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권력과 가해자중심주의의논리: 조0천 강제추행 사건에 대한 오덕식 판사의 판결에 대해(3)

오덕식 판결에서 가해자중심주의 관점

오덕식은 2008년 8월 5일에 청담동 가라오케에서 강제추행 사건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세 가지 근거를 드는데, 그 중의 하나가 피고인 조0천, 소속사 대표 김종승, 그리고 투자자 변0호가 모두 강제추행이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술 신빙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이다. 왜 이렇게 퇴행하는 판결을 내렸던 것일까? 

조0천은 윤지오에 의해 가해당사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그 인물이 강제추행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당연히 스스로에게 이익이 된다. 다른 두 사람은 어떨까? 앞에 인용한 2009년 윤지오의 진술을 살펴보면 이들은 “술테이블에 자연이 언니가 올라가서 춤을 출 때 밑에 앉아 있는 김종승과 손님들이 자연이 언니가 마침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밑에서 치마속 팬티를 보는 경우도 있었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오덕식의 생각과는 달리 조0천과 한패이며 성추행에 공동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에 속한다.  

이들이 강제추행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에게 명백히 이득이 되는 진술이다. 그러므로 이 세 사람의 진술은 이득을 위한 진술이지 진실을 위한 진술일 수 없고 마땅히 배척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실과 정의에 선 판사라면 이 강제추행에 동조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이득과 무관한 윤지오의 진술만을 진실증거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 오덕식은 “윤씨 진술만으로 피고인을 형사 처벌할 정도로 공소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여 유일한 진실증거를 회피한다. 오덕식의 논리대로라면 대부분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피해자 진술 외에는 증거를 확보하기 힘든 성폭력 사건들이 “형사 처벌할 정도로 공소사실이 입증”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성폭력은 대부분 범죄로 구성될 수 없게 될 것이다. 전형적으로 남성중심적이며 가해자중심적인 논리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따져야 할 순간에 두 가지 진술들(그 중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것은 진실이다)의 수를 셈하며 어느 쪽이 수가 많은지 비교하고 있는 판사가 오덕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백히 신빙성이 없고 거짓일 가능성이 많은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수가 많다고 하여 그쪽의 손을 들어준다.

두 번째로 드는 근거는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없는 근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너무나 역력하다. “당시 술자리는 접대 자리가 아니라 생일 축하 자리였고 피고인이 조선일보 기자와 총선 출마자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같이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가운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피고인이 이런 사람을 처음 소개 받는 자리에서 주의를 기울였을 것으로 보여진다.”가 그것이다. 조0천의 변호사가 했다면 딱 맞을 말을 판사가 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가운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는 사실과도 다르다. 동석한 두 사람 중에서 더콘텐츠의 대표 김종승은, 전직 조선일보 기자에 2003년 총선에서 덕양구에서 유시민과 맞붙은 적이 있고 2007년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으며 부인이 현역 검사였던 조0천과 거의 같은 또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서 보더라도 열위(劣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조0천은 건방졌고 김종승은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는 진술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변0호는 나이는 10살 정도 더 많지만 투자회사 대표로서 권력을 조0천보다 더 많이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그 자리가 조0천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환경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장되고 왜곡된 추정을 덧붙임으로써 오덕식은 강제추행이 있었을 리 없다는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드러내놓고 판결 근거로 삽입한다. 이것은 좀더 노골적으로 가해자를 편드는 방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세 번째로 드는 근거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내용은 “윤씨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고인의) 소속사 대표는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고, 고인과 친밀한 행동을 했으며, 고인이 술도 따르지 않도록 관리했다고 한다”면서 “그렇다면 공개된 장소에서 추행이 벌어졌다면 최소한 피고인이 강한 항의를 받았어야 하는데 한 시간 이상 자리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오덕식 판사가 갖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이 겹겹의 몰지각, 오인,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내가 막막할 지경이다. 고인에 대한 김종승의 “친밀한 행동”이란 위계와 위력을 이용한 상습적 성추행이거나 손님들 앞에서 하는 보여주기식 쇼였다. 또 김종승이 “술을 따르지 않도록 관리한 것”을 반드시 장자연에 대한 대표로서의 책임감이나 소속사 배우들에 대한 보호심의 표현으로 보기도 어렵다. 김종승은 수시로 장자연과 소속사 배우들에게 폭언, 협박, 구타를 자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윤지오는 2019년의 여러 증언에서 “술을 따르지 않도록 관리한 것”이 실은 ‘술잔이 섞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방법’이었을 수 있음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마약이 든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후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진술이 그것이다. 어떤 술잔에는 마약이 들어있고 어떤 술잔에는 마약이 들어 있지 않다면 ‘술잔에 대한 계획적 관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여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추행이 있었다면 항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오덕식의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2009년 3월 19일 윤지오의 답이 있다.

문: 장자연이가 테이블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 머니000 대표 홍0근[실제로는 조0천]이가 장자연에게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요?

답: 자연이 언니가 테이블에서 원피스를 입은 상태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 사람들이 밑에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문사 홍0근 대표[실제로는 조0천]가 손목을 잡고 끌어 당겨 자기 무릎에 앉힌 상태에서 양손을 원피스 치마 속으로 집어 넣어 허00와 음0를 만지자 자연이 언니가 몸부림을 치면서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다시 오른 손으로 원피스 곁으로 가슴을 만지어 자연이 언니가 일어나면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문: 그렇다면 그런 행동을 보고 김종승, 변0호는 가만히 있었는가요.

