행한 자살사건으로 보게 만드는 사회적 인지프레임의 형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주체, 즉 조선일보 같은 언론권력이다. 이미 수사과정에서 황제조사, 증거인멸, 위장증언, 수사혼선, 수사외압, 거짓보도 등을 행하면서 자신의 보존에 급급했던 이 언론권력이 살인 관점에서 재수사가 재개될 수 있는 상황을 방치할 리는 만무할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검증의 목소리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며 그 검증몰이는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로 발전했다. 이어 긴 시간에 걸쳐 증언자의 인성, 도덕성, 행실, 사생활 문제에 대한 아주 전형적인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처벌적 정의의 관념에 따라 윤지오가 행한 증언행동이 맞닥뜨린 철벽이 이것이다. 그런데 그 철벽은 가변적으로 움직이는 트랜스포머형 철벽이었다. 윤지오는 적어도 이때까지는 국민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국민과 함께 “멀리까지” 왔다. 하지만 단순자살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재수사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한 다음부터, 윤지오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전문가-기계, 언론-기계, 유튜브-기계 등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가동되었고 윤지오로부터 국민들을 하나하나 분리시켰다. 이것들은 가해자들을 시야 바깥 안전지대로 은폐하면서 피해자이기도 한 여성 증언자의 사생활을 들춰내어 조롱하는 센세이셔널한 3류극장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 무대에 올려진 윤지오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의 형상으로 모질게 그려진다. 가부장제 성폭력 극장에서 성폭력의 피해자인 서지현과 김지은을 ‘꽃뱀’의 형상으로 그렸듯이 말이다. 이 극장은 가해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들을 처벌되어야 할 자로 그리는 책임전가의 극장이고 젊은 여성은 믿을 수 없고 오직 이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치는 성차별의 극장이며 더 이상 증언은 불가능하다고 명령하는 진실혐오진실종말의 극장이다. 

거스를 수 없는 “민중의 힘”과 ‘처벌’을 통한 정의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3)

거스를 수 없는 “민중의 힘”

하지만 윤지오 자신의 인지적 정동적 변용으로부터 이러한 결단이 직접적으로 도출되어 나왔다고 본다면 그것은 일면적일 것이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2016년 촛불혁명과 그 2차국면으로서의 미투봉기가 윤지오에게 불어넣어준 용기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인간적 결단과 결합되어 있는 사회적 측면이다. 한국이 촛불혁명과 미투봉기를 통해 가부장적 성권력 체제에 대한 비판과 고발을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역사적 믿음의 측면이다. 물론 캐나다에서 살았던 윤지오에게서 촛불혁명의 체험이나 기억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지오는 촛불혁명의 여파로서 한국 사회에 일고 있던 세 가지 변화의 계기들이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변화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계기는 2017년 12월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발족이다. 이것은 촛불혁명 이후 아래로부터의 개혁압박에 밀린 검찰의 위로부터의 반성(?)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검찰이 적법절차 준수와 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검찰총장이 국민들께 사과한 후에 그 후속 조치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장자연 사건은 검찰이 자행한 대표적인 부실수사 사건이므로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심으로 국민들께 반성하고 사과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시정하는 검찰의 자기정화 노력의 표현이라면 장자연 사건은 필수적으로 다루어지고 진실이 밝혀져야 할 사건이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13번째 증언>의 17장에서, ‘장자연 사건을 재조사한다해도 나올 게 없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은 불가능하다’는 등 검찰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내부 반론들을 바라보며 과거사위원회의 발족에 그다지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윤지오는 두 번째 계기인 미투봉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미투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고백함으로써 ‘숨어 살기’라는 강요되고 전도된 ‘피해자다움’을 거부하고 (한국의 경우 실명으로) 가해자를 고발한 운동이다. 윤지오는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실명얼굴드러내고서 자신이 당한 성추행(1차 피해)에 대해, 그리고 그에 이어진 ‘꽃뱀’이라는 비난 및 인사불이익 조치(2차 피해)에 대해 고발한 것에 주목한다. 이때 서지현 검사는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피해를 당하고도 숨어 사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3번째 증언>에서 윤지오는 그 말이 “어쩌면 9년 전 자연 언니가 진정으로 듣고 싶었을 위로와 응원의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205)고 쓴다. 그리고 그는 미투의 서지현이나 김지은이 그랬듯이,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면서 출판하기로 결심한 이 책의 맨 마지막 문구를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야”(245)로 맺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피해자다움을 거부하면서 “잘못 없음”(무죄함)을 자신에게 한 번, ‘자연 언니’에게 한 번 선언하는 자기판결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잘못이 가해권력에게 있으므로 필요한 것은 피해자다움이 아니라 가해자다움이라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이 두 계기는 장자연 사건 재조사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세 번 째 계기에서 종합되었다. 국민청원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수십년 전에 지워져버린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를 행정차원에서 미약하나마 실행하는(정확하게는 시뮬레이션하는) 장치다. 대한민국 국민은 (스위스 국민처럼) 법안을 발의하여 그 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사를 잘못 대의하고 있는 대표자를 소환하여 해임할 수도 없는 사실상의 ‘탈정치=정치박탈’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2016년 촛불혁명 과정에서 그토록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제는 권력이 이러한 목소리를 달래는 통치장치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목소리를 청와대에 전하는 신문고의 역할도 한다. 과거사조사위원회 1차 조사대상에 ‘장자연 사건’이 오르지 않은 것에 격분한 수많은 누리꾼들이 권력형 성폭력 범죄의 대표적 사례인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사전조사 대상에 포함시키라며 국민청원에 나섰고 2018년 4월 2일 장자연 사건은 마침내 2차 사전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어 6월에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 재수사를 권고했다. 이를 두고 윤지오는 “국민청원에서 이미 증명된 민중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 같다”(230)고 평가한다.    

