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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자

경제학
작성자
amelanojoe
작성일
2018-02-21 10:26
조회
350
관점을 바꾸자

한 상품의 기준 가격은 상품의 겉면에 새겨져 있다. 그것이 요동치는 경우에도 한 상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것, 그 양적 지표는 특정 순간에는 분명하다. 가격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가격의 변동은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우연의 힘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던 것과 달리 정치경제학자들은 상품가격이 상품가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밝혔고 그 상품가치는 다시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도 밝혔다. 맑스가 여기에 가한 수정은 '필요한 노동'이 실제로는 직접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며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노 노동은 가치를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노동력만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고팔릴 수 있는 상품이 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가격, 가치, 노동의 관계를 밝히는 이 지적 역사적 노력 속에서 우리는 상품가격(현실성; 양태)-상품가치(강도/가능성; 속성)-노동력의 운동시간(실재성; 실체)이라는 세 차원의 방법론적 범주의 운동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의 생산비용이며 노동력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담지자, 즉 자본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회적 집단의 총체로서의 노동계급을 상상할 수 있다. 만약 노동력에 따라서 노동계급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고용되는 사람들,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상품으로 판매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만이 노동계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데 실패하는 사람들,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여하튼 자신의 노동능력이 상품관계 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노동계급에서 제외되는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점점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던 시대에 우리는 이 부분을 역사적 지체나 예외로 간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상품관계 속으로 편입될 부분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지화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는 이러한 상상이 적실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오히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상품관계로서의 고용관계 밖으로 추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의 일부만을 지칭할 수 있을 뿐인 개념으로 된다.

노동력이 아니라 추상노동을 따라서 (더 정확하게는 노동력과 추상노동의 관계에 의해서) 노동계급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하나의 순환 속에서 총노동시간으로서의 추상노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노동시간에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시간을 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추상노동의 총체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노동의 총체를 제하면 잉여노동이 된다. 추상노동을 따라서 노동계급을 상상하면 이렇게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으로 노동계급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력을 전제하는 것인 한에서 상품으로 되지 못한/않은 노동능력[활동능력]은 여기에서도 사유금지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상품화된 노동력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을 사유할 때, 임금노동이라는 장은 유일무이한 사유의 장으로 등장하고 사실상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협소한 사회관계의 틀을 벗어나서 사유하기 어렵다. 이렇게 사유할 때 자본주의는 선발된 자들의 게임이 되고 그 게임에서 배제된 자들은 구경꾼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비고용 비임금의 존재들, 어떤 호황기에도 전체 인구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존재들(생명으로서의 [고용 자체가 금지되곤 하는] 어린이, [정년이 되어 일터에서 추방되는 것이 합법화되어 있는] 많은 부분의 노인, [가부장주의적 차별과 성적 분업으로 일차적 해고의 대상이 되는] 많은 부분의 여성, [오직 특수한 부문에서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많은 부분의 장애인, [아예 권력이 임금노동 관계에서 격리시켜 버린] 수감자, 등등)이 구경꾼에 불과할까? 자본주의는 자신의 게임룰 바깥에 있는 이 존재들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까? 아니, 맑스가 '제발로 선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실질적 포섭 단계의 자본주의가 정말로 '자립적인' 자본주의일까? 우리는 노동계급을 역사적 주체로 선언하기 위해 이 존재들을 주변존재나 경계존재나 쓰레기로, 사실상의 비존재로 치부해 버려도 좋은 것일까?

