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 공통장에 대한 범죄화 시도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그런데 이 증여 공통장(이에 대해서는 http://amelano.net/?p=1318 참조)은 아직은 유령적이다. 그것은 정동적 구호를 동반하면서 화폐로 표현된 공통장(commons)이지만 공통체(commonwealth) 혹은 공동체(community)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하다. 그것은 상호인정이나 수평적 소통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자기재생산의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각 증여자들이 감사, 격려, 연대결의 등을 표명함으로써 공통의 추구를 표현하지만 상호관계의 분명한 형태를 갖추지는 않은 공통장이다. 국가의 기능장애의 시간에 국가 바깥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이 공통장은 증언자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형성된 증여의 공통장으로서 이후에 그 공통장이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는 수증자의 결단과 화폐의 힘에 맡겨지게 된다.

그런데 윤지오는 후원금 증여가 지속되고 있던 다음날인 19일 신한은행 통장을 자신의 의지로 닫는다. 왜 그랬을까? 국가 바깥에 구축된 이 증여 세계, 증여 공통장이 국가(국법)와 맺는 관계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에서 독립되어 국가의 관여 범위를 벗어나는 자율적 장(場)인가? 아니면 시민사회의 한 장이면서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영역인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신한은행 통장을 통해 나타난 증여 공통장은 국가가 국민의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에 맞게 기능하지 못하는 때에 발생한 것으로 공론장도 시장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제3의 장이다. 하지만, 사회를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해 나가는 경향이 있는 국가는 이 증여공통장이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일단 발생하게 되면 이 장을 자신의 통제 안으로 끌고 오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 지점에 주목하도록 윤지오에게 조언을 해준 것은 민변 소속의 한 변호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원금 수증이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과 상충할 수 있으니 관계기관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었다. 후원금이 증여와 수증의 관계, 즉 증여교환의 관계로서 시민사회의 자율(自律, autonomy)에 속한다면 기부금품법은 이 증여교환 관계에 대해 국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가하는 통제장치, 즉 법률(法律, law)에 속한다. 

자율과 법률의 관계가 문제로 되는 이 상황에서 윤지오가 찾아가 만난 그 ‘관계기관’은 서울시 민간협력과였다. 자율과 법률의 중간 지대에서 민간과 공공 양자 간의 협력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면담내용에 대해서는 윤지오와 담당자의 기억이 서로 엇갈린다. 담당자가 기부금품법에 관한 일반적 설명을 윤지오에게 한 점에 대해서는  기억이 일치하지만 개인 후원금이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서로 기억이 다르다. 담당자는 경호비가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함에 반해 윤지오는 그 반대로 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기억의 이 차이는 단순한 기억의 차이라기보다 기부금품법의 모호함이 반영된 지각과 인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민간협력과 상담 담당자가 3월 19일에 신한은행 통장 후원금이 기부금품법 적용대상이라고 만약 단정적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월권이다.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은 30여분간의 시간 동에서 후원금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나 유권해석을 즉석에서 내릴 수 있을 만큼 명료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기부금품법 적용대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행복을 고려한 상담을 해주려면 후원금의 성격, 기부금품법 적용배제대상에 속하는가 않는가에 대한 법리해석, 등록 의무에 대한 판단, 즉각 반환의 기술적 방법 등등에 대한 고려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보들이 포함된 추상적 상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호성은 기부금품법의 전개과정이 자율영역과 법률영역 사이의 투쟁을 반영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역관계, 정치적 필요 등에 따라 변화해 나왔고 이로 인해 법조항들이 상당한 내적 모순을 품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도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항의를 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은 권위주의적 ‘금지법’에서 시작되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시장의 계약관계 외의 사인 간의 금품수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자신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자율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금지 중심의 기부금품법은 국민의 행복추구권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시민생활에서의 행복을 충분히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스스로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부금품법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고조되고 이것을 법제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금지법은 점차 ‘규제법’으로 발전했다. 이후 국가가 자신의 복지책임을 시민사회에 전가하여 시민사회의 자율적 에너지를 축적에 활용하는 방향, 즉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현재는 (2017년 7월 26일 개정된) ‘조성법’, 즉 기부문화의 조성을 위한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이 법률 역시 아직 여러 가지 모호함을 갖고 있어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기부문화의 “금지”나 “규제”보다 “조성”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진일보한 법률이다. 현행법에서 기부금품은 “반대급부 없이 취득하는 금전이나 물품”으로 광범위하게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의 기부금품은 “반대급부”가 없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증여의 일반적 개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증여는 시차가 있다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답례를 반대급부로서 수반하기 때문이다. 증여관계에서 답례는 일반적으로 의무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이 규정하는 기부금품의 정의는 일반적 증여라기보다 증여의 특수한 형태로서 답례를 전제하지 않는 “순수증여”의 개념에 더 가깝다.

기부금품법의 핵심적 취지는 기부금품 일반을 법률로써 관리하려는 것에 있지 않다.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이라는 그 이름이 보여주듯 “모집과 사용”을 관리하는 것에 그 핵심적 취지가 있다. 모집되지 않은 “후원금”이나 “기부금품”은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그 외에도 회비나 헌급 납부처럼 “모집”이라고 보기 어려운 많은 경우들이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들로서 규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모집”이란 무엇인가?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 제2조 2항은 “서신, 광고, 그 밖의 방법으로 기부금품의 출연(出捐)을 타인에게 의뢰ㆍ권유 또는 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항은 “모집자”라는 이름으로 모집 주체를 규정하는데 그것은 “제4조에 따라 기부금품의 모집을 등록한 자”를 지시한다. 그 주체는 다시 모집종사자를 두어 모집행위를 할 수 있는데 다음의 4항이 그것을 규정한다. “‘모집종사자’란 모집자로부터 지시ㆍ의뢰를 받아 기부금품의 모집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가 그것이다. 이렇게 모집, 모집자, 모집종사자에 대한 세밀한 법률 규정을 제시한 후 제4조 1항에서 “1천만원 이상의 금액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 이상의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자는 다음의 사항을 적은 모집ㆍ사용계획서를 작성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안전부장관 또는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도지사ㆍ특별자치도지사에게 등록하여야 한다.”하여 등록할 의무가 있는 모집금액을 따로 규정한다. 1천만원 미만이면 등록하고 모집할 필요가 없지만 1천만원 이상이면 등록 후 모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조, 13조, 14조는 모집된 기부금품의 사용에 관한 규정으로서 모집목적에 맞는 사용 및 공개 의무 그리고 모집비용에 충당할 수 있는 비율을 규정하고 있다. 16조는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대한 규정을 위반한 때에 주어지는 벌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제4조 제1항에 따른 등록을 하지 아니하였거나, 속임수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등록을 하고 기부금품을 모집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처럼 현행의 기부금품법은 시민사회가 자율적으로 창출하는 순수증여의 문화를 장려하고 국가기관에 등록하여 모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아울러 등록된 모집행위에 대해 일정한 혜택을 주고 모집된 기부금품의 공정한 사용을 감독하려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가 증여 공통장의 출현이라고 부른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기부금품법과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SBS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방송사들은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에 입금된 후원금을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으로 보면서 그 후원금 모집이 기부금품법 4조(1천만 원 이상 모집하고자 하는 자의 등록 의무)를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후원금의 증여와 수증이라는 시민사회의 자율적 관계행위를 범죄화하는 보도다. SNS 계정주들의 일부도 이에 동조하면서 신한은행 후원금을 범죄화하는 피드/댓글 행동을 지속했다. 국가에 의한 범죄화 이전에 언론과 SNS에 의해 선제적으로 범죄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증여 공통장을 범죄화하여 국가에 종속시킴으로써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시민사회 내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시민사회의 국가화의 징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후원이 범죄라면 시민사회에서 자율적 공통장을 구성하고 그것을 공통체나 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것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특히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상당히 많은 활동들이 자발적 후원과 기부에 의해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점, 집회와 시위처럼 헌법에 보장된 공통의 정치실천들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자발적 후원, 자발적 증여를 범죄화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국가의 건강한 존립조차 위협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행의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도 “모집”을 통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금품은 법률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즉 “서신, 광고, 그 밖의 방법으로 기부금품의 출연(出捐)을 타인에게 의뢰ㆍ권유 또는 요구하는 행위”를 통해 모집된 기부금품만을 법률의 적용대상으로 삼으며 등록의 의무도 그러한 모집행위를 수반하는 기부에 대해서만 강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에 대한 후원에 모집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네티즌들이 윤지오의 증언에 공감하고 신변위협을 염려하여 자발적으로 후원통장 개설을 요청했고 이 요청을 망설임 끝에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 신한은행 통장의 후원금이다.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이자 기부금품법 연구자인 이상신 교수에 따르면 모집행위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는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이상호 기자가 윤지오의 개인통장을 온라인에 공개한 것을 모집행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부금품법 2조 2항의 모집행위는 “서신, 광고 등” 각각의 “개인에게 도달 가능한 수단을 활용하는 능동적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온라인을 통한 기부참여는 모집행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이상신, 기부활성화를 위한 법제개선안,https://research.beautifulfund.org/wp-content/uploads/1/cfile5.uf.183639344FC5E71C1F7C08.pdf) 이런 한에서 언론방송과 SNS 계정들이 신한은행을 통해 증언자 윤지오를 후원한 다중의 자율적 증여행동을 국가의 기부금품 법률에 의해 규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부문화를 조성하고 장려하려는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의 입법취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법률의 오용(誤用)을 선동하여 탈법의 위험을 초래한다.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방송이나 기사 혹은 피드를 통해 법의 오용을 선동하는 것을 넘어서 후원금 수증 그 자체를 사기로 고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훈 변호사나 최나리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후원금 증여자들은 “교묘하고 지능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기망한 윤지오에게 속아 “자신의 행위가 낳을 결과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착오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박훈은 윤지오의 신한통장에 후원금을 증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하고 나선 것은 놀랍다. 이 때에는 후원금 증여자들 중의 누구도 자신이 속았다고 주장하지 않을 때였다. 누가 그에게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 어리석은 사람, 착오에 빠진 사람으로 비난하고 모욕할 권리를 준 것일까? 누가 혹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대리주의적 행동에 나서도록 재촉한 것일까? 