윤지오 고유의 법의지: 처벌을 통한 정의

이상의 설명은 윤지오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고 증언하기로 한 조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캐나다와 한국의 정치문화적 차이에서 윤지오는 캐나다가 이미 보여주고 있는 피해자 중심의 정치문화 쪽으로 한국이 나아가기를 바랐다. 또 그는 촛불혁명과 미투봉기를 통해 한국 시민사회와 민중 내부에 그러한 이행을 가능케 할 역량이 무르익고 있다고 보았다. 윤지오는 대한민국 국민의 힘, 아래로부터 민중의 정치적 힘을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윤지오에게는 국제적 문화조건이나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적 성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주체적 모멘텀, 고유한 법의지(Rechtswille)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예인, 여성, 나이어림, 학력, 도덕성 등을 이유로 간과해 버리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식으로 뭉개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해권력이 우리 사회의 변호사, 작가, 기자, 교수 등의 소위 “전문가들”과 신문, 방송, 유튜브 등의 스펙터클 미디어들을 총동원하여 벌이는 성별, 계급, 인종을 뛰어넘는 ‘대(對)윤지오 총력전’을 통해 깊이 은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들이 이토록 집중적이고 끈질긴 총력전을 펼치는 것일까?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 우리는, 장자연 사건의 실체를 은폐한 일등공신(?)이었던 검찰이 바로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와 재수사 요구는 검찰에 대한 비판을 수반함녀서 시민사회로부터 제기되었음에도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시민 주도성이 아니라 검찰 주도성을 허용하는 기구였다. 장자연 사건을 2차 사전조사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과거사조사위원회는, 미리부터 성상납 및 리스트 재수사는 10년인 공소시효 때문에 재수사가 불가능하므로 리스트나 성상납 의혹이 아니라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과 검찰을 수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공공연히 흘렸다. 이것은 장자연의 사회적 타살 사건 그 자체를 조사하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을 조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겠다는 (사실상 사건 은폐형) 가이드라인 제시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대한 윤지오의 반응 속에 윤지오 고유의 법의지가 표현된다.

