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권력자들의 입 TV조선이 ‘탐사보도 세븐’에서 증언자 윤지오를 음해하는 정치적 이유

요점: 1.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밝혔다. 2.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고 문건이라면 장자연의 죽음은 원점에서 재수사되어야 한다. 3. 장자연의 글을 유서라고 보게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이로부터 이익을 편취해온 가해권력자들이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을 시작했다. 4.그럼에도 윤지오는 장자연 죽음의 진실을 직접 국민들께 알리기 위해 책으로, 인터뷰로 증언을 이어갔다. 5.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음해공작이 시작된 후 정치권은 윤지오를 음해하는 세력과 그 음해를 방조하는 세력으로 구분될 뿐이다. 6. 이 음해공작을 깨뜨릴 조직된 저항세력이 없는 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 음해를 향후 총선과 대선의 주요 이슈로 밀고 나갈 것이다. 7. 윤지오의 증언을 지켜서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할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이 절실한 시간이다. 8. 미투시민행동의 페미시국광장은 그 첫걸음일 수 있다.  

  • 2009년 3월 7일 직후의 첫 언론보도(사실은, 조작)로 인해 국민 대다수는 지난 10년간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10일, 노컷 뉴스의 기자 김대오 기자, 조선일보의 기자 박은주가 호야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유장호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이미지가 장자연이 유서를 남겼다는 가짜-이미지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글”이라고 보도했고 박은주는 사망하기 직전 남긴 “장문의 글”(“유서’의 사전적 의미가 바로 죽기 전에 남긴 글이다)이라고 보도했다. 김대오는 제2보에서 그 글이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달라”고 장자연이 부탁해서 보관하고 있었던 글이라는 유장호(‘장자연의 한 측근’)의 말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보도함으로써 그 글이 유서임을 의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장자연의 문건을 실제로 본 경찰, 검찰, 법관은 그것이 유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언론이 대중을 대상으로 꾸며낸 이 가짜 이미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국민으로 하여금 유서라고 오인하게 하는 것이, 또 그 오인을 방치하는 것이 가해권력을 무혐의로 만드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연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가능성은 배제되는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그 죽음에 연루되었을 수 있는 다층다양한 가해권력들이 샅샅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언론권력, 경찰권력, 검찰권력, 사법권력이 계약직 연예노동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국민을 기망하는 연합된 사기권력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알고 있으면서” 국민을 속이는 고의적인 국민 기망의 권력이었다. 이 권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고 통제되지도 않는 권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국민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감시해야 할 것은 이들 권력들이 국민들을 속일 위험이라는 문제이며 국민의 안전이라는 시각에서 그 위험을 통제할 장치를 실제적으로 고안하는 문제다.
  •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이고 그 문건에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일관되게 증언해온 유일한 증언자이다. 시민사회는 몰랐지만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증언조서(문건)라는 것은 법정에서는 공인된 사실이었으며 이상호가 재판과정에 대한 취재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낸 사실이고, 심지어 장자연이 남긴 글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이라고 보도했던 김대오도 [아무런 이유설명도 사과도 없이 말을 바꿔] 인정한 사실이다. 
  • 윤지오의 <13번째 증언>과 언론 인터뷰 이후 한국 국민들 중에 장자연의 글이 문건이 아니라 유서라고 우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 즉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는 것은 장자연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 그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면 장자연이 그 문건을 왜, 어떤 정황 속에서 작성하게 되었는지 명백한 조사가 필요하며 국민들에게 그것들이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왜 국민들이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라고 잘못 알게 되었는지, 왜 국민들이 그토록 장기적인 오해무지 속에 방치되어 왔는지 조사되고 규명되어야 하며 진실을 은폐한 책임자를 찾아내 문책해야 함을 의미한다. 
  • 윤지오의 증언으로 인해 분명해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난 10년여 동안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로 풀어주는 데에 봉사해온 언론, 경찰, 검찰에 의해 기망(欺罔) 당했으며 그 이득을 편취(騙取)한 것은 가해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국민을 대신해서 수사를 맡아온 사람들과 기관들은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는 관점에서 국민들에게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해내야 하며 그 관점에서 범죄행위자를 다시 조사해서 처벌을 해야 한다. 이것이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 및 엄정한 처리를 지시하게 된 조건이다.