누가 봐도 어색하고 불합리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박훈에게는 후원금 증여자들이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 필요했다. 박훈에게 자신의 명예훼손 소송 변호를 맡긴 김수민이 그 일을 맡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후원금 증여자들로 하여금 후원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도록 촉구하고 최나리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해주므로 변호사비 걱정 말고 반환청구 소송에 함께 해 달라고 후원금 증여자들에게 간절하게 요청했다. 438명의 소송동참자들이 모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가! 최나리 변호사가 반환소송청구자들을 대리하여 후원금반환소송을 제기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반환소송청구자로 변한 후원금 증여자들이 최나리의 소송에 동의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적일 것이다. 438명의 후원금 반환소송 참여자들이 나서 자신들이 피기망자, 착오에 빠진 사람, 어리석은 사람임을 자인한 후에야 박훈의 일방적이고 대리주의적인 고발도 그 수만큼의 사회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남는다. 윤지오에게 후원금을 낸 사람들은 신한은행만 5,745명이다. 국민은행 지상의 빛 계좌의 후원자를 합친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일 것이다. 그 중 438여명이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인정했다고 해도 압도적인 숫자의 사람들, 적어도 5천 3백명이 넘는 후원 증여자들이 스스로를 피기망자, 착오에 빠진 사람, 속임을 당한 사람, 사기 피해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후원금반환소송에 참여한 438명의 사람들에 비할 때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다.  한국의 언론사회는 이 압도적 다수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하면서 극소수의 의견에 따라 후원 증여자들 전체를 피기망자, 사기 피해자로 단정하는 폭력적 어조의 방송들, 기사들, 피드들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보도폭력이 가져오는 사회적 결과는 증여관계가 불법화되고 증여 공통장이 범죄공간으로 인식되어 증여자가 어리석은 자로 비난받고, 수증자가 범죄자로 지탄되는 것이다. 2019년 10월 30일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는 국가의 기능장애의 순간에 진실을 지키기 위해 출현한 다중의 자율적 증여 공통장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의 첨점이다. 그것은 증여 공통장이 지키고자 한 진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언론을 비롯한 준국가기관과 그에 영향 받은 시민사회 일각이 시작한 범죄화 움직임을 경찰, 검찰, 법원 등의 국가기관이 사법적으로 배서(背書)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는 영화적 장면의 하나이다.

최나리는 소장에서 “피고[윤지오]는 후원을 받음으로써 원고들을 비롯한 여타의 후원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분노, 수치심 등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태연하게 쓴다. 그런데 실제로 후원금 반환청구 소송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압도적 다수의 후원금 증여자들을 터무니없이 피기망자, 사기 피해자, 심각한 착오에 빠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증여자로서의 이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분노, 수치심 등의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증여문화를 조성하기보다 상처 입혀 퇴행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최나리 자신임을 누가 모를 수 있겠는가?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수행되는 이런 반증여문화적이고 반공동체적인 고소고발 행렬의 소음 때문에, 후원금 수증자인 윤지오가 수증자이기 전에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력체제를 고발하는 진실 증여자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져 간다. 진실이 혼탁해지면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모호해지고 심지어 거꾸로 뒤집어져 가는 이 정치적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지금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을 뒤에서 부채질하면서 투항하거나 죽거나를 선택하도록 밀어붙일 생각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지난날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부장주의적 가해권력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진실을 가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집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전의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사유화할 수 있는 곳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된 총선과 대선이 이들의 이 음울한 목표를 현실화시켜 주권자를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의 희생물로 만들 대의주의의 정치 의식(儀式)으로 되고 말 것인가? 

국가와 기업에 대한 다중의 섭정을 위한 상상

공무원을 국민이 섭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무원이 국민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섭정이 정치적 과제로서 나타나는 것은 대의제가 과도한 나머지 공무원이 자립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 공무원이 주인인 공무원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민주제의 간접 민주제로의 대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왔다. 공직의 사유화와 권력화는 그것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래로부터 국민-다중의 섭정은 공직을 부름에 대한 응답, 즉 소명(Beruf)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유화된 공직을 다중을 공통화시키는 봉사활동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국민-다중의 권력에 봉사하는 서비스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배심제 하의 AI검찰’이라는 형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어 자본가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다.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위치지워지며 대다수 국민들은 기업 영역에서 주권을 잃고 노예로 전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 국민-노동자의 주권됨과 모순된다. 또 기업체제가 지배적으로 되면 국민-노동자는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성을 망각하게 되며 자신의 기관인 국가와 자신을 고용한 기업의 배신적 유착도 심화되게 된다. 대의제가 기업제와 동화되면서 정치적 대의자들이 기업주처럼 군림하고 국민이 노예처럼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주권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정치영역에서 국민-다중의 주권회복이 기업영역에서 노동자의 주권쟁취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업영역에서도 노동자-다중이 주인으로 될 때에만 다중에 의한, 다중을 위한, 다중의 정치/경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다중통제 하의 AI기업’의 형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영역의 공통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해방이 현재는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계화, 정보화, 자동화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경향이 그것인데, 노동(여기서는 ‘고용노동’을 지칭한다)과 소득을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결합시켜온 자본주의의 오랜 경향과 장치들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무소득, 저소득과 묶어 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고용노동=강제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삶정치적 활동은 노동으로 평가되지 않고 무상수취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소득 및 무조건적 보장소득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고용되어 노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소득 문제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활동은 기업적 고용세계 바깥에서도 전개되고 있고 기업들은 이 활동들을 외부효과로서 전유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없이 소득 없다’(예컨대 무노동무임금)는 관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노동자가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자유롭게 종사하면서도 그것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행복한 느낌으로 충실할 수 있을 때 국민과 노동자 사이의 현재의 배리현상(주인이 노예되는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삶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섭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업은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관이 아니라 (비)노동자-다중의 부름을 받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소명기관(Beruf-organ)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착취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 것과 국가가 권력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이다. 하나의 과정이란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섭정능력이 향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다중의 공통화 없이 국가와 기업의 공통화 없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섭정 능력을 위한 사유실험과 행동실험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그 성과들의 공통화-연결망(commoning-network)이 섬세하게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을 통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이 첫 걸음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의 분화,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한 관찰메모

  •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는 서초동과 여의도로 분산 개최되었다.
  • ‘분열’이 아니라 ‘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집회의 이슈와 강조점이 다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촛불은 반드시 단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화하고 분산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 연결되고자 한다면 분산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물론 현재는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전체 촛불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 9차까지의 서초동 촛불집회의 주최측을 자임했던 개국본이 10월 12일을 갑작스런 마지막 집회로 선언한 것이 이 경쟁적 분화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집회의 종료를 선언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암묵적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종료 선언이었고 이것이 촛불을 지속하자 하는 사람들을 별도의 경향적 세력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즉 서초동인가 여의도인가의 분화가 있기 전에 종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화가 있었다.
  • 북유게 사람들이 촛불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국이 사퇴한 날과 겹치는 월요일(10월 14일)이었다. 개국본이 여의도 촛불을 결정한 것은 수요일(10월 16일)이었다. 종료나 계속이냐의 분화가 여의도인가 서초동인가의 분화로 나타났다.   
  • 섭정의 관점에서 두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이유는 없다. 촛불다중에게는 두 주최측, 두 집회의 에너지가 사회개혁의 집합적 에너지로 공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두 집회의 공통점은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검찰이 범인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현존하는 검찰권력의 불법성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에 윤석열 수사, 구속 등 검찰총장에 대한 강한 사법적 압박 요구가 더해졌다.
  • 여의도 집회는 “공수처 설치”와 “응답하라, 국회” 등의 입법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서초동과 여의도의 뚜렷한 차이는 여의도에서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구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서초동 집회는 이전 9차 집회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국 수호’를 외치면서 조국을 이슈화했다. 여의도 집회는 ‘조국 수호’라기보다 ‘조국 계승’(수고했습니다) 쪽으로 초점을 옮기는 분위기였다. 서초동이 조국을 현재화한다면 여의도가 조국을 과거화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초동 집회보다 여의도 집회에 더 많은 사람(감으로는 약 1.5배~2배)이 모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여의도 집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고려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성별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여성이 주축이었다. 8대 2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반면 여의도 집회는 5:5로 동등하거나 6:4 정도로 남성이 더 많은 집회였다.
  • 세대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2~30대가 주축이고 여의도는 그보다는 연령이 더 놓은 세대가 주축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참가자들의 자유발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집회는 공연과 유명인사들의 연설 중심이었다. 
  • 서초동 집회에 비해 여의도 집회가 미디어 동원이 많았다. 여의도 집회는 스크린이 과잉동원되었다는 느낌이었다. 9월 28일의 과소동원과 대조되는 풍경. 전체적으로 너무 큰 마이크 소리로 집중이 어려웠다. 국회의사당역 출구의 포스트잇 시위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초동의 경우는 미디어 동원이 적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히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주요 슬로건을 담은 큰 깃발들 대오가 외곽을 오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 전체적으로 여의도 집회의 방식이 전통적 조직운동의 집회방식이라면 서초동 집회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킹 방식을 오프라인 집회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구심점을 이루면서 촛불다중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19년의 촛불집회는 개국본이나 북유게 등 개별 단체나 커뮤니티가 주최측이 되어 집회를 개시하고 다중들이 그것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최측의 정치적 색깔이 집회 전체의 색깔을 좌우할 수 있고, 주최측 간의 의견차이나 갈등이 촛불 다중들의 갈등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생산적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주최측이 뚜렷한 데서 오는 이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나타난다. 