“재수사를 통해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C의 성추행’과 ‘검경의 고의적인 사건 축소와 부실수사’ 정도라니…… 성상납에 대한 규명과 연루된 자들의 처벌은 불가하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웠다.”(234)

이 ‘실망스러움’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강한 의지의 이면이다. 내가 ‘’과거사 조사’를 둘러싼 두 가지 시간성의 투쟁’’(http://amelano.net/?p=646)에서 서술한 것처럼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로 만들어 영구히 과거화하려는 경향을 보였음에 반해 윤지오는 사건의 현재화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사회정의 실현의 필수적 요구라는 입장을 역설한다. 윤지오가 ‘정의(justice)’와 같은 학술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의 감성적 언어는 장자연 사건에서 정의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진상규명을 기초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윤지오의 태도는 장자연 사건에 임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언젠가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집회에서 유경근 4.16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책임자에 대한 처벌, 처벌, 또 처벌입니다”라고 이미 쉰 목소리로 절규하듯 외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윤지오는 그에 비해 훨씬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유경근과 동일하게,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윤지오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이 처벌에의 의지를 떠나서는 이후 윤지오의 어떤 행동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재조사가 시작되면서 윤지오가 전화로 검찰에게 참고인 진술을 시작하고 C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 2018년 12월 초 C의 2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1월 27일 서울행 비행기를 탄 것은, 1차 공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그 “C의 잘못이라고 확실히 밝혀내야 한다”(234)는 것, 즉 처벌적 정의,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추기: 2019년 7월 15일 그 전직 조선일보 기자인 그 C씨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형사 3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강제추행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윤지오 씨의 진술이 상당히 신빙성 있다’는 것을 근거로 징역 1년을 구형했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182]

피해자다움의 강제적 수용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의 결단으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2)

“결국 올바른 피해자다움이란 이번 판결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피해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최대한 격렬히 저항하고, 피해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신고한다. 피해 이후에는 가해자가 두렵고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티내고 싶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무조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 신고 과정에서는 자존감이 강해 보이는 단호한 모습 대신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해리 상태에 빠져야 한다. 평소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도 소송 과정에서는 신뢰할만한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상태’다. 모순 그 자체다.” -도우리[미디어스 기자]

강요된 피해자다움의 부득이한 수용: 기자로부터의 도피

‘동료배우 윤 모 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3번째 증언> 14장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를 받으면서 느낀 혼란에 대한 서술이며, 그 피해자다움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윤지오에 대한 피해자다움의 강요는 (장자연을 대신하여)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자들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윤지오에게 “걸려 오는 전화도 마음 편히 받지 못할” 정도로 “나를 통해 언니의 일을 캐려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168)로 다가왔다. 기자들은, 취업을 위해 찾아간 치어리더 에이전시에도 찾아왔고 연예기획사를 찾아가면 그곳으로도 찾아왔다. “잠깐 동안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라며 그렇게 얼굴을 팔고 나면 지금보다는 더 활동하기 편해질 것”이라고 부추기며 “지상파 TV의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서 언니와의 관계나 그간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무명배우이다 못해 지망생”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존감을 갖고 살고 싶었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169)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자존의 ’떳떳함’은 이상하게도 당당함이 아니라 TV 출연을 거부하고 인터뷰를 거부하고 “ㄷ엔터 소속이었다는 말도, 자연 언니와 친분이 있었음”도 말할 수 없음을 통해서 겨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윤지오 자신에게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167)이었다. 그가 그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 것은 미인대회 관계자로부터 대회 출전을 하지 않도록 권유받았을 때였다. 그 관계자가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자신이  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미인대회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그런 권유를 한 것을 알았을 때, 윤지오는 장자연의 동료배우였다는 사실이 “낙인, 주홍글씨”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장자연이 겪었던 그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일까? 기자들이다. 윤지오는 소속사의 노예계약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소망이 김종승과의 다툼에 장자연의 삶을 이용하고자 했던 이미숙/유장호의 야망의 덫에 걸려 탄생한 것이 장자연 문건/리스트라고 파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약직 연예노동자 장자연이 경험한 성착취와 성수탈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조서이자 고발장으로 남아있다. 이 문건/리스트의 작성으로 인해 결국 장자연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장자연은 누가 봐도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2019년 4월 16일 이후 김수민이 윤지오와 관련해 맡고 있는 역할이 이런 성격의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게 피해자다움과 증언다자움을 강요하려는 가해권력의 필요를 여성의 위치에서 충족시키는 것, 즉 윤지오가 피해자 답지 않고 증언자 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 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 ‘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배우였던 자신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발아들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는 결단

