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납 강요”는 ‘성폭행’을 의미한다(1)

글 머리에: 현대 자본주의에서 매매, 접대, 상납

‘성접대’나 ‘성상납’이라는 말은 좀 아리송한 용어들이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의미가 애매한데도 관행처럼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고 심지어 법률전문가들도 이런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접대’는 손님을 맞아 뭔가 시중을 드는 행위이며  ‘상납’은  윗사람에게 뭔가를 바치는 행위이다. 둘 다 시중을 든다거나 바친다거나 하는 어떤 ‘모심’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손님’이 반드시 ‘윗사람’은 아니다. 손님은 외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므로 수평적 관계의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납은 반드시 수직적 의미의 윗사람을 전제한다. 윗사람의 으뜸은 역사적으로 늘 사회 위에 옹립된 가상의 공동체인 국가, 그리고 국가의 관료들이었다. 즉 권력자들이 윗사람으로 행세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가는 곳에 늘 상납이 따라다녔다. 

‘접대’나 ‘상납’이라는 말 앞에 ‘성’이라는 말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가부장 체제에서 남성이 접대나 상납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아주 드물 것이다. 대개는 여성이 접대나 상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성접대나 성상납이란 여성접대, 여성상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나는 접대나 상납의 목적어로 ‘뭔가’라는 말을 사용했다. 역사에서 그 뭔가의 ‘무엇’은 대체로 돈이나 재물이나 노동력이었다. 여성은 이 중 어디에 속한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여성이 돈(교환수단)이고 재물이며 노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이 이처럼 본디 다면적이어서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접대나 상납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그 체제의 수단으로 다면적으로 활용했는지 나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인간이기보다 돈, 소유물, 노동력으로 파악하는 인종차별주의적 관점과 관행을 유지해왔고 또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접대 당하고 상납 당하면서 여성은 학대(虐待)를 경험해 왔다. 

이미 ‘당하다’라는 수동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듯이 성접대나 성상납의 주체가 여성 자신인 경우는 드물었다. 누가 접대나 상납의 제물로 되기를 원하겠는가?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를 소설화한 <심청전>의 주인공 여성 심청이 인당수(의 용왕)에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공양미 삼백석이 필요해서였다. 눈이 먼 아버지의 욕망으로 인해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운명’이 심청에게 강요되었다.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이 운명을 자발적 ‘효’의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고 심미화한 것이 <심청전>이라고 좀 쓴 소리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충’이 ‘효’의 국가 버전인 것처럼 ‘효’는 ‘충’의 가족 버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충효는 가부장적 상납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청의 몸이 인당수의 용왕에게 ‘상납’되기 전에 심청은 뱃사람들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자신의 몸을 이미 팔았다. 즉 공희(供犧)=상납 전에 이미 인신이 매매된 것이다. 심청은 몸과 바꾼 삼백석의 쌀을 모두 절(부처님)에 ‘상납’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심청에게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용왕에게 심청의 몸을 ‘상납’한 것은 심청이 아니라 항해의 안전을 바랐던 뱃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아버지, 부처님, 용왕은 모두 상납을 받는 존재들로 나타난다. 

여기서 심청의 몸을 둘러싼 일련 행위연관들이 상납 과정에 대한 우화적 표현이라고 말한다면 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독해가 우리가 심청전에 대해 갖고 있는 심미감을 깨뜨릴 수 있으며 심지어는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든 심청전에 인신매매와 인신상납의 테마가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심미화, 도덕화, 정당화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읽힌 심청전이 21세기 현대에도 중요한 것은 인신매매와 인신상납이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이 되고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팖’이 ‘매춘(賣春)’여성만이 겪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인 것은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결혼한 여성도, 남성도 누군가에게 몸을 팔지 않고는(즉 ‘매춘’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풀 艸와 날/해 日이 결합되어 ‘봄’을 의미하는 春은 생장력, 에너지, 잠재력, 노동력을 의미하고 그것을 노동으로 현실화하여 그 잉여가치를 이윤형태로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팔아야 하는 그 ‘누군가’가 인격형태을 취하는가 비인격적 알고리즘의 형태를 취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그 누군가가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자영의 경우). 소수의 자본가조차도 자본을 관리하는 자본의 하인으로서 살아간다. ‘나는 매춘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보편적 매춘사회인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을 팔아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내부에서 차별하고 이간시키는 관념이다. 우리 오늘날 누구나 매춘한다고 말함으로써 성별과 인종을 넘는 우리의 공동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낡은 인신매매를 종식시킨 사회가 아니라 과거에 강제적이었던 인신매매를 경제적 계약형식으로 혁신하여 보편화한 사회이다. 우리가 임금, 급료, 연봉 등의 말로 부르면서 서로 키재기를 하는 이 말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신대금, 몸값임을 누가 모르는가? 다만 우리가 너무 비참해질까봐 애써 감추거나 서로 감춰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혹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자신의 낡은 정체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숨기려 해서든가. 렌트, 지대, 수수료, 로열티, 뇌물, 세금 등은 어떨까?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독점이나 권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합법화되었는가 불법에 머무르고 있는가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납의 범주들에 가깝다. 