조국 사퇴의 정치적 의미와 사퇴 이후의 검찰개혁에 대한 연구노트

  1. 조국의 조기사퇴는 검찰개혁 전선에서의 후퇴다. 조국에게 맡겨졌던 최소한의 개혁목표조차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기사퇴는 검찰개혁에 저항해온 언론과 검찰 및 자유한국당의 압력에 민주당 지도부가 동화된 결과이다. 
  2. 검찰-언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를 사법과 문화로 비선(秘線)지배하면서 강탈적 축적을 가속시키는 두 개의 ‘비선(秘線)축’으로서 서로 연합하여 작동한다. 이것은 과거 발전주의 국가를 군부가 권위주의적으로 비선지배했던 것에 비교할 수 있다.
  3. 언론과 검찰은 표적보도(편의보도)와 선별기소(편의기소)를 통해 다중의 인지적 정치적 삶을 왜곡하며 착취적이고 수탈적인 사회관계를 온존, 강화한다. 
  4. 이 두 축은 국가에 대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능력을 찬탈하고 왜곡한다. 이 두 축은 국내적으로 지배하는 엘리뜨와 복종하는 군중,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지배하는 제국과 종속하는 주변국 사이의 구조적 연합(국민통합과 미일한 동맹)으로서의 국가를 표상한다. 지배, 사대, 전쟁, 경쟁, 승리가 이들의 지향성이다. 이 두 축은 전쟁으로서의 삶이라는 호전적 이미지를 삶의 본질로 제시한다. 
  5. 이것은 자율, 자주, 평화, 연대, 공통이라는 현시기 촛불다중의 염원과 대립한다. 그러므로 현 시기에 전 국민적 의제가 되어 있는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이 두 비선축의 비선지배를 촛불다중의 민주적 섭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필수적 통과절차다.
  6. 조국의 법무부 장관임명은 촛불다중의 검찰개혁 요구에 대한 자칭 촛불정부의 최소한의 부응조치였다. 즉 다중 섭정의 정치적 첨점이었다.
  7. 검찰은 국민의 검찰개혁 요구에 저항했고 그 수단이 조국 일가에 대한 먼지 털이식수사였다. ‘검찰개혁’ 메시지에 ‘사기꾼 일가’라는 메신저 죽이기로 응수한 것이다. 이것은 ‘권력형 성폭력 리스트(장자연 리스트)’ 메시지에 ‘사기꾼 윤지오’라는 메신저 죽이기로 응수한 것과 동일하다. 
  8.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성착취-성수탈 관계가 사회적 의제로 표면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작업은 조선일보가 주도했고 ‘조국 일가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검찰권력을 침식하지 못하도록 막는 작업은 검찰 특수부가 주도했다.
  9.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는 윤지오의 인성, 도덕성에 대한 비난을 통해 증언의 신빙성을 추락시키는 마녀사냥을 통해 이루어졌고 조국 일가 사기꾼 만들기는 조국 일가의 자산가적 계급성을 비난하고 말과 삶의 불일치를 집중 공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도덕’과 ‘정의’의 담론은 ‘인권’을 짓밟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10. 이 두 공격 모두에서 “누구를 사냥하는가?”는 분명했지만 “누가 사냥하는가?”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져보면, 실제 상황은, 성폭력 가해권력이 피해여성의 노출을 비난하고, 거대한 규모의 착취수탈자가 임금 외의 가외지대(extra-rent)를 수취하는 정규직노동자를 비난하는 아이러니한 성격의 것이었다.
  11. 좌파 일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규직 노동자 상층의 (상당히 일반화된) 지대수취(‘사모펀드’), 기회수취(‘장학금’, ‘표창장’)를 비판하기 위해, 도덕주의적 정의를 내걸고 거대 권력이 주도하는 이 마녀사냥에 동참하거나 쟁점회피하면서 기권하는 태도를 취했다.
  12. 조국은 검찰발 사퇴압박을 거부했고 검찰개혁의 ‘최소한(불쏘시개)’을 전진시켰다. 그것을 뒷받침한 힘은 조국 자신에게서 나왔다기보다 촛불 집회에 결집한 수백만 다중에게서 나왔다.
  13. 9월 28일 이전에 개국본은 다른 시민단체와의 연대 없이 단독으로 촛불을 꾸려가면서 사법개혁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9월 28일 국민-다중의 분노의 폭발은 개국본/사국연을 놀라게 하고 후퇴시켰다. 더 이상 ‘주최측’이 무의미해지는 다(多)중심의 시간이 열렸다. 이것은 검찰개혁의 급진화, 더 급진적인 검찰개혁을 가져올 다중지성적 에너지였다. 10월 12일을 마지막으로 한 집회중단(그것은 ‘최후통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결국 검찰이 아니라 문재인과 조국을 향한 최후통첩이 되고 말았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국본/사국연의 대응방식이다.
  14. 촛불의 혁명적 폭발이 집회에 가져온 충격(‘중단’) 외에 권력장에 가져온 충격도 있다. 9월 28일의 촛불혁명은 조국을 일거에 대선 유력 후보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10월 5일 촛불다중의 더 폭발적인 참여는 민주당까지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 검찰 및 광화문 집회의 압박에 짓눌린 상태였지만 서초 집회의 촛불에 결정적으로 놀라서 후퇴를 시작했다.(다음날인 10월 6일 조국, 주진우 만남. 주진우-김건희[윤석열]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이것은 의미심장한 만남이다. 대화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사퇴의 의사타진과 일정 조율 및 사퇴형식의 조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5. 지금까지 조국사퇴를 요구해온 자유한국당, 노동당 외에 이제 민주당 지도부가 조국사퇴 대오에 가담한다. 명분은 대통령과 당의 지지율 하락이다. 그런데 리얼미터의 통계적 지지율이 하락을 보이는 순간에 거리에서 촛불이 보여준 현실적 지지율은 상승하고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거리의 현실다중이 아니라 통계 속의 가상 군중을 입장선택의 근거로 삼았다.
  16. 10월 11일 ‘동교동계 원로들’이 이낙연 총리를 불러 조국 사퇴를 권유한다.(https://news.v.daum.net/v/20191011145155705 ) 이후 민주당 내에서 11월 조국의 명예사퇴론이 나왔다. 10월 12일 촛불집회는 ‘주최측’에 의해 잠정 마지막 집회로 계획되었는데(김어준은 그 잠정성과 관련하여 “다시 집회가 열리는 상황은 없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이것은 권력장 내에서 이미 일정정도의 교감이 있었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17. 10월 12일 집회에 대학생진보연합을 비롯한 단체가 촛불 집회 지속을 주장한 것.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계속하겠다는 플랭카드를 내건 것은 촛불집회의 중단에 대한 거부심리가 촛불 다중 속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주최측은 집회계속 플랭카드 철거를 요구했다. 이미 인쇄되어 참가자들이 든 피켓은 검찰개혁-조국수호인데 연단에서 조국수호 발언은 억제되었다. 일찍이 조국이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8월 28일 후보자사퇴를 주장했던(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908284024H) 이부영을 촛불집회 연사로 내세웠다. 이런 현상들은 촛불집회 주최측이 다중의 폭발적 참여로 인해 점점 ‘조국수호’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가는 ‘검찰개혁’을 ‘조국수호’로부터 분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8. 10월 12일 촛불집회의 열기가 여전히 폭발적이었던 것, 그리고 노무현-문재인-조국을 잇는 이미지가 자생적으로 등장하면서 조국을 더욱 더 확고하게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시키는 것을 확인한 후 11월 퇴진보다 더 이른 ‘조기’퇴진을 권유할 필요성이 민주당 기득권 세력 내에서 더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19. 또 다른 계기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윤석열 원주 별장 접대 진술에 대한 수사회피 보도(한겨레)가 나오고 이 문제가 가져올 파장에 대한 조기단속의 필요성. 12일의 촛불집회에서 윤석열체포 주장의 대중적 등장. 윤석열이 국회의 뜻에 따를 의사를 표현한 것. 이런 여러 계기들이 결합하여 국회-검찰이 합세하여 서초집회의 촛불을 끄고 청와대를 포위하여 조국의 사퇴를 부분 명퇴의 형식(‘검찰개혁의 불쏘시개’)으로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20. 조국 사퇴 후 자유한국당은 “국민승리”를 외치며 환호하고 나경원, 황교안이 패스트트랙 안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검찰개혁의 길이 난망하고 험난할 것임이 예상된다. 민주당은 사퇴 계획을 “몰랐다”고 발빼면서 적어도 말로는 검찰개혁을 지속하겠다고 주장하고 있고 검찰개혁을 더 잘 할 인물을 찾자고 주장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해하고 존중한다”, 노동당은 “환영한다”, 이다. 즉 국회와 제 정당들은 조국 사퇴 사건의 연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오히려 긴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묵묵부답”의 윤석열이다.) 그런데 문재인 지지층은 조국 사퇴를 범 동교동계(이해찬-이낙연-이재명)의 압박의 산물로 해석하고 있고 김어준-주진우-시사타파가 이에 동조했다고 보고 있다. 연착륙은 쉽지 않을 것이며 지지율 회복도 순조롭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 조국 사퇴는 어떤 방식으로도 검찰개혁 전선의 승리로 규정할 수 없다. 조국 사퇴가 검찰개혁의 후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조국 사퇴 압박이 거셌고 지지율 하락이 견디기 어려웠다는 점에 동의한다. 즉 조국 사퇴가 외압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조국의 입장에서 사퇴외압은 두 종류다. 하나는 검찰, 자유한국당, 언론에서의 사퇴압력, 그리고 또 하나는 민주당 내부에서의 사퇴압력.
  22. 조국 사퇴는 검찰개혁을 주장하면 신상이 털리고 가족이 걸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다. 검찰로서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개혁을 실제로 주장하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23. 그런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진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당 내에 있지 않다. 9월 28일을 분기점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검찰개혁을 한 목소리로 외친 사람들, 즉 촛불이 있다. 조국 사태는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절박성을 학습하는 집단지성적 공간이었다. 촛불이 강하게 밀어준다면 촛불국민의 뜻을 받아 나설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24. 촛불은 조국수호를 외쳤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잔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조국사퇴가 닥쳐온 것은 조국수호라는 촛불의 주장이 정면에서 거부된 것이다. 이것은 촛불집회의 갑작스런 ‘폐지’와 때를 같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다중이 나서지 않으면 검찰개혁의 완수가 이번에도 난망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군사독재”를 대체한 “검찰공화국”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10월 12일 마지막 촛불집회”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집회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관건이다.
  25.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검찰개혁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국민들 덕분입니다.”“검찰개혁을 응원하는 수많은 시민의 뜻과 마음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라는 조국 사퇴 문구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당정청이 힘을 합해 검찰개혁 작업을 기필코 완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에서의 ‘당정청’보다 훨씬 근본적인 역량에 대한 호소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민주당의 검찰개혁 립서비스가 립서비스에 그칠 것인가 실질적인 것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조국사퇴 전 24시간에 무슨 일이?

2019년 10월 13일 오후 2시 조국 장관의 워딩:

검찰개혁의 입법화, 제도화가 궤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시작이다. 검찰개혁의 방향과 시간이 정해졌지만 가야할 길이 멀다.… 흐지부지하려고 하거나 대충 끝내려고 하는 건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확실한 결실을 맺도록 당정청의 힘과 지혜를 모아달라.

2019년 10월 14일 오후 2시 조국 장관의 워딩:

더는 제 가족 일로 대통령님과 정부에 부담을 드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자리에서내려와야, 검찰개혁의 성공적 완수가 가능한 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검찰개혁을 위한 ‘불쏘시개’에 불과합니다. ‘불쏘시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저의 쓰임은 다하였습니다.

가족 때문으로 인한 자발적 사퇴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워딩 차이다.