  • 윤지오의 증언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증언을 통해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진실을 알리고 처벌을 촉구했다. 그는 2018년 말 조희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증언들에 힘을 실어 실제적 처벌로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2019년 3월에는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 그가 공개적으로 책을 내고 방송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진실을 증언해도 진실이 국민들께 전달되지 않는 것을 10년 내내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가해자를 비호하는 권력기관들에 의해 철저히 기망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론, 경찰, 검찰 당당자들이 사실을(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법정투쟁용 문건, 즉 증언조서임을) 알고 있으면서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숨기고 수사를 부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 처분하는 것을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취급하는 조사/수사기관과 국민 사이의 이 간극 속에서 국민들이 조작된 무지 상태에 방치되고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의 힘으로 장자연 사건이 재조사 대상으로 오른 것(“이슈화”)을 이용하여 허구가 가려버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 그는 이를 위해 2018~9년에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와 별도로 조사나 수사기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국민들께 직접 사실을 널리 알려서 국민으로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지난 10년간 계속된 그의 증언경험을 토대로, 국민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탄핵-파면하고 이어 권력형 성범죄자들을 단죄해온 촛불과 미투의 경험을 자기성찰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슈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해 보지 못했던 것을 영리하게 해 보려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영리한 행동’이라는 계획은 내가 <절대민주주의>(2017)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攝政)’이라고 불러온 것, 즉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절대화하는 삶정치적 운동과 상통하는 구상이다.
  • 일정기간 동안 이 영리한 섭정의 행동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청원행동에 나선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를 수평적으로 조직화한 연합세력이 아니었고 흩어져 있으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역관계에 반응하는 흩어진 개인들이고 언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론적 존재였다. 일부 여성단체들과의 협력이 있었지만 일시적 협력이었고 윤지오는 개인인 증언자로서 움직였다. 
  • 아래로부터의 섭정력이 충분히 자기조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윤지오의 증언행동과 그에 대한 시민연합은 SNS, 유튜브와 같은 기업적 소셜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었다. 녹색당과 같은 원외정당, 정의연대와 같은 일부의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증언을 통해 제기되는 이슈를 사회적 의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윤지오의 증언이 첨예한 것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하고 사회이슈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화 역량이 미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개인으로서 국민청원을 통해 과거사위원회 조사기간 연장을 청원하거나 윤지오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를 요청하거나 경호를 위한 후원금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적 연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안민석을 비롯한 몇몇 국회의원들(이른바 ‘동행모임’)이었다. 지금 수개월에 걸쳐 점점 규모를 키워가며 지속되고 있는 ‘사기꾼 만들기’ 집단음해공작의 강도에서 반증되다시피, 윤지오의 증언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보호가 필요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이 국회의원들이 윤지오에 대한 실질적 보호조치를 했는지, 그 보호조치가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연대력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힘을 발휘했는지는 의문이다. 
  • 안민석이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4월 8일 윤지오 국회초청간담회를 가진 이후 이들은 윤지오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실질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동행모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서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국회의원으로서 플러스가 될 수 있는 ‘공익제보자를 돕는다’는 이미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4월 중순 이후 윤지오에게 실질적인 음해시도가 시작되고 위험이 분명해졌을 때에는 사실상 어떤 보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수수방관했으며 자신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거의 동시에, 윤지오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윤지오를 통해 구독자를 늘렸던 고발뉴스, 뉴스공장 등의 유튜브들도 윤지오에 대한 가해권력측의 공세가 뚜렷해진 4월 말 이후로는 윤지오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 윤지오가 국민의 부름을 받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을 하고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비록 단단하게 자기조직화된 시민들의 지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국민적 여론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지오가 보호자를 자처한 동행자 국회의원들과 연결되자마자 윤지오는 정파투쟁과 정권투쟁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보수 정파와 보수 언론이 빠르게 결집하여 증언자 윤지오를 반(反)정권투쟁의 초점으로 삼기 시작했을 때 동행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신속하게 증언자 윤지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그것이 혹자가 조롱조로 말하듯이 윤지오가, 현 집권세력에게 기대하는 바의 큰 정치이슈를 갖다 주지 못한 탓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윤지오가 제기하는 문제들(조선일보 방씨 일가, 의문사와 타살 가능성, 국정원의 개입, 홍준표, 마약주입과 성폭행 의혹 등)이 현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원칙적으로 다루어 나간다면 현 집권세력 자신도 그 일부로 속해 있는 