구조적 강요의 지평

요컨대 우리는 모두 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신매매나 인신상납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서로 유리되어 있고 그 개개인들이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공동의 수단들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이 구조적 강요의 조건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토지, 화폐, 자본, 기계, 기술, 통신망, 통치기구, 법체계, 학교, 미디어 등등이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수단인데 그 대부분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소수나 국제자본가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대의체계는 생명개체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생명의 실존을 타자에게 위임하는 태도, 관습, 문화, 사고법, 정당화체계를 대규모로 재생산한다. 그것이 낳는 결과는 뿔뿔이 흩어진 신자유주의적 개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이 구조적 강요를 강요로서 느끼지 못하며 우리 스스로가 계약에 따라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장자연이 문건과는 별개의 편지형식의 글 머리에서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라고 쓸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별과 직업을 떠나 누구나가 겪고 있는 이 구조적 강요에 대한 고발일까?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그 고발은 누구나가 겪고 있는 학대 체험들의 연합을 제안하고 구조적 강요의 문제를 철폐하는 행동(사람들은 이것을 사회혁명이라고 부른다)을 촉구하는 격문(檄文)이었을 것이다. 장자연의 고발에 이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촛불혁명을 이끌어낸 다중들이 고 장자연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 문구의 이 격문적 측면 때문이다. 우리가 고 장자연 사건을 가해권력자 대(vs.) 다중의 적대 구도 속에서 발생하게 되는 필연적 사건 중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도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가 갖는 저 적대성의 깊이와 보편성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성상납을 했습니다’와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의 차이는 누가 왜 지우나?

그런데 구조적 강요의 지평은 “성상납을 했습니다”와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가 잘 구분되지 않는 근원적 지평이다. 왜냐하면 성상납을 강요당한 것이 구조적 강요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상납을 했습니다.”도 구조적 강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지오가 누차 강조해서 말하듯이 “성상납을 했습니다.”는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와 같은 뜻이 아니다. 전자는 상납의 댓가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쌍방성을 함축하지만 후자는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교환성을 함축하지만 후자는 폭력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윤지오가 증언에서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보자. 내가 읽고 들은 범위 속에서 윤지오는 이 둘의 차이에 대해 적어도 두 번 이상 언급한다. 

한 번은 2010년 6월 25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증인신문조서에서 판사의 질문에 답하면서이다.

문: 문서에 사람별로 피해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피해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성함과 성상납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있었고, 어떠한 장에는 성함만 기재되어 있으면서 어떠한 언론사에 누구, 어디 무슨 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

문: 성상납과 관련하여서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나요.

답: 성상납을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성상납강요를받았다는 것입니다.

문: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는 것은 장자연의 피해사실에만 적혀 있었나요 아니면 송00나 이00의 피해사실에도 적혀 있었나요.

답: 송00이나 이00은 앞부분에 명시되어 있었고 뒷부분에 이름만 쭉 나열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 송00나 이00에 대해서 적혀 있었던 것은 어떠한 내용이었나요

답: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송00나 이00의 이름이 적혀 있는 페이지에는 성상납 관련 이야기는 없었나요.

답: 예 다른 페이지에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진행되는 문답에서 윤지오는 두 가지를 분명히 밝힌다. 하나는 피해사실과는 별도로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고 성함(이름)이 나열된 글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상납을 했다’고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윤지오는 증인신문 시의 판사가 애매하게 흐리고 있는 ‘성상납 관련’이라는 말을 바로 잡으면서까지 ‘성상납을 했다’가 아니라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가 자신이 본 정확한 문구였음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또 다른 한 번이 있다. 그것은 “성상납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름으로 잘못 붙여진) 고 장자연 사건은 ‘성상납 사건’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자신의 적극적 해석을 덧붙인   2019년 3월 19일 ‘오늘밤 김제동: 목격자 윤지오 검찰에 묻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56SyXa50I) 프로그램에서다. 이 프로그램에서 윤지오가 김제동과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면서 내놓은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지금까지 피해자 입장에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 가해자에 대한 수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만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 [경찰과 검찰은] 가해자를 규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 장자연 씨가 쓴 문구는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이지 “성상납을 했습니다”가 아니다.
  • 나는 경찰에서 일관되게 이렇게 말해 왔다.
  • 장자연 씨는 성상납을 할 분이 아니다.
  • 장자연 씨가 자의로 성상납을 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의해 타의로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 언론보도에서 ‘성상납’ 사건이라고 쓰고 또 그렇게 알려지게 된 것은 언론이 장자연 씨에 대해 2차 가해를 한 것이다.
  • 장자연 씨가 겪은 것은 강요에 의한 성폭행이었다.
  • 그것은 물질적 거래나 동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 문건에는 “협박 당했다”, “강요 당했다”는 핵심적 두 줄이 있는데 왜 이 “협박”과 “강요”에 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프로그램에서 김제동은 윤지오 씨 이야기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면 그것은 “성상납” 사건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이다. 여기에 꼭 한 마디를 덧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성상납 강요’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단순한 성폭력 사건이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자연 리스트는 ‘권력형 성폭행’ 리스트가 되며 ‘성범죄 혐의자들’의 리스트가 된다. 가해자들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무엇보다도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지우려고 하는 동기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이 없다면 윤지오가 말하듯, 그 리스트가 ‘같이 밥을 먹은 사람들의 리스트인지 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리스트인지’ 그 성격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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