이 두 워딩 사이에 권력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검찰개혁의 미래,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향배를 가늠하는 데 필수적이다.

“대충 끝내려고 하는” 세력이 누구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촛불집회를 ‘주최’해온 단위에서 집회를 갑작스럽게 중단한 이유도 이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할 기사: 조국 장관 사퇴,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주도http://www.newbc.kr/news/articleView.html?idxno=7111

지난 며칠 동안 민주당 주변의 권력역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트위터: https://twitter.com/lalapesto

서초 촛불집회의 의미와 양상에 대한 몇가지 생각

집회와 의회

  1. 대의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집회(assembly)는 의회(parliament)가 기능장애에 빠진 때에 의회를 치유하고 개혁하기 위해 출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정치장이다. 그것은 일종의 의회밖의 의회, 거리의회이다.
  2. 집회는 언어, 분석, 이성에 의해 이끌리는 의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 직관, 정동의 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 
  3. 집회는 의회를 대체하기보다 의회를 섭정한다. 의회의 가능조건과 기능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다.  
  4. 집회의 언어는 이 때문에 주로 명령어이다.

9월 21일, 9월 28일, 10월 5일/10월 12일의 집회변이

  1. 내가 참가한 주말집회는 6, 7, 8, 9 총 4회 중 3회였다. 내가 참가하지 못한 8차 집회(10월 5일)는 9차 집회와 유사한 질/량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 첫 주말집회였던 6차 집회는 사법개혁국민운동본부(초기의 개싸움하는국민운동본부)라는 명확한 집회주체가 있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를 통해 전개되었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사국본은 시민사회단체들과의 연대 없이 단독으로 집회를 주최했다. 1차 집회를 수백명에서 시작하여 9월 21일 6차 집회에서는 내가 참석한 시간에 대검 정문 앞에서 수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다. 검찰이 이것을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전의 검찰 수사 관성이 집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 7차 집회에서는 빅뱅이 일어났다. 서초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나갈 때부터 여기저기서 검찰개혁을 외치는 구호소리가 요란했다. 페스티벌이 있었던 예술의 전당 방향을 제외하고 교대역 방향과 서리풀터널 방향, 그리고 검찰청 방향으로 집회군중이 서 있었다. 주최측은 대검 정문 앞에 고속터미널 방향으로 무대를 설치했는데(수 만 명의 참가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 무대는 집회군중에 떠밀린 왜소한 섬처럼 보였다. 7차집회는 주최측의 예상을 넘어선 다중의 폭주공간이었다. 통행이 어려웠고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켓도 없고 촛불도 없이 스마트폰 랜턴 앱으로 집회를 이어갔다. 무대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꽤 많은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구호도 다양했다. 통신폭주 때문인지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았다. 촛불혁명의 시간이 있었다면 9월 28일 7차 집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9차 집회는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6시 50분에 도착하여 한자 십(十)자형 집회대오를 외곽으로 취재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보았다. 예술의 전당방향 한 블럭 반을 돌았다. 교대역 방향이 가장 길었는데 강남역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대오였다. 대검 방향은 서초경찰서를 분기점으로 태극기 집회 수천명과 대치/분리되어 있는 형상. 서리풀 방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나 군데 군데 빈자리가 많았다. 2시간 10분이 걸려 9시에 출발점인 서초 사거리에 도착했다.
  5. 6차 집회가 결의를 했지만 불안한 선구자들의 형상이었고 7차 집회가 성난 군중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9차 집회는 자신감 넘치는 축제참가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터가 생겼다. 어린이를 등목 태운 사람들, “검찰개혁, 윤석열체포” 피켓을 두른 반려견, 일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9차 집회에서 7차 집회의 아나키스러움은 사라졌다. 교통경찰이 통행을 관리하고 자원봉사자들이 군중을 관리했다. 서초 네거리에 설치된 거대한 중앙 무대는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 복제되었다. 거대한 복제 스크린이 대충 열 개는 되어 보였다. 집회는 다중의 자발적 운동이라기보다 중앙이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는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 이 때문에 구호는 “검찰개혁, 조국집회”로 일정하게 수렴되는 분위기. (태극기 집회 쪽은 “문재인 퇴진, 조국구속”만을 반복적으로 외쳤다.)
  6. 태극기 상징의 재전유/탈환이라는 이유로 태극기 문양 피켓들 및 대형 태극기가 집회 도구로 도입되었다. 9차 집회에서는 그것이 애국가와 결합되었다. 이것이 애국주의로 나아갈지 “나라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모색으로 나아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앙 무대의 지배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전자로 귀결될 위험성이 높다.
  7. 집회 무대에서 먼 곳, 특히 교대역과 강남역 사이에서는 중앙 무대의 복제 스크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독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 무대를 등진 대오를 꾸리는 모습도 보였다. 자세히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중앙 무대의 방향에서 크게 벗어난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보완하는 것?
  8. 지역에서 올라온 참가자들의 대오도 일정하게는 무형의 독립성을 갖고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9. 주최단체인 사국본이 9차 집회를 잠정적 마지막 집회로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대학생진보연합은 19일 26일에도 대학생 주도로 집회를 계속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

단상

  1. 촛불다중들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위해할 수 있는 검찰권력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검찰개혁을 하라는 명령을 하기 위해 모였다.
  2. 조국은 검찰개혁을 수행할 최소 행위자(최소강령의 이행수임자)로 호명된다.
  3. 국민의 사법주권이 현재 주어진 최소강령인 검경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설치를 통해 달성되지는 않는다. 대법관 및 검사장 직선, 재판배심원제(국민참여재판)를 보충할 기소대배심제(Grand jury), 법관 및 검사장에 대한 국민소환제 등 국민의 사법주권을 보장하면서 대의기관들을 통제할 제도들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4. 이러한 과제들은 사법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완수될 수는 없기 때문에 국민-다중이 행정주권과 입법주권을 획득하는 과정과 동시병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동물과 집회

“[네팔의 자나 안돌란 당시] 비라트나가르에서는 당나귀와 개와 고양이도 검은색 스카프와 민주주의 구호로 장식한 채 거리를 뛰어 다녔다”(조지 카치아피카스, <아시아의 민중봉기>, 원영수 옮김, 오월의봄, 347쪽)

서초동에서도 “검찰개혁, 윤석열체포” 띠를 두른 반려견이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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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조사편의주의와 윤석열 총장의 과잉대응에 대해

1.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겨레 하어영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은 과잉대응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자의 기사는 윤총장이 윤중천으로부터 ‘접대’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진술이 있는데 검찰의 조사나 수사가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왜 조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답해야 할 순간에 검찰총장이 나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며 논점을 벗어난 대응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잉이고 그것이 언론의 질문에 말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두 번째 과잉이다. 이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협박으로 느껴진다.

2. 윤석열 총장이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공직자인 때에 그 공직자의 접대 혐의에 대한 윤중천의 과거사진상조사단 진술이 있었고 이에 대해 추가 조사/수사가 없었다는 것이 하기자의 보도내용이다. 검찰이 누구를 조사하고 누구를 조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주권자 국민의 주권행사의 필요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검찰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보도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기소편의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수사편의주의의 악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된다.

3. 장자연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국회의원의 이름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 이름이 홍준표임은 홍준표 자신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홍준표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를 혼내 주었다고 유튜브를 통해 자랑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윤지오가 자신의 이름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진술했다며 윤지오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윤석열이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홍준표가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결과는 동일하다. 문제는 왜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것은 조사하고 어떤 것은 조사하지 않는가, 하는 것 즉 조사, 수사, 그리고 기소의 임의성이다. 

4. 윤석열 총장은 혐의가 있으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하는 것으로 좋은 평판을 얻은 검사다. 조국 일가에 대한 이른바 ‘먼지털이식’ 수사도 바로 그런 논리와 이미지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혐의에 대한 검찰의 조사 회피문제를 제기한 하어영 기자를 고소한 것은 자신을 예외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어영 기자를 고소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도 한 치의 남김도 없이 먼지 털듯이 조사하고 수사하라고 말하는 것이 일관된 태도였을 것이다.

5.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식의 동문서답을 하고 있고 조국 장관은 그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검찰이 윤석열을 ‘조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하어영 기자의 주장에 기초한다면,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단정하는가? 또 조국 장관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을 무엇을 근거로 내렸는가? 공식적인 조사가 없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조사자료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런 발언의 당사자들은 윤중천 진술과 관련하여 윤석열 총장에 대해 갖고 있는 조사자료를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이며 만약 있다면 그 조사자료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김경록 인터뷰 pdf 파일

김경록 인터뷰는 최근의 사태를 이해하는 중요한 일차자료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KBS, 유시민과의 인터뷰 자료 두 종류를 정독했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언론과 검찰은 정말 조심해야 할 집단이다.’ 핵심인물의 인터뷰 진술이 위와 같은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지금 전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사건 스케치를 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의아스럽다. 추후 시간과 조건이 된다면 코멘트해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읽은 자료를 토론용으로 올려두기만 한다.

증여 공통장(gift commons)의 등장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의 삶정치적 성격에 대한 논고

‘증언’은 ‘진실을 밝히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증언은 과학, 예술, 철학과 공통점을 갖는다. 과학, 예술, 철학이 증언의 요소를 갖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이 더 이상 증언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장자연의 증언을 이어받아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현주소에 관해 증언했다. 이 증언은 성폭력적 가해권력이 엄청난 재력, 광대한 인맥, 노련한 기법을 동원해 역사의 어두운 곳으로 은폐해온 진실을 꺼집어 내 말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이렇게 진실을 증여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차단되어 있었던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또 이것들에 기초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한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신의 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증언은 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의 행사일 뿐만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언어적 증여의 행동이다. 

2019년 3월 4일 이후 윤지오는 자발적이고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 언어적 증여행동에 나섰다.  지난 10년간 경찰, 검찰, 법원을 통해 이루어진 간접적이고 매개적인 증언이 가해자를 찾아내고 실제로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그가 ‘이 조사를 통해서 국가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마다 진상조사단은 ‘기록’에 남는다거나 ‘역사적 평가’가 남는다는 식으로 사건을 역사화하는 답변을 준다. 하지만 윤지오에게 장자연 사건은 자신의 청춘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신체적 정신적 상처이고 극복되어야 할 현재적 아픔이다. 이 상처의 치유와 아픔의 극복은 가해자의 규명과 단죄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므로 기록이나 역사적 평가로 만족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가 김수민과의 카톡에서 ‘이 책[13번째 증언]이 어떻든 이슈가 될 것이고 그 책이 얼마나 팔리든 상관 없이 그것을 바탕으로 영리하게 지금까지 못해본 것을 해 보려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영리하게’의 실질, 영리하게 해보려는 그 과제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다.