거듭말하지만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2019년 3월 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였다. 이 유튜브 방송의 5: 37~7:04 구간에 김어준과 윤지오가 나눈 인터뷰 대화는 흥미롭다. 그 대화는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김어준: 지금까지 본인이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했는데 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지오: 국내에 거주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 살면서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모두 얼굴과 이름이 공개됩니다. 이런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존중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어준: 내가 숨어 살 이유가 뭐가 있냐, 나는 피해잔데…

윤지오: 가해자가 떳떳이 사는 것을 보면서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던 게 사실입니다.

김어준: 10년만에 장자연 사건이 다시 조사된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숨어살고 싶지 않다, 내가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잔데 가해자는 다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내가 10년간 숨어살다시피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그래서 결심을 하신거고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고 이야기해야 겠다 생각하신거죠. 이름이 윤지오씨입니다. 처음 모셨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gS_KHy4akx8&t=2s: 대화 내용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을  조금 고침.)

이름도 가리고 얼굴도 가리고 살았던 저 ‘숨어 살기’를 버리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결단은 무엇보다도 사건 이후에 윤지오가 보고 겪었던 캐나다의 경험에서 주어진다. 캐나다에서는 성폭력 관련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동등하게 공개되며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은 캐나다와 정반대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사는 데 피해자는 얼굴도 이름도 가리며 고개숙인 채 숨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고 가해자가 계속 가해할 수 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지오는 캐나다와 한국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점점 한국의 피해자들이 부당함과 억울함을 겪고 있음을 더 강하게 감각한다. 

이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정동적 변용의 체험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오가면서 그 문화적 차이공간 속에서 한 곳에 머물렀다면 몰랐을 것을 깨닫고 느끼지 못했을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인지적 정동적 변용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증언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결단은 행동으로 옮겨 졌는데, 거기에는 ‘강요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도 피해자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자’라는 사회개혁적 제안이 함축되어 있다.

<지상의 빛> 김상민 상임이사가 윤지오 대표를 대리하여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후원금 계좌와 관련하여 소명한 내용에 대한 메모

이후 아래로부터의 공통장의 구성에서 후원 및 자발적 기탁의 역할에 대해 고찰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후원금의 성격에 대한 김상민 상임이사의 소명 내용을 메모해 둔다.


1. <지상의 빛>(대표 윤지오)은 최근 이사회와 총회를 열어 <정의 연대> 사무총장 김상민을 7월 8일자로 상임이사로 임명하였다. (출두시에 해당 임명장은 경찰에 제출하였다.)
2. 김상민 상임이사는 그동안 방학썬 특검 촉구 비대위 활동을 하면서 윤지오씨와 연대활동하는 과정에서 서로 잘 알게 되었으며 <지상의 빛> 설립취지에 동감하여 회원가입을 했다. 김상민 상임이사는 정의연대 사무총장으로서 행정안전부 OGP(열린 정부 파트너십)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OGP 활동의 정신에 따라 가해자들로부터 온갖 음해를 받으면서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공익제보자 윤지오씨의 국내 대리인 역할을 자원하기로 하였다.
3.박훈 변호사가 고발한 후원금 건과 관련하여 김상민 상임이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였다. 신한은행 통장은 이상호 기자가 고발뉴스에서 윤지오씨의 신변보호를 걱정하여 경호비 등의 목적으로 후원할 계좌번호를 달라고 요청하여 유튜브에 공개한 것이고 윤지오씨는 그 통장에 얼마가 들어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또 윤지오 씨는 혹시나 음해세력들이 시비를 걸 것에 대비하여 서울시 민간협력과에 이상호 고발뉴스 피디 및 경호원과 함께 방문하여 “혹시 후원금 등록을 해야 하냐?”고 문의하였으나 신고나 등록대상이 아니라는 공무원의 답변을 듣고 돌아왔다.
4. <지상의 빛> 후원금 계좌인 국민은행 통장에 입금된 금액에 대해 기부금품법과 관련한 위법성을 묻는 경찰의 질문에 대해 김상민 상임이사는 <지상의 빛> 후원금은 기부금품금에 규정된 모금행위를 통한 후원금이 아니라 소속원으로부터 모은 금품이거나 자발적 기탁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조선일보와 박훈 등 음해세력들에 동조하여 이 기부금품법을 무리하게 적용하여 문제 삼는다고 하면 정의연대의 경우도 천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고 있으므로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자수하여 계좌 압수수색을 포함하여 수사를 요청할 계획임을 밝혔다. 또한 유튜브 등에서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는 수십만명도 고발하여, 압수수색 등 <지상의 빛>을 수사했던 방식으로 수사하지 않는다면 시민단체들이 나서 사이버수사대장을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6. 김상민 상임이사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조선일보와 결탁하여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무리한 압수수색을 진행한 점에 대해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 상을 받아 후원금 반환소송을 벌이고 있는 최나리 변호사, 박훈 변호사등과 공모한 점이 있는지, 사건청탁과 관련하여 변호사법 위반과 관련하여 사이버수사대장, 조선일보, 박훈, 최나리의 은행계좌를 압수수색을 검찰에 요청할 것이라고 하였다.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_프롤로그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성범죄를 방치하고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해온 공동체로 인해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갔던 것일까요? 피해자들의 입을 열 수 없게 만든 것이 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피해사실, 진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들을 꽃뱀, 창녀로 부르고 의심하고 손가락질해온 공동체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성폭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문제였고, 약자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홀로코스트였습니다.” -서지현