그 런데 우리가 주류적 사고가 강제하는 바처럼, 즉 이 비고용의 존재들을 순수한 낭비적 존재로 사고해 본다 하더라도 그 낭비는 자본주의가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생산된 잉여가치는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일국의 노동계급에 의해 모두 실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해외의 소비자들 찾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발전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러기 전에 이미 국내의 이 낭비적 집단들이 바로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이 시장 외 존재들에 의한 가치실현을 돕기 위해 결국 국가에 의해 생계지원비가 주어진다거나 아니면 신용기관들로부터의 신용공여(대출)가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들을 낭비자나 소비자로만 묘사하는 것은 부당하다. 실제로 어떤 인간도 소비만 하면서 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은밀한 지점에서 연결된다. 기계의 생산성이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떨어뜨려 임금을 인하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비고용의 인간들이 수행하는 활동들(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여성의 노동을 비롯하여 각종의 무상의 서비스들, 오늘날에는 가격으로 계산되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인지적 활동들 및 각종의 발명활동들)은 임금을 인하시키는 압력이 되거나 아니면 자본에게 무상의 자원처럼 이용됨으로써 잉여가치의 창출에 기여한다. 그것은 고용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절대적으로 늘리지 않고도 상대적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고용의 존재들도 잉여가치 생산에 참여하며 만약 노동계급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존재들도 노동계급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가! 이것은 잉여가치 창출을 정당화해 주는 논변인데, 비정규직이 노동인구의 과반수를 넘고 어린이나 노인이나 기타 비고용인구를 감안한다면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비고용이며 사회적 정상인 시대에 굳이 이렇게 사고할 필요가 있을까? 이쯤되면 거꾸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상품화를 정상이 아니라 예외로, 자본주의를 정상적인 관계양식이 아니라 이상한 관계양식으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자본이 교환관계를 통해 축적한다는 것은 적어도 반 이상은 거짓말이다. 자본은 교환을 거치지만 교환을 통해서 자본은 일원한푼 축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자본이 축적하는 것은 교환되지 않은 것, 즉 부불의 것, 무상으로 취득되는 것이다. 산 노동과 교환되는 자본도 그 산 노동의 지불부분에서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비지불부분으로부터 축적한다. 잉여가치는 정확하게 말해 남는 가치라기보다 지불되지 않은 가치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은 본래부터 도둑질이다. 아니 시초축적은 강도질이었다. 강도질에서 도둑질로의 이행이 있었을까? 아니다 지금 도둑질은 강도질과 병행되며 한 손으로는 도둑질을, 다른 손으로는 강도질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도둑질은 기업이 맡고 강도질은 국가가 맡는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로 긴밀히 협력한다.

그런데 강도질과 도둑질의 대상은 시시때때로 변화한다. 초기의 시초축적의 대상은 토지였다. 토지의 강탈과 사적 소유는 그곳의 물, 폭포, 바람, 태양빛, 박테리아, 기후, 공기, 광물, 동물 등에 대한 무상의 이용권을 제공한다. 둘째의 도둑질은 앞서 말했듯이 노동과 교환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불하지 않은(교환되지 않는) 부분을 남김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제 자본은 고용된 사람들의 인지는 물론이고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인지까지 '외부성'이라는 이름 하에 지불 없이 이용한다. 도둑질과 강도질이 분간하기 어렵게 마구 뒤섞인 파생강도질이 사회의 보편원리로 자리잡는다. 금융이 바로 그 파생강도질을 하는 주요형태이지만 전쟁은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하는 강도질이다. 용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은 강제수용과 재개발도 그 강도질의 형태들 중의 하나다.

이 강도/도둑 떼들에게 내가 당신의 잉여가치 형성에 기여했으므로 내 몫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비루한가! 그렇게 하기보다 우리는 노동을 생명활동의 한 형태로 파악하면서 생명과 삶의 문제로 고찰의 초점을 옮기고 잉여가치를 그 생명활동의 외화, 즉 강탈된 부분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역전을 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럴 때 부각되는 것은 생명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자기생성이며 다양한 존재들의 협력이다. 생명의 공통적 생산과 재생산을 초점에 놓으면, 이미 도둑질과 강도질을 위한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 교환은 부차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교환과 시장은 생명의 공통되기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부득이 의지하게 되는 지팡이 같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되기는 잉여가치화와는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원리에 입각한다. 그것은 교환이라기보다 교류이고 교류라기보다 협력이며 협력이라기보다 생성이고 생성이라기보다 생명이며 생명이라기보다 이름붙일 수 없는 삶이다.

이것의 가능성이 잉여가치화의 운동에서 눈을 돌려 외면하는 방법을 통해 열린다고 볼 수는 없다. 사냥꾼을 피해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의 살 속으로도 총알은 파고든다. 잉여가치는 생명의 창조성의 외화이고 물화이다. 공통되기는 생명의 창조성이 도둑질되어 잉여가치의 형태로 되지 않도록, 그래서 생명을 옥죄는 힘이 더 거대한 괴물적 힘으로 자신을 짓누르지 못하도록 잉여가치화의 흐름을 중단시켜야 한다. 잉여가치화는 공통되기 흐름으로부터의 누수이다. 우리는 잉여가치화된 것, 그것의 결과물인 전 지구의 부를 생명의 것으로 되찾아옴과 동시에 잉여가치화의 흐름을 낳는 핵심적 기제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매와 판매의 관계를 집단적 힘으로 멈추게 해야 한다. 이것은 공통되기의 완성이 아니라 그것을 비로소 본궤도에 올려 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이것은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에게 주로 붙여지는 노동계급의 이름(만)으로 수행될 수 없고, 공통된 삶의 생산자들 모두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다중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일 것이다.(2010.1.1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