수사기관을 매개로 한 증언이 아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 증여언어의 수증자는 바로 직접적으로 국민 자신이 된다. 신문, 방송, SNS 등에서 윤지오의 증언을 접한 시민들과 네티즌들이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언니는 용기있고 멋진 사람이에요’ 등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밝은 세상에서 재미있게 삶을 살아냈을 아름다운 젊은이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소리내지 못하게 했던 더러운 이름들을 딛고 더 나은 세상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준 지오님을 응원합니다”(juk***won,  2019년 3월 7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라는 댓글은 윤지오의 증언증여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증여인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것은 가격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이라는 긍정적 가치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더러움’은 일의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갈등 속에 노출되어 분열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앞의 댓글에서 ‘더러움’은 가해권력의 특징으로 나타나지만, 증언자에게서 ‘더러움’을 보는 가해자적 시각이 바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가해자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의 이름을 빌려 나타난다. “더러운 년. 최소한 고인의 아픔을 덜어주는게.? 고인을니야욕에이용하지마라.더불어 정치액션그만둬”(sim1****, 2019.3.5)에서 표현된 “더러움”이 그것이다. 

가해권력에 대한 증언이 있자마자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장자연을 숭고화하면서 살아있는 증언자를 더럽다고 모욕하는 언어가 즉각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인에 대한 숭고화와 숭배는 산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 아래에 굴복시키는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고인 숭고화와 숭배는 권력자들이 산 사람들의 생명력을 착취하고 수탈하기 위해 산 사람들의 자기가치를 격하하는 통제양식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욕받지만 죽은 후에는 숭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조장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기법이 고인에 대한 숭고화와 숭배라는 테크놀로지이다. 

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죽음이 된다. 그런데 이 테크놀로지는 다른 한편에서 특수한 죽음, 장자연의 죽음만은 비하하고 격하해도 좋다는 예외조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고인이 숭고한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장자연이는 죽어서도 좌빨들 노리개신세로구나ㅎㅎㅎㅎㅎㅎㅎ!!”(inte****, 2019.3.5)라는 정치적 비난의 수사가 그것이다. 죽음은 숭고한 것이지만 어떤 죽음은 모욕되어도 된다는 태도로 이들은 고인이 된 장자연을 비하한다. 그 비하는, “시체팔이 그만해라…”(thde****)라며 고인을 ‘시체’로 물건화하고 상품화하는 언어조차 주저 없이 사용하는 행동양식이다.

이렇게 출판과 공개증언의 개시에 때맞춰 연대자들의 지지와 격려와 더불어 나타난 이 격렬한 정치적 반동(reactions)과 비인간적 모욕(insult) 그리고 진실에 대한 보복(revenge)의 사회심리는 윤지오에게 즉각 신변보호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을, 숨어있던 가해권력이 증언에 대하여 취하는 대응과 위협으로 읽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 3월 8일 가족간 카톡 소통은 증언 이후에 닥쳐오고 있는 이 신변불안을 여실하게 나타낸다.

“엄마: 빨리 와 그게 최선이야 …비행기 변경해서오버되는 돈 엄마가 줄게 … 늘 조심하고 밤에 돌아 다니지 마 사람 많은 곳에 있고 뒷골목으로 절대 나니지 말고 …꼭 택시타고.. 숙소 꼭 알려주세요!!! 이동시마다 알려주세요!!!!!!! 되도록 빨리 와!!! 그게 최선일 듯

내사랑: 댓글은 보호 안해주니까”

그런데 3월의 2차 한국 방문은 국가가 불러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신변보호 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웠고 국민이 행한 청와대 신변보호 청원은 많은 사람이 동의참여를 했지만 한 달 뒤인 4월 초가 되어야 정부의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3월 13일 윤지오 가족은 응급조치로 어쩔 수 없이 사비로 사설경호원을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오빠: 엄마가 무장경호원 붙여준데 지금 견적 뽑았음 24시가 2명 교대로…차량 지원해준데.

윤지오: 나는 증언자인데..한국은 항상..사건사고후에 움직이는게 슬프다 오빠..

오빠: 여기도 마찬가지야 사람이 죽어야 경찰오고 수사시작돼…..

엄마: 안전이 최고! …이제 경호원이 밀착해서 경호해 줄거니 안심해 차량도 지원해주니 편하게 다녀”

정치경제학적으로 보면 윤지오의 자비 무장경호는 가해권력자들에 의한 보복이 따를 수 있는 증언에 수반되는 필수경비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과 더불어, 국민과 대한민국의 주권 증진과 세계시민들의 행복증진에 이바지하는 윤지오 가족으로부터의 증여에 해당한다. 이것은 분명 계약과 교환에 의해 주어지는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힘과 가치가 윤지오와 그 가족으로부터 국민들과 시민들에게  주어진다(be given)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경호비는 윤지오 자신의 재산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증여를 위해 엄마의 재산이 사용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윤지오는 엄마에게 빚진 것이 되며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해야 했다.

“네 감사해요. 그간 맘고생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가 또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주셨기에 이렇게까지 용기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신께서는 감당할 고통만 주실테고 제가 감당할 수 있기에 감사해요. 앞으로 제가 엄마도 지킬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또 선한 기업인이 되도록 노력할께요.”

좀 냉혹해 보이지만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이 가족 대화에도 적용해 보자. 감사(thank)는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는 채무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think)는 약속이다. 윤지오는 엄마에게 선한 기업인이 되어 엄마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겠다는 약속을 한다. 자신을 대신해서 엄마가 경호비용을 부담하게 되었기 때문에, 윤지오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는 조건으로 가족 관계 속에서 빚진자(채무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미래시간과 미래의 삶이 가족에게 담보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 그는 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엄마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빚짐의 의식은 더 일반화되어 윤지오는 엄마만이 아니라 신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신에게도 정신적으로 빚지는 것이다. 

물론 엄마는, “고마워~~ 울 딸이 힘들 때마다… 엄마가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면서 딸을 위한 경호비용 지출을 자신의 ‘큰 행복’(‘다행’)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전통적 증여 공동체인 가족의 태도이다.

그런데 정작 헌법과 공익신고자 보호법(공익신고자 보호법 13조 1항 신변호보조치: “공익신고자 등과 그 친족 또는 동거인은 공익신고 등을 이유로 생명.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입었거나 입을 우려가 명백한 경우에는 위원회에 신변호호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경찰관서의 장에게 신변호조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2항 제1항에 따른 신변보호조치를 요청받은 경찰관서의 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즉시 신변보호조치를 하여야 한다)에 따라 신고자/증인의 보호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국가 ‘공동체’는 어떤가?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윤지오 신변보호 청원을 받고도 이후 다시 변호사로부터 윤지오 신변보호 요청을 받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증언자가 명백히 국민의 알권리와 주권 증진을 위해 증언을 하고 있고 그 증언으로 인한 보복 우려에 대비해 사설 경호비용을 지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의하는 국가는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는 항상 국민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이 역사적 상례였다.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이나 1987년의 시민항쟁, 2008년의 촛불집회나 2014년의 세월호 집회, 그리고 2016년의 촛불혁명 등은 대의민주주의가 기능장애에 빠진 순간에 시민의 직접행동이 그것을 치유하는 힘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용된 사람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주인이 나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019년 9월 28일의 서초동 촛불집회도 선출되지 않은 검찰권력이 비대해져 선출된 대의권력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권력원천인 국민이 ‘검찰개혁’이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직접 자신의 사법주권을 주장하며 나선 사건이다. 

국민을 위한 증언자가 국가 공동체에 의해 방치되는 상황을 지켜본 네티즌들은 윤지오 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이게 나라입니까? 너무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ma_***ong, 2019년 3월 13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후원계좌 열어주세요. 사람 한명 살린다 생각하고 후원할 거예요. 진짜….경찰들은 믿을만한 것들이 못되네요.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지만… 이제 더 이상 뉴스에서 안 좋은 소식은 안 듣고 싶네요. 용기내어주신 윤지오님 항상 응원할게요”(amd*****13, 2019년 3월 13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라며 후원계좌 개설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3월 14일에도 후원계좌 개설을 요구하면서 한 네티즌은  “이건 윤지오 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장자연 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피해자분들 그리고 넓게 봐서는 우리 국민들을 위한 겁니다! 윤지오 님이 끝까지 안전하게 싸워주셔야 우리도 이런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ㅠㅠ 연대합시다”(byj****)라고 말한다. 증언은 증인의 몫이지만 증인이 안전하게 싸울 수 있도록 최대한 연대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몫이라는 정확한 인식에 따라 후원금 계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연대의 입장에서 후원금 계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오씨 항상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혹여 지오시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지쳐하실까봐 매번 걱정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여성분들이 밤에도 눈 한번 감지 않고 지켜볼 것이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겁먹지 말고 지쳐하지 말아주세요. … 남성들에 의해 마치 고깃덩어리마냥 죽어나가고 죽어나갈 여성들만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우리 여성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고 연대할 것이고 이길 것입니다. 용기내주시고 힘써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그리고 혹시 경호비 모금 받으실 생각 없으신 건가요? ㅠㅠ”

이러한 목소리들에 윤지오는 이렇게 답한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신변보호에 걱정을 해주시고 그런 염려를 하게 해드리고 마음을 무겁게 해드리는 것 같아 국가에서의 도움을 받기에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판단에 사설 경호원을 24시간 대동하게된것을 말씀드렸어요. 현재의 상황이기도 했고요. 이런 사실을 아시고 너무나 많은 분들께서 생각지도 못한 후원계좌를 말씀해주고 계신것 같아요.댓글과 DM[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말씀해주시고 계시지만 제가 감히 뭐라고 여러분의 열정으로 창출한 귀하고 값진 금액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정도로 한것이 아직 없는데.. 그렇게 고민을 하고있고 아직도 무엇이 좋은지 방법과 자문을 구하고 신중히 제 개인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저보다 어려움을 겪고 계시고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들께 전달되어지면 너무나 의미있고 더 뜻깊지 않을까란 생각이되었어요.”(3월 14일 인스타그램)

후원계좌는, 윤지오가 사기를 기획했다는 고발자나 악플러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후원계좌 공개 제안을 받고서야 윤지오는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런데 증여교환의 관계와 영역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일정한 돈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먼저 지불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 정도로 한 것이 아직 없는” 것이다.  