답: 말리거나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이 나고, 그 이후에도 다시 흥겹게 노래도 부르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말리거나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강제추행이 없었다는 증거로 될 수 없다. 권력과 위력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 순진무구한 사람이거나 그 자신이 권력과 위력에 속해 있어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반응을 유도하는지를 느낄 수 없는 사람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윤지오는 강제추행이 있었지만 말리거나 다른 행동 없이 그 후에도 “흥겹게 노래도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은 김학의와 윤중천의 관계에서처럼 세 사람이 그 술판을 공동으로 즐기는 공모적 관계에 있다고 보면 모순이기는커녕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오덕식은 이제, 만약 그렇다면 당사자인 장자연이나 동료 배우인 윤지오는 왜 항의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 “최소한 피고인이 강한 항의를 받았어야 하는데”라는 모호한 표현을 통해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말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오덕식은 ‘피해자가 피해자다워야 피해자다’라는 낡은 (즉 너무나 많은 비판을 받아 떳떳하게 내세우기가 어려운) 피해자다움의 요구를 에둘러서 표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제추행을 당했으면서 항의하지 않았다면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정확히 안희정 사건 1심 판결의 조병구의 관점이 그것이었다. 이 관점은 장자연이나 윤지오가 김종승이 대표로 있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1억의 위약금과 그 이상의 까다로운 조건으로 묶여 있었고 세 사람의 ‘힘 센'(장자연)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권력형 혹은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덕식은 이상과 같이 부당하고 오도된 방식으로 강제추행에 대한 의심을 표명한 후 마지막 한 방울의 논리적 여지까지 닦아내겠다는 투로, ‘강제추행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윤지오의 진술이 혐의를 입증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가 드는 논거는 가해자 중심으로 구축된 자신의 주관적 가정을 실제 과정에 투사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문제다”라는 논법. 그 논법은 이렇게 표현되었다. “면전에서 조0천의 추행 장면을 목격했다면 7개월 뒤 조사에서 가해자를 정확히 특정하지는 못했더라도 ‘일행 중 처음 보는 가장 젊고 키 큰 사람’ 정도로 지목할 수는 있었을 것인데 기자들의 보도를 추측해 50대 사장이 추행했다고 진술한 것에는 문제가 있다.” 

상식적으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제기다. 일행중 처음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윤지오로서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나머지 두 사람인 김종승과 변0호는 여러 차례 만난 바 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한 사람뿐이다. 문제는 그가 누구인가이다. 그 사람이 밤늦은 가라오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가장 젊었는지 어땠는지를 기억해야만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인가? 윤지오는 사건 7개월 뒤인  3월 15일에는 50대 초반, 18일에는 40대 중반으로 나이를 짚었다. 18일 진술 기준으로 조0천의 실제 나이와는 불과 몇 살 차이다. 

또 앉아서 술 마시다가 드물게 일어나 춤추는 자리에서 키가 크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 키재기를 하는 시간이라도 가졌어야 한다는 말일까? 게다가 윤지오의 키가 173cm라고 하는데 하이힐을 신었다면 윤지오의 눈 높이가 조0천보다 더 높아 조0천의 키가 작게 보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판사 오덕식의 판결논리는 최면수사를 하면서 가해자가 신었던 구두의 모양과 색깔 따위를 묻고서는 각성수사에서 했던 말과 달랐다고 참고인을 다그쳤던 수사관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오덕식은 왜 초기수사에서 경찰이 윤지오에게 조0천의 실물이나 동영상을 보여주지 않고 심지어 사진조차 보여주지 않았는지라는 핵심 문제를 회피하면서 윤지오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불충분한 기억을 의심의 도마에 올리고 그것을 증언 신빙성에 대한 의심으로 확대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이 가해자를 숨기고 보호하려는 남성주의적이고 권력카르텔적인 연대의식이 없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2019년 8월 22일 조선일보, 중앙일보를 비롯한 상당수의 언론은 “윤지오 진술 신빙성 없어”(중앙일보), “윤지오 진술 신빙성 떨어져”(조선일보, 동아일보), “윤지오 진술 의문”(SBS) 등의 타이틀로 판결 결과를 요란스레 보도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한 오덕식의 판결의 정체가 뚜렷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덕식의 판결은 윤지오 진술 신빙성을 떨어뜨려온 4월 중순 이후의 일련의 윤지오 음해공작의 연장선 상에 있다. 뉴시스-박훈.김대오.김수민-SBS.조선일보(TV)-오덕식. 그리고 그 방법은 가해자의 관점에서 가해자와 사법 판결로 연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이 이 가해자 연대망의 일부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보도역사를 보아 충분히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연대망은 유일하게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술해온 윤지오의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려’ ‘없애는’ 것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온 효과가 무엇일까?

무죄가 1심 판결이므로 아직 진실을 다툴 기회는 더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성단체는 검찰에게 항소하라고 요구한다. 만약 검찰이 항소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정체를 충분히 의심받고 있는 검찰이 가해권력의 일부임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사건이 될 것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발전된다면 법이 정의의 기관이 아니라 남성권력카르텔을 사수하는 가해의 기관임이 드러나는 것일 터이고 그렇다면 남는 것은 “법 위의 법”(윤지오), 즉 시민들의 직접행동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법개혁을 위한 언어적 청원행동으로 나아갈지, 더 물리적인 직접적 제헌행동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의 분노 지수는 높아지고 있고 지하로 흐르는 그것의 폭발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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