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영상클립들의 두 가지 목적과 세 가지 목표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2)

요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동영상 계정주들의 사업들이 경제적 이득을 거두려는 목적과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운영되는데,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세 개의 목표가 있다. 1)댓글러들로 하여금 디지털 성폭력을 행하게 함으로써 성폭력 체제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것, 2)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인 장자연 사건을 덮는 것, 3)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로 증언자 윤지오를 지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여 성폭력 체제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것.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임의의 라이브영상들의 클립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그 영상들 속의 등장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영상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인물의 여러 장면들인지 아니면 여러 인물들의 여러 장면들인지 알지 못한다. 또 만약 그것들이 한 인물로 수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증언자 윤지오”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윤지오의 증언이 갖는 흐름의 일관성과 신빙성에 어떤 의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라이브영상 클립들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등은 적어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장자연 사건에 관한 증언의 일관성과 신빙성은 일차적으로는 진술조서들의 일관성, 다른 여러 진술자들의 진술과의 교차, 남겨진 증거물들과의 조회 등을 중심으로 검증하는 것이 맞고 필요하다면 당대의 사회구성이나 정치구성과의 관련 속에서 판단할 문제이지 직업적 이유나 취미상의 이유를 갖고 한 라이브 방송의 장면들에 조회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 클립들 속의 등장인물의 직업이 엘리트직종인가 평범한 직종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학력이 높은가 낮은가, 영어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맞춤법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도덕성이 고매한가 저속한가, 인성이 좋은가 나쁜가, 성격이 까칠한가 부드러운가  따위는 증언을 검증하는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증언에 대한 검증을 증인에 대한 검증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박준영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인종주의적 검증관만이 그런 몰상식을 허용한다. 만약 동영상클립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증언에서도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추론하여 전자를 후자의 근거로 삼는다면 변호사, 정치가, 성직자는 원천적으로 증언에 부적격한 인종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세 직업은 거짓말로 먹고 사는 직업군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직업상 웃는 사람이 집에 오면 좀체 웃지 않듯이, 거짓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직벙외의 영역에서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좀더 근본적인 것으로는 로버트 펠드먼의 연구가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진실은 “우리 모두가 10분에 세 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해 본 적이 없어”라는 말이라는 지적도 상통하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들에 따르면 인류 자체의 증언이 신빙성을 잃어버리므로 증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거짓말쟁이라는 말하려는 게 아니라 증언에 대한 검증은 증인에 대한 검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이 영상 클립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윤지오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일까? 그러한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구독자나 팔로워를 불러 모으기 위한 것, 즉 자신의 계정을 홍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경제적 동기일 수 있을 것이다. 광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이들에게 주어질 모종의 댓가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 계정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사업”인 셈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사업이 거두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이다. 이것은 이 사업의 두 번째 목적을 구성한다. 우리는 이 이 두 번째 목적 속에 다시 두 가지 목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측면의 목표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화, 다르게 표현해서 강간문화와 강간연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들의 영상클립들에 등장하는 것은 한 사람의 “여성”이다. 이 여성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구독자나 팔로워들이 무엇을 하는가? 그 여성을 훔쳐보고 조롱하며 짓밟는 것이다. 훔쳐보면서 관음적 만족을 취하고, 조롱하면서 자기기만과 위선에 들뜨고, 짓밟으면서 성폭력의 쾌감을 향유한다. 그러면서 그 영상의 제작자(나 유통자)에게 지지한다, 응원한다, 존경한다고 찬사를 던지고 ‘한 번만 더, 조금만 더’ 식으로 갈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강간문화와 강간연대가 남성에 의해 주도되고 되고 있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이지만 그 참여자가 남성만인 것은 아니다. 남성권력의 노예임을 받아들이거나 “나는 다르다, 혹은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적극적 참여자인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는 억압과 동의로 구성된 헤게모니 질서로서 남성 폭력을 배후에 깔고 있는 점에서는 억압적 질서이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여성들의 협조 위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동의의 질서다.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은 남성권력에 유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게는 사활이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가사노동을 하는 무상수탈에 의존해 왔고 또 노동 전반의 가사노동화와 여성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인지자본주의는 여성노동을 저비용으로 이용함으로서 착취율을 높이지 않고는 존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여성을 별개의 인종으로, 또 이렇게 인종화된 특수계급으로 차별하는 성차별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축적의 핵심적 메커니즘이다. 