그런데 증여증언은 계약교환의 관계형식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여증언은 측정될 수 없는 가치, 교환가치로서 서로 비교불가능한 말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몸과 행동으로 증언이라는 증여행위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증여-수증-답례의 순환으로 나타나는 증여관계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약교환의 관계가 지배적으로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증여교환의 관계는 예외적 교환양식으로 치부되고 억압되며 부단히 계약교환의 문법, 관례, 언어로 번역되고 치환됨으로써만 마치 이해된 것처럼 간주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증여관계는 여전히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당장 개개인의 출생부터가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가족관계, 친구관계와 같은 상당 부분의 관계가 계약관계가 아니다. 이런 전통적 관계만이 아니라 디지털 온라인 커뮤니티들도 계약교환의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삶의 상당부분이 증여교환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그 관계를 계약교환 관계의 문법을 통하지 않고는 번역할 수 없는 의식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의 세계시민들인이 처한 보편적 딜렘마이다.  증여관계는 전근대적 친밀성 관계나 탈근대적 온라인 관계 모두에서 일상적으로 실재하는 흔하디흔한 관계이면서도 상품교환의 관계의 지배로 인해 관계와 교류의 합당한 형식으로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증여관계의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위상변화로 인해 증여는 뇌물, 사기와 부단히 혼동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지오의 증언증여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증여를 계약교환의 문맥에서 독립된 증여교환의 독자적 문법 속에서 더 일관되게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티즌들의 이러한 후원계좌 개설 요구를 받아 방송에서 처음(3월 15일)으로 언표한 것이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이다.  이상호 기자는 이미 3월 13일에, 신변보호 요청을 한 윤지오가 자비로 경호를 하기로 한 사실을 고발뉴스에서 보도한 바 있다. 또 그는 장자연 사건 ‘보도’로 인해 이미숙 배우로부터 고소를 겪은 바 있는 경험자로서, 윤지오가 ‘증언’으로 인해 권력의 보복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신변보호를 위한 경호비만은 국민들의 손으로 마련해 주자는 뜻으로 후원금 통장 개설을 제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여론의 맥락에서 이 제안은, 국가가 증언자로부터 받은 증여에 대해 필요한 답례증여를 행하지 않고 있는 무례(無禮)의 상황에서, 그리고 그 무례가 증언자의 신체를 위험에 방치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주인이고 주권자인 국민이 증언자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답례증여를 직접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윤지오는 3월 14일과 동일한 취지에 따라 이 제안에도 응하지 않는다.    

“후원계좌도 너무 많이 말씀해 주시는데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면서 번 돈을 감히 받기가 너무 죄송스럽고요. 저는 젊잖아요. 아직 저야 뭐 노동을 통해서도 열심히 벌면 되고 … 또 거절하는 것조차도 또 되게 건방진 것 같아서 계속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알아주셨으면 좋겠구요.”(3월 15일 발언 녹취: https://www.youtube.com/watch?v=kOh4CrB_nSk&list=PLnjhiitCpmZtTDRnfnPhDdPn8mAoxPRRO&index=25, 1시간 53분 전후)

시민들이 고생해서 번 돈을 받기는 죄송스러운데 거절만 하는 것도 무례한 것 같아 난처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실제로 계약교환이 아닌 증여교환의 관계에서는 증여가 공동체적 연대의 의사표시인 만큼 그에 대한 답례도 공동체적 연대의 의사표시이다. 따라서 증여교환의 관계에서 답례의 거부는 연대의 거부로 인식되어 상호 연대관계를 깨고 전쟁관계로 들어가자는 의사표시로 해석되곤 한다. 후원금에 대한 거절이 ‘건방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난처하다는 생각은 이러한 증여교환 관계의 맥락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틀 뒤인 3월 17일  윤지오는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을 위한 4.16 기억저장소에 개인 후원금을 기부하러 갔다. 이 자리에서 4.16기억저장소 대표인 김00 어머니로부터 4.16기억저장소도 100% 후원금으로 운영되는데, 후원금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는 예(禮)가 아니라는 취지의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2019년 3월 18일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일대 사건이 기록된 장소로 나타난다. 신한은행 통장에 입금된 후원금액(약 1억 1천 7백만원, 참고로 현재의 잔고도 약 1억 1천 7백만원이다)보다 놀라운 것은 후원행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다. 3월 18일 22시 45분부터 3월 19일 13시 50분까지 총 15시간 5분 동안 동안 무려 5745건의 송금참여가 이루어진다. 1분당 약 6.4명이 후원송금에 참여한 것이다. 

단 시간에 이런 속도의 송금참여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을까? 나로서는 이런 경우를 떠올릴 수조차 없지만 있다면 아마 사익을 위해 경합이 붙은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후원참여의 경우에 송금 하나하나는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것이고 좀더 엄밀히 말하면 공통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즉 장자연 사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에 공감하면서 그 용기에 감복하고 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언을 해달라는 요구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연대의사를 담은 송금이었다. 

이것은 증여교환 순환관계에서의 행동, 즉 윤지오의 증여증언에 대한 답례증여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증인의 신변안전을 바라는 열망과 증인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려는 연대의 취지가 아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증인의 신체가 나의 신체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공통장적 인식의 표현이다. 실명으로 증여한 사람도 있고 익명으로 증여한 사람들도 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이름 대신 적어 보냈다. 그 구호들은 통장 위에서 집회의 깃발이나 만장처럼 펄럭인다. 아래에 이름 대신 찍힌 문구들 중 이 후원금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을 몇 개 골라 적어보자. (아마도 8자로 제한된 것으로 보이는 글자 제한 때문에 문구가 잘려 있는 경우도 있는데, 잘린 글자는 잘린 그대로 쓴다)

“윤지오짱예쁨, 힘내세요~~^^, 강0예지 존경, 유00고발후원, 고맙습니다, 적어서미안해요, 윤지오지킨다,정00(홧팅!!), 그대미소영원, 진실은승리한다, 항상응원할게요, 응원합니다, 지오님 감사해, 증언자윤지오, 벨라 화이팅, 멋진사람윤지오, 적게나마보태요, 함께하겠습니다.그동안수고하, 제주도연우맘, 정의사회구현, 용기에감사합, 고마워요!힘내, 딴게니키스오, 지지합니다, 끝까지함께해요, 혼자가아니에요,도움이되길, 용기내주셔서, 소액이라죄송,다담주에더보낼, 무너지지말아요, 끝까지함께가요, 언니힘내세요, 당신이지치지않, 용기감사합니다,연대합니다, 끝까지연대하겠, 나00달려라, 이시대영웅입, 경호는내가맡는, 같이해요!화이, 터널지오최고ㅋ, 전재산이이것, Justice…, 무탈기원, 용기잃지마세요, 꼭취뽀해서힘드, 멋져요힘내요, 증언에는후원, 긴시간을지나가, 지오님힘내세요, 금쪽같은 윤지오, 부디안전하시길, 힘네세요고맙습, 쫄지말기!!힘내, 함께싸울게요,실수투성이밤,딴지방판소년단,끝까지싸워주세, 대신해서 감사, 용기에응원과, 촛불하나, 아자!, 배우님힘내세요, 지나가는과객, 15번째증언응원, 깨어있는시민, 사필귀정, 적은돈죄송해요, 연대합니다, 작은용기가모여, 힘이되어드리고, 저희가함께할께, 백수라서,조금, 진실은밝혀진다, 두달연장화이팅, 감동감사함께해, 포기하지마세요, 사설경호후원금, 늘초심으로힘내, 고기도사드세요, 담엔더보낼게요, 그 용기에 박수, 다치지마세요, 많은여자들이같, 걱정하지마세요, 이제우리가지켜, 같은여자로써응, 김00.지켜줄, 증언감사합니다, 지치지말아요, 짐을지워미안해, 정의가승리하기, 진실이밝혀지기, 쭉 연대할께요, 봄은꼭돌아오거,진실은침몰하지, 학생이라부족하, 지나가는스님입, 훌륭하십니다.., 기도보탤께요, 끝까지살아주세, 지오님지지마세요, 김학의구속, 이것밖에힘이안, 학생이라죄송해, 홀로싸웠을시간, 커피사드세요, 언니아프지마요, 적지만마음만은, 당신은착한사람, 우리모두가증인, 이봐요힘내요딴, 큰용기감사합, 끝까지지지말아, 우리가지키겠, 밥한끼라도힘나, 아자아자!!!!, 돈패닉, 정의는이긴다, 그대의 용기에, 대한민국이응, 두딸의아빠 힘, 이렇게라도제망, 미안해요고마워, 용기내줘고마워, 딴게이와같이가, 함께임을잊미마, 이길수있습니다, 무사기원부탁, 지켜드릴게요, 토론토박00힘, 000국회의원, 일반시민, 기린은울지않는, 윤지오씨를국회,KOOL하게, 의인은힘내시라, 한국페미니스트, 서로의용기, 경호비용지원, 정읍아인이아빠, 행복합시다-딴, 성불하십시오, 본명이더예뻐, 진실을 응원합, 어느시각장애인, 소시민의정의, 사랑합니다.응, 죄지은자반드시, 윤배우님고맙습, 용기가대단해요, 힘들어지오화이, 우리는서로의용, 진실승리, 낙숫물이바위, 곁에있어요, 진실규명을위, 꿋꿋하고당당, 행복하게사세요, 윤지오씨경호비, 머리숙여감사드, 당신은멋진사람, 온마음으로연대, 이길거에요, 잊지않고지지합, 강한멘탈을지지, 당신이자랑스럽, 핸사리반짝, 차비라도보태요,  ……..”

위의 문구들은 틀림 없이 서로 다른 곳에 있었을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동소이하게 여러 차례 반복되는 문구들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서론 다른 사람들의 공통의 정동과 공통의 인식, 공통의 의지를 표명한다. 천원부터 백만원까지 (평균하면 1인당 약 2만원의, 그러나 결코 평균해서는 안 될) 크고 작은 송금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방식으로 합류하는 무수히 많은 응원과 격려(힘내세요, 이깁니다 등등), 무수히 많은 연대결의(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끝까지 함께연대하겠습니다 등등) 무수히 많은 감사(당신의 증언과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미안함(짐지워서 미안합니다, 소액이라 죄송합니다 등등)의 격류이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 정동의 격류는 서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후원금 흐름의 형태로 이루어진 집회(assembly)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증인의 용기에 감사하고 지치지 않도록 격려하며 진실의 승리를 기원하고 끝까지 연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것은 윤지오의 진실증언 증여에 대한 답례의 증여로서 진실규명과 진실승리를 위한 용기와 연대의 공통장(commons)을 구축하는 힘의 출현이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의 상호증여를 통해 서로의 진실과 힘을 다지는 무형의 공간이 생성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건을 ‘증여 공통장의 등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2019년 3월 18일 이후 15시간 여에 걸친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우리의 서랍에서 흔히 발견되는 은행통장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겠지만, 결코 경제적 수입과 지출이 기록되는 사인(私人)의 통장이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이 체제의 가해권력에 대한 저항의 용기, 진실규명의 의지, 함께 이 체제와 맞서자는 연대의 결의, 이 실천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서로빚짐(감사)의 확인이 표현된 정치적 공간이고 그 정치적 목소리들이 낱낱이 기록된 삶정치적(biopolitical) 문서이다.  이 통장에는 경제적 일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드물다(rare)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특이하다(singular)는 의미에서 사건의 문서이다. 