가부장제 성폭력 질서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무렵 여성주의 이슈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남성 20대의 지지율을 떨어뜨린다는 보고서까지 제출되면서 이것이, 장자연-윤지오를 둘러싼 쟁점에서, 집권세력이 남성 20대 지지율을 높이고 총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물러나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쟁점은 본질적으로 가부장제 성권력 체제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미디어스>의 전혁수 기자가 잘 정리한 것처럼,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에 대한 가해자로 지목되어 지탄 받아온 조선일보는, 윤지오에 대한 성폭력적이고 인권말살적인 융단폭격을 퍼부은지 약 2개월여에 만에, 이제 자신을 (가해자가 아니라) ‘사기꾼 윤지오’를 단죄하고 사기꾼을 방조한 정치인들을 꾸짖는 정의의 언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6월 14일 안민석의 비굴한 페이스북 항복 문서는 이러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한다’는 조선일보의 위력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내고 피해 조력자에게 비겁한 변명을 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정의의 투사처럼 우뚝 세우는 교활한 정치공작술을 통해 다시 한 번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 <탐사보도 세븐> 2019년 7월 19일자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는 이 정치공작술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종합판본이다. SBS의 ‘궁금한 이야기 Y’가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편집노하우를 보여주었다면, ‘탐사보도 세븐’은 <Y>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기초로 집권여당계 정치인들이 윤지오에게 이용당할(“놀아날”) 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집노하우를 보여준다. 10년 동안 경찰과 검찰이,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증언조서)이라는 것을 국민 몰래 알고 있었듯이, 지금 조선일보나 SBS도 국민 몰래 윤지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윤지오를 포함한 83명에 대해 포괄적 조사를 수행했던 과거사진상조사단처럼, 폭넓은 취재력을 통해 팩트를 알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론이 팩트를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팩트를 편집하는 기관이고 진실을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할 진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기관이라는 점에 있다.
  • 교활한 ‘사기꾼’에게 이용당하는 무능한 권력은 존재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통해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세븐>의 기획의도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세븐>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를 집권권력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윤지오를 둘러싼 내기판이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이 무고한 시민이자 장자연 사건의 피해자이고 또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를 총선을 앞두고 정쟁의 볼모로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븐>의  진행자 유오성의 형인 유상범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로 재직할 당시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2017년 7월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되었다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이러한 정치적 배경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여러 요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 ’거짓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윤지오’라는 구호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가해권력들이 이런 정치적 이유에서 만들어낸 날조된 구호이다. 이들은 총선에서의 다수당화와 차기 집권을 위해 이 구호를 향후 수 년 간 밀고 나가려 할 것이다. 젠더 입장에서나 계급 입장에서 여성-계약직-연예-노동자였던 윤지오나 장자연보다는 오히려 가해권력과 더 큰 공통점을 가진 현 집권세력은 윤지오를 방어하고 증언자 윤지오와 함께 고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재수사와 가해자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워나갈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미 이들은 이 사건을 (바둑에서의) ’내준 집’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악영향의 최소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고 장자연 사건을 규명할 힘은 다시 아래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7월 8일 350여개 여성단체들이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미투시민행동)을 조직하고 고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경찰과 검찰의 행태를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서울 광화문에서 ‘페미시국광장’을 무기한 열기로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사적이다. 첫 집회는 7월 12일 저녁 7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렸는데 이들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일보를 적폐언론으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의 폐간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검경 개혁, 여자들이 하자”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이 시작한 싸움에 여성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남자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이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절대민주주의적 섭정론에 따라, 국민에게 제대로 “이용당하는” 정부,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를 원한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정부들이 국민들을 개돼지로 무시하면서 재벌에게, 미국에게, 일본에게 “놀아났다”. 조선일보, 티비조선 같은 가해권력들이 (지금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서 나타나듯이) 그러한 반국민적 매판정부를 창출해 왔고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가 들어서면 그것을 퇴출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라는 비난성 질문은 정부가 국민을 위하지 말고 재벌, 미국, 일본을 위하라는 언론권력의 반동적이고 매판적인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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