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고삐를 쥐다

요점: 6월 15일에 초고를 썼지만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공개하지 않았던 글이다.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국민들을 배반하게 함으로써 국민을 무력하게 만들고 국가권력의 비선실세로 행세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2019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대한민국 권력자들(그 중의 하나가 언론권력인 조선일보 자신이다)의 마녀사냥 놀음을 ‘거짓 증언 논란’으로 부름으로써 5월에 유행했던 ’증언 신빙성 논란’이름을 한 단계 더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든 후, 조선일보는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었던 9인의 국회의원과 청와대를 그 거짓의 방조자, 협력자로 고발하는 정치공세에 나서고 있다. 6월 14일자로 나온 몇 개의 기사제목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일보가 지금도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권력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경기지방경찰청장을 협박했던 그 조선일보가 이제 국회의원을 무릎 꿇리고 청와대를 질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거꾸로 서있다. 제 대로 된 나라라면 그 나라를 구성하는 나랏사람들이 주인이어야지 사기업체가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주권이 나랏사람들로부터 나와야지 사기업체에서 나오면 안 된다. 국민들이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해야지 일개 사기업체의 신문이 그런 짓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하고 퇴출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변호사 직함을 가진 자유한국당 소속인 박민석, 강연재, 그리고 조선일보의 친구인 최누리, 그리고 사법행동에서 이들과 공조하고 있는 ‘사회주의자’ 박훈 등이 고소고발로 윤지오를 짓밟아 그가 들고 있던 증언 촛불의 마지막 불씨까지 구둣발로 비벼끄고 나면, 그리하여 지금은 “거짓 증언자”로 부르는 윤지오를 “사기꾼 윤지오”로 명확히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면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언론권력으로, 공식 체계 바깥에서 공식적 대의권력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秘線實勢)의 권력으로 우뚝 서게 되지 않겠는가?

대체 어떻게 이러한 헌법유린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어떻게 나랏사람들의 주권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고 비선(秘線)의 의제된 주권이 들어서는 것일까? 여러가지 조건과 이유가 작용하고 있겠지만 국회의원 안민석이 2019년 6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조선일보는 이 글을 “궁색한 사과문”이라고 부른다. 누구에 대한 사과문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 속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안민석입니다.

우리 사회의 큰 잘못이었던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증언자로 자처한 윤지오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선한 의도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그분들은 저의 제안으로 선한 뜻으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습니다.

윤지오 증인 국회 간담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이후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윤지오 출판기념회는 성직자 한분께서 선의로 도와 달라고 요청하셔서 제가 도와 준것이니 다른 국회의원들과는 상관없음을 밝힙니다.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보 기사를 쓴 기자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윤지오 증인을 도운 것이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평소 공익제보자는 보호되야 한다는 믿음이고 노승일 부장 박창진 사무장 박관천 경정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서로 도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피해를 걱정해서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것입니다. 정치인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의정활동 하겠습니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지오가 “증언자로 자처”했는가? 아니다. 윤지오를 증언자로 불러들인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대의하는 정부(법무부)였고 직접적으로는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 이후 국민의 이 부름에 응한 후, 윤지오가 자신이 “유일한 증언자”로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증언, 즉 진실말하기에 나서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유감과 안타까움을 함축한 것이었다. 함께 진실을 말하자는 제안을 담은 것이었다. 안민석은 윤지오가 마치 스스로 “증언자”로 나선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증언자로 자처하고 신변위협을 과장해 국민을 기망한 사기꾼”으로 몰아 붙이는 가해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어 안민석은 곧장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의 “난처한 입장”에 관심을 돌린다. 그러면서도 지금 가해권력자들의 유도(誘導)에 따라 수천수만의 군중들의 손가락질과 욕설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죽은 장자연과 성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 노예계약에 시달리는 연예노동자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개돼지로 학대당하는 국민들을 대표하여 촛불증언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증언자 윤지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짐짓 스스로 윤리적인 체하며 핏발선 눈으로 사람들은 외친다. ’허언증 환자’, ’사기꾼’, ‘탕녀’는 감옥으로, 라고.  로마권력자들의 눈에는 예수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계속 주장하는 ‘허언증 환자’, ‘미친 사람’이었고 천국이라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기망”하여 주변에 불러 모으는 “사기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했는가?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조차 예수를 비난했다. 

왜 십자가의 역사가 교훈이 되지 않고 동일하게 반복될까? 왜 안민석은 “증언자 윤지오”와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지금은 윤지오를, “선한 의도”로 그를 도우려 했던 의원들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는 마치 악한 의도를 가진 말썽꾸러기처럼 묘사하는가? 동행하겠다는 약속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그리고 재판도 열리기 전에 왜 안민석은 가해자들의 안내를 받아 군중이 윤지오에게 덧씌운 범죄자 혐의를 사실로서 묵인해 버리는가? 윤지오의 증언이 어느 것 하나 진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조작되어온 가짜진실을 바로 잡아온 상황에서 왜 그 증언, 공익제보를 외면하는가? 왜 안민석은 “촛불국민이 부른 윤지오”의 증언을 배신하는 유다의 길을 선택하는가? 

물론 안민석도 “모두 제탓”이라고 하며 십자가를 짊어진다. 그 십자가가 누구의 십자가인가? 국민의 십자가인가? 촛불국민의 십자가인가? 아니다. 동료 국회의원들을 위한 십자가일 뿐이다. 여야 가릴 것 없는 동업자 국회의원들의 십자가일 뿐이다. 안민석은 말한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윤지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하는 동안 국회의원들은 무얼 했는가?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혔는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수 있도록 가해자들을 찾아냈는가? 안민석은 윤지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지오와의 동행을 약속한 국회의원들이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국회의원의 동행 방식인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손놓고 있을 때 국민이고 증언자인 윤지오는 국정감사보다 살벌하고 청문회보다 더 가혹한 신상털이를 당하고 있었다. 오직 힘 없는 네티즌들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국민과 증언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선의를 표현하는 방식인가? 물에 빠진 자가 살려달라고 외치며 손을 뻗어 구조를 요청하지 않을 때는 방관하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윤리학인가? 그 윤리학이,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구조요청이 들려오지 않는다고 손놓고 있었던 해경의 방관과 무엇이 다른가? 촛불국민, 미투여성, 윤지오가 탄 증언의 세월호가 마녀사냥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있는 지금 그 배에 동행을 약속했던 국회의원 안민석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떠한가?  해경123정을 타고 기관원들(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친 세월호의 선장의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

안민석은 말한다. 나의 동료 국회의원들은 윤지오와 “상관없”다고.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다.”라고. 나의 몸은 “나병”에 옮지 않은 깨끗한 몸이라고. ….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이 사정의 말은 누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촛불국민들에게 하는 말인가? 미투여성들에게 하는 말인가? 증언자 윤지오에게 하는 말인가?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공익제보자들에게 하는 말인가?

국민들은 ‘나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안민석의 당부의 말이 촛불국민, 미투여성, 증언자 윤지오, 공익제보자 들보다는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자들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말임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또 국민들은 안민석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권력자들 앞에서 무릎꿇고 비는 모습에 상황판단이 흐려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어서 앞으로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그 손이 공익제보자들을 결정적으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겪고도, 모를 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대인공격을 통해 그 대표들이 국민을 배반하고 자신들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비선실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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