이 사건은 화폐로 기록된 사건이다. 맑스는 화폐가 교환수단, 지불수단, 축장수단, 세계화폐라는 네 가지 기능을 갖는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의 화폐는 이 중 어디에 속하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통장에 입금된 화폐는 상품의 대금으로 송금된 것도 아니며 이미 산 상품의 대금을 지불한 것도 아니며 부를 모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맥락에서 신한은행 통장의 화폐는 증여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증여는 경호비라고 불리는 특이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5745명(이 숫자는, 15시간 여의 입금흐름 후 신한은행 계좌를 윤지오가 닫음으로써 강제로 제한된 숫자이다)의 후원집단이 무엇을 ‘경호’하려고 한 것인가? 무엇을 ‘지키려고’ 한 것인가? 윤지오의 신체를 지킴으로써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진실을 지키고 그것에 대항 저항을 지키며 그 저항의 연대를 지키고 서로에 대한 빚짐과 상호의존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진실의 연대를 위한 증여의 공통장을 경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신한은행 통장의 화폐는, 결코 경제적 수치로 환원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삶정치적 화폐였고 삶정치적 언어 그 자체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송금 그 자체가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삶정치적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위선에 대하여: 증인을 보호하기보다 방치하고 왜곡하고 체포하기(3)

 증언자 윤지오와 국가_2019

2018년에 윤지오는 증언을 달라는 검찰(검사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했다. 장자연에 대한 조0천의 강제추행을 입증하기 위해 검사측 증인으로 법정에서 증언을 했고 과거사진상조사단을 위해 장자연의 문건과 리스트에 대해 증언했다. 그 증언들은 경찰 수사관에게 했던 2009년의 증언과 유사하게 검사나 조사위원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 이 증언들은 ‘이순자’라는 가명으로 얼굴 없이 이루어졌다. 

2019년에 윤지오는 다른 선택을 한다. 우선 증언의 대상을 소수의 수사 및 조사 전문가에서 국민 대중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직업으로서 수사나 조사를 하는 전문가를 매개로 했던 간접증언에서 헌법상 알 권리를 가진 국민 대중을 향한 직접증언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것은 2018년 MBC 피디수첩과의 인터뷰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또 하나는 실명을 가리고 얼굴을 숨기는 식의 강요된 ‘피해자다움’을 버리고 실명과 실면으로 증언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가명 증언은 2018년 피디수첩 인터뷰 및 JTBC와의 전화인터뷰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아래로부터 국민의 명령으로 재조사가 이루어진 이 절호의 기회에 실명, 실면의 증언이 이름과 얼굴을 숨기고 하는 증언보다 증언의 효과를 더욱 키울 수 있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두 가지 전환은 장자연 사후 10주년에 맞추어진 <13번째 증언>의 출간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간접증언에서 직접증언으로, 폐쇄증언에서 개방증언으로, 수동증언에서 능동증언으로, 타율증언에서 자발증언로, 수세증언에서 공세증언로의 이러한 증언 태도의 전환은 왜 이루어진 것일까? 

우선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10주년이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13번째 증언>, 224쪽)는 위기감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학의, 버닝썬 등의 동종사건과 연동되면서 장자연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드높아진 상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와 연관된 것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사권도 없이 과거사 조사 차원에서 겨우 6명의 조사위원에 의해 전개되는 이 재조사가 과연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실제적 처벌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즉 국가에 대한 의문의 문제이다. 실제로 2009년 KBS에서 장자연 문건을 보도한 직후 초동수사의 부실을 지적하는 여론의 지탄을 받고 무려 42명의 수사팀이 꾸려졌고 대대적인 재수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하지만 그 재수사는 가해혐의를 받은 권력자들 모두를 무혐의 처분하는 절차로 귀착되었다. 이러한 전례를 생각해 보면, 비록 정부가 바뀌었고 촛불국민의 명령이 있다고 하지만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실제적 처벌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조건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인식과 한계인식 속에서 윤지오가 선택한 것은, 국민에게 직접 증언을 주고 국민이 이 증언을 기초로 재조사라는 사법과정에 직접 개입하여 과거사조사위원회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 윤지오가 염두에 둔 것은 애초에 과거사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도록 만든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그것은, 국민이 대의자들에 대한 소환, 해임의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법안을 발의하고 투표로 결정하는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며 국민이 수사, 기소, 재판의 권한을 갖고 그것에 관여하는 주체로 되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청와대에 직접 전달하여 위로부터 답변하도록 만드는 것으로서, 직접민주주의의 아주 약한 표현형태이다. 윤지오는 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법 위의 법”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 자생적 법철학 속에서 그는 국민의 제헌적 역량(법 위의 법)이 실정법(법)을 통제하고 재구성한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이러한 생각 위에서 윤지오가 선택한 것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증언 에세이집을 출판하고 방송에서 증언 인터뷰를 하고 여성단체와 함께 광장에서 증언 기자회견을 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 소식을 알리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2019년 3월 4일 한국으로 오자마자 그는 뉴스공장을 기점으로 며칠간에 걸쳐 조선일보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방송사와 인터뷰를 한다. 

이 인터뷰 과정에서 국민들은 지금까지 경찰과 검찰의 수사발표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생생한 정보와 접하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그 중 세 간의 주목을 크게 받은 것은 (1)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유서가 아니라 소송용 증언조서라는 것, (2)증언조서가 유서로 둔갑되어 자살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던 만큼 문건이 유서가 아닌 것이 명확한 한에서 장자연의 사망원인에 대한 원점조사가 필요하다는 것, (3)그 증언조서와는 별도로 편지글 형식 속에 담긴 리스트가 있었는데 그 리스트에는 “성상납을 강요”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 (4)장자연이 당시 술자리에서 보였던 일련의 모습을 보면 이 “성상납 강요”가 마약을 강제 주입 당한 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 점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 (5)“성상납을 강요”한 이 리스트에 적힌 이름 중에서 방씨 성의 세 사람과 이름이 특이한 정치인이 기억난다는 것 등이다.

인터뷰를 통해 직접 국민에게 주어진 이러한 증언들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주류적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장자연은 우울증을 앓다가 유서를 남기고 죽었고 그 유서에서 폭행과 협박을 한 당사자인 김종승은 처벌을 받았으며 장자연이 술접대나 잠자리를 강요받은 ‘조선일보 방사장’이나 ‘방사장의 아들’은 누구인지 아직 알 수 없으며 문건의 해당 구절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 경찰과 검찰 수사발표에 의해 국민에게 주어진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해 주어진 주류 상식과 윤지오의 새로운 대국민 증언 사이의 간극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 증언의 충격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주류 상식 세계에서 장자연 사건은 (다행히 경찰이 의도하고 있었던 장자연의 사기 미수사건으로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기껏해야 악덕 기업주의 일탈적 악행 사건으로 인지되었다. 이럴 때 그 최종 책임은, 김대오가 주장하는 바처럼, 더 콘텐츠의 대표 김종승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윤지오의 증언은 장자연 사건을 권력형의 집단적 성폭행 사건으로, 즉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문제로 인지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마약을 이용한 특수강간 사건이나 살인 사건의 관점에서도 수사해 볼 필요가 있음을 제기했다. 이럴 때 최종 책임은 권력자들과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에 주어지게 된다. 이 증언들은 장자연 사건의 공소시효는 종결되었다는 기존의 사법적 통념을 거부하면서 공소시효가 아직 충분히 남은 사건으로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증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그 관심과 지지는 얼굴과 이름을 밝히고 국민에게 직접 증언을 준 윤지오의 용기에 감사하면서 그의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것(3월 8일 청와대 국민청원)이었고 그 증언에 따라 장자연 사건의 조사기간 연장과 재수사를 요청하는 것(3월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우선 신변보호요청 청원자는 이렇게 쓴다.

“고 장자연씨 관련, 어렵게 증언한 윤00씨의 신변보호를 요청드립니다. 목격자진술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의 불이익, 또는 신변에 위험이 없도록 신변보호를 청원합니다. 보복, 불이익이 있으면 어떻게 아이들이 이 세상을 보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정의로운 사회, 그 밑바탕은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의 힘입니다. 20대초반에 그 큰 일을 겪고 10년간 숨어 살아야했던 제2의 피해자 윤00씨의 신변보호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청원합니다.”(강조는 인용자)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의 힘이 정의로운 사회의 밑바탕인 만큼 증언자에게 보복이나 불이익이 없도록 국가가 신변보호를 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윤지오의 증언을 사회에 대한 진실증여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증여를 받은 국민이 수증자로서 진실증여자에 대한 신변보호라는 최소한의 답례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후세대에게 떳떳한 나라의 성원일 수 없다는 것을 신변보호 요청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 청원은 한 달 만에 386,506명의 동의참여를 이끌어냈다. 

두 번째 청원, 즉 조사기간 연장과 재수사 요청은 다음과 같은 간명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고 장자연씨의 수사[조사]기간 연장 및 재수사를 청원합니다. 수사기간을 연장해 장자연씨가 자살하기 전 남긴 일명 ‘장자연 리스트’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재수사를 청원합니다.”

‘장자연 리스트’는 2009년의 초기 재수사에서 참고인 및 피의자 진술을 통해 명백히 제기되었으나 경검의 수사를 거친 후 사라진 주제다. 윤지오의 증언은 이 주제를 1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사회적 의제로 다시 가져왔다. 이 청원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을 재수사 연장의 근거로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청원은 신변보호 요청보다 많은 738,566명의 동의참여를 이끌어 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주어진 기간내 20만명 이상의 동의참여를 이끌어낼 때 정부는 답변의 의무를 진다. 실명과 실면으로 국민에게 직접 증언키로 한 증언방식의 전환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매개로 윤지오가 다른 국가기관을 만나도록 만든다. 지금까지는 사법경찰과 검찰 및 법원이라는 사법 계통의 국가기관만을 만났으나 이제 청와대와 행정경찰이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후에는 입법부인 국회(의원)도 개입하게 됨으로써다.