대한민국에 윤지오가 숨어 살아온 이유를, 또 그것을 강제한 억압적 조건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감각이 마비되고 지성이 혼탁해진 그런 사람들은,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이유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지각적 착시 속에서,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실명의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던 가명들의 윤지오와 혼동된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 윤지오는 숨어살지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이제 와서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할 이유도 권리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2019년 3월 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의 저 실명 공개와 얼굴 공개는 무엇이란 말인가?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실명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마치 수 십 년부터 자신이 윤씨, 김지연씨, 이순자씨, A씨, Y씨가 윤지오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틀며 오래 전부터 실명의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가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살지 않았다’를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숨어 살도록 강제하는 것은 권력이다. 힘의 비대칭이 눈을 부라리고 쫓아 다니는 사람과 숨 죽이며 숨어 사는 사람 사이의 기우뚱한 관계를 만든다. 숨어 산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유린당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 권력의 일부인 사람들은 이 비대칭과 유린의 상황에 둔감하다. 그것이 그냥 늘 그러한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낀다. 혹은 그 자신이 권력의 일부는 아니면서도 권력에 혼을 빼앗겨 권력의 지배와 권력 질서 없이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혼돈과 무질서 때문에 붕괴할 것이라고 여기고 그 붕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망각해 버린다. 즉 숨어서라도 살아가면서 언젠가 권력 질서를 해체하면서 밝은 대낮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 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할 수 있는 자아능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둔감함이나 아둔함 속에서 윤지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망막에 윤지오는 숨어 살지도 않으면서 숨어 살았다고 거짓말하는 형상으로 나타나며, 공개할 삶도 실명도 얼굴도 없으면서 공개-쇼를 하는 사기꾼의 형상으로 비춰진다. 동일한 물체도 거울이 일그러져 있으면 일그러져 보인다. 그로 인해 생기는 환영은 필연적이다. 이 필연적 환영을 수정할 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으로(materially) 그 거울을 반듯하게 펴는 것뿐이다. 즉 일그러진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힘의 비대칭관계를 실제로 없애는 것뿐이다. 망막이 일그러져 있는 한, 말로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한다 해도 그 필연적 환영이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울을 평평하게 펼 필요에 대한 감각을 좀더 절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단했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나는 2019년 3월 4일의 공개행동이 (숨어 살지 않았던 사람이 행한 사기행위라는 음해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10년간 숨어 살다가 그 나름의 인식론적 변용을 거쳐 행한 인간적 결단, 특히 강요된 ‘피해자다움’, 강요된 ‘숨어 살기’에 대한 거부의 행위임을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