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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종말로서의 신자유주의의 파탄

정치학
작성자
amelanojoe
작성일
2018-02-21 10:16
조회
194
20세기의 역사는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그 한계가 이론으로서뿐만 아니라 실제적 경험으로서 드러났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의 종말 국면에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은행국유화는 사회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더 이상 노동계급의 혁명적 이상이나 실천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비상수단으로 살아 있다.

발생기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과 그것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공황)를 다스리면서 생산의 발전을 계속할 수 있는 장치이자 사회적 관계로 상상되었다. 그것은 주요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공동으로 생산하는 생산공동체이자 생산에 기여한 만큼 분배받는 분배공동체로 이해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투쟁무기였는데, 그것은 자본이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며 무정부적이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계급과 그들을 지지하는 민중은 무정부성을 극복할 강력한 정부로 자신을 조직하려 했다. 그 방안은 전위적 정치조직인 당이 기존 국가를 장악하여 통치주체를 노동계급으로 전환시키는 것에서부터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아래로부터 새로운 코뮌정부를 건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역사적 사회주의의 길은 대체로 이 양극단의 중간쯤에서 결정되었다. 기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당이 민중들의 코뮌/소비에트/인민위원회/평의회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생산의 사회주의로 나타났다.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 중국의 대약진 운동, 북한의 천리마 운동은 생산사회주의의 대명사들이다. 이것은 세계의 후진 지역들이었던 사회주의 나라들을 빠르게 중진 혹은 선진 지역으로 , 반봉건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바꿔놓았다. 생산의 사회주의가 가져온 거대한 생산력 향상의 결과는 다시 확대된 생산을 위해 [또 상당 부분은 자본의 국제적 포위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방어를 위해] 투자되었다. 사회의 이 생산 중심적 배치는 점점 분배의 사회화를 지체시켰고 분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회집단을 특권계급으로 경화시켰다.

동구와 아시아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갔다면 서구는 공황을 통해 사회주의로 간 경우이다. 자본주의적 시장이 덜 발전되었던 동구와 아시아에서 노동조직과 노동운동을 통해 생산력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자본주의적 시장이 더 발전되었던 서구에서는 생산력의 과잉이 문제였다. 시장은 노동을 강제하고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유능한 장치였지만 공황[과 그것을 통한 생산력 파괴]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케인즈주의는 시장의존적인 발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장을 중심에 두면서도 노동운동을 생산력으로 전화시킴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시장과 국가를, 운동과 통제를 혼합했다. 생산은 여전히 시장중심적이었지만 조직된 노동운동과 국가의 타협이 그것에 일정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했다. 생산성에 따른 임금 지급 원칙과 사회복지 제도는 임금과 소득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 케인즈주의적 서구에서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소득(분배)의 사회주의라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생산의 사회주의는 그것에 종속되어 있었다. 사회적 대타협과 노사정위원회들은 계급타협의 정부였다.

1970년대 이후 동서구를 막론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얼핏보면 모든 사회주의들의 철폐를 위한 시도로 보인다. 20세기의 사회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위축되었던 시장이 다시 주인공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산자본 및 자산의 화폐자본으로의 전환(금융화)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국가는 국경을 넘는 금융자본의 하위파트너로 기능했다. 20세기의 생산사회주의나 소득사회주의는 모두 강력한 국가에 의지했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상대화(국가의 탈주권화와 제국 주권화)는 사회주의가 쇠퇴했거나 혹은 철폐되었다고 보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금융화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라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주도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의 원리는 전혀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다. 금융자본주의는 국가권력 이 아니라 신용을 사회주의의 기축으로 정립한다. 부채는 점점 확장되면서 위기에 내몰리는 사회주체들을 사회적으로 구제하는 복지기금으로 기능한다. 부채는 (상환의무가 수반되는) 소득의 형태이다. 소득사회주의는 부채라는 형태로 특수하게 재현된다. 기존의 사회주의들이 겪었던 재정적자가 개인적 부채의 형태로 사회화된다. 국가자본이라는 자본의 사회화 형태 대신에 파생금융 상품들이 자본의 수익을 평균화하고 위험을 사회화하는 형태로 등장한다.[footnote]이에 대해서는 조원희,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진보평론], 42호, 2009 겨울, 261-2) 참조.[/footnote] 신자유주의는 한편에 수익과 위험의 사회주의를, 다른 한편에 부채의 사회주의를 장치한다. 이로써 큰 이익과 큰 손실은 직접적으로 사회화하고 작은 손실은 개인화한다. 지난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것은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큰 손실이었다. 그것은 은행의 국유화라는 방식으로 사회화되었다. 서브프라이머들의 부채는 개인화되었다.

그러므로 금융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사회적 삶에 내면화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내파를 생산하는 체제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를 그것의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하나의 생산관계는 그것의 생산력적 가능성이 고갈되기 전에는 붕괴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스탈린주의/케인즈주의-신자유주의에 이르는 20세기의 역사는 자본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진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본원적으로 경쟁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본원적으로 사회적인) 자본의 사회주의적 역사의 최고이자 최근의 국면으로 사고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계획자-사회주의들(스탈린주의와 케인즈주의와 파시즘)을 대체한 신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지금까지 생산능력의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가, 그것이 드러내는 특질이 무엇인가, 사회주의의 내파국면에서 그 생산능력에 어떤 지향성이 형성되고 있는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는가를 살피려 귀를 기울이고 현실을 응시하면서 역사의 현재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종말로서의 신자유주의의 파탄에 대한 실제적 대안을 구축하는 길이 아닐까?(2010.2.4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