청와대는 이 두 청원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지시를 답변으로 내놓는다. 그 지시의 전문은 좀 길지만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국민들이 보기에 대단히 강한 의혹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은폐되어온 사건들이 있습니다. 공통적인 특징은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일이고, 검찰과 경찰 등의 수사기관들이 고의적인 부실 수사를 하거나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비호・은폐한 정황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진실 규명 요구와 함께 과거 수사 과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한 의혹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검찰과 경찰이 권력형 사건 앞에서 무력했던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 위에서 과거에 있었던 고의적인 부실・비호・은폐 수사 의혹에 대해 주머니 속을 뒤집어 보이듯이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지 못한다면 사정기관으로서의 공정성과 공신력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건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진실을 밝히고,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신뢰 받는 사정기관으로 거듭 나는 일은 검찰과 경찰의 현 지도부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오래된 사건인 만큼 공소시효가 끝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아닌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일은 그대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엄정한 사법 처리를 해 주기 바랍니다. 


강남 클럽의 사건은 연예인 등 일부 새로운 특권층의 마약류 사용과 성폭력 등이 포함된 불법적인 영업과 범죄 행위에 대해 관할 경찰과 국세청 등 일부 권력 기관이 유착하여 묵인・방조・특혜를 줘 왔다는 의혹이 짙은 사건입니다.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드러난 범죄 행위 시기와 유착 관계 시기는 과거 정부 때의 일이지만 동일한 행태가 지금 정부까지 이어졌을 개연성이 없지 않으므로 성역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수사와 조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유사한 불법 영업과 범죄 행위, 그리고 권력 기관의 유착 행위가 다른 유사한 유흥업소에서도 있을 수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집중적인 수사와 조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 사건들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함께 검찰, 경찰, 국세청 등의 고의적인 부실 수사와 조직적인 비호, 그리고 은폐, 특혜 의혹 등이 핵심입니다. 힘 있고 빽 있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불법과 악행에도 진실을 숨겨 면죄부를 주고, 힘없는 국민은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결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법무부 장관과 행안부 장관이 함께 책임을 지고 사건의 실체와 제기되는 여러 의혹들을 낱낱이 규명해 주기 바랍니다.”

법무부장관과 행안부장관 등 행정각료들을 대상으로 한 이 지시는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을 권력형(‘특권층’) 범죄로 규정하면서 검찰과 경찰 등의 수사기관이 고의적인 부실수사를 통해 진실규명을 가로막아 범죄를 비호하고 은폐한 정황들을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이 지시는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에 대해 규정하고 설명하고 판단하는 특권적 주체였던 경찰과 검찰을 조사와 수사의 대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는 점에서 관점의 커다란 도약과 진전을 보여준다. 실제로 윤지오는 3월 1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대통령의 이 응답을 “국민청원으로 이뤄진 기적같은 일”로 평가하고 “10년 동안 일관되게 진술한 유일한 증인으로 걸어온 지난날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으로 갖게되었”다고 밝힌 후 “진실 규명에 대해 언급해주신 대통령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지시에는 숨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이 지시가 검찰과 경찰을 조사와 수사의 대상으로 설정한 후 역설적이게도 곧바로 그 다음 문단에서 조사와 수사의 대상인 검찰과 경찰을 다시 조사와 수사의 주체로 복권시킨다는 것이다. 조직의 명운을 걸고 스스로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깊은 반성”을 통해 사정기관으로서의 공정성과 공신력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을 대상으로 하는 제3의 조사/수사 주체를 구축해야 할 시점, 즉 수사권을 주권자인 국민의 수중으로 가져오는 방향의 혁명적 발상으로 나아가야 할 순간에 다시 경찰과 검찰 자신을 자기수사의 주체로 불러내는 것은 경찰과 검찰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검찰을 견제세력이 없는 특권세력으로 인지하게 만듦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그들을 비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지 않을까? 수사와 기소에서의 국민주권을 골간으로 하는 경찰 및 검찰 기관의 실질적 개혁이 부단히 지체되고 실패하는 것이 대통령의 이런 양면적 태도와 무관할까? 이런 지시 이후에 실제로 법무부 과거사조사위원회는, 변호사와 교수가 포함되었던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 담겨 있었던 최소한의 진실추구적 요소마저 지워버리면서, 재수사의 길을 닫아버리고 사건 재조사를 종결시켜 버렸다. 이러한 종결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들에 대한 신빙성을 추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변보호 청원에 대해서는 행정기관의 일정한 반응이 있었다. 3월 8일 시작된 청원이 마감되기 전인 3월 14일 윤지오 변호사로부터 신변보호 요청을 받은 경찰청은 동작경찰서로 하여금 “△스마트워치 제공 △112 긴급 신변보호 대상자 등록 △임시숙소 제공 △맞춤형 순찰 등의 신변보호 조치”를 하도록 결정하고 시행했다. 이러한 조치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 과거사진상조사단은 윤지오의 대국민 직접 증언 중에서 재조사할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윤지오를 재차 증인으로 불렀고 이 조사에서 윤지오는 언론 인터뷰나 출판물에서는 하지 않았던 내용(가령 장자연 리스트에서 본 이름들의 실명)을 증언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조치가, 3월 30일 윤지오가 “스마트 워치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으나 경찰관이 9시간 넘게 출동하지 않은” 사태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느껴 경찰은 3월 31일 스마트워치 전체에 대한 긴급점검 실시를 약속하고 새로운 숙소로 윤지오를 이동시키고 신변보호특별팀을 구성하여 24시가 동행 밀착 보호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얼마 뒤 경찰은 3월 30일 당일 윤지오가 불안감을 느껴 스마트워치를 누르게 된 것이 상황과 환경에 대한 오인과 오판에 의한 것이며 스마트워치를 누른 후 경찰이 출동하지 않게 된 책임도 윤지오의 기기 조작미숙에 있었다면 책임을 윤지오게게 돌렸던 것도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일이다. 

대한민국 경찰은,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국민, 증언자를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증언자 자신 등에 떠밀려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에 나섰으나 증언자의 신변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기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것은 일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해권력자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보호하고 은폐하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발적이고 예민한 책임감을 보이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국민의 생명보호 의무에 속하는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시민사회에 “진실을 밝힐 힘”을 증여하는 증언자에 대한 사회의 답례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를 자처하는 윤지오가 과장으로 꾸며낸 일대 소동처럼 발표함으로써 증인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

국회는 어떠했던가? 국회는 윤지오 동행의원모임 구성과 간담회, 그리고 <13번째 증언> 북콘서트라는 형태로 이 사건에 개입했다. 출판기념 북콘서트는 애초에 국회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던 출판기념 북콘서트가 하루 전날 취소된 것도 신변안전 문제였다. 윤지오는 출판기념 북콘서트 무대에서 자신과 가까이 서게 될 출연진이 누구인지, 신변안전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인지 확인해 주기를 요청했고 극장측이 이것을 거부함으로써 북콘서트가 무산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회의원 안민석의 주도와 공익제보자 모임의 연대로 북콘서트가 국회에서 열리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무렵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증언자 윤지오를 동행하기 위한 모임을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4월 초에 이루어진 이 일련의 과정은 물밑에서 드러나지 않게 전개되던 반윤지오 흐름의 표면화와 겹쳐졌다. 이 흐름은 윤지오의 인스타그램에 악성 댓글이나 악성 DM의 수준에 머무렀던 지하흐름이었으나, 윤지오의 대국민 직접증언이 청와대를 넘어 국회에까지 반향을 일으키고 또 과거사진상조사단이 예정에도 없던 추가증언을 윤지오에게 요청하여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장자연 리스트 그 자체가 재수사될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강하게 표출되고 표면화된다. 이것이 가해권력측이 느낀 위기의식의 표현이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증언에 대한 이 반동(reaction)은 호야스포테인먼트 전 실장 권0성의 발언을 근거로 삼은 뉴시스의 윤지오 공격과 박준영의 증인검증론을 거쳐 김수민 김대오 박훈의 사기론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 핵심은 증언에서 증인으로 초점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언론이 이 작업의 선봉에 섰는데, 장자연 리스트가 문제가 아니고 윤지오의 인성과 도덕성이 문제라는 보도를 쏟아내는 것이 그 방식이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제도언론들의 센세이셔널한 보도에 인스타그램 및 유튜브의 까판 담론이 결합되어 여론화되는 과정에서 국회의 윤지오 동행모임은 동행은커녕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윤지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 동행모임의 침묵은 이후에, 윤지오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달 간 전혀 접촉한 바 없다는 해명, 윤지오의 난처함보다 자신과 동료의원들이 윤지오로 인해 겪는 난처함을 중시하는 엘리뜨주의적 냉정함, 다른 공익제보자로부터 윤지오를 분리시키는 교묘한 언어놀음 등으로 범벅이 된 항복문서를 가해권력 앞에 내놓는 것으로 끝났다. 

이렇게 윤지오는 2009년에 사법경찰을, 2018년에 검찰을 경험한 후에 2019년에는 행정기관과 입법기관을 경험했다. 언론기관과의 마주침에 대해서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국가기관과 긴밀한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2019년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청와대가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엄정한 조사를 요구하면서도, 결코 엄정할 수 없는 검찰 자신에게 과거사 조사를 맡기고, 국회의원이 표면적으로는 증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증언자가 여론의 공격 받을 때에는 연락을 끊고 침묵하며, 행정경찰이 증인의 신변보호를 책임지겠다고 하고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이었다.   

이 위선적 과정의 끝에 윤지오는 10년만에 다시 사법경찰과 접속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참고인으로서가 아니라 피의자로서다. “10년 동안 일관되게 진술한 유일한 증인으로 걸어온 지난 날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진실이 규명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여태껏 그래왔듯 성실하게 진실만을 증언”하려고 했지만 변호사, 작가, 기자, 유튜버, 인스타그래머 등의 고소고발자들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은 고인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제소했다. 일찌기 ‘조선일보 방사장과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안개 속으로 감추어 최초 증언자 장자연의 증언조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허위 문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한민국 사법경찰은 이제 윤지오에게 체포영장을 청구함으로써 후속 증언자인 윤지오의 증언도 허위라는 고소고발자들의 제소에 힘을 실어주고 장자연 사건 자체를 미궁 속으로 밀어넣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