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테크로서의 ‘증여’?

최나리변호사의 ‘증여의의사표시취소로인한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에대한비판(3)

이에 비춰보면 윤지오가 신변위협을 과장하여 기망행위를 했다는 고소장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이후에 명백히 확인되는 것은 가해권력이 벌인 거대하고 집중적이며 스펙타클적인 ‘기망’ 작전이기 때문이다. 이 작전이 국민들을 밑도 끝도 없는 거짓의 수렁 속에서 방황하도록 만들면서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를 무참할 정도로 짓밟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태를 모르는 철없음 때문일까? 아니면 눈 뜬 사람 코를 베려는 야욕 때문일까? 변호사 최나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원고들은 피고의 위의 기망행위를 신뢰하여 ‘피고의 신변보호와 증인들에 대한 지원 등을 목적으로’ 피고의 신한은행 계좌에 후원금을 지급하였는 바, 그 금액은 적게는 1,000원에서부터 많게는 150,000원에 이르며 총 10,231,042원에 이르는 금액을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가 후원을 독려할 당시 밝힌 사용목적은 허위이거나 극히 과장되어 있으며,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고들은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하여 각 후원금에 상응하는 경제적 손해를 입었으며 피고의 진실성을 믿고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였던 선의가 짓밟히는 등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에 대하여는, 원고들과 피고의 관계, 이 사건 피고가 수많은 언론플레이를 하며 공신력을 쌓은 후 이 사건 기망을 하였던 점, 이에 대한 피고의 책임의 정도, 이로 인하여 원고들이 앞으로 선한 의도의 기부나 후원활동이 위축되어질 것이 염려될 정도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실 등 제반사정을 참작하여 볼 때 그 액수는 20,000,000원이 상당하다 할 것입니다. 이에 피고는 원고들에 대하여 경제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금으로 10,231,042원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로 20,000,000원 즉 총 30,231,042원을 배상하여야 할 것이며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2%의 비율로 인한 지연이자를 지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고들이 4월 23일 이전에 윤지오의 신변보호 등을 목적으로 후원한 돈은 증여(贈與, gift)로 볼 수 있다. 증여는 법률적으로는 ‘일방(一方)의 당사자(贈與者)가 자기 재산을 무상으로 상대방에게 준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수증자가 이것을 수락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민법 554조)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증여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미 이행되었다. 이미 이행된 증여에 대해 증여[계약]이 해제될 수 있는 경우란 수증자가 증여자에게 폭행 등 범죄행위(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뿐이다.

과연 윤지오가 원고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 질문에 대해 최나리는 증여 후에 저지른 범죄나 불법행위가 아니라 증여를 유발한 행위를 불법행위로 단정하고 또 증여 후에 후원금이 목적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임의의 추정을 자신의 소송의 근거로 삼는다. “피고가 후원을 독려할 당시 밝힌 사용목적은 허위이거나 극히 과장되어 있으며,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습니다.”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바 이 주장은 허위사실이다. 후원금 계좌를 공개하면서 내건 사용목적은 증언자 보호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경호비가 사비로 지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 장자연 사건 증언자가 보복이나 예방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점 역시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인정했듯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예컨대 윤지오는 정권을 창출하기도 퇴출시키기도 한다고 자임하는 언론사의 전직 기자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증언했고 그 사주의 성폭력 혐의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해당 언론사는 수 십 차례에 달하는 보도로 윤지오의 진술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사기꾼으로 몰면서 인성과 도덕성을 실추시켰다. 이것은 교통사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한 공격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잠재적이거나 현실적인 신변위협에 대한 당시 윤지오의 증언은 과장되기는커녕 오히려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라는 표현은 무고를 해서라도 어떤 형태로건 윤지오를 처벌토록 하려는 최나리의 야욕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경찰도 통장조회와 압수수색을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후원금은 개인적 영달을 위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돈을 윤지오가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은 최나리의 잘못된 사태인식과 상상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엄연한 무고에 해당한다. 

최나리는 고소장에서 원고들이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하여 각 후원금에 상응하는 경제적 손해를 입었다”거나 “피고의 진실성을 믿고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였던 선의가 짓밟히는 등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며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원고들이 선의에 따른 자신들의 증여행동을 “경제적 손해”로 오인하기까지, 그리고 윤지오로 인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는 식의 일종의 착란을 경험하기까지 언론방송들의 마녀사냥용 가짜뉴스폭탄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부어졌던가? 수증자를 고소하기에 나선 증여자(원고)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 정신을 갖고 사태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때 맞춰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은 변호사(최나리)가 무상 변호를 제공할 예정이니 제발 후원금 반환소송에 나서달라고 얼마나 간곡한 호소를 했던가? 오랜 호소에도 불구하고 몇 명 밖에 신청하지 않아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좌절감까지 피력하면서 말이다. 이미 준비되었던 무상 고소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 6월 10일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선의의 증여행위를 경제적 손해로 오인하고 증여행위에서 얻은 자긍심을 정신적 상처로 오인하는 원고집단(그것도 전체 후원자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집단)을 만들어 내는 데 그만큼 긴 시간과 어려운 노동이 요구되었던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최나리의 고소장은 ‘신뢰’ ‘선의’와 같은 도덕적 언어와 ‘피해’ ‘손해’ 등의 경제적 용어, 그리고 ‘기망’ ‘사기’ 등의 법률적 언어를 엮어서 만든 그럴듯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장식들을 벗겨 보면 무엇이 남는가? ‘1000만원 투자하여 한 달 만에 3000만원으로 만들기’의 재테크 기술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2%의 비율로 인한 지연이자”를 지급받을 수 있다는 유혹적인 고리대 조건도 붙어 있다. 성공만 한다면 수입이 짭짤한 것이다.

일정한 금액을 증여한 후에 수증자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그 수증자로부터 증여액의 세 배 이상에 달하는 재산을 가로채려는 최나리의 이 소송을 나는 신종 재태크 사기술을 실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수법이 만에 하나 성공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장 교환의 지배에 억압당하고 있는 증여의 문화를 송두리째 도려내고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증여를 수익성 높은 재테크 기술로 만드는 이러한 소송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선한 의도의 기부나 후원활동”에 대해 철저하게 의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위축되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윤지오가 아니라 최나리(와 원고집단)가 조야할 것이다. 

물론 이 소송이 기소로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 재테크 실험은 실패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이 소송의 혜택을 이미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일까? 후원금 반환소송의 제기를 통해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을 떨어뜨림으로써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권력자라는 지탄을 벗어나고자 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이 소송을 ‘후원자들까지 돌아섰다’는 여론조작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윤지오의 증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려 그것의  직접적 수혜자가 되었다. 이 상황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었던 일부의 사람들이, 한 때 윤지오에 대한 증여자였던 수백명의 ‘원고집단’이 이들 성폭력 가해권력이 휘두르는 여론용 몽둥이로 변질되어 가해권력을 위해 이용되는 것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던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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