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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교육 혹은 삶정치로서의 교육

기타
작성자
amelanojoe
작성일
2018-02-21 10:24
조회
218
어제 다중교육론 첫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다중교육학이라 부르곤 했지만 너무 아카데믹하게 느껴진다. 다중교육에 관한 담론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다중교육론 세미나라고 부르고 싶다. '다중교육'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그것이 무엇일 수 있을까?

나 를 돌아본다. 1975년 1월, 고등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담임선생님의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행위를 입시지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대학생활 4년 내내 학비조달을 위해 이어진 국어과외지도, 학원영어강사 생활의 시작이었다. 내가 배우는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입시를 위한 정보와 기술, 그리고 지식이었다. 얼마나 무료하고 재미 없는 시간이었던가? 배우는 사람은 또 어떠했겠는가?

1979년 3월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국어와 한문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입시였고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주어진 그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론 이전에 좋은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는 실제적 필요가 해답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미 주어져 있는 그 필요와 목적, 그리고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교육의 정의나 개념은 너무나 분명해서 그것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평가는 당연히 일상의 성적경쟁과 진학율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동료교사들은 이 맹목적 과정에 따르는 고통을 '곧 그만두고 딴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으로 달래곤 했다. 교무실에서 수업 시작종이 울릴 때 '끙'하고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면서 교과서를 흔들며 "자, 약 팔러 가볼까?"라고 자조적인 혼잣말을 내뱉곤 했던 동료 교사가 생각난다.

교 육특기훈련을 받은 후 1980년 여름부터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전날밤 불침번을 서고 야간훈련, 기합 등을 받은 생도들 중의 반 이상은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잔다. 가르치는 행위는 글자 그대로 '복무'(서비스)였다. 생도들을 잘 쉴 수 있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등에서 취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에게 문학평론를 가르칠 때, 지방대학 국문과 학생들의 상당수는 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문학에 뜻을 둔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관심을 갖고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과외, 학원,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이 성적서열을 다투는 입시교육이고 사관학교에서의 교육이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로서의 서비스교육이었다면 대학에서의 교육은 기업에 취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문학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이 듣고 싶지 않은 문학 이야기로 그들의 시간을 뺏는 어거지교육이었다. 이상이 1989년 3월까지 십수년간에 걸쳐 경험한 사교육과 공교육의 모습이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공교육 강화에서 찾는 목소리들이 내게는 허망하게 들린다.) 이 시간 내내 가르치는 행위는 나 자신에게는 소외된 활동이었으며 동시에 타자를 소외시키는 활동이기도 했다.

교사로서의 나는 입시, 전쟁, 취업이라는 교육 이전에 이미 주어진 생산관계 속에 던져졌으며 그 관계의 부품으로 기능하도록 명령받았다. 일류대학에 보내야 하고, 탈영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며, 이미 낸 등록금의 본전 생각이 나도록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명령이다. 이 명령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면서 다르게 가르치려는 교사, 강사, 교수는 학생들이나 학부모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학교로부터 해고될 각오를 해야 한다. 교육행위를 둘러싼 이 완강한 생산관계의 틀은 이후로 더 강화되었으면 되었지 약화되지는 않았다. 국가가 정치적 생산관계의 물적 형식을 대표하고 기업이 경제적 생산관계의 물적 형식을 대표하며 각급 교회가 종교적 생산관계의 물적 형식을 표현하며 군대가 군사적 생산관계의 물적 형식을 표현하듯이 학교는 교육적 생산관계의 물적 형식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수의 사람들이 타인들과 타자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체제를 일상적으로 생산하는 기관들이다.

이 기관들에서의 삶과 활동이 따분하고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때로 폭력적인 것으로 표변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학교는 무엇보다 순응을 요구한다. 교사, 학생 모두가 무엇엔가 순응해야 한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자신을 고용한 학교의 교장, 총장, 이사장이거나 국립의 경우는 총장, 장관, 대통령 등의 권력자들이다. 크게 보아 이들은 체제로서의 자본의 요구를 교사와 학생들에게 관철시키는 강제도구들이다. 순응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덕목은 없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때에만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고 점점 높아지는 보상체계의 사다리를 탈 없이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 일인지는 알 사람은 대개 안다. 오랜 순응의 습관이 관료적 나태로 되거나 기회를 만나면 포악한 권력행위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 당사자를 병들게 하고 인성을 파괴하여 편집증 인간과 편집증 체제를 육성한다. 순응하기 어려운 사람들,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분열증 상태에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태. 보장된 직장과 그에 수반되는 보수는 살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딱히 달리 갖고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직분을 갖고 있는 자신이 무엇엔가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가르침이 위에 대한 복종에 종속된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사퇴를 결심하면서도 다시 매일매일 어제를 반복하며 살게 되는 분열증의 상태에 많은 교사들(그리고 경우는 다르지만 경험구조는 동일한 학생들)이 놓여 있다. 그래서 정신병원이 학교의 보충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여기에다가 감옥과 장의사까지 추가 보충물로 점점 긴밀하게 결합되고 있다. 이것은 해고가 때로는 해방의 계기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 러므로 교육을 문제로서 접근하기 시작할 때, 교육철학이나 교육방법론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교육제도에서 시작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길들은 실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샛길밖에 되지 않는다. 어디에서 시작하건 교육의 문제는 입학, 취업 등의 교육외적 강제와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 강제들은 가족, 기업, 국가, 제국 등 우리 시대 부패한 공동체들의 내적 필요에 의해 주어지며 그 필요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재생산 문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지금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에 대한 분업적 영역적 사고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우리가 기존의 교육을 반(反)교육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능력의 해방이자 인간의 지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의 혁명적 확장으로서의 실질적 교육을 사고할 때, 교육은 삶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지 교사와 학생의 대면 영역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영역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정확하게 맞는 단어를 찾지는 못하겠는데 굳이 말하자면 교육은 영역이라기보다 측면이며, 나아가서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글을 맺으면서 한 두 가지 생각을 메모해 두자. 무엇보다도 교육은 다중 내재적 관점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내재적 관점에서만 교육을 주객관계로 가르는 기존의 교사/학생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육은 무엇보다도 자기교육이며 타자교육도 자기교육의 다른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아동, 청소년, 학생 등의 대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특이화하면서 공통되어 가는 다중들의 내재적 주체형성과정이 교육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통되기를 위한 다중교육론은 그러므로 정확하게 삶정치적 혁명론과 중첩된다. 교육에 대한 철학, 방법론, 제도에 대한 사유는 삶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되고 그것의 일환으로서 발전되어야 한다.(2010.1.15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