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목표 외에 2009년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목표가 있다. 물론 이 목표는, 장자연의 죽음 자체가 앞서 말한 성차별주의와 성폭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사건을 은폐하고 덮어버리려는 것은 성차별과 성폭력의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첫번째의 장기적 목표의 달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들이 지금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고 그의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려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장기적 목표와는 구별성을 가지며 거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 그 영상들 속에 미시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무엇일까? 그것은 임의 편집된 라이브방송 클립들의 등장인물들과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를 동일한 것처럼 혼동시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지각적 착시 때문에 발생하고(이에 대해서는 나의 글 “‘숨어살던’ 시기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지각적 착시에 대해”(http://amelano.net/?p=967)를 참조하라.)  다른 한편에서는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정체성 혼동은 중요한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다. 윤지오는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까지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얼굴도 실명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데 계정주들은 이 클립 영상들이 그 10년 동안에 촬영된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정들은 클립 영상 속의 인물과 증언자 윤지오가 동일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즉 증언자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이 거짓말이면 증언도 거짓말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억지 논리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증언자 윤지오가 10년 동안 대중에게 얼굴을 보여주지도 이름을 밝히지도 못하고 숨어서 살았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2019년 3월 4일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 전의 TV 탐사 프로그램(예컨대 PD수첩의 ‘고 장자연’)이나 JTBC 전화 인터뷰 같은 데에서 혹은 다른 자리에서 증언을 할 때에는 ‘이순자’라거나 ‘김지연’ 같은 가명으로 혹은 이름 없이 성만으로, 혹은 기호화된 이름으로 얼굴과 실명을 가리고 나오는 증언자 윤지오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제작된 모든 프로그램들에서 윤지오는 얼굴을 뿌옇게 블러 처리하지도 않으며 이름을 숨기지도 않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숨어 살았음’을 입증하기 위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한가? 

클립에 등장하는 그 “여성”은 춤을 추거나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거나 혹은 또 다른 동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지는 않다. 그 디지털 여성의 정체성은 (설령 생물학적으로 동일인의 영상인 경우라고 가정할지라도) “증언자 윤지오”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다. 영상클립들의 등장인물이, 얼굴을 공개하고 이름을 공개하여 지금 윤지오로 살고 있는 인물과 형태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인물로 지각되므로, “증언자 윤지오”는 숨어 산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동안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살았다고 자꾸 생각되는 사람들이 혹시 있다면, 자신의 지각능력과 사유능력에 대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게 두 개의 정체성을 고의적으로 혼동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거나, 한 자리 할 수 있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병리학적 문제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당신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가해권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고의적 혼동에 동참하고 있다면 자신이 가해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인격과 지성과 양심을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지, 그러한 자기매매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디지털 영상물의 세 번째 목표가 있다. 그것은 증언자 윤지오와 공공연히 활동하는 영상 클립 속 인물의 동일시를 통해 그 동안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과는 다른 목표이다. 양자의 정체성 혼동=동일시가 ‘거짓말한다’는 이미지를 낳기 위한 조작이라면 이 세 번째 목표는, 두 번째의 동일시에 기초하여, 영상 클립 속 여성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손가락질함으로써 구독자/팔로워들로 하여금 증언자 윤지오를 손가락질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가 말하듯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성폭력을 당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지만 더 큰 고통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탄과 그 지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한자로 指彈으로 쓰는 우리말 지탄은 글자 그대로 손가락-탄환이라는 뜻이다. 포탄이나 총탄이나 지탄이나 탄환인 한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강간동맹체들에 의해 주도되는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에서는 가해자들보다 피해자들이 늘 지탄의 표적으로 대두되곤 한다. 그리고 죽게 되는 것도 이상하게 대부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 장자연이 이 어처구니 없는 체제의 희생제물이었다는 것에 재론의 여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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